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극 또는 정권찬탈로 읽는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박 대통령이 서거했다. 1980년은 서울의 봄이라고 말은 했지만 겨울 공화국이었다. 민주정부가 아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정치적으로 약점이 큰 정권의 공통점은 국민들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많이 편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물가를 인위적으로 통제했다. 통행금지를 없앴다. 학생 교복을 자율화했다. 두발도 자율화했다. 방송국은 흑백에서 컬러 방송을 송출했다. 프로야구 프로 농구를 탄생시켰다. 이른바 3S로 불리는 스크린, 스포츠, 섹스에 국민들 눈을 멀게 했다. 이 시기에 담배 ‘솔’이 출시되었다. 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 축하 기획 담배였다. 대통령 취임한다고 담배를 최고급으로 출시하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몇이나 될까?
그해 5월 외무부에 계약직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계약직이라 하는 업무가 단순했다. 노호식 서기관이나 배장호 사무관이 초안을 해주면 나는 타자기로 종이에 먹지를 대고 타자를 쳤다. 타자를 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부본이 하나라 먹지 한 장만 대고 치면 쉽지만 부본이 여러 건이라 먹지를 2 장 3 장 심지어 4 장을 대고 칠 때는 정말 전신 바짝 차리고 일해야 했다. 노호식 서기관과 배장호 사무관이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았다.
“이봐, 우군?”
“네, 서기관님 부르셨습니까?”
“장관님 보고 문건 있지?”
“국화 공문 말씀이세요?”
“그래 국화인지 무궁화인지 꽃 이름 들어간 공문 말이야.”
“예, 찾아드리겠습니다.”
아시아과의 비밀 보관함을 열었다. 원래 금고형 서류함은 비밀문건을 보관하는 곳이기에 노호식 서기관이나 배장호 사무관 비밀취급 인가 난 고위직 공무원이 취급할 수 있도록 금고 비밀번호 자체가 비밀이었다. 다만 업무 편의를 위해 촉탁직인 내가 비밀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금고 비밀번호는 49, 68, 72다. 이 번호를 순서가 달라도 열 수 없고 번호와 번호 사이 돌리는 회전 방향이 달라도 금고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번호를 싸구려 68년생들이 72년 유신헌법 반대 데모를 했다고 외웠다. 솔직히 노호식 서기관이나 배장호 사무관도 이 비밀금고를 열 때마다 조용히 나를 불러 68 다음 뭐야? 물었다.
“배 사무관님, 여기 국화 공문 있습니다.”
“어디 보자, 그런데, 왜 4부야? 우리 만들기를 5부 만들지 않았어?”
“예, 저도 5부를 결재판에 넣은 걸로 알고 있는데?”
외무부의 문서는 정식 공문 명칭인 ‘전두환 대통령 서남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순방계획 대신에 ’ 국화(國花) 재배 면적 확대 보고서‘라고 위장 명칭으로 보고서를 꾸몄다.
왜 하필이면 국화(國花)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차라리 무궁화라고 하거나 가을 국화(菊花)라고 한다면 그냥 식물 꽃으로 넘어갈 것을 나라 국(國)이 들어가는 국화(國花)는 웬만한 한자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중요한 일이 보고서에 담겼다고 유추할 것이다.
아시아과에서 보고서 5부를 만든 것은 장관이 보고용으로 1부, 대통령 1부, 청와대 배석하는 외교안보 수석 1부, 국가안전 기획부장 1부 만약을 대비한 예비용 1부 이렇게 5 부 보고서를 준비했다.
그런데, 오늘 다이얼을 돌리고 꺼내 4 부밖에 없어 나도 놀라고 배사무관 이마에 내천(川) 자가 그려지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노 서기관은 시간이 없다고 빨리 한부를 복사기로 복사해서 만들고 자기가 차관님과 장관님께 보고하고 올 동안 비밀 보관함 서류 전체를 꺼내서 전수조사 하라고 했다.
배장호 사무관과 나는 서류철을 서류함에서 꺼내 모두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제목을 비밀관리대장에서 확인하고 연필로 관리 대상에 V표시를 했다. 외무부 서남아시아 동아시아 서류함 전체를 하루 종일 전수 조사했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한 비밀 문건 전수조사는 오후 4시가 되어서 끝이 났다. 신기한 것은 그 잃어버린 우리의 ‘국화’ 문건 이외의 모든 비밀은 비밀관리대장과 일치했다. 그리고 남은 것도 없었다. 그만큼 비밀관리를 철저하게 해 왔던 것이다.
우리는 서기관님 오실 시간이 되자 점점 마음이 초조했다.
과연 이 난국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사실 대로 비밀 사고로 보고하여 우리에게 비밀관리 소홀 책임을 물어 징계할 것인가? 여러 망상이 지나갔다.
오후 4시 30 분 노 서기관이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늘 보고는 잘 끝났으니까 모두 개별 퇴근하지 말고 청진옥으로 가 있어! 했다. 청진옥은 외교부 청사 뒷골목 과거 ‘아도’라는 일식집을 현재의 공승현 사장이 보신탕집으로 개업한 것이다. 보신탕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삼계탕과 염소탕을 병행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노 서기관이 식탁 중앙에 앉고 마주 보는 자리에 배장호 사무관, 노호식 서기관 좌측에 9급 타자수 여직원 김경희 양이 김 양 앞에 임은묵 사무관 노호식 서기관 우측에 조윤희 사무관 조윤희 사무관 앞에 내가 앉았다. 그야말로 나는 임시직이라 제일 말석에 앉았다. 노 서기관이 말문을 열었다.
“이번 국화작전(國花作戰) 아무래도 이상해. 아니 비행기가 크다고 크면 큰 대로 그냥 짧게 운행하면 되지 일정을 늘이느라 나라를 억지로 추가시키고 달러를 낭비할 필요가 있나?”
맞은편 배 사무관이 조심스레 말을 하였다.
“서기관님은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어차피 한번 덩치 큰 비행기를 움직일 것이면 일정 늘이고 순방 국가도 2개 정도 늘이면 국익에 도움이 안 되겠습니까?”
“국익?”
“예, 국가의 이익은 꼭 눈에 보이는 것만 이익이 아니거든요. 지금 우리와 국교가 있더라도 미미한 나라에 대통령이 방문해서 그 나라 정상과 악수하고 덕담을 나누다 보면 미개발 국가이면 지하자원이나 천연자원을 싸게 수입해 우리가 가공해 다른 나라에 수출하게 된다면 큰 국익이 아니겠습니까?”
