5.18의 두 명칭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

by 함문평

역사학자들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생각하듯이 오늘을 위해 1980년 광주를 생각해야 한다. 1980년 5월, 광주는 오늘을 그냥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안개정국’이란 말이 연상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민주공화당의 총재를 승계받은 1979년 11월 12일 김종필이 ‘안개정국’이라는 말을 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지만, 집권 기간을 알 수 없는 권력의 진공상태였고, 정당들은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유신 독재’ 하에서의 절대 권력이던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서거함으로써 권력의 진공상태를 가져왔으며, 이를 채워줄 행정수반으로서의 최 대통령은 위기관리를 주도하지 못했다. 79년 12월 13일의 군사 반란에 대해 사후 결재를 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짊어지게 된 상태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에 끌려가는 형국이 되었다.

하편 야당은 ‘신민당’과 ‘재야 민주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야권 속의 김대중은 정치재개의 사면 복권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2월 29일 사회 안정의 바탕 위에서 착실한 정치발전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 명을 사면 복권을 단행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80년 3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소장 진급 2년 2개월 만에 진급이었고,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김재규 내란 방조’ 혐으로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

국무총리실 이수정 서기관이 우근호 사무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국보위에서 우 사무관을 찾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작년 행정백서를 우 사무관이 종합한 것을 알고, 국보위 백서 작업에 가담시킬 모양이야. 일단 가서 국보위에서 하는 말을 들어 보고 사실대로 함 부이사관님께 보고하도록 해요.”

“예, 알겠습니다.”

삼청동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는 인산인해였다. 언론대책반장이라는 사람이 이수정 서기관에게 전화를 해서 그를 부른 것이다.

“국무총리실 우 사무관입니다. 국보위에서 찾는다고 해서 왔습니다.”

“예, 언론대책반장 이경재 반장입니다. 반갑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요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100일간의 업적을 한 권의 백서로 만들 예정인데, 작년도 백서를 총괄했으니 국보위 백서도 총괄실무를 맡아 달라고 했다.

국가 공무원 개인이 총괄을 맡는다고 말할 수 없으니 공문으로 보내라고 하고는 되돌아왔다. 국무조정실 함석윤 부이사관과 이수정 서기관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함 부이사관은 “아니, 국보위가 100일 동안 무슨 큰 업적이 있다고 행정백서도 아니고 국보위 백서를 별도로 만든다는 거야? 우 사무관 국보위에서 파견이라도 보내라는 거야?”라고 성을 냈다.

국보위를 다녀온 후로 밥맛을 잃었다. 왕성한 식욕이 뚝 덜어졌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퇴근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국정홍보는 문화공보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백서(行政白書) 발간업무는 총리실에서 하고 있었다. 그가 국어교육과 출신이라 한자를 많이 안다고 행정백서 담당자로 국무총리실 함 부이사관이 업무지시를 했다.

1978년 행정백서는 어떻게 발간했는데 1979년에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2.12 하극상 군사 반란이 일어나고, 하나회가 군권을 장악하더니 1980년 광주사태가 발발하고 평정되자 5월 31일 신군부는 삼청동 총리실 근처에 국가 보위 비상대책상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있지만 대통령보다는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이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수해 현장도 대통령보다 상임위원장이 가는 곳에 수행하는 인원이나, 기자들도 더 많은 인원이 취재를 했다. 9시 TV 뉴스는 땡과 동시에 전두환 동정이 첫 뉴스였다. 공무원들이나 기자들이나 알아서 기는 것인지 대통령은 꾸어온 보릿자루 대접이었다. 말로는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공무원이나 신문기자나 다 알아서 국보위에 기었다. 요즘 말로 ‘스타 탄생’ 만들기에 들어갔다.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는 8월 4일 ‘우리 사회 저변에서 선량한 국민을 괴롭혀온 폭력 사기 밀수 및 마약사범 등 각종 사회적 독소를 뿌리 뽑기 위해 이들 사범에 대한 일제 소탕을 시작했다’고 발표하고, 사회 정화를 위한 정부의 조치가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시민 모두가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헌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많은 민원이 행정관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삼청동 국보위로 날아들었다. 무력으로 국회를 해산했다.

