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대학 507 강의실
九 龍 大 學 507 강의실
청주 무심천 강변 九龍大學이 있는 구룡봉 아래 큰 연못이 있었다.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들이 서로 자기가 우두머리라고 싸움을 했다. 용들의 싸움에 모충동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다. 모충동 사람들이 구룡봉에 제단을 설치하고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 비나이다. 옥황상제님이시여! 여기 모충골 백성들을 굽어 살피소서. 아홉 마리 용들이 다들 자기가 왕이라고 저렇게 싸움을 합니다. 옥황상제님이 이들을 하늘에 불러 싸우지 못하도록 서열을 정해주시거나 모두 없애고 딱 하나의 용만 남겨주소서! 모충골 백성들이 정성 들여 제물을 바치오니 옥황상제님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모충골 백성들의 간절함이 하늘에 도달했는지 乙丑年에 홍수가 나서 무심천이 범람하더니 9 마리의 용들이 승천을 했다. 옥황상제는 9 마리의 龍을 하늘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제1 龍부터 제9 龍까지 각기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각 용들은 자기의 임무만 관장하지 다른 용의 일에 훈수나 비판을 금지시켰다. 그로부터 하늘에 평화 모충골에 축복의 날이 계속되었다. 옥황상제가 九龍들에 부여한 임무는 다음과 같다.
제1 용은 국민주권
제2 용은 영토수호
제3 용은 언론자유
제4 용은 국군통수
제5 용은 재벌해체
제6 용은 문화융성
제7 용은 민주회복
제8 용은 병역평등
제9 용은 사법평등을 관장하도록 했다.
517 강의실에 장 준호 교수가 들어섰다. 2 학년 과대표 이학선이 차렷, 교수님께 대하여 경례에 맞추어 안녕하십니까? 하고 교수도 반갑습니다. 답례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군대 같은 분위기지만 당시 이 나라 분위기는 거대한 병영집단이었다. 장 교수는 출석 카드를 점검했다. 대부분 사회교육과 학생이 수강이라 장 교수가 이름과 얼굴을 아는 사이인데 특이하게 국어교육과에서 일반선택으로 수강한 함 문평만 초면이었다. 함 문평 학생?
― 예, 함 문평입니다.
― 복장을 보니 ROTC 복장을 하고 있는데, 4 학년생이 2 학년 과목을 일반선택 수강을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 예, 제가 국어교육과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모두 이수했습니다만 교사로 혹시 학생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국어교사라도 헌법은 알고 있어야 국어선생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신청했습니다.
― 박수! 내가 이 학교 강의 올해 4년 차인데, 정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예비교사를 만났군요. 교사는 과목 무슨 과목이든 헌법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헌법개론을 교양필수로 하자고 제안을 해도 교무처장, 학생처장 보임 교수들이 반대를 해서 못했는데 이렇게 일반선택으로 교사는 헌법을 알아야 한다고 수강한 1 호 학생을 만나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이런 자발적인 수강 학생이 있어 더 철저한 강의준비를 하겠습니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재미있는 헌법학 강의실로 꾸며봅시다.
그렇게 장 교수와 문평 학생의 인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헌법학 강의를 시작했다.
제1 용 국민주권
우리가 헌법학 시간에 말하는 주권(主權)이라는 것이 왕조시대는 주권이 왕에게 있었습니다. 조선이 망할 무렵 대한제국이라고 국호에 허풍을 덜었지만 몇 년 못 가고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병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지배에서의 조선 도는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주권 잃어버린 국민이 얼마나 서러운 것인가를 체험했다. 주권을 찾기 위해 의병이나 독립군 활동을 한 사람도 있지만 일본 순사 끄나풀이 되거나 황군의 장교나 하사관 심지어 가미카제 특공대가 된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 지낸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백 선엽 장군 등이 모두 일본군 장교출신이었다.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는 독립군 출신이었다. 일본 극우 성향의 학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은 현재 대한민국이 이 만큼 잘 살게 된 것이 일본이 한일합병으로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철도 건설을 했고 부산, 인천, 원산, 군산, 해주 등의 항구를 개발해 준 덕이라고 말한다. 얼핏 들어보면 그럴듯한 논리다. 하지만 만약에 일본이 1910 년 8월 29일 한일합병을 하지 아니했다면 대한민국은 여태 철도도 없는 나라가 되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인류문명 발달은 물과 같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고 흐르다 바위를 만나면 양 옆으로 갈라져 흐른다. 바위를 지나면 다시 하나로 합쳐서 흘러 작은 물이 큰 강에서 만나 먼바다로 흐른다.