“야, 이거 우리 우 사무관이 신세대 생각을 하는데?”
“아이참, 서기관님과 제가 나이 차이 얼마나 난다고 신세대입니까?”
“하긴 그가 중3 때 우는 중 1, 그가 고3 때 우는 고 1, 대학교는 그가 재수하는 바람에 우가 2학년 때 1학년 입학했지?”
“예.”
그렇다, 노 서기관은 과거에 육군사관학교 XX기로 합격했었다. 사관학교는 합격생을 미리 소집해 기초 체력훈련과 군대 제식을 가르치는 과정이 있다. 가 입교 행사다.
노 서기관은 육군사관학교 XX 기로 합격하여 가 입교 행사에서 구보 낙오한 것이 스스로 동기들에게 누가 되기 싫다고 육군사관학교를 조용히 퇴교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수유리 신일중·고등학교 앞에서 문구점을 하는 이모를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딱 1년 공부해서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하면 부모님이 육군사관학교 합격했다고 돼지 잡아 동네잔치를 했었는데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한다면 정말 또 , 잔치할 일을 재수생 노호식은 꿈꾸고 있었다.
노 서기관과 우 사무관은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의 강림중학교 1회와 3 회였다. 지금은 행정명칭이 강림면 강림리지만 노 서기관과 우 사무관이 강림중학교 다닐 때는 ‘안흥찐빵’으로 유명한 안흥면 강림리였다.
강림 중학교를 졸업하고 원주고등학교에 합격한 수재였다. 원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도 원주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운데, 전교생이 50 명 내외의 ‘리’ 단위 중학교에서 원주고등학교에 합격하였고, 1회 졸업생이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한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강림중학교의 자랑이었다. 노 서기관의 아버지는 28년 후에는 아들이 장군이 될 것을 상상했다. 그래서 노 서기관은 육사 자퇴를 부모님께 비밀로 하고 이모님 댁에서 은밀하게 재수를 했다.
이모의 큰딸 최영경이 중3이었다. 아들 효석은 중 1이었다. 영경은 반에서 20등 내외 효석은 반에서 10등 안에는 들었다. 영경이 다니는 수유 여자중학교를 노호식은 찾아갔다.
양복을 잘 차려입고 영경의 4촌 오빠이고 육군사관학교 교수 문관이라고 소개했다. 담임선생님은 임병철 국어 담당이었다. 면담하면서 선생님 책상에 있는 교사용 지도서와 다른 참고서 문제집을 외웠다. 담임선생님께 수학 선생님, 영어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수학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외웠던 국어 참고서와 문제집 제목을 수첩에 기록했다. 같은 방법으로 영어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수학 참고서와 문제집 제목을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영어선생님 그리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사회와 과학 한문 선생님을 소개받고 인사했다.
결국 영경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 중에 음악, 미술, 체육 선생님을 제외한 모든 선생님의 교사용 지도서와 교과서 이외의 참고하는 참고서 문제집 목록 전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청계천 6가 헌책방에 가서 책을 구입했다. 그 많은 책을 새것으로 구입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 헌책으로 구입했다. 영경에게 선생님이 수업 중에 농담으로 하신 말씀 중요하다고 별표 해준 것 등을 추려서 중간고사 모의 문제집을 만들었다.
운이 좋게 수학 참고서에 수유여자 중학교 2 년 선배의 시험문제가 들어 있었다. 통상 선생님들은 한해 전의 출제한 문제는 만약에 유출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재탕을 안 하지만 2년 지난 문제는 숫자만 바꾸거나 그림을 반대로 출제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호식은 알고 있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반에서 20등 하던 최영경이 수유여자 중학교 자기 반에서 2등 전교에서 2등이 된 것이다. 영경의 반에 전교 1등 김선미라는 학생과 모든 점수가 같은데, 음악, 미술, 체육 실기가 들어가는 과목에서 영경이 음치라서 조금 떨어지고, 선미보다 영경이 체육은 앞서고 미술에서 영경이 선미보다 떨어져 전교 2등이 된 것이다.
처음 영경의 담임선생님이 영경을 불러 물었다.
“너 공부 하루 몇 시간 했니?”
“제가 공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왜?”
“학교서 집에 가면 사촌 오빠가 하루 배운 전 과목을 일대일로 묻고 답하기를 하기 때문에 그거 끝나면 숙제만 겨우 해옵니다.”
“음, 그렇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영경이가 선미 답안 베낀 줄 알았지?”
“선미 그 깍쟁이가 저에게 답을 보여주겠어요?”
“하긴 그렇다. 하여튼 이번에 영경이가 우리 반에서도 2 등이고 전교 석차도 2 등이다.”
“나는 담임으로 기분이 좋다. 우리 반이 전교 1,2 등 다 차지했고, 반 평균도 다른 반보다 전체 평균이 0.9 높다. 이건 대단한 성과야.”
“예, 열심히 공부해서 다음 기말시험은 제가 선미보다 앞서겠습니다.”
“그래, 사촌 오빠 잘 둔 영경이 축하한다.”
발 없는 말 천리 간다고 영경이 전교 2등 소식은 수유리 일대 엄마들 사이에 큰 뉴스가 되었다. 노호식은 수유여중 학생을 가르치는 학원 선생 과외 선생 중 최고 고수가 되었다. 이모 김미선 여사는 싱글벙글, 우리 조카가 강원도 안흥 찐 빵 동네에서 천재 소리 듣고 컸으며, 원주고등학교를 들어갈 대도 수석 졸업도 수석, 육군 사관학교도 그놈의 체력장 점수 때문에 3등이지 체력장 빼고 필기시험 점수나 예비고사 점수는 우리 조카가 수석이었다고 카더라 뉴스를 남발했다.
그렇게 중학생 3 학년 1학년을 한 명당 5만 원씩 받고 가르쳤다. 더 많은 인원이 찾아왔지만 이모님 댁이 한 번에 15명 이상은 도저히 신발 벗을 공간도 없다고 월, 목은 3 학년, 화, 수는 1학년 딱 4일만 과외지도를 하고 금, 토, 일은 오직 자신의 재수 공부와 1, 3학년 학교 진도보다 꼭 1 주 정도 빠른 템포로 과외를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1981 년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수석은 아니지만 장학금 받을 성적으로 합격해서 고향 강림에 계신 부모님이 땅을 팔거나 소를 팔지 않아도 호식은 공부할 수 있었다.