작년 12.12부터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시간에 쫓긴 신군부는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집권하는 과정에서 정통성이 약한 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대국민 홍보가 필요했다. 정통성이 약한 정권의 특성이 국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선심성 행정을 하였다. 3S 정책이라고 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책을 펴서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을 유발하고 눈을 3S로 돌렸다. 한편, 대국민 홍보수단으로 개혁백서를 펴낼 예정이라고 했다. 통상적인 행정실적과 박대통령 시기부터 해 오던 것들도 개혁의 성과로 둔갑시켰다. 지금이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르지만 그 당시는 좌익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짓는 것이 국보위의 의도였다.

삼청동 국보위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보위로 와 달라고 해서 실장님에게 보고를 하고 국보위 문공위원회 사무실에 갔다. 사복을 입었으나 옆머리가 짧고 사복이 북에서 귀순한 사람 같은 중령, 대령들과 공무원이 한 사무실에 있었다. 허 중령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아는 체를 했다.

“우 사무관님이 행정백서 발간을 담당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국보위 발족 이후 연말까지 개혁성과를 정리해서 백서를 만들 계획입니다. 광주사태의 진상도 좌익 사주를 받아 일으킨 폭동이라는 것을 기록으로 확실하게 남길 것입니다.”

“광주의 일은 아직 정리도 안 된 것을 어떻게 기록으로 남기나요?”

“이 양반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사건의 발단 원인부터 사건 종료에 대한 조사가 나온 것이 없지 않습니까?”

“광주사태는 좌익이 사주한 민란으로 기록해야 됩니다.”

“민란으로 정부에서 공식 발표했나요? 그럼 국사편찬위원회에 그렇게 기록하면 되는 것이지 저를 부른 이유가 뭔가요?”

“국보위 발족 이후의 국정 전반에 대한 백서 작업을 해야 하기에 우 사무관을 불러 의견을 들어 보려는 것이오.”

“저는 국사편찬위원도 아니고 그냥 국무총리실의 사무관입니다. 앞으로 저를 부르거나 백서업무를 하게 하려면 공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당신 말이야, 현실을 직시하라고. 따끔한 맛을 봐야 알겠어?”

“따끔한 맛이라니? 당신이 내 상관이라도 된다는 거요? 국보위가 국무총리실에 지시하는 기관이요? 여기 중령, 대령들이 많은 모양인데 고교 동창도 육사, 공사, 해사 나와서 다 대령으로 있는데 그들에게 당신들이 말한 것처럼 백서를 쓰라면 쓸까요?”

군인으로 상관이 명령하면 그대로 따르는 습성으로 행정도 지시하면 그대로 될 줄 알았는데 그의 당돌한 말에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국보위사무실에 와서 서슬이 퍼런 군사반란 주역들에게 무모한 말을 한 것 같아 슬며시 겁이 났다.

국무총리실로 돌아오면서 어쩔 수 없으니 한발 물러서자 이 상황에서 백서작업을 피하는 방법은 국정홍보에 대한 일이니 문화공보부에서 책임지고 만들도록 건의하기로 했다.

오자마자 함 부이사관을 찾아가 보고를 했다. 자초지종 말을 듣고만 있던 부이사관이 “맞는 말이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홍보비서관도 있는데, 백서 편집을 국무총리실 사무관에게 담당한 이유는 모르지만 백서에 관심 많은 대통령도 서거했고, 총리로서 백서발간 초안이 종합되면 한자(漢子), 영어 단어 철자 하나까지 검토해서 최 주사라는 별명이 붙었던 분이 대통령인데, 이거 대통령보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더 판치는 세상이니 백서 업무는 문화공보부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국무조정실장님께 보고할게.”라고 말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회는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하극상을 저지른 후에 국보위에 중령, 대령들은 사복을 입었지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머리는 짧아 꼭 귀순한 탈북자 기자회견을 보는 듯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일처리 하고서 뭐 그리 당당한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면서 그는 봄에서 여름을 보냈다.

10.26은 김재규가 숨 막히는 유신체제를 벗어나려고 한 선의의 일인거사로 좋게 평가한다 해도 12.12와 광주사태가 평정되자 국보위가 설치된 것은 점진적인 쿠데타에 불과했다.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기했다. 그들이 집권하는데 방해가 되는 인사 김대중을 내란음모 주동자로 검거하고 김종필 등 정관계 고위직들은 부정축재자로 체포했다. 이런 것들이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사회개혁이라고 했다.