우리가 헌법이라고 하는 한자어 헌법(憲法)은 법(法)이 물 수(水)에 거(去)가 합쳐진 말이다. 물이 흐르듯 가는 것이 법이고 법 중에 으뜸이 헌법이다. 헌법이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지만 이제와 굳어진 헌법을 으뜸법이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다. 장 교수의 강의는 거침이 없었다. 1985년 2 학기 517 헌법학 교실은 중앙정보부 충북지사의 주요 관심 교실이었다. 강의실이 넓으면 어느 구석에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도 있었으나 517 강의실은 아주 작은 40 명 정도 들어가면 곽 차는 강의실이라 교수가 교단에서 보면 맨 뒤까지 한눈에 보여 어디다 도청장치를 할 수가 없었다. 중앙정보부 충북지사 구룡대학 파견관 백 운택 사무관은 도청장치가 없으니 복도를 지나가면서 슬쩍 517 강의실에 천천히 지나면서 강의를 들어보거나 학생들을 접촉해 커피를 사주면서 노트를 빌려보는 방식으로 정보보고서를 작성했다.
백 운택이라는 이름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에 전두환 신군부에 가담한 71 훈련단장 백 운택(白雲澤)과 동명이인이었다. 백 사무관은 중위로 전역하여 중앙정보부 7급 특채로 들어갔다.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를 나와서 체력도 튼튼하고, 군대서도 단기복무자지만 장군 전속부관을 하고 전역했기 때문에 장군들 모시는 예의범절이 투철했고 상황판단도 빨랐다. 그래서 유신사무관이라고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군대생활 5 년 대위로 전역해서 5급 사무관이 득실거리는 중앙정보부에서 나름 진급을 빨리했다. 곧 서기관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지 안에 맨 위에 그의 묘가 있다. 비석에 김재규 장군으로, 김재규 의사로 새기면 누군가가 와서 ‘장군’과 ‘의사’를 망치로 훼손했다. 1979년 10.26에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다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몇십 년은 늦게 찾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김재규의 역사적 평가에 인색함을 무릅쓰고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1963년 박 정희의 초판본 <國家와 革命과 나>에 보면 5.16 민족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의 확립 혁명이며 사회적으로는 근대화 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창업 혁명이며, 국가의 재건 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 혁명이인 것이다.(박 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27쪽)
솔직히 그(김재규)는 5.16에 처음부터 가담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자칭 주체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혁명 노선을 뒤늦게 합류한 사람으로 공부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읽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박 정희가 경상도 출신이고 사범학교 나온 사람이라고 그를 각별히 생각해 좋은 보직을 주었다. 인간적인 고마움을 늘 간직하고 살았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고마운 것과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박 정희가 추구하는 대한민국과 그가 생각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말이 좋아서 10월 유신이지 유신헌법은 헌법도 아니라는 것이 턱밑에 차올랐으나 어느 누구 하나 유신헌법이 나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사람은 민청학련 사건부터 모두 간첩으로 사형을 시키거나 무기징역을 대법원에서 판결을 했다. 나도 그 유신헌법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공작을 했다.
1979년 10월 중순에 부산 마산 지역에서 데모가 발생했다. 직책이 중앙정보부장이라 그는 잠행하여 사태를 파악했다. 신문보도에는 부마사태를 20세 전후 이 지역 때밀이,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공장 단순 노동자 비하의 말로 공돌이 공순이들이 김영삼의 사주를 받아 데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부산역 광장을 볼 수 있는 허름한 골목에서 데모를 관찰했다. 그리고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에 막걸리를 마시는 시민들과 대화도 했다. 신문보도와 반대되는 보고를 대통령에게 했다. 부산경찰서에 연행된 인원이 200 명이라면 20 명 정도만 학생들이고 나머지 180 명이 부산의 일반시민이라고 보고했다. 그 시민들은 김영삼 사주를 받은 일도 없고 남조선 민주주의 해방 전선도 아니라고 했다. 이런 것을 특단의 조치 없이 막으려고만 한다면 점점 전국의 대도시는 민중봉기로 발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박 정희 대통령 그 작은 눈이 더 작게 오그라들었다.