더구나 최영경의 반에서 20등 하던 애를 전교 2등으로 만들고 수유중학교 졸업할 때는 전교 1등에 서울시 고입 연합고사 1등을 하게 만들어, 호식에게 과외를 하려는 학생은 넘쳐 이모님 댁을 핑계로 15명으로 인원 한정을 했다. 전학을 가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결원이 생길 때만 학생을 뽑았다. 가르치는 것도 1, 2, 3학년 전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고 1과 고 3만 가르쳤다. 1학년이 2학년으로 올라가면 그냥 다른 학원을 가든지 다른 과외 선생에게 배우고 3학년이 되는 12월 즉 2학년 기말시험이 끝나면 찾아오라고 했다.
그렇게 과외를 가르치고, 대학교 공부하고 졸업하는 4학년 때 외무고시에 합격해서 직업 외교관이 되었다.
“신세대는 저기 김경희 양이 신세대입니다.”
“함 군, 자넨 어떻게 생각해?”
“저는 뭐, 아는 게 없어서?”
“야, 이건 알고 모르고 문제가 아니야, 보잉 747 비행기를 14일간 운행하면 300 만 달러가 들어가고 18일간 사용하면 400만 달러가 들어가는데, 어떻게 400만 달러 소비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돼?”
“300만 나누기 14는 23만 달러, 400만 달러 나누기 18 하면 22만 달러 그러니까 18일 사용하는 것이 국익에 좋다 이런 논리지요?”
“야, 이 사람들아? 내 말은 그 둘을 단순 돈으로 계산해서 하루 얼마 소모가 아니라 우리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50만 불이 뉘 집 개 이름이냐 이거야? 버마와 언제부터 절친한 사이라고 버마를 첫 기착지로 하느냐 이거지?”
“그야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인도로 단숨에 가려니 연료가 문제라서 연료 보충 겸 정상외교 한다고 하면 국민들도 다 이해할 것 아닙니까?”
“그놈들 육사 출신 별들이 언제 국민 생각하고 쿠데타 일으켰어? 국민을 생각한다면 12.12 나 5.18 등을 발생하지 않게 했어야지?”
“서기관님 식사나 합시다.”
“그래, 내가 먹을 것 앞에 두고 서두가 길지? 자 한잔 합시다? 모두 잔이 찼으면 건배합시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잔을 내려놓자 노호식 서기관이 또 한마디 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이범석 장관님과 소망 교회에서 예배드린 후 점심으로 칼국수를 드시면서 하신 말씀이 버마가 사회주의 국가이고 우리보다 친북한적 외교를 해온 나라라서 자신은 아예 대통령 순방계획에 고려도 안 한 나라인데 나중에 추가되었다고 하시더군.”
“아니 정상외교를 전담하는 주무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이 생각도 안 한 것을 누가 추가시킨 것입니까?”
청와대 장세동 경호실장 하고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장충동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치면서 인도 방문하는 길에 버마를 방문하시는 것이 각하의 퇴임 후 구상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놈들 말이 대통령 지시로 외교부로 떨어져 우리가 다 만든 3개국 순방계획을 6개국 순방계획으로 뜯어고치느라 근 2 주 동안 야근하고, 국제 전화하고 난리를 친 거지.
“서기관님, 그런 놈들 불러다 외교부서 근무하라고 하면 되겠네요?”
“장관님께 불편한 말씀을 한 것이 바로 그 점이야. 그런데 우리 평안도 사나이 이 장관님은 호탕하게 야, 노호식이 너 서기관서 외교부 공무원 끝내고 싶어? 지금 힘들고 험난해도 자네가 고생 좀 해서 각하 방문 국가 늘면 나중에 자네가 대사 되어 버마 대사, 인도 대사, 스리랑카 대사 어디든 갈 자리 늘어나는 것인데 고시 출신이 좁쌀처럼 그런 것에 불만 품지 마. 더구나 육사 출신들이 하는 행태는 절대로 자네 머리 못 따라오는 것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자네 어려서 육사 34기 체력장 빼고 1등 합격자라며? 원리 원칙, 정의 따지면 자네만 다쳐하시는 거야. 정말 우리 장관님은 하늘이 내린 외교관이야.”
“음식 앞에 놓고 이런저런 말이 많으니 나쁜 서기관 되겠군. 어서 먹읍시다.”
“예,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서기관님과 아시아과를 위해 건배합시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거리에는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 서남아시아 오세안 순방을 경축하는 대형 선전 간판과 현수막이 시내 곳곳에 걸려 있었다. 10월 8일 아침부터 비가 촉촉이 내린다.
영등포 여자고등학교 합창단이 부르는 ‘선구자’ 노래가 울려 퍼지고 특별 전세기 보잉 747 전두환 대통령 일행은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국화 재배 면적 확대에 대한 보고서 잃어버린 한 부는 서울 대방동 거물 간첩 이선실 손에 들어 있었다. 서울 외교부에서 누가 어떻게 입수했는지 알 수 없다. 외교부 아시아과에서 비밀 분실 신고를 하지 않아서 정부에서는 비밀 유출도 몰랐다.
이선실이 입수한 국화작전 비밀문서는 평양 중성동 김정일 관저까지 공작원 기종서가 가지고 갔다. 북한 대남 공작부서의 이선실은 서울 대방동 388의 25번지 2층 집에서 20년 이상 고정간첩을 하였다. 이선실의 암호명은 관악산 노파였다.
구국의 소리 방송은 고정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리고 고정간첩이 대남 공작부서에 보내는 보고문을 단파로 보내기도 했다.
‘지금부터 구국의 소리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서울 관악산 노파가 백두산 정일봉에 국화 한 송이를 바치니 손상됨 없이 온전히 받들어 모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암호문으로 평문으로 해독하면 서울에 있는 고정간첩 이선실이라는 할머니가 김정일 지도자 동지에게 직보 문건을 획득했으니 중간 전달자들은 열람을 금하고 서울서 평양까지 한 번에 가져갈 방책을 강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파 방송을 녹음한 보고를 받은 김정일 지도자 동지가 선전 선동부 이재강 부부장을 불렀다.