전두환의 하수인들은 공직자 숙청, 삼청교육대 설치, 언론통폐합, 언론인 해직 정리를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조치라고 했다. 모든 관공서에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입체 간판을 설치했다. 공무원과 학교 교사들도 정의사회 구현 궐기대회라는 것을 출석부를 만들어 점검했다.

국무총리실에서도 평생 부정과는 담을 쌓고 지내온 선배가 그 정의사회 구현 궐기대회에 휴가를 갔다고 사직서를 냈다.

원주고등학교 남궁태환 선생도 횡성지역 교사들 정의사회 구현 궐기대회에 불참했다고 학교에서 퇴직을 당해 노량진 D학원 강사가 되었다.

권력에 눈이 먼 군인들이 정의와 개혁의 나팔을 불어대는 모습을 아니꼬운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도 국어교육과 출신이라 교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터에 국보위 지시라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기록을 만들고 신군부 집권 음모의 조력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해 여름은 후회와 번민의 나날이었다. 백서 발간 작업을 하는 척만 하고 탈출할 길을 모색했다.

백서의 목차와 골격은 구상해 놓았지만 세부 내용의 집필은 여백으로 두었다. 각 부처에서 개혁실적이라고 넘겨온 것들은 박정희 대통령 시기부터 해 오던 것들을 개혁성과로 포장한 것이었다. 그는 함 부이사관에게 갔다.

“백서 작업을 문화공보부로 넘긴다고 약속하신 거 어느 정도 진전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말이야, 문화공보부로 넘기기는 하는데 우 사무관 백서 발간 동안에 문화공보부로 파견을 보낼 수 있냐고 묻더군, 그래서 본인에게 그걸 물어보고 알려주겠다고….”

“부이사관님, 공무원 사표를 쓰는 것이 편하지 백서에 가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우 사무관 심정을 알지, 그래서 고민이야….”

신군부는 진드기처럼 그를 괴롭혔다. 군사독재는 박 정권 18년으로 충분하지 또 장군 계급장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을 한다? 그런 나라에서 공무원을 한다는 것이 너무너무 싫어졌다.

8월 16일에 최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9월 말일에 공무원 사직서를 제출했다. 통상적인 행정업무를 개혁성과로 부풀리는 백서 작업을 하는 것을 내면의 소리가 거부했다.

아내는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가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 대방역 1번 출구 앞 도로였다. 행정고시를 위해 대방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식힐 때는 대방지하차도를 빠져나와 샛강 오솔길을 걸었다. 어느 날 고향에 부모님이 다녀가라고 해서 청량리 도착해서 지하철 1호선으로 대방역에 내려 계단을 다 내려와 횡단보도를 향하는데, 그만 하이힐 굽이 도로 배수로 망에 걸려 부러졌다. 한쪽은 굽이 높고 한쪽은 낮아서 걸을 수가 없었다. 뒤에서 그것을 본 우 사무관이 “아가씨 구두 벗어 보세요?” 해서 받아 들고 도로 견치석에 굽을 내리쳐서 양쪽 높이를 같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백서 만들기 싫어서 사직서를 내자 처음에는 놀라더니 여름 내내 고민한 이야기를 들어 보더니 사직서 내는 것에 동의를 했다. 사무실에서 함 부이사관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사직을 만류했으나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가 떠나고 백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 후임으로 백서를 담당할지 정해지지 않고 시간만 흘러갔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10월 23일에 개정헌법이 확정되자 국보위는 국가보위 입법회의로 개편되고 11대 국회 개원과 함께 해산했다. 국보위 사람들은 대부분 군복을 벗고 신군부 5 공의 핵심 자리를 꿰찼다.

1980년 11월 30일 짐을 정리하고 총리실을 떠났다. 떠나는 날 백서 발간 업무가 문화공보부로 이관되었다. 그 무렵 미국에 있는 고교 동창생 노 로버트 호식 박사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고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춥고 배고픈 학문이라고 부모님이 반대하여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진학한 것을 알고 있는 친구였다.

유학비용은 대학원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으로 충당하고 일부는 노 로버트 호식이 마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을 해 주고 약간의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지나자 지도교수가 찾는다기에 교수 연구실을 찾아갔다. 대머리에 턱수염이 산적같이 난 교수가 질문을 했다.

“Mr. Woo, 한국에서 한국어교육과를 졸업했는데 왜 관련도 없는 고고학을 하려 하는지, 혹시 정치적 이유로 도피성 유학은 아니냐?”라고 물었다.