잠시 후 나타난 차지철이 너스레를 떨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탱크로 쓸어버리면 됩니다. 제가 탱크부대 출신 아닙니까? 캄보디아는 300만 명 학살했는데, 우리도 200 만 정도는 탱크로 밀어버리면 아무 문제 없이 조용해질 겁니다.
차지철의 말에 박 정희 얼굴이 펴졌다. 차 실장처럼 강력하게 처리해야지 이거 중앙정보부가 너무 물러터지니 탈이야! 했다.
그날 의전과장 박 선호는 플라자 호텔에서 신 재순을 만났다.
이어 내자 호텔에서 가수 심수봉을 만났다. 신양과 심양을 태우고 빨리 궁정동을 가야 하는데 가수 심수봉이 기타 줄이 하나 나갔다고 갈아야 한다고 해서 가까운 악기점에서 줄을 갈고 궁정동에 도착을 하니 저녁 6 시 45 분이 되었다.
박 선호와 박 흥주에게 오늘 저녁에 해치우겠다고 하니 박 선호가 놀라는 표정으로 각하까지입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저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차지철 부하 경호실 놈들을 제압한다. 불응하면 발포해도 좋다. 알겠지? 예. 박 선호는 대답을 했는데 박 흥주는 답이 없었다. 내심 걱정이 되었다. 박 흥주는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큰 사고가 없는 한 장군까지 갈 마음이 있는 장교인데, 혹시 거사 전에 변심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그동안 나와의 신뢰 내 지시에 한 번도 아니라고 한 일이 없는 박 흥주가 내 명령에 지옥까지 따라갈 거라 믿었다.
만찬장에서 병풍을 등 뒤로 중앙에 박 정희 대통령이 앉고 좌우에 두 아가씨가 앉고 반대쪽에 김 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차지철이 앉았다. 당연히 이야기는 오늘 준공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이야기를 했다. 오늘 같은 만찬에서는 기분 좋은 말만 할 것이지 차지철이 또 부마사태 이야기 김영삼 제명 이야기를 하면서 살살 나의 부아를 질렀다.
―형님, 각하를 똑똑히 모시십시오. 이어 차 지철을 향해
― 이 버리지 같은 새끼!
이어 탕! 한 발을 차지철에게 쏘았다. 차지철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바람에 총알이 손목에 맞았다. 이어 대통령을 향해 한발 발사를 했다. 대통령을 쏘면서 대국적으로 청치 하십시오! 했다.
― 김 부장, 왜 이래!
그는 못 들은 척 차지철을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으나 권총은 철커덕! 철커덕! 소리만 났지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다. 박 선호에게 총을 달라고 해서 들어왔다. 그때 때 전기가 나갔다. 김 계원 비서실장이 불 켜! 소리를 질렀다.
박 선호의 M36 치프 스페셜을 받아 들고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겨울 공화국
―양 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
(중간 생략)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홧발로 지근지근 짓밟아 대고
(중간 생략)
지금은 겨울인가
한 밤 중 인 가
논과 밭이 얼어붙은 겨울 공화국
(이하생략)
―양 성 우 시집 겨울공화국 중에서―
그는 여러 번 박 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제목부터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자가 투표를 해서 뽑아주는 머슴 대통령이 국가와 혁명 그 위에 나라는 식의 제목이 아주 민주주의하고는 어울릴 수 없는 제목이지만 박정희 통치철학 5.16 혁명 철학을 알기 위해 여러 번 읽었다.
책 중간에 5.16을 민족혁명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그는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하늘의 구름은 저렇게 편하게 흘러가는데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언제쯤 제대로 된 민주(民主) 구경을 할 수 있을까? 전율이 느껴지는 대목을 발견했다.
― 이 革命의 前程에는 定해진 時限이 없다. 제3 공화국 수립만으로 革命이 끝나는 것도 아니요, 어디에서 어디까지라고 期限이 定해질 수도 없다.
