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강민철
나의 아버지는 강민철이다. 지금까지는 독신으로 살았으며, 미얀마 아웅산 테러범으로만 알려졌다. 아버지 강민철이 이 세상의 평범한 남자들처럼 한 여인을 사랑했고,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아버지는 어머니 박은경 뱃속에 나의 씨앗을 심어 놓고 평양을 떠났다. 그때가 1983년 8월 여름이다.
1984년 7월 25일 나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작은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유복자였다. 어머니 박은경이 어린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이름도 어머니가 알려주어 아버지 본명이 강영철이었고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국가에서 여권을 만들기 위해 가짜로 지어준 이름이 강민철이었다.
아버지는 1983년 여름에 버마라는 나라에 전투원으로 떠났다. 아버지 일행은 아버지보다 군사칭호가 높은 진영관 소좌 동급인 신기철 대위였다. 북한에서는 남한이나 해외로 간첩이나 테러활동 나가는 인원을 ‘전투원’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자기보다 군사칭호가 높은 진영관 소좌와 의견이 충돌하자 자기 의견을 접었다. 작전은 보는 이에 따라 성공이라 할 수도 있고, 실패라 할 수도 있었다.
1980년 8월 3일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대통령 취임을 경축하는 기념 담배가 나왔다. 전 세계에서 대통령이 취임했다고 기존의 담배보다 질 좋은 담배가 출시되는 나라는 이 나라 남조선뿐이었다. 1980년 담배를 만드는 곳은 전매청이었다. 현재 담배인삼공사 전신이다. 전매청장은 함영서다. 그는 충북대학교 연초 제조학과를 1962년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전매청에 특채로 들어갔고, 연초 제조 분야 최고 권위를 가진 박사였다. 경축 담배 이름은 ‘솔’로 지었다. 물론 담배 이름 작명도 함영서가 했다. 솔의 담배 표지디자인은 정이품 소나무를 스케치한 작품이다. 소나무의 일편단심, 충성심을 상징하여 작명한 담배 ‘솔’이었다. ‘솔’ 좌우로 봉황무늬가 그려있다.
‘경축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이라고 글씨가 새겨있다. 거리는 정의 사회구현이라는 간판이 모든 관공서에 붙었다. 설악단’에서 특수 훈련을 받던 공작원 오수원이 탈영했다. 오수원은 솔담배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설악단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논산 훈련소나 사단의 신병교육대를 수료한 병사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모집된 군인이었다. 국군정보사령부에서 별도의 모병 담당관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운동신경이 민첩하고, 담력도 어느 정도 있고, 최악의 경우 고문을 당해도 쉽게 입을 열지 않을 사람을 물색하여 철저한 신원조회와 체력검정을 하여 합격한 인원만 설악단 요원이 될 수 있었다. 미국의 그린베레 부대와 유사한 부대였다.
오수원은 담배 한 모금 깊이 빨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북한군 병사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다. 한 명은 초소 안에 있고, 한 명은 초소 밖에서 좌우로 이동했다. 오수원은 겉옷만 입고 하얀 내의를 벗었다. 투항한다, 월북한다는 표시로 흰색 내의를 흔들었다. 초소 밖에서 서성이던 초병이 발견하고, 초소 안에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분대장 동무! 저기 웬 놈이 흰색 속옷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디?”
“독수리 바위를 봐요.”
“정말 저놈이 의거 월북을 한다. 확성기 가져오라.”
“예, 여기.”
“아, 아, 아 거기 하얀 내의를 흔드는 동무는 들어라.”
“의거 월북이면 내의를 왼손에 들고 흔들어보라?”
오수원은 내의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 잡고 흔들었다. 북한군 초소에서 간단한 최초 신문만 받고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월북 이유는 전두환 정권이 눈꼴이 사나워 의거 월북했다고 했다.
매일 9시 뉴스 땡! 하고 나면 TV 화면에 등장하는 대머리 전두환 대통령이 오수원은 너무 보기 싫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월 초의 부산 마산지역 데모 일명 부마사태를 수습한 방법을 차지철은 탱크로 밀어붙이겠다고 하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민심은 천심이다. 민심을 똑바로 파악하고, 우리 중앙정보부가 보고하는 정보 보고에 대하여 대통령 각하께서 관심을 가지고 통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말에 차지철이 끼어들어 각하! 까짓 거 탱크로 밀어붙이면 됩니다! 그 한마디에 분개한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차지철을 향해 이 버러지 같은 놈! 하면서 권총을 발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980년에는 서울의 봄이 오는 듯했다. 그러나 허수아비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0%라는 경이적인 득표로 전두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치적으로 약점이 큰 정권의 공통점은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국민 피부에 직접 느끼는 정책을 편다는 것이다. 물가를 인위적으로 통제하여 물가안정을 이루었다. 통행금지도 없앴다. 학생들의 교복도 자율화했다. 학생들의 머리카락도 자율화했다. 방송국에서는 컬러 방송 송출 시간을 연습했고, 프로 농구, 프로 야구를 출범시켰다. 이른바 3S로 불리는 스크린(영화), 스포츠, 섹스 산업에 국민의 눈을 잠시 정치에서 3S 쪽으로 돌리게 했다. 이민 갈 형편은 못되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홀가분하게 월북했다.
오수원의 월북으로 북한은 남한에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전두환 일당들이 정권을 잡는 일련의 사건 12. 12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사진을 합성하여 전단을 만들었다.
북서풍이 불 때 고무풍선에 매달아 띄워 보냈다. 오수원의 진술 중에 남한의 중요한 외교 기밀을 털어놓았다. 작은아버지 오현득이 외무부에 서기관으로 근무해 득문 사항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제3 세계 외교를 강화를 위해 인도와 버마를 방문할 것이라고 진술했다.
북한군 훈련소 중에서 전투원 양성소는 7 개 있다. 가장 고난도의 훈련을 하는 곳이 124 군부대다. 124 군부대는 1968년 김신조를 포함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던 부대로 유명했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내려온 31명 중 김신조는 생포되고 28명 사살되었으며, 북으로 2명이 도주 복귀했다. 도주한 두 사람은 박재경과 이상규다.
박재경은 현재 북한 노동당 서열 22위이고 대장으로 군사 복무하고 있다.
이상규는 그 후 다시 남파되었다가 부산 다대포에서 남한의 설악단 부대원 이기건, 이응일조에게 잡혔다. 이기건, 이응일은 탈영하여 월북한 오수원의 선배다. 붙잡힌 간첩이 이상규이고 그 당시 정보 사령관이 육군 소장 이상규였다. 이상규, 전충남 다대포 간첩을 생포하고 신문한 최초 신문 보고를 받은 정보 사령관 이상규 장군은 상규가 상규 부하에게 생포되었다고 했다. 124 군부대의 지휘관은 강창수다. 강창수는 김일성과 함께 6.25 전쟁에 참여했던 ‘강건’의 아들이다. 강창수 부대에서 진영관 소좌, 신기철 대위, 강민철 대위 3명이 버마 특수임무에 편성되었다. 이미 전투원으로 9년 이상 복무하였고 강화도 침투, 거문도 침투 등의 경험이 있었기에 긴장감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수영, 달리기, 외 줄타기, 두 줄타기, 세 줄타기 , 총 격술, 태권도, 유도 등의 체력훈련과, 폭발물 제조, 무전기 송수신 등의 무기와 통신 훈련도 하였다. 또한 정치사상 교육도 중요하게 이루어졌다.
이들 3명을 위한 정치사상 교양 강의는 구국의 소리 방송 원고를 집필하던 ‘윤노빈 박사’가 맡았다. 진영관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는 백발이 성성한 윤노빈 박사를 쳐다봤다. 윤노빈은 강의실 스크린에 흑백 사진 한 장을 비췄다. 이인모 노인이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늙었지만, 눈매가 부리부리했다. 한때 최장기 비전향 장기수로 한국 언론은 물론 세계 인권 기관에도 석방하라고 공개요청 한 인물이다. 윤노빈 박사의 정치사상 특강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특수임무 3명의 정치사상 교양을 맡은 윤노빈입니다. 전투원 여러분의 사상 무장이 투철하지만 그래도 다시 정치사상을 교양시키라는 김일성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 구국의 소리 방송 원고를 쓰다 말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전투원이 임무 수행을 하다 보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면 바로 복귀하면 되지만 실패할 경우가 문제입니다. 실패하면 가장 좋은 것은 동무들이 휴대하고 있는 자살용 독침으로 자살을 하거나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것입니다. 당에서는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적들에게 모든 무기를 빼앗기고 자살의 기회마저 박탈당하면 여기 사진의 이인모 영웅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인모 영웅은 남조선의 최장기 비전향 장기수입니다. 수령님께서는 이인모 노병에게 ‘영웅 칭호’를 하사하셨습니다. 또한 ‘불사조 이인모’라는 별명도 붙여주셨습니다. 수령님께서 남조선에 갈 수 없기에 이인모 아내와 자식들에게 영웅 칭호와 영웅 메달을 친히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불러 달아 주셨습니다. 전투원 세 동무는 이 윤노빈이 출신 성분이 좋아 보입니까?
네.
아닙니다.
저는 출신 성분이 나쁩니다. 본디 남조선 사람입니다. 남조선에서도 가장 남쪽 부산입니다. 부산에 있는 국립 부산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사람입니다. 철학을 가르치고 조용하게 살고자 했으나 남조선 정치가 놈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10. 26 전에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들이 데모한 것을 이 윤노빈이 뒤에서 사주했다고 뒤집어씌우고 교수 연구실을 압수수색 했습니다. 체포당한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 어시홍, 연선흠, 김태국, 김성태, 신명섭, 박영원, 신상균, 최성현, 김선미, 신난숙, 김선애, 김채란, 이시영, 서원석 등이 모두 ‘신성철학 연구회’ 소속이라는 이유로 이 윤노빈을 교수 연구실을 압수수색하고 나를 체포했습니다.