“한국어교육학이 전공은 맞지만 그건 부모님이 고고학이라는 건 공부하기만 힘들고 돈벌이가 안 된다고 해서 접었던 꿈을 늦었지만 이루고자 왔습니다.”

등록절차를 마친 뒤 지도교수 Peter. Park을 다시 찾아갔다.

한국 정치 상황을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소릴 들어도 불쾌한 대응을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해 주었다.

잠시 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니 슬라이드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지난해 일어난 광주사태 슬라이드였다. 한국에서는 보도통제로 보도가 전혀 되지 못한 15분 분량의 활동사진이었다. 외국 기자들이 광주사태 현장에서 계엄군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찍은 것이었다. 사람을 짐짝처럼 차량에 집어던지고 대검을 착검한 총으로 시민을 구타하는 장면을 보고 눈물이 나고 부끄럽고 치가 떨렸다. 공수부대원이 개머리판과 총검으로 시민을 공격하고, 부녀자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군대가 전방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시민을 상대로 진압했다.

Peter. Park 교수는 상영 중간에 혼잣말로 “전두환 보안사령관? 신군부는 깡패야 깡패!” 어디서 배웠는지 한국말로 욕을 하였다.

그 무렵 미국 한인사회는 반전두환 팬클럽 수준이었다. 노 로버트 호식이 운영하는 마트에도 한국인 교포가 직원으로 여러 명 있었는데 가끔 일하면서 한국 관련 뉴스가 나오면 욕부터 하였다. 화면에 전두환이 나오기만 하면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9시 KBC 뉴스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제12대 대통령에 민정당의 전두환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25일 상오 8시부터 전국 77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대통령 선거는 5,271명의 선거인이 투표 참가, 전두환 후보가 유효투표수의 90.23%인 4,755표를 얻어 당선권인 선거인 재적 과반수 2,539표를 훨씬 넘는 압도적 득표로 당선되었습니다.

중앙선관위는 이날 밤 9시 각 시도 선관위에서 집계 보고해 온 선거록 작성을 마친 후 중앙 위원 전체 회의를 열고, 전두환 후보의 당선을 확정 공표했습니다. (이하생략)

오리건주 원주민 인디언들은 땅을 어머니라고 했고,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얼굴이라고도 했다. 조상이 묻힌 곳이며 그들의 어머니이며, 배 속의 아이 얼굴을 기다리는 동안 인류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한 번은 묵념을 해야 하지 않을까? 백인의 점령에 의해 인디언 선조들이 학살당하고 쫓겨난 곳에서도 그 아픔을 기록했다.

어떤 비극이 일어나도 해가 지고 다음 날 해가 떠오른다. 지난 5월 광주사태가 여기 미국 인디언들이 백인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과 교차되었다. 고통스러운 삶의 자취와 슬픈 전설이 오리건주 숲 속에 구전되었다.

서부 개척 시대에 황금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던 백인들이 강변에서 마주친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수천 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을 불태웠다. 어쩌면 1980년 광주사태가 ‘인디언을 해치고 오히려 당당함을 유지하는 백인이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차지하고 당당하게 지내는 신군부’와 비슷했다. 그래서 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에 있음에도 신군부가 전방 9사단의 예비연대를 경복궁으로 이동을 해도 묵인한 것일까? 세월이 지나 미국문서 기밀이 해제되면 밝혀지겠지?

인디언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산과 강의 정령들에게 기도드리고 사람이 꾸는 꿈을 정령들이 만들어 내는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였다. 태양의 신에게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과 가엾은 영혼들이 지혜로운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자신들의 천막이나 마을을 찾아온 손님에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좋은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인디언들에게 대지 위의 모든 것은 존중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작지만 신기한 오리건 주의 마을에 숨겨졌을 이야기와 바람에 스쳐가는 풀잎 요정의 피리소리가 들렸다.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는 라일락과 이름 모를 야생 꽃나무들 속에서 ’ 샛강변의 오솔길‘이 연상이 되었다.