(國家와 革命과 나 27 쪽)
결국 정해진 시한도 없고 기한도 없이 永久革命이라는 뜻이다. 포장을 혁명이라고 했으니 혁명이지 쿠데타이고 영구집권을 한다는 것을 이렇게 배배 꽈배기로 과서 말을 현란하게 책에 쓰고 있으니 사람들은 이미 1963 년에 영구집권 시나리오를 가지고 시작했는데, 일반인은 그걸 모르고 3 선만 하면 물러날 것으로 믿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974 년 8.15 광복절 기념식을 하던 중에 문 세광이 손 총에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고 박 근혜가 정신이 우울한 시기에 최 태민이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
(1975.2. 최 태민이 박 근혜에게 보낸 편지 중)
이 편지를 박 근혜가 읽고 최 태민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최 태민이 근혜의 영혼과 육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세상을 풍자하는 은어 중에 ‘육박전’이라고 있다. 국어사전적 의미는 ―서로가 맞붙어서 치고받는 싸움이다―하지만 1973 년의 육박전은 육영수와 박 정희의 부부싸움을 육박전으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신민당 국회의원 조모가 정 인숙 사건의 풍자 노래를 불렀다.
국정감사 정기국회에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정부 질의에 답변하는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대신 가사만 읽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어요.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것을
죽고 나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어요.
국무위원자리의 정일권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총리는 이런 시중의 노래를 들어보았는지 알고 있는지 따졌다.
1978 년 5 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 최 태민이 박 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기업에 전화를 해서 기부금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을 조사해서 최 태민과 박 근혜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명목은 구국여성봉사단의 발전기금이라고 했으나 거의 세금 수준이었다. 안내면 세무조사를 받을 판이라 기업들은 눈치껏 재계서열 순위에 맞는 돈을 구국여성봉사단에 바쳤다. 심지어 유정회 국회의원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백 광현 서기관을 불러 최 태민과 여성구국봉사단을 조사하고 박 근혜 관련 사항을 보고서로 만들었다. 박 정희는 그의 보고를 받고 시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최 태민 박 근혜 앞에서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 중앙정보보가 간첩이나 잘 잡으라고 모욕을 주었다. 최 태민도 절대 기업이 스스로 발전기금 낸 것이지 내가 강압적인 전화 하지 않았다고 하고 박 근혜도 모함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더구나 육영수 여사가 없는 상태에서 박 근혜의 눈물을 보니 박 정희의 속이 얼마나 애처로웠을까? 이해는 가지만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라고 하는 동양의 처세술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결국 그의 보고서는 중앙정보부의 보존문헌실로 가서 봉인되었다. 이날 이후 그는 더 이상 이 나라에 희망이 없음을 알았고 그가 혼자 1 인 혁명을 결심했다.
조선시대의 단종 복위 사건에서 사육신 교훈에서 보았듯이 혁명을 여러 명이 하면 보안을 지킬 수가 없다.
배반자가 나와서 혁명전야에 혁명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이런 보안 취약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가 혼자 계획하고 거사 직전 심복에게만 알리고 심복 중에서도 반대자는 그의 손으로 제거, 혁명을 해야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공자님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강조하셨다는데 그는 四字成語로 말한다면 살신성민(殺身成民)을 하기로 했다. 이 한 몸 이 땅 民主聖殿에 바친다고 결심했다.
중앙정보부장 업무수첩 맨 뒤에 낙서를 했다. 시라고 보기에 너무 치졸하지만 몇 자 적었다.
나의 자유
― 나를 만일 신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의 수호신이라고 부르겠지
나를 만일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 대한의 국부라고 부르겠지
독재의 아성 무너뜨렸네
내 목숨 하나 바쳐
자유 민주주의 회복하였네
나 사랑하는 三千七百萬 국민에게
자유를 찾아 되돌려주었네
萬歲 萬歲 萬萬歲
(이하생략)
박 선호가 데리고 온 여인들은 각자 자필로 이름을 쓰고 지장을 받았다.
첫째, 각하가 말을 시키기 전에는 먼저 말을 하지 말 것.