“서울 관악산 노파가 직보 문건을 입수했다고?”
“예, 그 노인 재주가 대단합니다.”
“서울 지리 잘 아는 전투원 한 명을 뽑아 오시오?”
“아니, 전에 광주 문건도 직접 오라고 해서 광주로 남녀 한 조 보냈다가 모두 잡혀서 남조선이 들고일어난 광주 사건을 우리가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뒤집어씌울 구실만 주었는데, 이번에 서울까지는 정말 너무 위험하니 인천 부두나 강화도 해변까지는 노파가 책임지고 보내라고 하시지요. 그만큼 중요하다면 노파도 보고문을 거들어 야지 노파는 입수만 하면 우리 전투원 목숨만 위험합니다.”
“그래? 그러면 강화도까지는 노파가 보내고 강화도서 인수받아 평양의 전투원이 운송한다고 전문을 치시오.”
그날 밤 구국의 소리 방송이다.
‘여기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개성에서 방송하는 구국의 소리입니다. 백두산 정일봉이 관악산 산장의 여주인에게 알리는 말씀입니다. 이번 귀중한 국화꽃 한 송이를 곱게 피우기 위해서는 삼별초 정신을 이어받아 강화도에 할머니 손길이 닿고 강화도에서 애국호의 선장과 선원이 인수받으니 착오 없이 시행하라는 백두산 밀영의 당부였습니다.
이상 구국의 소리 특별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이재강 부부장은 안광수 백학초대소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강화도까지 당일치기로 문건을 받아 평양까지 돌아올 한 명 선발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안광수 소장은 공작원 조하영을 지명했다. 대남 공작원 조하영은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었다. 6.25 때 서울서 선전 선동대원을 하고 서울이 탈환되자 월북했다.
서울에는 조하영의 큰 아버지, 고모가 살고 있다. 조하영은 남파 공작원으로 서울 인천 강화를 몇 번 다녀간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안광수 백학 초대소장도 조하영 공작원을 이재강 부부장에게 추천했다.
“조하영, 동무 초대소장실로 가시오?”
초대소에서 청소하며 조하영의 개인 심부름을 하던 장명순 이모가 말했다. 명순 이모는 원래 간호사 출신이다. 그런데 공작원을 양성하고 관리하는 초대소에서 일한 것은 이제 2년이 되었다. 초대소장실 문을 열었다. 소장실에 김정일 지도자 동지가 와 있었다.
“충성! 전투원 소좌 조하영 소장님 부름 받고 왔습니다.”
“동무가 조하영 동지요?”
“예, 그렇습니다.”
“당 중앙이시며 민족의 태양 어버이 수령님의 유일한 계승자이신 김정일 지도자 동지가 조하영 동무를 친히 임무 부여하기 위해 여기 오셨습니다.”
“이번 조하영 동무의 책무가 막중하오. 강화도에 가서 받아오는 문건은 잘 되면 남조선 대머리 전두환 대통령을 일거에 박살 낼 수 있는 문건이오.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되고 만약 임무 수행이 실패될 것 같으면 현지서 자폭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목숨을 바쳐 조국에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자, 그럼 출발하시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 388 번지 25 호 문패가 李 善 實이라고 달려 있다.
60 이 조금 넘은 이선실 노인과 손녀 박은경이 함께 살고 있었다. 박은경은 대방여중 3 학년이었다.
검은 교복 중학생은 단정했다. 할머니가 은경을 불렀다.
“은경아! 은경아!”
“할머니 부르셨어요?”
“그래, 여기 좀 앉아라.”
“예, 할머니?”
“네가 수고 좀 해야겠구나?”
“뭐예요?”
“음, 이 서류 봉투를 네 책가방에 넣고 일단 영등포역까지 택시를 타고 역 반대쪽에서 용산서 강화까지 가는 38번 줄무늬 버스를 타고 강화도로 가. 종점서 내려 남녀 화장실 앞에서 화장실 들어가지 말고 여자 화장실 앞에 줄만 서 있고 여자 손님들이 다 용변 보고 나간 후 너 혼자가 될 때까지 서 있어. 그러면 나이 30 좀 넘은 남자가 학생 지금 몇 시야? 하고 물으면 몇 시 몇 분이라고 말하고 제 시계가 한 3 분 빠르다고 말해. 그러면 30 대 남자가 혹시 이선실 할머니 손녀입니까?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 사람에게 이 봉투를 주고 오면 된다. 만약에 화장실 앞에 누가 나타나 두 사람을 본다면 얼른 삼촌 나 배고파 짜장면 사줘요 해서 식당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너와 그 남자의 대화를 못 듣게 해.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은경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영등포역에서 38번 강화행 버스를 탔다.
강화 종점에서 내렸다.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벽은 벽보와 낙서로 지저분했다. 줄을 섰다. 은경 앞에 3 명 뒤에 4 명이 되었다. 은경의 차례가 되자 바로 뒷사람에게 먼저 하세요 하고 양보했다. 마지막이 되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은경도 소변을 보았다. 나와 밖에 서 있었다. 한 남자가 걸어왔다.
“학생, 지금 몇 시야?”
“예, 오후 2시 40분인데, 제 시계가 한 3분 빨라요.”
“음, 학생 고마워. 그런데, 학생이 혹시 이선실 노인의 손녀야?”
“예, 이거 할머니가.”
그때, 경찰 순찰차가 다가왔다.
“삼촌 배가 고파요. 자장면 사줘요.”
“그래, 가자?”
조하영과 박은경은 중국성이라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조는 곱빼기로 은경은 보통으로 먹었다. 그리고 식당에서 할머니가 주신 봉투를 은경이 하영에게 주었다. 은경이가 건네준 서류 봉투를 조하영은 자신의 서류 가방에 넣고 비밀번호를 돌려 잠금을 했다.
은경은 하영과 헤어져 다시 38번을 타고 강화에서 영등포역까지 와서 택시를 타고 대방동으로 왔다.
조하영은 문건을 무사히 백학초대소로 가지고 왔다. 대기하고 잇던 벤츠에 조하영과 안광수 초대소장이 탔다. 벤츠는 평양 중성동 15 호 관저로 불리는 김정일 관저로 달렸다. 김정일과 대남 선전선동부서의 이재강 부부장이 맞이했다.
“수고했소, 조하영 동무!”