서울 서빙고 분실이라는 곳에서 이근안 고문 전문가를 만나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습니다. 더는 이놈의 나라에선 내가 더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없다 결론 내리고, 나의 또 다른 반쪽 조국 북한으로 의거 월북했습니다. 전두환 집권 초기라 나의 월북은 전두환 정권에게 타격을 줄 수 있기에 모두 언론 보도가 통제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조선에서 서울 다음 큰 도시 부산의 국립대 교수가 북으로 월북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놀랄 것이고, 월북 이유가 전두환이 싫어서라고 신문에 보도된다면 그야말로 수치 아니겠어요?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나의 월북을 알고서도 모른 척 일체의 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지요. 괜히 죄 없는 시인 김지하만 구속수감 되었지요.
김지하와 나는 강원도 원주 중학교 동문이라는 이유로 그의 시 ‘오적’을 금서로 만들고 구속했지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란 놈이 박정희 대통령의 가슴에 총을 쏘더니 남조선이 민주화되기 전에 전두환 일당이 12·12 거사를 ‘백일집 잔치’라는 암호명으로 반란을 일으켜 군부 통치의 시대를 만들어 남조선은 자유민주주의의 희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의거 월북했습니다. 나를 따라서 부산에서 대만으로 대만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평양으로 정말 어려운 장정을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선 내 아내 이병희는 입북 초기 사상 검증을 받다가 사망했습니다. 죽기 전 아내가 저승에 가서도 만나지 말자고 하더군요. 아내에게는 정말 미안합니다. 죽은 아내, 이병희에게 정말 나는 죄인입니다. 남조선의 전두환 대통령은 광주에서 민간인 대량 학살을 기반으로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에 남한 민중들의 저항감이 큽니다. 전투원 여러분이 전두환 대통령만 처단한다면 남조선에서 민중들의 열화 같은 환영 군중대회가 열릴 것입니다.
다음 화면을 봅시다. (1980년 5월, 광주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차별 매를 맞는 시민)
이 사진처럼 남조선은 매일 데모 없는 날이 없습니다. 그런 만큼 전두환 대통령의 통치자로 인기는 없습니다. 국내에서 인기가 없는 통치자들의 인기 만회 방법은 해외 순방입니다. 골치 아픈 국내 정치에서 잠깐 눈을 돌려 해외 정상들과 만나는 것이 뉴스에 보도되면 우매한 민중들은 그런 뉴스에 매혹되는 것입니다. 국민에게 인기는 없으나 9시 뉴스에 땡!
소리와 함께 첫 화면이 대머리 해골 같은 모습이 등장하고 그날 전두환 대통령이 어디를 방문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가 뉴스 첫머리를 장식하였다. 남조선 인민들은 9시 뉴스 시간에 일부러 오락 프로로 채널을 돌리는 민중들이 늘어났습니다.
다음 화면을 봅시다. (TV오락채널을 보고 있는 남조선 사람들)
얼마나 전두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대머리 얼굴이 보기 싫었으면 9시 TV 뉴스 시간에 아예 이런 오락 방송을 찾아가며 보겠습니까? 대통령 경호실장 장세동, 외무부 장관 이범석, 국가 안전 기획부장 노신영 등이 서남아시아 순방계획을 만들어 전두환 대통령의 인기를 높이기 위한 작전을 기획했습니다. 방문 국가는 버마, 인도, 호주, 뉴질랜드, 스리랑카, 브루나이 등입니다. 처음 계획은 인도, 호주, 뉴질랜드 3개국 순방이었으나 장세동 경호실장이 버마 사회주의 통치체제와 국가평의회 같은 기구는 남북이 대치한 우리가 본받을 점이 있다고 말해 전두환이 순방에 버마를 추가시켰습니다. 민주주의를 해도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식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전두환 대통령도 한국은 민주화되는 것을 국가가 방치하면 안 된다 생각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유신헌법을 반포하면서 국회의원의 1/3을 국민 투표가 아닌 지명에 의해 국회의원을 만들어 야당인 신민당은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유정회’라는 여당 2중대 국회의원까지 2 : 1의 힘겨운 싸움을 했다.
장세동 경호실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각하도 네 윈 통치 스타일을 배우실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버마는 영국식민지였다. 한국이 일본제국주의 통치하에서 해방된 1948년 영국으로부터 버마가 독립했다. 네 윈은 점성술을 철저히 믿었다. 버마공화국으로 새 출발 선언을 한 것은 1948년 1월 4일 새벽 4시 20분이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가 독립 선포에 일정을 정했으면 9시, 10시에 공식 행사를 하면 되는 것을 새벽 4시 20분 기상천외한 시간에 독립 선포 행사를 한 것을 보면 정말 점성술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독립 초기에 공산당의 무장봉기와 군대의 반란 소수 민족의 자치권 요구 데모가 많았다. 우누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었을 때 네 윈이 1962년 3월 2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네윈 통치 시대가 열렸다. 군사 쿠데타 직후 네 윈은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16명의 고위 간부로 구성된 혁명평의회를 구성하여 전권을 행사했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최규하 대통령 시절에 군대의 장군들을 뽑아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상임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네 윈의 혁명평의회와 유사했다.
네 윈은 집권 초기에 군을 동원해서 사회 전체를 장악했다. 상명하복에 길들여진 군인들을 중앙 및 지방의 행정기관에 배치했다. 국영기업체에도 퇴역 군인들을 전진 배치했다. 집권당인 사회주의 계획당도 군인 출신이 절반 이상 차지했다. 사회주의 계획당은 국민을 조직화하여 네 윈의 26 년간 권력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네 윈이 1980 년에 대통령직을 내놓고 국가평의회 의장직만 유지해도 버마는 네 윈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았다. 남조선의 전두환의 추종자들이 몇 년 후 전두환이 대통령직을 내놓아도 버마의 네 윈처럼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고, 그런 대비를 이번 버마 방문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다.
여기 모인 3명의 전투원 동무들은 남조선 전두환 일당이 버마에 도착했을 때 일순간에 처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버마를 거쳐 인도에 방문하고 인도와 남조선이 가깝게 되는 날엔 우리 북조선은 비동맹 국가의 외교에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인도는 비동맹 제3세계의 리더 국가입니다. 따라서 이번 동무들의 버마에서 임무 수행은 북조선 외교가 지속 성공하느냐 남조선에 밀리느냐의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꼭 성공하고 모두 영웅 칭호를 받기를 바라며 오늘 사상 교육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3명의 특수임무 전투원은 윤노빈 박사의 열강에 손뼉 쳤다.
1983년 9월 30일 이범석 외무부 장관이 뉴욕에 왔다.
9월 1일 KAL 007편이 소련의 미사일 공격에 의해 사할린 섬 상공에서 격추되었다. 승무원과 승객 269명을 태운 민간 항공기가 피격되어 태평양에 수장되었다. 소련의 영공을 침범한 것은 사실이나 민간 항공기임을 알면서도 격추한 것에 전 세계가 소련의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규탄했다. 한국 유엔 대표부 공무원들은 UN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에서 소련을 규탄하고 한국의 지지를 호소하느라 밤낮없이 일했다. 그런 직원을 격려하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금일봉을 받아 한국에서 뉴욕으로 출국했다. 한국은 국민들이 총궐기 규탄대회를 하였지만 소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유는 분명히 영공 침해였기에 자국 방어 목적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했다. 한편 출처 불명의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미국 CIA가 첩보 수집 센서를 새로 개발했는데, 소련의 탐지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몰래 한국 민항기에 앞바퀴 접는 부위에 부착시켰고, 비행 프로그램을 조작해 민항기 항로를 약간 이탈시켰는데 소련의 K.G.B가 그 첩보를 소련으로 먼저 타전해서 대한항공 007기 격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만약에 미국이 KAL 007기 격추에 대해 비난할 경우 소련은 공개하면 미국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비밀문서를 입수한 상태였다. 결국 힘없는 한국의 KAL 007기 승객만 영문도 모르고 태평양에 수장되었다. 이성기 뉴욕 총영사 허남태 참사와 한국 대사관, 영사관 주요 직원들 그리고 국가 안전기획부 뉴욕 파견관 서광선 서기관 등이 회식에 참석했다. 술이라는 것이 처음에 한잔으로 시작하지만 한 잔이 두 잔 석 잔 늘어나고 폭탄주를 돌리고 나면 취기에 평소 체면 때문에 하지 못했던 말도 나오는 것이다.
술 취한 이범석 외무부 장관이 한마디 내뱉었다.
“경호실장, 그 개새끼 때문에 내가 버마까지 간다.”
“원래 이번 외교 순방계획을 내가 계획 건의한 것은 인도, 호주, 뉴질랜드 3 개국이야. 그런데, 육사 나온 개새끼들이 끼어들어 버마, 스리랑카, 브루나이까지 이거 뭐 외교관계도 불분명한 나라까지 다 넣고, 이게 외교야? 보석 밀수나 쇼핑 관광이야?”
“장관님, 취하셨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외교부에서 이범석 장관을 수행하던 강철구 서기관이 부축해 회식 장소를 빠져나왔다.
1983년 여름, 7월 마지막 주였다. 진영관 소좌와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일행은 1 주일의 휴가를 얻어 개성 강창수 부대를 떠나 휴가를 즐겼다.