둘째, 여기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말 것.
셋째, 안가에서 보고 들은 것은 일절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이를 어기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합니다.
서약서 작성 후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신 재순이 대통령 옆에 앉았다. 박 정희가 나이와 이름을 물어보고 예쁘게 생겼다고 칭찬을 했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 뉴스를 보고 싶어 했다. 7 시 뉴스에 나올 것이라고 TV채널을 9에 맞추었다. 만찬장 흥이 무르익었다. 심수봉이 자신의 노래 <그때 그 사람>을 부르고 앙코르 송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차지철이 <도라지>를 불렀다. 남 효주가 들어와 박 선호 과장이 보자고 해서 대통령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 나갔다. 박 선호에게 가니 손가락을 동그랗게 표시하면서 준비 다되었음을 알렸다. 나는 머리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만찬장 안으로 들어왔다.
신 재순 양이 <사랑해>를 부르겠다고 해서 심수봉이 기타 반주로 음을 맞추었다. 그 순간에 김재규는 김 계원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좀 잘 모시십시오! 했다.
차지철을 향해 이 버러지 같은 놈 하면서 한방을 쏘았다. 이어 박 정희를 향해 한방 쏘았다. 그런데 첫발 차지철에게 쏜 것이 명중이 안 되어 차지철이 손목에 피를 흘리면서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다시 한방을 쏘았으나 권총이 철커덕! 찰칵! 소리만 나지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박 선호에게 권총을 받아 안으로 들어와 박 정희를 차지철을 확인 사살했다. 비유하자면 로마를 위해 시저를 죽여야만 했던 블루투스 심정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죽이려면 박 정희만 죽이지 차지철을 왜 죽이냐 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내 마음은 박 정희도 미웠지만 차지철 이 놈은 인간도 아니라고 여겼다. 예비역 대위 출신이 지 휘하에 꼭 별을 자리를 만들어 경호실 국기 강하를 하면서 허름한 유정회 국회의원들이나 허름한 나라 대사를 불러 옆에 세우고 식을 했다. 완전 이 나라 부통령행세를 했는데 박 정희는 알면서도 묵인했다.
만찬장 안에서 박 정희와 차지철을 처치하는 총소리를 듣고 밖에서는 박 선호와 박 흥주가 경호실 부하들을 제압했다. 정 인형과 박 선호는 해병대 동기였다. 총소리가 나자 박 선호가 총을 꺼내 꼼짝 마! 했다. 안 재송은 사격 선수답게 민첩한 동작으로 총을 뽑았다. 박 선호가 먼저 뽑은 총으로 안 재송을 쏘았다.
그의 혁명계획은 박 정희를 사살하고 육군참모총장으로 혁명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정 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미리 말했다가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르면 시행도 전에 내가 반역죄 될 것 같아 그에게 미처 말하지 못하고 거사를 했다. 실수라면 그 혁명위원회라는 것이 국무회의를 거쳐 계엄을 선포하고 다음 단계라는 것을 내가 간과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하지만 미완의 혁명이지만 박 정희를 없앤 것만으로도 이 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한 것이라고 50 년 후의 역사가가 나를 재평가하리라 믿었다.
김 계원 비서실장에게
―형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철저히 하십시오!
― 응, 알았어.
만찬장을 나왔다. 목이 말랐다. 물을 찾았다.
김 계원 비서실장은 피투성이 박정희를 국군지구병원으로 후송했다.
당직 군의관 안 대위에게 빨리 조치해! 이분 꼭 살려했다. 군의관은 맥박을 확인했다. 응급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김 병수 병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비서실장이 환자 한 명을 데리고 왔는데 원장님이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고를 했다. 김 병수 원장이 와서 환자 얼굴을 확인했다. 배를 걷었다. 반점이 보였다. 김 병수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임을 알았다. 전화기를 들었다. 국군지구병원은 보안사와 직통연결 전화가 있었다. 보안사 참모장 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각하 서거를 알렸다.
1979년 10월 17일 이날은 72년 유신선포 7 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청와대 영빈관에는 3 부 요인들과 유정회 국회의원들이 가득 찼다.