정치학과 세미나인데 다른 과 학생들도 참여가 가능한 파슨스 교수의 정치학 강의실에서 역시 광주사태의 활동사진 상영이 있었다. 소총에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이 광주시민을 위협하고 두 손을 묶고 짐짝처럼 트럭에 실었다. 파슨스 교수는 한국의 5공 정권을 군사정권으로 규정하고 정권의 실세는 군부 사조직의 핵심인 대령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정치를 ‘대령정치(Colonel Politics)’라고 정의하면서 미국이 전두환 장군과 그 부하 대령들의 집권 기도를 완전히 방치하였다고 워싱턴 백악관을 비판했다. 교수의 발표와 참석자들의 질문과 교수의 답변을 들으니 한국에서 공무원 시절 여름에 국보위를 찾아갔을 때 짧은 머리 사복차림으로 로봇처럼 움직이던 대령, 중령 장교들이 떠올랐다.

전두환과 하나회를 몰랐던 한국교포들은 떠나온 조국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 부끄러웠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한국은 언제쯤 문민통제가 되는 국가가 될까? 세미나에 참석한 우근호가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질문이 그에게 향했다.

“Mr. Woo, 교수가 한국 정치를 대령 정치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 파슨스 교수님이 말하는 대령들을 실제 만나서 대화를 했으니까요.”

“Mr. Woo, 정치인입니까?”

“아닙니다. 국무조정실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럼, 부당한 정부와 싸워야지 왜 미국에 왔습니까?”

“거기 대령 정치집단에 도움 주는 공무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비겁하지만 대령 정치가 끝나면 돌아갈 것입니다.”

미국인 참석자들의 웃 사무관을 보는 눈빛이 어떤 사람은 ‘애정 어린 눈빛’이었으나 더러는 ‘경멸의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세미나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포들도 참석했기에 오리건 주립대학 밖으로 퍼져나갔다. 그날 세미나는 그와 한국 유학생과 한국 교포들을 우울하게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한국에서 아내로부터 편지가 와 있었다.

보고 싶은 당신에게

당신이 백서를 만드는 책임자가 되기 싫다고 사표를 내고 간 후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백서가 발간되어 정부 각처와 공공 도서관에 배포한다고 뉴스에 나오더군요.

창훈은 해군에 입대했어요. 딸 미아는 치기공과를 졸업하고 서울 강남에 있는 강림 치과병원에 취직을 했어요.

아버님은 당뇨병에 점점 체중이 불어나서 걱정이 됩니다. 여기 걱정은 마시고 공부 잘해서 고고학 박사가 되어 돌아오기 바랍니다.

19 ××. ×. 25. 아내 경희

백서는 미국 공공도서관에도 배포되었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면 전두환 사진과 하단에 한자로 ‘全斗煥 大統領 閣下’라고 주석이 달렸다. 다음 장을 넘기면 1980년 6월 5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 현판식 사진이 나온다. 그 아래 대장으로 전역하는 사진이 있고, ‘1980년 8월 22일 새 역사 창조의 시대적 소명에 따라 상임위원장은 30여 년 봉직해 온 군을 떠나 예편하였다’고 쓰여 있다. 다음 장을 넘기면 발간사가 나온다.

발간사

새 시대, 새 역사 창조의 기초를 닦는 데 크게 공헌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그동안 업무 실적을 모아 백서로 출간하게 된 것을 매우 보람 있고 뜻있게 생각합니다. 지난 5월 학원 소요와 광주사태 등 국가가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발족된 국보위는 사회의 안정 회복과 정화조치 등 당면한 중요정책을 신속히 집행함으로써 10.26 사태 이후 야기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 역사 비전을 여는 전환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하 생략)

아내에게 답장을 쓰고, 세미나에 대한 소견을 이 서기관에게 편지에 담았다.

이수정 서기관님께

미국에 오면서 변변한 인사도 못하고 떠나와 죄송합니다. 미국 오리건 주에 정착했습니다. 영어로 말하는 것이 서툴지만 듣는 말은 이해를 하니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정치학과 세미나가 있었는데, 명칭은 세미나로 하고 사실은 대한민국의 5.18 광주사태를 몰래 촬영해 미국으로 보내온 기록 영상을 감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한국 내에서는 언론통제로 전혀 보도되지 않았던 공수부대원이 착검한 상태로 시민을 위협하는 장면, 몽둥이로 개 패듯 패는 장면, 시체를 짐짝처럼 집어던지는 장면을 숨죽이고 보았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나의 조국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수치스러운 하루였습니다. 함 부이사관님과 이 서기관님을 총리실에 남겨 두고 혼자 도망치듯 미국 유학을 와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귀국하며 소주 한잔 사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19 ××. ×. 25. 근호 드림

보름 후에 이 서기관의 답장이 왔다.