강민철 대위는 강원도 통천이 집이다. 통천 고향에서는 하룻밤만을 보내고 평양으로 갔다. 강민철은 평양 지하철 승리역에 내렸다. 인민대학습당이 보였다. 청기와지붕 처마 밑 전자 벽시계가 오후 6시를 보여주고 있었다. 약속 시간 30분 전이다. 김형직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나오고 동평양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교원 박은경을 만나기로 했다. 검은색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곱게 입은 은경이 계단을 또박또박 걸어 올라왔다. 민철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박은경과 강민철은 통천에서 인민학교를 함께 다녔다. 그러다 인민학교 4학년이 되자 은경이 평양으로 이사했다. 이사 후로는 민철은 은경이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중학교 때, 은경이가 동해안으로 수학여행을 왔다.
수학여행지 통천 총석정에서 은경과 민철은 인민학교 때 헤어지고 4 년 만에 만났다.
그 인연으로 은경과 민철은 연애했다. 편지를 주고받았다. 은경은 김형직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마치고 동평양 중학교 수학 교원이 되었고, 민철은 해외 특수임무 수행 전투원이 되었다.
“은경 동무!”
“민철 동무!”
둘은 만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옹했다. 인적이 드문 대동강으로 걸어갔다.
버드나무 길게 늘어진 아래 벤치가 있었다. 벤치에서 부둥켜안고 키스를 했다. 은경이 잠시 입을 떼고 민철을 바라보았다. 민철의 맑은 눈동자 속으로 희수가 빨려 들었다. 둘은 벤치에서 내려와 풀밭에 누웠다. 은경의 무릎을 베고 민철이 누웠다. 민철의 팔은 은경 허리를 감았다. 은경이 고개를 숙여 민철의 입에 키스했다. 민철의 손은 은경의 귀를 만지고 이어 목덜미를 만졌다.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젖혔다. 젖가슴은 터지기 직전 풍선처럼 탱탱했다. 우리 언제까지 연애만 할 거야? 은경이가 손으로 자신의 젖꼭지를 민철의 입에 물려주며 말했다. 민철은 은경의 젖꼭지를 아프지 않게 입술로 지그시 깨물었다.
민철은 꼬마 시절 엄마의 젖을 빠는 아기처럼 오물오물 빨았다. 민철이 젖을 빨 때,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이 순간 그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 해외 임무 수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통천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자. 우리 결혼하겠다고 하면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모두 좋아할 거야. 은경이가 동평양 중학교 수학 교원이라고 하면 더 좋아하실 거야.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사범대학에 보내 교원을 하라고 어려서부터 늘 말씀하셨는데, 내가 군대 가서 이렇게 전투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어. 나 자신도 성격이 조용하게 혼자 사색하거나 책 보는 것이 좋지 육체적으로 활동이 많은 군인은 내 체질이 아니거든.
그럼, 오늘 밤은 우리 집에 가서 내 부모님께 민철 동무와 결혼하겠다고 말하고 승낙받자? 그래, 그렇게 자자. 은경 동무!
민철과 은경은 외화상점에 들러 약간의 고기와 맥주, 소주를 샀다. 보통강구역에 있는 은경 아파트로 갔다. 박은경의 아버지 박철수는 평양 지하철 기관사이다. 어머니 배순선은 동평양 백화점의 계산원이다. 은경의 형제는 딸만 셋이다. 은경이가 막내다. 큰 언니 은정은 청진으로 시집을 갔고, 작은 언니 은영은 군대 복무 중이다. 4군단 고사포 부대에 근무한다. 은경의 아파트는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4층에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말하던 강민철 동무야.”
“민철 동무,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 어서 인사드려?”
“처음 인사드립니다. 강민철입니다.”
“오느라 수고 많았소.”
“여보, 뭐 하고 있어. 손님 왔는데 술상 봐야지?”
“예, 준비하지요?”
은경 어머니와 은경은 주방에서 술상을 준비했다. 은경 아버지와 민철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강 동무는 올해 나이가 몇인가?”
“예, 스물여섯입니다.”
“군인이라 들었는데, 군사칭호는?”
“대위입니다.”
“스물여섯에 대위면 빨리 진급했는데?”
“아닙니다. 저보다 빠른 동기들도 많이 있고, 저는 중간입니다.”
“고향은 어딘가?”
“예, 강원도 통천입니다.”
“음, 통천이라. 참 좋은 곳이지.”
“예, 물 맑고 경치 좋고 바닷가라 수산물이 풍부합니다.”
“대위에서 소좌는 언제 되는가?”
“예, 이번 해외 작전만 잘 마치고 돌아오면 내년에 승진되리라 봅니다.”
대화 중에 술상이 들어왔다.
“한잔 올리겠습니다.”
“그래, 한 잔 하세. 자네도 한 잔 받게.”
“아바이 동무는 약주 잘하십니까?”
“많이는 못하고 소주 한 병이 딱 좋지.”
“예, 저도 한 병이면 족합니다.”
이때 은경 어머니가 뭐 남자들만 기분 내기야, 우리도 한잔하자며 맥주 한 잔씩을 따랐다.
은경 부모님과 은경, 민철 4명이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쳤다. 아버지가 건배 제의를 했다.
“우리 막내딸 은경과 새로 맞이한 아들 민철 동무를 위해 건배합시다.”
“위하여!”
“위하여!”
“위대하신 수령님과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건승을 위해 다시 한번 건배합시다.”
“위하여!”
“위하여!”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은경 어머니가 민철에게 물었다.
“은경에게 들으니 군사칭호가 대위라는데, 한 달 노임이 얼마나 되나요?”
“예, 그건 군사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고, 일반 노동자나 사회 직장인의 노임의 서너 배는 됩니다. 차관 정도 대우를 받는 것이 전투원입니다. 어머니, 딸 걱정 마십시오?”
그럼, 딸 셋 중에 우리 은경이가 나중에 제일 호강하겠네, 신랑 잘 만나서 노임 많이 받아 호의호식하겠네 하면서 어머니는 은경을 보았다. 은경의 볼이 약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쑥스러워 은경은 주방으로 가서 아버지와 민철을 위해 안주를 더 가져왔다. 안주 더 가져왔으니, 아버지, 민철 동무 더 드세요. 그날 밤은 그렇게 보통강구역 4층 은경의 아파트에 행복한 웃음꽃이 피었다.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막내딸 시집갈 때 주려고 준비한 솜이불이 은경이 방에 펼쳤다. 한 땀 한 땀 은경의 어머님이 바느질한 이불이다. 여기가 오늘 밤 민철과 은경이 첫 경험 자리다. 민철은 은경이 하얀 잠옷 그 상태로 들어 올렸다. 작은 방을 한 바퀴 돌았다. 은경은 민철이 빙빙 돌 때, 민철의 목을 꼭 껴안았다. 민철은 이불 위에 은경을 눕혔다. 집에 오기 전에 대동강 강변에서 은경이가 오른쪽 젖꼭지를 물렸기 때문에 집에서는 민철이 왼쪽 젖꼭지에 입술을 댔다. 은경의 가슴은 콩닥콩닥, 쿵- 쿵! 뛰었다. 이미 젖가슴은 부풀 대로 부풀었다. 은경과 민철의 몸이 하나가 되었다.
한참 격정적인 사랑의 행위를 하고 난 후 민철이 은경의 귓불에 키스했다. 은경도 민철의 입술 목을 빨았다. 은경이 이번에는 민철을 아래 눕히고 여성 상위 체위를 하였다.
민철이 위에서 할 때와 색다른 감흥이 왔다. 은경은 이 상태를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은경의 몸 아래 깊은 곳에서 파르르 떨림이 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짜릿했다. 다음 날 아침 은경이가 민철을 흔들었다. 민철 동무, 내 귀걸이가 한 짝이 없어. 뭐야? 민철은 귀걸이가 발이 있어 달아나고, 날개가 있어 날아가겠어? 방에 있겠지 하며, 은경을 방 한쪽 구석에 서게 하고, 이불을 들어 한쪽을 높이 들었다. 베개도 흔들어봤다. 베개에서 귀걸이 한쪽이 부러진 채로 방바닥에 떨어졌다. 오각 별 모양에 오각 별 뾰족한 끝부분에 투명한 보석이 박힌 귀걸이다. 민철은 부러진 오각 별 귀걸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민철 동무, 귀걸이 주세요. 구입한 상점에 가서 붙여달라고 해서 쓰겠어요. 아니, 내가 해외 갔다 귀국할 때, 더 좋은 귀걸이 선물할 게 이건 나를 줘. 그 부러진 귀걸이 어디다 써요? 이건 내 부적이야. 교회 다니는 사람은 십자가를 믿고, 천주교 신자 묵주로 기도하고, 불교 신자 천수경 외우듯 나는 이 ‘오각 별 귀걸이 ’ 한쪽이 나를 어떤 위험에서도 지켜주는 부적으로 믿을 것이오. 내 아무리 위험한 일이 닥쳐도 이 귀걸이를 부적 삼아 살아서 돌아올 것이니, 꼭 기다려주기 바라오. 민철의 말은 비장했다. 일주일의 휴가는 꿈결처럼 흘러갔다. 진영관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는 강창수 부대로 복귀했다. 계획된 훈련 시간표대로 태권도, 총검술, 폭발물 조립, 설치, 해제, 수류탄 투척, 독침 주사, 무전기 송수신, 난수표 조립 및 해역 등의 훈련이 반복되었다.