“조하영 동무는 영웅이오 영웅!”
“모두 위대하신 수령님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영도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안광수 소장의 말에 김정일은 흐뭇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하여튼 수고 많았소. 내가 오늘은 술 한 잔 해야겠소?”
김정일 지시에 바로 관저에 음식상이 준비되고 소조 밴드가 동원되었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이선실이 입수하고 조하영이 운반한 ‘국화 재배면적 확대에 대한 보고’라는 남한의 외교 비밀문서를 김정일이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이재강을 불렀다.
“이재강, 여기 보세요?”
“예?”
“남조선의 전두환이가 10월 8일 서울을 떠나 공식 수행원 장관, 차관급 22 명에 정주영 등 기업인 30여 명을 대동하고 버마, 브루나이, 인도, 호주, 뉴질랜드를 방문한다. 여기 각국에 도착시간 행사 일정 다 들어 있어. 이런 외교 기밀을 이선실 노파는 어떻게 빼냈지. 재주도 용타야.”
“이선실도 그렇고 손녀딸 은경이도 중학생이 간도 크지 그걸 들고 조하영 동지를 만났는데, 바로 앞에 순찰차가 오니까 삼촌 배고파 자장면 사줘 해서 식당으로 피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경찰 순찰에 불심 검문했으면 일이 큰 낭패될 순간에 여중생의 기지로 모면했으니, 이건 다 하늘이 우리 편이오.”
은경 여중생은 참으로 아버지 박철수 동지와 닮았소. 은경 아버지 박철수는 대남 공작원이다. 국립묘지 현충탑 참배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러 왔다가 197X 년에 폭발물 오작동으로 사망했다.
“예, 이참에 완전 미 제국주의 앞잡이를 쓸어버리는 겁니다.”
북한 황해도 옹진에 있는 다른 초대소에서 강민철 공작원이 특수임무 지령을 받고 있었다.
“강민철 동무는 앞으로 나와 선서를 하시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전투원 대위 강민철은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동지 앞에서 엄숙히 선서합니다. 지금부터 모든 인적사항은 남조선 성북 초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강민철로 행동할 것이고 당과 수령님의 총 폭탄이 되어 통일전선에 이 한 몸 바칠 것을 선서합니다. 1983 년 조선인민군 124 군부대 소좌 강 민 철!
강민철의 선서에 강창수 부대장과 이재강 부부장이 배석하였다.
“강민철 동무는 버마로 가시오. 이미 선박으로 출발한 진성호 박상철 강상호 동지들을 지도하여 꼭 성공하기 바라오. 김정일 동지가 이미 동건애국호로 출발한 전투원이 있는데 추가로 강민철 동무를 보내는 이유를 명심하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버마에 가서는 버마 대사든 참사든 모두 강민철 동무의 애로사항을 조치해 줄 것이오. 여기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친필 서한이 있소. 이걸 줄 테니 버마 대사를 만나면 보여주시오.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친필서한은 조선시대 마패처럼 보여주면 모든 애로사항을 현지 책임자가 다 들어주었다.
김정일 친필 서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동무의 요청은 나의 지시와 같은 것이니 현지서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시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정일-
조하영은 위장된 외교관 신분 및 여권을 휴대하고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 버마로 직행했다. 버마 대사 김영철이 랑군 비행장까지 마중 나왔다.
“조하영 동지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참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공항가지 대사님이 마중을 나오다니 영광입니다.”
“조국에서 특별임무를 띠고 오시는데 공항에서 영접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여튼 고맙습니다.”
1983 년 10월 8일, 영등포 여자고등학교 합창단의 조두남 작곡 ‘선구자’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의 순방 환송식이 거행되었다. 가을비가 척척하게 내렸다. 광화문에서 김포 공항 가는 도로 옆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환송했다. 출국하기 전 전두환 대통령은 출국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인도양과 태평양을 종단하는 본인의 서남아시아와 오세안 순방은 제5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우리 국력의 국제화를 지향하는 국민 여러분의 여망에 따라 본인이 추진해 온 개방 외교의 네 번째로서 세계사의 중심에 우리 스스로를 성큼 다가서는 전진의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평화와 협력의 새로운 기수로 세계 속에 우리의 위치를 튼튼하게 다져왔습니다. 버마와 인도 그리고 스리랑카 등 3개국은 우리와 같은 아시아 대륙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과거 식민지주의에 대한 투쟁은 통하여 독립을 쟁취한 역사적 경험에서부터 경제 성장과 복지 향상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 오늘의 좌표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근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사건에서 반문명적이고 반이성적인 폭력의 실상을 억울한 피해자로서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더욱이 같은 동족인 북한 공산당이 가해자를 두둔하고 나서는 모습에서 반문명과 반이성, 그리고 반민족과 반인 간의 극치를 목적하고 암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반이성과 반인 간의 자세들은 비단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안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안녕을 위해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냉엄한 정세 아래서 세계평화와 세계인 모두의 안녕과 번영을 지키기 위한 화합과 협력의 정의로운 국제질서가 하루속히 모색되고 정착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이 순방을 마칠 때까지 안전한 행사가 되도록 많은 기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김포공항에서 이륙하는 장면을 김정일은 이재강과 부부장과 김정일 관저에서 보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출국한 이후 외무부에서는 비상대기 상황실을 유지했다.
상환 반장은 노호식 서기관이 상황반장이고 사무관 2명, 주사 4명 주사보 4명을 2 개 조로 나누어 주야 24시간 상황유지를 했다.
김포공항을 출발한 전세 특별기는 10월 8일 오후 7시에 첫 순방국인 버마의 랑군 공항에 착륙했다. 랑군 공항에는 주 버마 대사와 버마 외교부의 의전장이 영접을 나왔다. 21 발의 예포가 터졌다. 트랩을 내려와 우산유 대통령 내외가 전두환 대통령을 환영했다.
10월 9일 일요일 아침 10시에 아웅산 묘지에 참배하기로 계획되었다.
아웅산 묘지는 우리나라 동작동 국립묘지처럼 국가유공자 묘역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아웅산 묘소 참배를 취재하려고 한국의 신문·방송 기자들과 사진 기자들은 좀 더 좋은 위치에서 촬영하려고 자리다툼도 하였다.
“잠시 후 대통령께서 도착하시겠습니다.”