도열해 있던 일행은 박정희 등장에 박수를 쳤다. 박정희의 유신 결단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칭송의 건배를 했다. 이 시간 부산에서는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민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부산대학교 교정에서 시작된 시위는 교문을 나와서 시가지 행진으로 번지면서 시민들이 가세했다. 부산대학교 정상천이 초안을 작성한 <민주구국투쟁 선언문>을 낭독했다.
― 반만년 역사 위에 이처럼 무자비하게 수탈을 하는 집단이 또 있겠는가? 일제의 수탈은 왜놈이 조선을 지배하느라 그런다고 하지만 이건 같은 민족 더구나 국민들이 투표로 뽑아준 공직자가 국민 위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수탈하고 잘못은 노동자 농민들에게 덧씌우고 있다.
YH 여공들의 죽음과 그들의 외침을 보라! 김영삼 제명을 보라!(이하생략)
영빈관에서 흥이 무르익어 유신이 영원할 것처럼 유신의 영원함을 위하여! 외치면서 축배를 서너 잔 마셨을 때 내무장관 구 자춘이 박 정희에게 다가가서 작은 말로 보고를 했다. 순간 박정희의 얼굴이 검은 얼굴이 더 흙빛이 되었다. 만찬은 중단되었고 청와대 비서진과 관계기관 대책회의 참석자들이 박 정희 서재에 모였다. 정답은 이미 정해졌다. 부산에 계엄을 선포하기로 했다.
최 국무총리는 형식을 지키느라 밤 11시 30 분에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했다. 1979. 10.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의결했다.
그는 박 흥주를 대동하고 부산으로 잠행했다. 부산시의 데모는 인접 마산과 창원으로 퍼졌다. 10월 20일에는 마산과 창원에도 위수령이 발동했다. 서울에서 1 공수여단과 포항 1 해병사단에서 1 개 연대가 급하게 부산으로 이동했다. 계엄군이 각 대학을 대대 단위로 나누어 점령했다. 내가 부산 시민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박 흥주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기사가 어디로 모실까요? 하는 말에 흥주가 광복동으로 가자고 하니 거기는 데모가 심해 갈 수 없다고 했다. 박 흥주는 기사에게 가다가 막히면 거기서 내리더라도 데모 장소 가장 가까이 가주세요 했다. 택시 기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출발하자마자 계속 박 정희 욕을 했다.
― 손님, 박통이 요즘 미친 거 아닌 교? 부산 시민을 홍어 좆으로 보면 큰코다칠 거라 예, 우리 부산 시민이 투표로 뽑아 준 김영삼을 누구 맘대로 제명하는 교? 공화당 유정회 그 새끼들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선별수리가 뭡니까? 그렇게 박 정희 욕을 듣다 보니 택시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왔다. 시내 시민들은 데모하는 사람은 데모를 일반 시민은 데모대들에게 김밥과 빵과 우유를 전달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11일 남한산성이라는 은어로 불리는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OO 일보 만물상 코너에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그를 표현했다. 개도 주인을 물지 않거늘 박정희의 심복이 박정희를 시해한 것을 두고 그런 평을 했다.
그는 변호인들이 여러 명 나를 변호하겠다고 사설 변호인단을 구성한 것을 모두 물리치고 국선 변호인을 택했다. 유신시대에 대학생들은 데모하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 운동하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많은 변호를 해주었다.
만물상이 익명으로 기사를 쓴다고 그를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생각을 했다. 세월이 지나면 좀 나아질까? 비유하자면 쥐 100 마리 사는 동네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어서 쥐들이 고양이가 우리를 잡아먹는데 고양이 오는 것을 빨리 알 수 있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주자. 그러면 우리가 방울소리 듣고 발리 도망갈 수 있다고 했다. 모두 좋은 의견이라고 찬성을 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토의를 했다. 쥐들은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핑계를 댔다.
3700 만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유신헌법이라는 것이 국민들의 기본권을 많이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박정희 앞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부 아첨의 발언만 했다. 그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쥐의 심정으로 3700만 국민들의 제한된 기본권을 돌려주기 위해 총을 들었고 박정희를 쏘았다.