1983년 10월 8일, 서울 김포공항
2개월 합창 연습을 한 동구 여자고등학교의 합창단이 부르는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이 시작되었다. 김포공항에서 출국 행사가 있었다. 거리에는 태극기와 방문 국가인 버마, 인도, 스리랑카, 뉴질랜드, 호주, 브루나이 국기를 흔들며 시민과 학생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전두환 이순자 대통령 내외를 수행하는 공식 수행원만 22명이었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청와대 경호실 경호원, 청와대 출입 기자, 정주영 경제인 대표 20여 명이 별도의 민간 협력기구를 구성해 동행하였다. 특별기 보잉 747기가 꽉 찼다. 길거리 인파들 사이에 ‘4천만이 뭉친 국력 서남아로, 대양주로’ 등의 현수막 피켓이 거리에 출렁거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고 한국 영공을 완전히 빠져나가자 기내 집무실로 이기백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불렀다.
국방부 장관은 국가 원수가 나라를 떠나 있는 동안에 국방에 대한 최고 책임자로 국무총리를 보좌하기 위해 국내에 있고 대신 국방 분야의 수행자는 이기백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하게 되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음, 앉아.”
“예.”
“버마의 군사정책과 군사 기구는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청와대서 보고 받은 자료를 두고 왔으니, 내가 참고할 사항을 다시 만들어 보고해.”
“예, 각하께서 참고할 사항이 이미 제가 준비한 서류 짐에서 꺼내기만 하면 됩니다. 버마 도착 즉시 드리겠습니다.”
“그래, 숙소로 꼭 가져와.”
“예, 각하!”
김포공항을 이륙 후 8시간을 비행한 보잉 747 특별기는 10월 8일 버마 시간으로 오후 4시 30분에 랑군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이계철 주 버마 대사와 버마 정부 외무부 의전 담당 최고 책임자가 영접했다. 21발의 예포가 터졌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 ‘우산유’ 대통령과 역사적인 한국 버마 정상 간의 만남이다. 공항에서 환영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시민과 학생들은 태극기와 버마 국기를 흔들며 랑군 공항에서 영빈관까지 가는 도로 양옆을 가득 채웠다. 대통령과 경호원, 통역요원,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의 직접적인 비서들은 영빈관을 숙소로 사용했고, 나머지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기타 수행원들은 ‘인야레이크(Inya Lake) 호텔’이 숙소로 배정되었다. 인야 레이크 호텔’은 랑군 시내 중심에서 20분 거리에 공항과 시내의 중간이었다. 호텔 정면에 인야 호수가 보였다.
1983년 9월 7일, 북한 개성
지금은 거대한 개성공단 조성으로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개성공단 제1 블록 서쪽 끝은 124 군부대 자리다. 124 군부대에 번호판 평양 216 벤츠 차량이 도착했다. 검은색 안경 쓴 김정일 지도자 동지와 대남 담당 비서 허담이 함께 왔다. 부대장 강창수가 현관에서 김정일을 영접했다.
“충성!”
“그래, 강창수 잘 있나?”
“지도자 동지의 염려 덕에 잘 있습니다.”
미리 보고 받아 김정일은 진영관, 신기철, 강민철에 대한 신상과 훈련 정도를 알고 있었다.
“팀장이 진영관 소좌라고?”
“예, 그렇습니다, 지도자 동지?”
“진영관은 영리하고, 신기철은 무쇠팔 무쇠다리야?”
“예, 그렇습니다.”
“강민철은 어떤가?”
“사실, 강민철 그놈이 셋 중에 제일 처집니다.”
“처지는 놈을 전투원으로 그것도 당야 침투가 아닌 해외 공작에 보내?”
“그래도, 강창수 부대원 400 명 중에 추리고 추린 인원 3 명이라 문제없습니다.”
“부대장은 강민철이 처진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강민철 그놈 대위지만 장군 이상으로 생각이 깊은 놈이더군?”
“아니 지도자 동지께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여기서 올라온 훈련 소감문 하나하나 다 읽어 봤는데, 강민철 그놈 소감문에 영혼이 살아 있어. 자기가 이 훈련을 왜 하는지, 이 훈련을 했지만 적에게 잡히면 다른 방도가 없나를 걱정하며 소감문 쓴 것에 평양에 있는 내가 읽어도 개성 강창수 부대 위에서 내려 보듯이 썼더군!”
“예에?”
“놀라긴, 이 사람 자기 부하 전투원 훈련 소감 건성으로 읽고 나에게 보낸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소감문을 읽고 거기까지 느끼는 지도자 동지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십니다.”
“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신은 없다. 오직 수령님만 신 같은 분이시지?”
강창수 부대 지하 식당에 김정일 지도자 동지, 수행 대남 비서 허담, 강창수 부대장, 진영관 소좌, 신기철 대위, 강민철 대위 등 6명이 원탁 식탁에 마주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식사에 앞서 지금부터 남조선 전두환 대통령 제거 작전에 투입할 전투원의 파견 신고식을 하겠습니다.
신고자 진영관, 신기철, 강민철 모두 앞으로 나오기 바랍니다.
차렷, 지도자 동지께 경례!
충성!
충성!
바로.
신고합니다!
강창수 부대 소좌 진영관!
동 대위 신기철!
동 대위 강민철!
이상 3 명은 1983년 9월 7일 부로 남조선 전두환 대통령 제거 임무 수행을 위해 버마 파견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충성!
지도자 동지께서 임명장과 지도자 동지 서명이 들어있는 로렉스 금장시계를 하사하시겠습니다.
(임명장)
소 속 : 강창수 부대
군사칭호 : 소좌
군사번호 : 82-0172737
성 명 : 진영관
위 사람을 남조선 미제국주의자 앞잡이 전두환 대통령 제거를 위한 특수임무에 임명함.
1983년 9월 7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김 정 일
(다음) 신기철 이하 내용은 같습니다.
(다음) 강민철 이하 내용은 같습니다.
다음은 임무 수행자의 선서가 있겠습니다. 선서의 선창은 진영관 소좌가 하고 두 대위는 복창을 하겠습니다.
선서!
선서!
우리는!
우리는!
총 폭탄 정신으로 무장하여!
총 폭탄 정신으로 무장하여!
남조선 대머리 전두환 대통령을!
남조선 대머리 전두환 대통령을!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처단한다!
우리는 점을 찾아 선을 이어!
우리는 점을 찾아 선을 이어!
조국통일 제단에!
조국통일 제단에!
전두환 목을 따고!
전두환 목을 따고!
통일 성업에!
통일 성업에!
이 한 몸 바친다!
이 한 몸 바친다!
우리의 성공은 수령님께 영광을!
우리의 성공은 수령님께 영광을!
실패하면 자폭한다!
실패하면 자폭한다!
총 폭탄 정신으로 무장하여!
총 폭탄 정신으로 무장하여!
자폭한다!
자폭한다!
선서를 마치고 모두 타원형 식탁에 마주 앉았다. 선서하는 동안에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준비되었다. 술도 양주, 소주, 맥주, 고량주, 보드카 등 다양하게 준비되었다.
술을 한잔씩 따르자 김정일 지도자 동지가 건배를 제의했다. 우리 모두 잔을 들고 건배합시다. 진영관, 신기철, 강민철 동지들의 작전 성공을 위하여 건배!
건배! 위하여!
위하여! 오늘 이 자리는 3 명의 전투원을 위한 자리니 마음껏 마시고 밖에 준비된 차량으로 여자 3 명 별도로 모셔왔으니 3 명의 전투원이 일대일로 짝이 되어 이 밤을 보내기 바랍니다. 인민군 합주단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도 불렀다. 여자 3명 중 첫째 여자는 리명주였다. 진영관 소좌의 짝이 되었다. 리명주는 ‘리설주’의 4 촌 언니다. 리명주는 김일성의 손자 김정의 부인이다. 둘째 여자는 허영숙은 신기철 대위 짝이 되었다. 셋째 여자 윤영미는 강민철의 짝이 되었다. 어느 정도 여흥이 지나고 김정일, 허담, 강창수는 자리를 떠났다. 3 명의 전투원은 각자 자기 짝과 함께 준비된 차를 타고 서해안 비밀 초대소로 향했다. 강민철은 윤영미의 부축을 받으며 초대소 203호에 들어갔다. 윤영미가 먼저 샤워를 했다. 민철도 뒤따라 샤워를 했다. 윤영미는 이미 알몸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민철은 은경 얼굴이 떠올랐다. 윤영미 얼굴 위에 은경 얼굴이 겹쳐 보였다. 민철은 영미에게 말했다.
이봐요, 여성 동무! 말씀하세요. 내가 오늘 꼭 영미 동무와 잠자리해야 해?
기럼요. 왜? 당의 지시입니다. 우리는 이미 교육 다 받고 모실 준비하고 왔어요. 민철 동무는 이 윤영미 미모가 맘에 안 들어요? 아, 아닙니다. 윤영미 동무 참으로 곱습니다. 그럼, 빨리 나를 안아줘요. 민철이 머뭇거리자 영미가 민철을 안고 누웠다. 영미의 손이 민철의 가운데 중요한 곳으로 간다. 살살 만지자 민철의 그곳이 단단해졌다. 단단해진 그곳을 영미가 입으로 빨았다. 민철이 참을 수 없어 빳빳한 무기로 영미의 방어선을 뚫었다.
영미는 묘한 신음 소리 냈다. 둘의 몸은 칡넝쿨처럼 엉켰다.