보고 싶은 우 사무관에게

우 사무관이 백서 담당을 하느니 공무원을 그만둔다고 낸 사직서를 함 부이사관님이 받아서 사직서가 아닌 휴직서로 변경해서 총무처로 보내고 결재받은 서류 사본을 나에게 주시면서 미국서 돌아오면 꼭 총리실로 복직하게 하라고 하시고 떠나셨어요.

신군부가 천사 같은 부이사관님을 강원도 공무원 연수원장으로 좌천시켰어요. 평소 공금과 개인 돈을 엄격히 구분하였고, 부정 축재한 적이 없는데 왜 강원도로 유배를 보내야 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긁어 부스럼 될까 참고 있어요.

우 사무관이 정말 사직서를 내고 미국으로 가니 국보위에서 우 사무관을 겁박하던 대령들도 놀란 모양입니다. 백서업무를 문화공보부에서 담당하는데 총괄 배순서 사무관에게 엄청 공손하게 대한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공부 마치고 귀국하면 연락 바랍니다.

19 ××. ×. 25. 수정 드림

우 사무관은 아버지 중풍이 걱정이 되었다. 인명은 재천이라던 할아버지도 94세에 돌아가셨는데 90은 사시겠지 생각했으나 그날이 너무나 빨리 왔다.

아내의 편지에 중풍에 체중이 늘어 걱정이라는 편지를 받고 보름 후에 아버지 부음을 들었다. 트렁크 하나에 짐을 챙기고 웬만한 것은 다 버리고 귀국했다. 아버지는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고 아버지가 평생 사신 신길동 집 앞 샛강 둔치 버드나무 아래 뿌렸다.

유품을 정리해서 태웠다. 그 옛날 국보위가 들어서고 백서 발간을 담당하라고 했을 때 고민이 되어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어 아버지께 쓴 편지가 보였다. 뒤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답장도 있었다. 편지를 쓰기는 썼으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유품을 정리하며 읽었다.

- 아버님 전 상서

삼청동에 매미가 울고 있습니다.

어머니 병세는 좀 나아졌나 궁금합니다. 저는 국무총리실에서 함 부이사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작년 12·12 군사반란 이후 군권을 장악하더니 국보위라는 것을 만들어 대통령보다 더 큰 위세를 부라는 신군들의 등살에 이거 사무관 힘들게 행시 합격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만둘까 합니다.

정승화를 체포한 것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고 대통령은 체포를 다음날 새벽에 재가를 하고 시간을 기록하면 책임이 벗겨지는 것도 아닌데 한심한 짓을 하고 광주사태를 좌익분자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라고 기술하라고 압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총리실 어느 누구와도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없어서 아버님께 하소연합니다. 휴가를 내거나 사직서를 내고 횡성 고향에 다녀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80.7.27.

아들 근호 드림

―아들 보거라

보내온 편지는 잘 읽었다.

12·12는 분명 하극상이고 군사 반란이다. 이 아비는 촌에 살지만 작년에 김재규 수사발표하면서 정승화에 대해 추가조사를 한다고 할 때, 전두환이 하극상을 저지를 줄 알았다.

비유하자면 단종을 영월로 귀양 보내고 왕권을 차지한 세조 같은 놈이라 생각한다.

이 편지를 쓰기는 한다만 부치지는 못할 것 같다. 혹여 이 편지가 문제 되면 아들이 불이익받거나 내가 삼청교육대 잡혀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원주고등학교 남궁태환 선생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냐? 가난한 학생 재주가 아깝다고 선생 봉급 몇 푼 안 되는 것을 쪼개 제자들 학비를 보내주신 분인데 뭐 정의사회 구현 궐기 대회에 불참했다고 삼청교육대 입소시킨 놈들이니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백서 발간 담당은 절대 하지 마라. 사직서를 내도 며느리가 고생이 되겠지만 여기 횡성 두 늙은이는 걱정 마라. 여기서 옥수수 매상을 하거나 고추를 팔면 작은 돈이나마 미아 어미에게 보내주겠다. 아무 걱정 말고 소신 것 해라.

1980.8 3. 아비 씀

아버지 유품과 편지 일체를 화장 후에 유해를 샛강 주변에 뿌렸다. 최규하 대통령 하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보고 얼마나 화가 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장작불에 유품을 하나하나 던졌다.

이전 08화1979년 12월 12일이라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