의전 담당자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검은색 벤츠 280 차량이 태극기를 달고 선두와 후미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웅산 묘소로 들어왔다. 차량 유리창이 선팅이 되어 있어 차량 안의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벤츠에서 내린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고 주 버마 대사 이계철이다. 이미 대열에 서 있던 함병춘 비서실장,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부총리에게 각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자신의 복장과 의전 서열에 맞게 섰는지 확인했다. 뒤쪽 군악대의 대열에서 진혼곡 나팔소리가 들렸다.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만 짧게 불었다. 2-3 분 흐르고 쾅! 하는 소리와 번쩍 섬광이 지나갔다. 아웅산 묘소 천정이 무너졌다.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 대사, 김재익 청와대 경제 수석 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 차관, 김용환 과학기술처 차관, 심상우 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 비서관, 한경희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정태진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사건 직후 전두환 대통령은 공식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강민철은 단파 송수신기를 꺼냈다. 송도대학으로 가장명칭을 사용한 공작원 양성기지와 단파 송수신을 시도했다.
“여기는 버마 아웅산입니다. 개성 모악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10월 9일 아웅산에 도열했던 국화꽃을 시들게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버마 아웅산에 도열했던 국화꽃을 시들게 했습니다.”
조하영은 버마 이야레크 호텔로 갔다. 숙소 1103 호실로 들어갔다. TV를 켰다. 긴급 뉴스가 나왔다. 버마 말과 글은 모르지만 화면이 아웅산 묘소 폭파장면을 반복해 보여주고 아나운서 목소리가 다급했다.
평양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이재강 선전 선동부 부부장이 받았다.
“부부장 동지 조하영입니다.”
“수고했소! 나도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방금 만나고 왔소!”
김정일 동지도 아주 좋아하셨소만 왜 원격 조종기를 그렇게 발리 눌러 전두환 대머리를 살려주었냐고 하셨소. 그러나 일단 수행원들을 떼죽음 시킨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하셨소.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부부장동지/”
“아니요, 오히려 겁을 먹고 인도나 다른 나라를 방문 취소하고 허겁지겁 달아나는 전두환 꼴이 더 우습게 되었다고 지도자 동지께서 죽인 것보다 보기 좋다고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서울까지 가서라도 전두환 목을 따서 바치겠습니다.”
“아니요, 이 사건으로 더 경호가 심해질 테니 당분간은 우리 사업을 역량만 키우고 실행은 숨겨야 하오. 안전하게 버마 대사나 직원들 위로해 주고 귀국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조하영은 호텔을 나왔다. 택시를 탔다. 버마 주재 북한 대사관으로 갔다. 대사관에는 버마 경찰과 대사관 직원이 고함을 질렀다. 경찰은 대사관 직원 전체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무슨 소리야, 외교관은 치외법권 적용이 세계 공통인데, 이놈의 버마만 버마 경찰에 우리가 조사를 받아?”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나 모두 조사에 응해야 합니다.”
“남조선 놈들이 자작극을 벌인 것을 왜 북조선 대사관 직원이 조사를 받아야 합니까?”
“자작극인지 아닌지는 양쪽 다 조사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 우리 버마 당국의 기본 지침입니다. 그러니 2 개조로 나누어 랑군 중앙경찰청에 출두하시오.”
조하영이 뒤늦게 합류하여 테러혁명을 지도한 이 사건의 행동대원은 모두 3 명이다. 신기철 대위는 아웅산 묘소 근처에서 사살되었고, 진성호 소좌와 강민철은 체포되었다.
한편, 서울의 노호식 서기관과 배장호 사무관 타자수 김경희 양, 이미경 주무, 다름 주사와 주사보들은 2 교대로 24 시간 상황을 유지했다.
“김경희 양?”
“예, 과장님!”
“이거 외교부에서 발표하는 성명서인데 복사해서 100 부 만들어?”
“예, 알겠습니다.”
“함상신군?”
“예, 사무관님?”
“이번 버마에서 순직하신 분들 각 개인별로 신상 파일을 만들어?”
“예, 알겠습니다.”
촉탁직이지만 국가에 큰 사고가 터지니 임시직 정규직 구분 없이 바빴다. 일손이 모자라 모두 말이 없어졌다. 침묵 속에 손놀림 발동작만 빨라졌다.
아웅산 묘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참석했던 수행원들은 무너지는 묘소 천장에 깔렸다. 팔다리가 덜어져 나가고 파편이 몸에 얼굴에 박혔다. 사망자 중상자 모두 형편없는 몰골이다.
한국에서 이상호 체육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국정부 진상조사단을 버마에 파견했다.
버마는 이 사건의 범인은 북한 개성에 있는 124 군부대, 강창수 부대 출신의 강민철, 진성호, 신기철 등 3 명으로 발표했다. 이들 중 진성호 강민철은 북한 황해도 옹진항에서 동건애국호를 타고 9월 8일 출발해서 9월 23일 랑군항에 도착했다.
강민철은 9월 25일 비행기로 버마 랑군 공항으로 왔다. 3 명은 버마 주재 북한 대사관 참사관 전창호의 집에 은거하면서 테러 준비를 해왔다. 크레모아와 소이탄, 도폭선, 무선 조종 장치 등을 조립하여 폭발물 3 개와 원격 신호 장치를 만들었다. 좀 덜어진 곳에서 폭발물을 터뜨리고 도주할 시간을 벌 수 있게 준비했다.
버마 수사관이 확보한 물증은 원격 조종기 1 대 조종기에 장착하는 일본제품인 히다찌의 건전지 20 개였다. 히다찌의 건전지는 이미 한국에서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기도 사건 때 회수된 불발탄, 임진강 침투 간첩 배낭에서도 히다찌 건전지가 나왔다.
아웅산에서 순직한 17 명의 유해는 대한항공 특별기로 한국으로 이송했다. 17 명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장으로 엄숙히 진행되었다. 모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함상신은 17 명의 국민장 행사를 외교부 아시아과 사무실에서 보고 있었다. 사직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인적사항을 다 기록하고 사직 사유에는 개인 신상이라고 적었다. 세부적으로 작성하는 곳에다가 월급이 공무원보다 많은 직장으로 가고 싶어서 사직한다고 썼다. 노호식 서기관 결재만 받으면 장관 결재는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범석 외무부 장관이 버마에서 순직한 관계로 차관님 전결처리로 사직했다.