1983년 9월 9일, 황해도 옹진항
화물선 동건애국호(東建愛國號)는 재일교포 기업인 조선화보 사장 문동건(文東建)이 일본서 구입해 북한에 기증한 것이다. 배 이름을 김일성 수령이 문동건의 ‘동건’을 따와 ‘동건 애국호’로 명명하였다. 평양의 제일 큰 해운회사 대성 해운 총국 소속이었다. 문동건은 이 배를 기증한 공로가 인정되어 김일성 훈장을 받았으며, 금수산 기념궁전의 만찬에도 서너 차례 초청받았다. 동건애국호의 선원은 선장 이 세월을 포함하여 39명이었다.
이 세월 선장은 해주 선원학교를 1963년 수석으로 졸업한 베테랑 선장이다. 이상일이 기관장이고 갑판장은 주준호였다. 39명의 공식 선원 외에 3명 전투원이 몰래 탔다. 진영관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였다. 3 명은 동건애국호의 기관의 열을 식히기 위해 만든 방열판 반대쪽에 허름한 상자를 쌓고 그 뒤에 숨어 지냈다. 정치사상 교육에서 윤노빈 박사가 말한 대로 미제국주의자들의 꼭두각시 우두머리를 제거하면 남조선 인민들의 대대적인 환영 군중대회가 열릴 것이라는 확신에 찼다. 6일간의 항해 끝에 동건 애국호는 9월 15일 새벽 4시 30분 랑군항 입구에 도착했다. 동건 애국호가 버마 당국에 제출한 입항 목적은 건설 자재 운반이었다. 부두에 정박하면서 건설 자재 하역하는 것을 경찰관과 세관 직원이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화물하역에 신경을 쓰느라 3명의 전투원이 소형 보트로 떠나는 것은 아무런 조사나 여권 확인 없이 떠났다. 3 인의 전투원은 북한 대사관에서 나온 황영주 참사의 안내를 받아 랑군 항에서 북한 대사관 참사관 이환귀 집으로 안내되었다. 3인의 전투원은 외교단지 내의 북한 참사관 숙소에서 평양으로부터 단파 방송으로 송수신되는 지령에 따라 행동했다. 동건 애국호가 랑군 항에 입항한 것을 국가안전기획부 랑군 파견관 박광선 서기관이 서울 국가 안전기획부 본부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본부에서는 해외공작 국장 김운백 국장이 노신영 안기부장에게 북한 공작선이 버마에 드나드는 만큼 정상외교 노선을 바꾸거나 미얀마에 순방한다면 실내 행사만 참석하고, 옥외 행사는 금할 것을 건의했다.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청와대에 박광선이 랑군에서 보고한 원문에 충실한 보고가 아닌 완곡한 표현으로 보고했다.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은 경호실장 장세동에게 버마에서 이런 보고가 왔는데, 각하께 사실대로 보고할 수 없어 고민이라고 말하자 장세동 경호실장도 그럼요, 각하가 버마 방문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데, 재 뿌리는 보고해서 뭣 하겠어요 했다.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버마에 북한 공작선 동건 애국호가 들어왔다가 출항했다. 출입 목적은 건설 자재 운반이었고, 대공 업무상 특이한 점 발견 못 했다고 보고했다.
1983년 10월 7일 새벽 2시, 강민철 일행은 준비한 폭발물을 휴대하고 아웅산 묘역에 도착했다. 천장이 높았다. 관리사무소장에게 빌린 사다리를 타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폭발물은 3개를 설치했다. 제1 폭탄은 원격 무선 조종으로 즉시 터지는 순간 신관으로 장약에 불이 붙고 터지면 폭발력에 의해 크레모아 철심과 쇠구슬이 터지게 설치했다. 제2 폭탄은 제1 폭탄이 터져 진동이나 후폭풍과 열이 발생하면 그 열을 감지해서 터지는 지연신관으로 설치했다. 내용물은 T.N.T 와 콤포지션 혼합물이었다. 제3 폭탄은 모든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화재를 발생하는 소이탄으로 설치했다. 새벽 작업으로 잠을 설친 3명의 전투원은 10월 7 일 오후는 내내 낮잠을 잤다. 10월 8일은 테러 마지막 준비로 지형정찰과 자신들이 설치한 폭발물이 버마 경찰이나 군인 혹은 한국에서 온 경호원들에 의해 발각되지 않겠는가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숙소를 나왔다. 복장은 진영관 소좌는 버마 전통 복장 론지를 입었고, 강민철 대위나 신기철 대위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다. 아웅산 묘소 주변을 한 바퀴 돌아봤다. 묘소 관리인이나 관광객들 모두 평온한 상태였다. 안심이 되었다. 이상 없음을 확인한 3명은 버마 랑군 시내 쇼핑을 했다. 원래 전투원들은 임무 수행 후 복귀하는 시간이 촉박해 중량이 나가거나 부피가 큰 선물은 구입하지 않는다. 민철은 은경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날 은경 집에서 은경이와 사랑을 나누다 한쪽을 부러뜨린 ‘오각 별 귀걸이’ 생각이 났다. 오각 별 모양의 귀걸이가 다행히 랑군 시내 기념품 판매점에 있었다. 오각 별에 뾰족한 각 끝에 투명한 모조 보석이 다이아몬드처럼 박혔다. 민철은 귀걸이 3세트를 구입했다. 진영관 소좌가 물었다. 애인에게 주려면 하나면 되지 왜 3개씩 사느냐 물었더니, 하나는 평양에 있는 은경에게 줄 것이고 2개는 고향 통천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 미정에게 줄 것이라고 했다. 진영관 소좌는 아내에게 주려고 쌍가락지를 하나 샀다. 신기철 대위는 아내가 지갑을 꼭 사 오라고 했다고 가죽지갑 빨간색 롱 지갑과 반지갑 2개를 구입했다. 자신들의 임무 수행을 위한 폭발물도 이상이 없고, 선물 쇼핑도 잘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외교단지 내 숙소로 돌아왔다.
1983 년 10월 8일, 버마 랑군
쌀쌀했던 서울의 날씨와 달리 버마는 33도의 날씨에 습도 90%였다. 한국의 한여름 후덥지근한 날씨와 비슷했다. 습도가 높아 끈적거렸다. 하늘에서 내려 본 버마의 국토는 아름다웠다. 푸른 숲이 넓게 펼쳐지고, 평야지대의 농토 사이로 농로길이 가로 세로 쭉 나 있었다. 공항에서의 의전행사를 마치고 전두환 대통령 일행은 영빈관 인야 레이크 호텔로 향했다. 1983년 10월 9일, 아버지 강민철에게 운명의 날이 밝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모든 것이 일치하였으나 무선 원격조종장치를 어디서 버튼을 누를 것인가가 문제였다. 아버지 강민철은 전두환 일당이 정확히 도열한 것을 보고 격발 할 수 있는 슈웨다곤 탑 위에 올라가 한 명이 망을 보고 신호를 하면 아래서 격발을 하자고 했다. 탑 위에 올라가는 것은 강민철 자기가 올라가고 격발장치를 누르는 것은 리더인 진영관 소좌가 하라고 했다. 신기철 대위는 만약을 대비해 자기를 근거리서 엄호 조준하고 있다가 위험한 순간이 되면 사격을 해달라고 했다.
진영관 소좌는 다른 생각이었다. 슈웨다곤 탑은 관광객이 너무 많아 보는 눈이 많아서 안 된다. 그냥 아웅산 묘소 1 킬로미터 전방 도로에서 방문단의 차가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행사하면 군악대 연주가 시작된다. 그때 누르면 이상 없다고 했다.
강민철은 어차피 계급도 진 소좌가 위고, 성공하던 실패를 하던 제일 책임이 무거운 사람이 진영관 소좌라 생각하고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나중에 내가 진급해 소좌가 된다면 나는 부하 전투원의 말이 더 현지 상황에 맞으면 부하의 말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진영관 소좌는 강민철과의 의견대립을 찜찜해했으나 자기 생각대로 거사가 진행되면 평양에 보고할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자기의 기묘하고 영활한 작전이고 김일성 훈장이 수여될 것이다. 민철은 가슴 주머니에 넣은 수첩을 꺼내 은경의 망가진 한쪽 ‘오각별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위험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이 오각별 귀걸이가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10월 9일 아침 공식 수행원들은 10시를 전후해서 숙소 호텔을 출발해 행사장인 아웅산 묘소로 향했다. 버마 정부가 외교 접대용으로 제공한 벤츠 차량과 미니버스로 떠났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공직 사회는 어디서나 행사에 의전 서열이 있다. 대통령을 기준으로 좌우, 좌우 반복하면서 대통령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서열이 높고 먼 곳일수록 서열과 직급이 낮은 것이다. 서석준 부총리가 직급이 대통령 다음으로 높아 행사장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 자리를 표시한 삼각형을 기준으로 우측 중앙 앞에 서있었다. 아웅산 묘지에 공식 수행원들이 도열한 상태에서 검은색 벤츠에 태극기를 달고 앞뒤로 선도 에스코트와 후미 후방 감시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이계철 버마 대사가 도착했다. 대사는 내리자마자 서석준 부총리를 향해 각하께서 곧 도착한다 했다. 수행원들은 자신들의 복장을 다시 가다듬었다.
자신의 위치가 의전서열에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그때 정열한 군악대의 대열 속에서 진혼곡의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이 들렸다.