박정희 없애고 정권을 차지해서 그가 대통령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불교 <금강경>을 많이 읽었다.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이니라.(일체 현상의 모든 생멸법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 같고 번개 같으며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1980 년 5월 24 일 죽음을 맞이했다. 처음부터 죽음을 가고 하고 한 일이지만 죽음이 내일이라 생각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 50 년의 시간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갔다. 어린 시절 구미에서 지내던 일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에 차출된 일, 해방 후 국군 소위가 되었고 남들 중위로 진급할 때 파면당한 일 다시 복직되었다.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거 파면당해서 김천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를 할 때 안 선호가 그의 제자였다.
해병대 장교를 우수하게 근무했으나 해병대가 해군에 흡수 통합되면서 자리가 없어 안 선호는 전역을 했다. 전역해서 개인 사업을 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내가 공직으로 끌어들였다. 말이 공직이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하는 일이 박정희의 채홍사였으니 그는 여러 번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더욱 못한다. 그래도 박 선호는 그의 제자고 인간관계가 있어서 참고할 수 있는 동안 하라고 달래 온 것이다. 새벽에 교도들이 나를 불러냈다. 남한산성에서 호송차를 타고 서대문 구치소로 이감시켰다. 죄수번호 101이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때에 우리 독립 운동하는 분들이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당하던 곳에서 내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대법원 판결까지 3 심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한 번의 재판이 남아있다. 이것은 하늘이 하는 재판이다.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있으나 하늘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없다. 하늘의 심판인 제4 심 역사의 심판에서 2020 년 나는 승리한다. 그가 목적했던 민주회복이 그때는 완전하게 회복하고 국민들의 역사의식도 높아지고 역사가들이 그를 역사책에 의인으로 기록하자고 할 것이다. 그는 그날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군대서 3 군단장을 할 때 유신헌법이 공포되었다. 군단장 공관 철조망을 안에서 밖으로 도망갈 수 없게 거꾸로 설치했다. 연말에 대통령 박정희가 3군단에 위문을 오면 공관에 구금을 하고 대통령에서 하야할 것을 녹음기에 녹음을 해서 방송국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해 연말 박정희는 3군단 부대방문을 그냥 넘어갔다. 다음 전역을 해서 건설부장관이 되었다. 그때도 건설현장에 일대일로 만났을 때 저격을 하려 했으나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잡은 것이 궁정동 10.26 만찬이었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방문을 저격한 것과 내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은 같은 차원의 거사였다. 도마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가 15 가지였다.
안중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열다섯 가지 죄상을 말했다.
첫째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는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째는 을사 5 조약과 정미 7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째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째는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여섯째는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일곱째는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케 한 죄요.
여덟째는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아홉째는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째는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열한 번째는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열두 번째는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한 죄요.
열세 번째는 한국과 일본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살육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마치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는 천황을 기만한 죄요.
열네 번째는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요.
열다섯 번째는 일본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때문이다.
내가 박정희를 죽인 열다섯 개의 이유는
첫째는 구악을 일소한다고 신악을 만든 것이요.
둘째는 목포에서 김대중 당선을 막기 위한 부정 선거를 저지른 죄요.
셋째는 3 선 개헌을 한 죄요.
넷째는 유신헌법을 만든 죄요.
다섯째는 긴급조치를 발령한 죄요.
여섯째는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해 무고한 학생을 죽인 죄요.
일곱째는 김 신조를 핑계로 만든 설악산 부대와 실미도 부대원들의 어이없는 죽음과 은폐한 죄요.
여덟째는 월남파병 군인들에 대한 전투수당 절반을 갈취한 죄요.
아홉째는 국회를 유정회를 만들어 거수기로 만든 죄요.
열째는 200 명이 넘는 여자들을 강간한 죄요.
열한 번째는 부일장학회 영남대학교를 강탈해 정수장학회를 만든 죄요.
열두 번째는 민족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일협정에서 저자세로 체결한 죄요.
열세 번째는 대한민국 영토를 미군기지로 전락시킨 죄요.
열네 번째는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백 운택 손 영길 등을 시발로 하나회를 만들어 군대의 단결을 저해한 죄요.
열다섯 번째는 박 근혜와 최 태민의 나의 보고에 대해 친국이라고 3 자 대면을 시켜 나를 모욕을 주고 최 태민 박 근혜의 나쁜 짓을 계속하게 한 죄이다.