“함상신 씨 왜 사직을 하는 거야?”
“예, 일단은 정규직도 아니고 봉급도 작아서 사직하고 새길 갈 것입니다.”
“지금 10월 말인데 12월까지 근무하고 12월 31일 사직하면 안 되겠니?”
“예, 제가 마음이 불편합니다.”
“뭐가 불편해? 우리 아시아과 사람들 다 좋은데?”
“지난번 장관보고 전날 분명히 국화작전 보고서 5 부를 만들었는데 과장님이 보시는 날 4 부로 한부가 없어진 것도 제가 그날 비밀 보관소에 넣었는데 솔직히 부수 확인 안 하고 그냥 있는 대로 넣었는데, 그게 17 명의 사망자를 낸 국화작전에서 국화를 시들게 한 원인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안 와요.”
“나도 요즘 서기관이라는 놈이 비밀문서 하나 똑바로 간수 못해서 이런 일이 났구나 하는 죄책감에 잠을 못 잔다.”
“이건 함군 혼자 문제가 아냐 우리 아시아과 전체의 문제지. 책임이 있다면 과장인 내가 더 책임이 크지 말단의 함 군이 책임이 크겠어? 그래서 이번 함 군 사직서는 나는 결재 올릴 수 없다.” 그러면서 사직서를 찢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국화작전을 추진 중이던 9월 1일 04 시 30 분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을 출발한 KAL007 편 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하여 소련 영공을 들어가게 되었다. 소련은 이 항공기가 민항기임을 알고서도 미사일을 발사해 격추했다. 비행기 잔해와 탑승객은 북태평양 한가운데 수장되었다. 이 비행기에는 3세 어린이부터 70세 노인까지 269 명이 타고 있었다.
버마에서는 버마 최고 실권자 네윈의 오른 팔로 불리고 일부 언론에서 후계자로까지 거론되던 틴우 장군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틴우는 버마의 국가안전기획장이었다. 틴우 장군의 체포 죄명은 부정축재 및 딸의 호화 결혼식이었다. 틴우 안전 기획부장 척결 시에 그를 따르던 정보계통 장군들 3 명이 함께 처단되었다. 이런 사건으로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을 틴우 장군을 사모하는 일당들이 저지른 일종의 버마 정부에 항의하는 테러로 보도한 가사도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10월 9일 10시 15 분 우 칫 라잉 버마 외무부 장관이 인야 레이크 호텔에 도착해 전두환 대통령을 모시고 아웅산 묘소로 출발해야 했다. 10시 20 분이 되어도 버마 외무부 장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호텔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요원들은 초조했다.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담배를 피웠다. 국가원수의 의전과 경호 행사 요원들은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산다.
대통령 행사의 타임테이블은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경호상의 문제인데 그 타임테이블을 머리에 넣고 행동하는 경호원들에게 그 시간표대로 나타날 시간이 나타나지 않으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외교와 정보 경호 업무 관련자끼리 협조된 신간을 분 초 단위로 암호로 만들어 교신하는데 이렇게 5 분이나 차이 나는 것은 외교 관례상 큰 결례였다. 모든 준비를 완료한 전두환 대통령은 창밖을 보며 호텔방을 왔다 갔다 했다. 답답한 전두환 대통령이 의전 담당 이성기 의전 담당관에게 말했다.
“이 담당관 출발 안 하나?”
“예, 각하 타임테이블 상으로 이미 출발 시간이 지났는데, 버마 외교부 장관이 아직 안 와서.”
전두환 대통령은 성질이 직선적이다. 좋고 싫음이 얼굴에 100% 나타나는 성격이라 포커를 하면 100% 잃을 사람이다. 호텔 자신의 방을 서성이다 2 층 V. I. P 로비로 올라갔다. 그때 버마 외무부 장관 우 칫 라잉이 도착했다.
버마 외무부 장관의 도착이 늦어지자 마음이 조급한 함춘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주 버마 대사 이계철 대사에게 먼저 출발해 각하가 곧 도착하신다고 하라고 했다. 그리고 함영춘 비서실장은 이순자 대통령 영부인과 비서실 직원을 챙겨 출발시켰다. 태극기를 부착한 이계철 대사를 경호 차량이 앞뒤에서 호위하며 아웅산 묘소로 향했다.
조하영이 벤츠 차량에 앞뒤로 경호하는 것을 보고 전두환 대통령이 아웅산 묘소에 도착했습니다. 진 소좌에게 보고했다. 이계철 대사는 차량에서 내리자 각하께서 곧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했다. 수행원들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의전 서열에 맞게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 기자는 수행원들이 앵글을 벗어난 사람을 호명하며 조금 안으로 들어가라 키 큰 분은 약간 무릎을 굽혀라 주문했다. 그 순간 쾅! 하는 굉음과 번쩍 섬광이 지나갔다.
아웅산 묘소 천정이 무너져 내리고 벽체 기둥도 무너졌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1983 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묘소는 피의 일요일이 되었다. 한국은 한글날이라고 10 시에 각 지역 도청소재지마다 한글날 기념행사가 있었다. 이 시간에 버마 아웅산 묘소에 대형 폭발물 사고 아니 테러가 행해진 것이다.
외무부 아시아과의 노호식 서기관이 반장으로 24 시간 상황 유지하던 상황실에 2 교대가 아닌 전원 출동 지시가 내렸다.
외교부 상황실에 비상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 성명 발표, 시신 처리 및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진 파견, 진상 조사단 파견 등이 결정되었다. 성명서에서 정부는 이 사건이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단정했다. 구체적 물증은 없지만 정부는 이 사건을 통해 천인공노할 북괴의 국제테러 집단의 본성을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았다고 못 박음으로써 사건이 북한이 관련돼 있음을 공식화했다.
강각성 국가안전기획부 2 차장이 주무관이 되어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의 조사단이 구성되었다. 조사단은 국가 안전 기획부에서 6 명, 경찰청 2 명, 국군기무사 2 명 국군 정보사 2명을 차출해서 총 12명의 합동조사단을 구성했다. 국군 기무사령부는 대공 상의 용의점 판별을 위해 차출했고, 국군 정보사령부는 적성무기 판별을 위해 차출했다.
1983년 10월 10일 유해 운구를 위해 대한 항공 특별기를 보내기로 하였다. 이상우 체육부 장관을 단장으로 유해 인수단을 파견했다.