-빰-빠바- 빰 빠바-
진혼나팔 소리가 나고 2-3분 후에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진영관 소좌는 나팔 소리가 난 후 시계를 봤다. 정확히 120초 지난 후에 스위치를 꾹 눌렀다. 탁 소리와 함께 쾅! 굉음이 터졌다. 번뜩이는 섬광이 지나가더니 천둥 같은 소리가 나며 아웅산 묘소 천정이 무너졌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통령을 기다리던 수행원들이 무너진 건물 아래 깔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줘! 비명을 질렀다. 서석준 부총리와 도열해 있던 대부분의 수행원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순간 묘지는 캄캄한 암흑이 되었다. 무너진 지붕에 깔린 사람, 폭발물 파편 철심에 맞은 사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 얼굴이 피범벅이 된 사람 그야말로 아비귀환이다. 묘소 지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날 3 명의 전투원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의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 대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 차관, 김용환 과학기술처 차관, 심상우 민정당 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의학박사 국군지구병원 전문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한경희 청와대 경호실 경호원, 정제원 경호원, 이충헌 동아일보 기자 등이 현장에서 순직했다. 여기에 버마 경호원 2명과 버마 기자 2명도 사망했다. 그 외 부상자는 50여 명에 달했다. 그 순간 대통령이 탄 차량은 아웅산 묘소를 향해 오는 중이었다. 영빈관에서 아웅산 묘소까지 거리는 5 킬로미터였다. 폭발이 일어난 시간은 10시 28분이었다. 대통령이 아웅산 묘소 도착 2킬로미터를 남겨둔 상태에서 폭발물이 터진 것이다. 강민철 대위와 신기철 대위 진영관 소좌는 현장을 탈출했다. 북한으로 복귀하기 위해 랑군항으로 갔다. 동건 애국호가 재입항해 대기하기로 했었다. 강창수 부대장은 3인의 전투원에게 거사를 마치고 랑군 항으로 올 때면 동건애국호가 동무들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했는데, 랑군 항을 좌우로 살펴봐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조장 진영관 소좌가 신기철 대위와 강민철 대위에게 명령했다.
두 동무 들으시오.
현재 랑군 항에 우리를 태워갈 배는 없소. 그러나, 나는 조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소. 3 일 후 저쪽 랑군 항을 잘 볼 수 있는 능선에 밤 9 시에 만납시다. 각자 훈련한 도피 탈출 실력을 맘껏 발휘해 꼭, 다시 만납시다! 예, 알겠습니다. 조장 동무 건투를 빕니다. 신기철 대위는 랑군항 북서쪽으로 달아났다. 강민철 대위와 진영관 소좌는 남동쪽으로 뛰었다. 한 시간도 채 안되어 신기철은 버마 경찰의 총에 맞아 사살되었다. 진영관 소좌와 강민철 대위는 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달아났던 강민철 진영관도 다음 날 10 월 10일 버마 군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순간까지 자신들의 테러가 성공한 것으로 알았다. 체포된 강민철과 진영관 소좌는 부상이 컸다. 얼굴에 수류탄파편이 박혔다. 진영관 소좌는 눈, 코, 허벅지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복부는 창자가 터져 나왔다. 강민철은 코,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고, 오른쪽 귀 고막이 터졌다. 왼 쪽귀로만 들어야 했다. 상처가 심해 합동신문은 두 명의 테러리스트가 어느 정도 회복 후에 진행하기로 하고 버마 당국은 군 병원에 이송해 치료에 전념했다. 군대 내 병원서 치료하자 일주일이 지나니 상처가 어느 정도 나았다. 범인 신문은 한국을 배제하고 버마 당국만 실시했다. 이유는 버마에서 한국을 테러 자작극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미얀마 경찰이 현장 조사에서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나고 2-3분 후에 폭발이 있었다. 그 나팔을 분 군악대원을 조사하였다. 한국 경호원이 다가와서 나팔을 진혼곡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만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진혼곡 빰빠바- 빰빠바- 하는 진혼곡을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을 불렀고, 그 후 3 분 정도 지난 후에 쾅! 소리에 아웅산 묘소 천정이 무너졌다고 진술했다. 버마 경찰은 한국 경호원이 왜 그 시간에 나팔을 불게 했는지, 그것이 일종의 범죄 암호 신호로 의심했다. 버마 경찰은 한국 경호원 이상범 경호원을 불렀다.
“왜 군악대 대열로 가서 나팔을 불게 했는가?”
“행사 전에 나팔소리 점검은 나의 평소 임무다.”
“ 그럼 행사 도열 전에 충분히 시간을 두고 미리 하지 행사장에 수행원들이 도열한 후에 한 이유가 뭔가?”
이 경호원은 수행원들이 도착했는지, 도열했는지는 관심 없었다. 이 경호원이 체크해야 할 목록대로 체크를 하였는데, 모든 항목을 점검한 줄 알았는데, 수첩을 꺼내 리스트 하나하나 재점검을 해보니 군악대 점검이 빠진 것을 그때 발견하고 대열보다 20 미터 후방의 군악대 의장대 위치로 갔다. 군악 전체를 점검하기에 시간이 없어 주변을 돌아보고 이상 없기에 나팔수 나팔소리만 점검했다. 그래서 진혼곡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 연습만 시켰다.
버마 수사관의 질문에 강민철은 거짓진술을 하였다.
진영관 소좌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름은?
강민철이다.
나이는?
26세.
국적은?
대한민국.
학교는 어디를 나왔나?
서울 성북 초등학교를 1972년 졸업중고등 과정은 검정고시를 봤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2 학년 중퇴했다. 학번은 79 학번이다.
아버지 성명은?
강석준(59 세)
어머니 성명은?
김옥순(55 세)
그 외 가족은?
여동생 강미정(25세)
군대는?
대한민국 특수임무 수행부대 설악단
군번은?
997412
계급은?
대위
직속상관 이름은?
설악단장 대령 이민룡
침투 경로는?
해상으로 왔다.
어떻게 왔는가?
공해상 까지는 동건애국호를 탔다.
랑군항 입항 전에 미리 준비한 보트를 타고 항구 반대 편 언덕으로 상륙했다.
버마 당국은 위의 신문조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국 대사관에 진위 여부를 확인 요청했다. 주 버마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진위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공문을 접수받은 한국의 외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방부, 문교부는 합동으로 답변서를 작성했다.
한국 정부는 버마 대사관의 확인 요청에 조사를 했다.
1970년부터 1973 년 사이 성북초등학교 졸업생 명부에 강민철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서울대학교 79 학번에 강민철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이 강민철은 정치학과를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민주당 국회의원이고 야당 몫 부의장을 하던 박영록 의원 사무실의 사무장을 하고 있었다.
강민철의 진술은 거짓이라고 한국은 버마 주재 대사관을 통해 버마 정부에 전달했다.
훈령 : 제1 호
수신 : 주 버마 대사
참조 : 참사관
제목 : 강민철 인적사항에 대한 답변
내용 : 1. 강민철 성북초등학교 학적부 확인 결과 강민철 없음(거짓 진술)
2.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79학번 조회 결과 강민철 있음, 현재 강원도 원주 횡성 국회의원 민주당 박영록 국회의원 사무실 사무장으로 원주에 있음(거짓 진술)
3. 군번 997412는 예비역 소령 김원태의 군번임(거짓 진술)
4. 설악단장 대령 이민룡 없음(거짓 진술) 역대 설악단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 초대 단장 대령 백운택, 2대 대령 추대식, 3 대 대령 설동섭, 4 대 대령 정천수, 5대 대령 조성진, 6대 대령 강신기, 7대 대령 오현득, 8대 대령 신상우, 9 대 대령 이종진 10대 현재 대령 김상태가 하고 있음.
1983년 10월 9일, 랑군 교민 토요 학교
전두환 대통령 수행원들이 아웅산 묘소로 떠난 시간에 영부인 이순자 여사는 교민 토요학교 행사에 참석했다. 랑군에 상주하는 한국 대사관 직원, 버마에 진출한 현대건설, 동아건설, 한진해운, 대우건설 등 한국의 상사 직원 부인들이 친목도모를 위해 매주 토요일 대사관 회의장을 빌어하던 행사였다. 이역만리 버마에서 한국인들끼리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행사였다. 한참 참석자의 인사가 진행될 무렵 경호원이 들어와 행사를 중단시켰다.
1983년 10월 10일, 서울공항
버마, 인도, 스리랑카, 브루나이, 뉴질랜드, 호주 등 6개국 순방을 하기로 떠난 17박 18일의 거대한 점보외교가 첫 순방국 버마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귀국했다. 떠날 때의 김포공항에서 출국성명을 낭독할 때의 자신감 대신 초조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경비가 삼엄한 서울 공항에 도착해 도착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
이번 사건은 치밀하게 계획되어 조직적으로 바로 국가 원수인 본인의 생명을 노린 전대미문의 악랄한 음모의 소산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의 국가 원수인 본인의 위해를 획책하여 잔혹 무도한 죄악을 저지른 범죄의 원흉으로 전(全) 지구상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북한을 지목하는 것은 비단 우리 국민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연전에 그들이 본인의 해외 순방을 틈타 캐나다에서 본인의 목숨을 노리다 발각된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적으로서 우리의 평화와 안전을 파괴하려고 집요하게 도발해 왔으며, 비이성적인 인간으로서 폭력과 유혈을 일삼는 살인범이라는 천하공지의 속성만으로도 이번 범죄가 저들의 소행임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중간 생략)
본인은 무수한 도전과 시련의 고비를 무서운 합심단결로 이겨온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저력이 어떠한 위협도 끝내 물리치고 우리의 생존과 안녕을 굳건히 지켜낼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와 결의로 오늘의 이 도전을 훌륭히 이겨 나가야 하겠으며, 본인은 신명을 다 바쳐 불의를 응징하고 평화와 번영을 구현하는데 앞장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83년 10월 10일
대통령 전두환
1983년 10월 13일, 서울 여의도 광장
육·해·공 3군 군악대의 중저음의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숨진 17 인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순국 외교사절 합동국민장으로 공식 명칭이 정해졌다.