그는 1980년 5월 24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5월 20일에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바로 집행이 되었다. 너무 졸속으로 사형이 집행되어도 어느 누구 하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이미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을 세상 민심은 알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문보도를 통제해서 그런 기사가 나가지 않았지만 일본은 벌써 전두환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다고 기사화했다.
5월 24일 새벽 3시 암한산성 육군교도소를 출발한 차량이 새벽 4시 조금 넘어 서대문에 도착해대. 지하실 독방에 그를 이감시켰다. 그의 죄수 번호는 101번이었다. 아침 7시에 사형집행실로 이동했다. 집행관이 유언이 있느냐? 묻기에 전날 변호사에게 녹음으로 유언을 남겼다고 대답했다. 간단하게 한마디 남기라고 했다.
― 국민을 위해 할 일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 박 선호, 박 흥주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 대법원 판결까지 3심 재판을 받았습니다만 저에게는 아직 한 번의 재판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하는 재판입니다.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의 있지만 하늘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없습니다. 하늘의 심판인 역사의 4심에서는 저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내가 유신의 심장을 쏘아 무너뜨린 유신 위에 민주회복 국민혁명은 성공했기에 여러분들은 민주주의를 마음껏 향유하기 바랍니다.
― 저는 민주회복을 하고 갑니다. 자유는 하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유신이라는 괴물 헌법 아래 시름시름 병들고 말살되었습니다. 74년도 민청학련 사건 이후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일하다 소리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일하다 사라지는 마지막 사형수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 어느 누구도 자유가 흐르는 민주의 강물을 가록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의 강물이 민주의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대한민국이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자유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편안히 사십시오.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그의 이런 유언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속시킨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서서히 최규하 임시 대통령을 부담을 주었다. 중동으로 원유 도입선 확보 명목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해외 순방을 보내놓고 광주에 시민과 학생들 데모 진압에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은 소문이 소문을 낳고 유언비어가 되어 광주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5.17 계엄확대 전국으로 시행을 했다. 광주 5.18 진압은 1979년 부산 마산 사태에 전두환이 부산을 강경하게 신속 진압을 하지 못해 이웃 창원 마산까지 번졌다는 박정희의 논평을 반면교사로 삼아 전두환은 공수부대 2 개 여단을 투입하여 전광석화 같은 진압을 했다. 광주의 피를 먹고 제5 공화국이 탄생되었다. 1979 년 12.16일 장충체육관에서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은 1 년 이내에 민주적인 절차로 헌법을 새로 만들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출하는 것만 관리하고 물러나겠다고 했으나 그 1년의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1980년 8.15 광복절 기념식만 하고 하야를 천명했다. 민주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지도자를 뽑고 물러나겠다는 소박한 최규하 대통령의 꿈은 사라졌다. 다시 장충체육관에서 선거인단에 의한 체육관 대통령으로 전두환이 선출되었다.
전두환이 통치하는 제5 공화국은 유신시대 보다 좋다고 볼 수 없었다. 박정희 시대의 유신의 무겁고 우울한 공기가 서울 하늘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가장 눈물겨운 것은 박종철 군의 고문 사망사건이었다. 신문 만평에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한 줄의 만화가 많은 국민들 눈물을 흘리게 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질긴 것인데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인가? 죽을 만큼 고문을 했으니 종철이가 죽은 것이다.
그가 죽은 다음에 대통령이 된 전두화과 노태우는 잘 알고 있었다. 전두환은 축구부이고 노태우는 럭비부였다. 공부보다는 축구나 럭비를 잘하던 놈들이 대통령을 하니 나라꼴이 뭐가 되겠어. 문화를 개방한다는 명목으로 프로야구 도입하고, 각종 영화제 음악제 특히 대학생들을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느라 대학가요제를 장려했다.
국선 변호인 안 동일이 그를 접견 신청했다. 국선 변호인은 사회에서 잘 나가는 법무 법인에 가담 못한 변호사에게 개인 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할 형편이 못 되는 피고인을 위해 국가가 순번을 정해 무료 변론을 하는 제도였다. 피고인들은 국선 변호인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