10월 9일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 직후 랑군 시내에는 이 폭발 사건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버마 경찰이 나팔소리가 나고 2-3 분 후에 폭발이 이루어진 점을 착안해서 버마 군악대의 나팔수를 조사했다.
‘왜 식 전에 나팔을 불게 되었나?’
한국 경호원이 와서 참배 시 묵념 때 연주하는 진혼곡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만 불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버마 수사 당국은 한국의 불만 세력이 버마 군악대 나팔수를 매수하여 나팔 부는 것으로 신호로 삼은 것을 의심했다. 버마 수사 당국이 추정한 시나리오는 네 가지였다. 첫째, 북한의 사주를 받은 버마 내의 반정부 단체가 저지른 범행이다. 둘째, 소수 민족 게릴라 등 버마 내에 있는 반정부 단체의 단독 범행이다. 셋째, 북한 특수부대의 직접 범행이다. 넷째, 한국의 자작극이다.
이런 네 종류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수사를 하다 보니 제일 먼저 의심을 받는 사람은 한국인 경호원 김미동이다. 김미동 경호원은 버마 군악대 대열로 가서 나팔수에게 진혼곡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을 불러보라고 했다. 한번 불어본 나파소리가 나고 2-3 분 후에 쾅! 하는 굉음과 번쩍 섬광이 지나가고 아웅산 묘소 천정이 무너졌다.
버마 정보국 수사관이 김미동을 심문했다.
“당신은 경호원 근무 경력이 얼마나 됩니까?”
“예, 10 년 됩니다.”
“그럼, 경험이 많은 경호원이 미리 점검을 했어야지 행사시간 임박해서 군악대를 점검한 이유가 뭡니까?”
“예, 경호 차장님으로부터 지시받은 임무가 출입하는 버마와 한국 그리고 외국의 기자와 사진기자의 보안 점검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악대를 점검하기로 한 구영삼 경호원이 경호실장 호출을 받고 불려 가면서 나에게 군악대 점검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군악대 점검을 한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구영삼 경호원을 불러오세요.”
구영삼 경호원이 불려 왔다.
“구영삼 경호원 맞습니까?”
“예.”
“이번 행사에 구영삼 경호원이 맡은 임무가 무엇입니까?”
“ 예, 아웅산 묘소 행사장 시설물과 군악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점검을 본인이 직접 하지 않고 김미동 경호원에게 부탁했나요?”
“예, 제가 다 해야 하는데, 기자들이 너무 많이 와서 거기 시간을 다 빼앗긴 상태서 경호실장님이 경호 본부로 잠깐 다녀가라고 해서 본부로 갔습니다. 그래서 다른 점검은 마쳤으니 군악대만 봐 달라고 김미동 경호원에게 부탁하고 본부로 갔습니다.”
“혹시 점검하면서 군악대 악기를 불어 보게 하라는 말도 했습니까?”
“아니요, 점검리스트에 목관악기 금관악기 등에 폭발물 소형을 은익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은 필요 없습니다.”
“알았습니다. 악기 소리가 나고 2-3 분 후에 폭발 사고가 났으니, 완전히 수해의 의문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김미동, 구영삼 두 경호원은 버마 경찰청에서 내보낼 수 없습니다.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계속하겠습니다.”
두 경호원은 버마 경찰청에 체포되었다. 조하영은 비행기로 랑군을 떠나 북경으로 북경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곧 김정일 지도자 동지와 이재강 부부장에게 불려 갔다. 김정일이 특유의 펑크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담배를 한 대 물고 조하영에게 물었다.
“조하영 동무! 사업을 어찌 그리 성급하게 했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놈 이계철 남조선 버마 대사 놈이 대머리라 전두환 대머리 하고 너무 똑같아서 정말 전두환인 줄 알고 버튼을 눌렀습니다. 벤츠 차량 앞에 태극기를 달고 앞뒤에서 경호 차량이 경호하고 내리자마자 도열한 이범석 외무부장관 이하 모든 참석자들이 고개 숙여 인사해서 깜짝 속았습니다.”
“알았소. 전두환을 처단 못한 것은 아쉽지만 동무들의 거사는 성공이오. 참석자들을 전몰시켰고 전두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단 말이오.”
“감사합니다, 지도자 동지! 죄송합니다. 부부장 동지 저는 전두환 목을 다기 위해 남조선으로 잠입할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오. 이번 일로 남조선 놈들이 더욱 경계를 삼엄하게 펼 질 테니 지금은 조용히 기다릴 때요. 당분간 조하영 동지는 삼지연 특각에서 푹 쉬고 다음 임무를 준비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북한에서 특수 임무 종사자인 해외 테러나 대남 간첩 임무 수행을 마치고 복귀한 인원에 대하여는 김일성, 김정일이 사용하는 특각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북한의 특각은 남한의 청남대처럼 국가 원수인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휴양소이다. 그런 특각이 북한에는 20 여개 있다.
2 개월간의 수사를 벌인 버마 당국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은 북한에서 국가 차원의 조직적인 테러로 결론이 났다. 버마는 북한에 대하여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고 발표했다.
주 버마 북한 대사 및 참사관 참사 영사들이 버마에서 추방되었다. 평양으로 쓸쓸히 돌아갔다.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외무부와 대통령 경호실 그리고 국가 안전 기획부에 대대적인 인사 태풍이 불었다. 노호식 서기관, 배장호 사무관은 한직으로 전보 발령 났다. 외교 안보 연구소 특정 직무 없는 연구원이 되었다. 나는 사표가 반려되었고 조촐한 이별 회식을 하였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가자 노호식 서기관이 말문을 열었다.
아니, 버마로 가자고 제안한 놈들은 그 자리 유지하고 죄 없는 우리가 왜 인사 태풍을 맞아야 해?
노호식 서기관은 ‘솔’한 까치를 입에 물었다. 한 모금 발고 후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과장님 뭐라 위로할 말씀이 없습니다. 길거리에 뭔 놈의 정의 사회 구현하자는 현수막이 그리 많은지.
그는 체포되어 버마 합동수사기관으로 이송되었다.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계속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자백했다. 강민철은 버마 감옥에서 25 년 수형생활을 하다가 2008 년 5 월 18 일 사망했다. 사인은 간암이었다. 시신을 북한도 남한도 인수를 거부했다. 버마 국립화장장에서 한 줌 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