하늘도 17 명의 아까운 인재를 비명에 가게 한 것이 애통한 지 구슬비를 뿌렸다.
잿빛 하늘 아래 서울대 부속 병원 영안실을 빠져나온 17 위의 연현이 종로 4가, 광화문, 중앙청 앞을 지나 마포와 서울 대교를 건너 여의도 광장으로 향했다.
감상협 국무총리가 조사를 낭독했다.
19 발의 조포가 울리는 가운데 영구차는 연도에 늘어선 국민들의 애도 속에 영결식장을 떠나 동작동 국립묘지를 향했다.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숨진 17위의 유해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들은 오열 속에 17 위의 안장을 지켜봤다.
영결식을 마친 여의도 광장은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장으로 변했다.
‘살인자 김일성을 지구상에서 몰아 내자!’
‘피를 나눈 동족을 향해 폭탄을 던진 전대미문의 살육행위를 전인류의 이름으로 규탄한다’ 등의 피켓과 현수막이 물결을 이뤘다.
유학성 반공연맹 이사장은 아무리 악랄한 북괴도당이라 하더라도 동족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다면 이 같은 살인행위를 저지를 수 있겠느냐? 고 규탄했다. 이날 석간신문에 난 흑백사진 한 장이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한 소녀가 국립묘지 나무에 기대어 혼자 눈물을 삼키고 있는 장면이었다. 희생자 서상철 동자부 장관의 차녀 미경 양의 사진이었다.
1983년 11월 22일, 랑군 법원에서 강민철과 진영관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버마의 사법제도는 4 심 재판을 한다.
1심과 2심은 지방법원에서 하고 고등법원의 3 심과 대법원의 4 심이 있다.
아웅산 테러의 사건의 중요도와 국제적인 관심을 반영해 1,2 심은 생략하고 바로 랑군 법원에서 3 심이 이루어졌다.
특별법원이 개회되었다. 강민철과 진영관을 위해 랑군 변호사협회에서 2 명의 국선 변호인을 선임했다. 강민철과 진영관은 버마 형법 제301, 302 조의 살인죄, 무기불법소지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장이 강민철에게 물었다.
강민철, 당신은 유죄를 인정하는가?
예.
진영관 당신은 유죄를 인정하는가?
......
대답이 없었다.
묵비권행사를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묵비권이었다.
철저히 주체사상에 세뇌된 태도다.
테러 후 잡히기 전에 자폭을 하고 자폭이 여의치 않으면 일체의 자백을 하지 말고 묵비권으로 공화국의 치부를 드러내지 말라는 정치사상 교양이 뼛속까지 몸에 밴 진영관 소좌였다. 강민철의 국선 변호인은 강민철의 자백으로 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형법에 명시된 ‘제보자의 특권’ 조항을 들어 면책 특권으로 감형이나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장은 테러리스트들에게 면책 특권은 없다고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1984년 네 윈이 의장인 미얀마 국가평의회에서 강민철은 감형되었다. 국제사회에 테러리스트의 전모를 밝혀 버마의 국제신인도 높인 점이 참작되어 강민철은 무기로 감형되었다.
진영관은 계속 묵비권 행사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84년 무기수가 된 강민철은 군대 내의 군교도소에서 민간의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1984년 7월 25일, 평양 어머니 박은경은 아버지가 평양을 떠난 후 뱃속에 나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평양 보통강 구역의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았다. 사내였다. 남이나 북이나 남아선호 사상은 같았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걱정이었다. 아비 없는 외손자가 측은했다. 그러나 별 방법이 없었다. 아기는 민철을 꼭 빼닮았다. 눈만 어머니 은경을 닮아 컸지만 쌍꺼풀이 아니었다. 이름은 ‘영수’라고 지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아버지 강민철이 해외 나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애를 낳아 어떻게 키우겠냐며 지우라고 했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은경은 혼자 키워도 당당하게 혁명유자녀답게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려 아이를 낳았다.
동평양 중학교의 당 세포 지배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처녀가 애를 낳았지만 나는 부화로 애를 낳은 것이 아니고, 강민철이라는 전투원의 아내이고 다만 해외로 임무수행 가기 전이라 결혼 휴가를 낼 수 없어 결혼식을 못하였지만 양가 부모님의 승낙을 다 받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밀리면 어머니 박은경은 정말 한심한 부화 녀성이 된다. 그러면 평양서 추방당하고, 수학 교원도 끝이다. 이를 악물고 일처리 했다. 김일성 수령에게 신소를 올리고,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도 신소했다. 신소에 대해 김정일이 사실 확인을 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강민철이 실제 이름이 강영철이고 해외 파견된 전투원이라는 것을 학교 당 세포 지배인이 알아냈다. 어머니의 신소가 받아들여졌다. 신랑 강영철과 신부 박은경의 혼인신고, 아기 출생신고가 처리됐다. 아기 이름은 ‘강영수’로 올렸다. 아버지 강민철이 버마에서 무기수로 지내는 동안 나, 강영수는 평양 대동문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다. 어머니 박은경은 나를 ‘만경대 혁명학원’에 보냈다.
만경대 혁명학원 원장은 리오성 중장이었다. 리오성 중장은 김일성과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 그래서 만경대 혁명학원 원장이 되었다. 다른 중학교는 교복을 입지만 만경대 혁명학원은 군관들 군복이 교복이다. 군관과 구분하기 위해 바지에 빨간 줄무늬만 넣었다. 멀리서 보면 군관 복장과 똑같았다. 그는 군복의 교복을 입고 어머니에게 경례를 하였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도 경례를 했다. 경례를 받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머니 박은경은 빙그레 웃었다.
1986년 9월 1일, 평양, 만경대 혁명학원 입학
남한은 3월에 입학을 하지만 평양의 학교는 9월 1일이 입학이다.
혁명학원의 일과는 군대식이었다.
교복이 군관 복지로 만든 것이라 고급이었다.
번쩍거리는 금색 단추에 군관 모자는 평양의 다른 중학교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입학식에서 리오성 원장은 훈시를 하였다.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우리 혁명학원은 입학생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피를 바친 혁명열사의 본을 받아 여러분은 밥을 먹어도 조국을 위해 밥을 먹고, 총을 쏴도 조국을 위해 쏘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용하는 연필 하나 총알 하나도 헛되이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김일성 수령님은 일제치하에 일본군 순사의 눈을 피해 엄동설한에도 조국 광복을 위해 쪽잠을 주무시면서 독립군을 지도하셨습니다. 남조선에서 많은 동지들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남로당 빨치산 활동’의 혁명 열사들 중에는 아직도 남조선의 좁은 감옥에서 조국 통일을 기다리는 ‘리인모 영웅’을 본받아 전향하지 않고 장기수로 남아있는 혁명열사가 43명이나 있습니다.
오늘 뜻깊은 날 여러분의 입학을 축하한다고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 돼지고기 20 마리를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온몸으로 보호해야 합니다.
‘총 폭탄 정신’으로 무장하여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신입생 여러분이 공부도 군사훈련도 과학 탐구도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10년, 20 년 후에는 여러분 중에 세계적인 과학자가 나와 핵무기도 만들고, 미국 본토까지 날아가는 미사일도 만들고,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나와 남북통일의 초대 대통령도 이 혁명악원에서 탄생될 것을 나 리 오성 원장은 믿습니다.(박수) 여러분은 조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라기 전에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전 교직원과 함께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박수)
입학식이 끝났다.
아침 6시 기상나팔소리에 기상하고 밤 10시에 취침 음악 소리에 맞춰 잠을 잤다.
연병장에서 체조를 하고, 구보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학과 출장을 간다. 모든 이동은 대열을 지여 이동했고, 이동 간에는 항상 군가를 불렀다. 우리 일행이 식당에 도착했다.
내가 구령을 붙였다.
일동 제자리 앉아!
식사시작!
감사히 먹겠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일어서! 구령이 떨어지면 식사를 중단하고 일어섰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자기의 식기는 자기가 깨끗하게 세척해서 식기 보관함에 반납했다.
조선어, 소련어, 수학, 과학, 체육, 군사학 등의 반복 수업이 이루어졌다.
군사학은 제식, 총검술, 격파, 특공무술, AK 소총 분해결합, 고장발생 시 응급조치, 수류탄 제조 및 투척, 독도법, 통신 기기 조작, 암호문 조립 및 해역 등 일 학년에서 상급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고난도의 훈련과목이 편성되었다.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군사학과 물리학에 흥미가 있었다.
나는 핵물리학자가 되어 핵개발로 미국 놈들이 무시하지 못하는 핵보유 국가가 되는데 자신의 할 일이 있을 거라 믿었다.
1986년 9월 2일, 부치지 못한 편지(은경이 민철에게)
강민철, 내 사랑하는 동무에게 드리는 바입니다.
여기 평양은 9월이라 선선합니다.
동무는 지금 어느 나라서 무얼 하시나요?
동무와 사랑을 나눈 1983 년 8월 한여름 밤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동무는 지금 어디 있기에 무정하게 흐르는 세월 동안 이토록 소식 한자 없이 지내십니까? 동무는 동무의 씨앗을 내 몸에 뿌린 줄도 모르시겠지요?
동무는 무정히 떠났지만, 동무가 뿌린 씨앗은 내 몸속에서 1984년 7월 25일 태어나 어제 9월 1일 만경대 혁명유자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늠름한 군관복의 교복을 입은 아들 영수의 거수경례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인 저에게 하였지요. 경례받는 마음이 얼마나 뭉클했는지 동무는 모르실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도 그러시더군요. 이 자리에 강민철 동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몸만 다치지 말고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살아서 돌아오시길 빕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바보라고 놀려도 다른 곳 시집 안 가고 영수 하나만 바라보고 잘 키울 것입니다. 당세포 동무에게 말하고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 신소문을 올려 동무와의 혼인 신고 아들 영수 출생신고 다 마치고 만경대 혁명유자녀학원에 보낸 것입니다. 아침 먹어도 저녁을 먹어도 동무가 문을 열고 올 것만 같아 가끔 문을 보며 먹습니다. 글재주 없는 제가 동무를 그리며 시 한 수 적어봤어요. 오시면 제가 낭독해 드리지요.
민철 동무 그리워하는 시
- 박은경-
아름다워라 민철 동무 흙 묻은 전투복
그립다 그립다 민철 동무
갈매기 울던 바닷가에
꽃이 피면 나비 온다
은경 얼굴 곱게 단장하면
민철 동무 오실라나
그네 뛰는 아낙네들
올라가면 다홍치마
내려오면 하얀 속치마
은경 가슴 다 녹이여
민철 동무 보고 싶소
동무 동무 민철 동무
은경 눈물 안 보이오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오각 별 내 귀걸이
다시 한번 걸고
민철 품에 안기고 싶어
1983년 12월 24일 아버지 강민철은 버마 교도소에 수감되어 ‘오각별 귀걸이’ 한 짝을 만지작거렸다. 은경 생각이 났다. 수인번호 3727, 은경은 아직도 이 오각별 귀걸이를 간직하고 있을까? 새로운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갔을까?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다. 고향 강원도 통천의 부모님은 무사하신지. 여동생 미정은 시집을 갔을까? 내가 버마에서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다 불어버린 것을 혹시 사상이 부족하다고 혁명 열사가 아닌 반당행위자로 낙인찍힌 것은 아닌지? 개성에서 마지막 훈련 과정에서 윤노빈 박사의 사상교육이 생각났다.
‘리인모 영웅’은 남조선 최장수 비전향 장기수라고 20년 이상 복역을 하면서도 조국을 배반하지 않고 자기 사상을 올곧게 유지해 온 것을 우리 모두는 흠모하고 따라 배워야 한다는 백발이 성성한 윤박사의 음성이 이곳 인세인 감옥 천정에서 들리는 듯했다.
나도 여기서 20년을 보낸다면 윤노빈 박사가 아닌 다른 박사들이 후배 전투원 양성 교육에 ‘강민철 열사’는 머나먼 이국땅 버마에서 자신의 사상을 굽히지 않고 20년을 복역하였다고 말해줄는지. 은경은 처녀의 몸으로 늙어 가서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하고 있을까?
1983년 여름 보통강구역의 아파트 4층에서 은경의 몸을 품었던 순간이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떠올랐다. 은경 몸을 더듬고 키스를 하고 몸과 마음이 둘이 하나가 되었었다.
은경의 한쪽 오각별 귀걸이만 만지고 있으면 감옥 안에서도 민철은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 5년, 10년, 15년, 20년, 25년도 지낼 수 있겠다.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죽을 고비에도 살길이 보인다고 했다. 민철의 부적은 오각 별 귀걸이 한쪽이다. 민철은 살아 평양으로 돌아가 은경을 다시 만난다면 한쪽 오각 별 귀걸이를 은경이 간직한 오각 별 귀걸이와 대조할 것이다. 약속대로 더 좋은 오각 별 귀걸이를 속주머니에서 꺼내 은경 귀에 걸어주고 은경 귀를 만지고, 키스하고, 은경의 눈부신 알몸을 더듬고 다시 영혼과 육신이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다. 내 나이 60 세 되어도 은경은 나를 알아볼까? 희미한 얼굴이지만 오각 별 귀걸이를 서로 내밀고 짝을 맞추면 틀림없는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 몇 만 리를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끈은 서로 이어져 있음을 오각별 귀걸이가 증명해 줄 것이다.
아버지 강민철은 감옥에서 버마 말을 익혔다.
무기수가 언제 나갈지 모르지만 어머니 은경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면 혼자 통역 없이 버마를 다닐 수 있을 만큼의 버마어 실력이 필요했다. 아버지 강민철의 미얀마어 선생은 이곳 인세인 감옥의 취사 담당 마떼였다. 마떼는 대한민국에 불법 취업 갔다가 마약 운반에 가담되어 한국에서 버마로 추방되었다. 감옥 안과 밖은 담장 하나 사이로 너무나 큰 차이점이 있다. 담장 밖의 사람 사람은 누구든지 늦잠 잘 권리가 있지만 담장 안 죄수들은 기상 음악 소리에 선잠을 깬다. 마떼는 유창한 한국어는 아니지만 일생 생활의 한국어 초보 수준을 하고 있어 아버지 강민철에게 서툰 한국어로 유창한 버마어를 가르쳤다.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버마어로 (밍갈라바)
어떻게 지내 시 나요?를 버마어로 ( 네 까웅 앨라 )
영, 제로는? ( 또 웅 냐 )
하나, 원은? ( 띳)
둘, 투는? (흐닛)
셋, 쓰리는? (또웅)
아버지 강민철의 버마어 공부는 하루 한 시간씩 계속했다. 버마어 공부를 마치고 나면 묵주를 들고 눈을 감았다. 기도를 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 김옥선, 아버지 강석준, 여동생 강미정을 그리며 기도했다. 평양에 있는 은경과 장인 장모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면 민철은 하루를 되돌아보며 일기를 썼다. 일기 형식이지만 사실은 보고 싶은 은경, 고향 통천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미정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1983년 12월 26일 교도소
원래 교도소는 범죄인들의 집합소다.
당연히 거칠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버마 교도소 수준은 너무 한심했다.
강민철은 스스로 나는 일반 잡범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절도, 살인, 강간, 상해 범들과 정치범 또는 테러리스트
강민철은 같은 교도소에서 지내지만 사상 차원이 다르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교도소에서 교도소장, 부소장, 간부나 하급 간수까지 강간, 살인, 절도범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민철은 화가 치밀었다. 민철은 교도관에게 요구했다. 정치범, 테러범이니까 그에 상당한 대우를 해 독방을 달라고 했다. 독방이 아닌 7인 실 방으로 배정되었다. 군대와 병원과 교도소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나이 불문하고 들어온 순서로 위아래가 결정된다. 교도소 왕선임, 양 아웅은 살인범이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현재 7년 복역 중이다. 양 아웅은 아침저녁 점호에 불참했다. 불참해도 교도소 내에서 교도관이나 공익근무 모두 양 아웅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완전 죄수들의 왕 노릇을 했다. 민철의 통역 마떼를 불렀다.
민철에게 머리 박아를 시켰다. 민철은 마떼에게 양마웅 네가 뭔데 나에게 머리를 박아 시켜? 통역을 하게 했다. 교도소에 왔으면 왕선임 말을 하느님 말씀처럼 따르라고 했다.
오늘 너의 신고식이다. 민철은 왕선임에게 너는 예의도 도덕도 없느냐? 통역을 하게 했다.
양 아웅이 민철을 주먹으로 쳤다. 민철이 일어섰다. 태권도 특공무술, 폭파, 수영, 산악훈련 등으로 단련된 124 군부대원 400여 명 중에서 3인 선발하는데 최종 3인이 된 강민철을 양 아웅이 몰라 본 것이다. 민철의 발이 양 아웅 머리를 가격했다. 민철은 2단 옆차기로 양 아웅 턱을 날렸다. 양마웅 입과 코에서 피가 나왔다. 민철은 양 아웅 눈을 까봤다. 이상이 없었다. 죽지는 않았다. 교도소 내 소문은 번개처럼 빠르다.
민철은 마떼를 불러 교도소 실천 사항을 통역시켰다.
나 강민철은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육군 대위 출신이다.
버마에 군대가 있듯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도 많은 군대가 있다. 장교와 하사관 병사의 계급이 엄격히 존재한다. 나는 장교 출신이다. 나는 일반 범죄자, 절도, 상해, 강간, 살인 등의 잡범과는 다른 사상범이다. 즉, 테러리스트 강민철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내가 국가의 명령으로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테러를 하였지만 나는 도덕적 사상적으로 깨끗하다. 너희들 절도, 상해, 강간, 살인 같은 죄를 나는 지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나도 이곳 교도소에 수감된 이상 이곳의 규칙을 100% 지킬 것이다. 너희들도 교도소 규칙을 지켜라. 만약 지키지 않는 자는 오늘 양 아웅처럼 나의 옆차기가 날아갈 줄 알아라. 이 시간 이후 점호 시간 지각하는 자, 불참하는 자, 식사 시간 작업 출장 시간 3 분 이상 늦으면 오늘 양 아웅이 나에게 2 단 옆차기 한방에 쓰러지듯 그렇게 할 것이다.
너희들은 코리아의 태권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다 알 것이다. 나는 태권도 공인 5단 특공무술 3단 유도 2단 도합 10단이다. 마떼가 강민철의 말 하나하나 천천히 버마어로 통역을 했다. 이 사건 이후 버마 교도소는 소장이나 부소장 교도관 하급 교도행정직 모두 편하게 되었다. 교도소 규정을 어기는 자가 없어졌다.
1983년 12월 31일, 한 해를 보내며
은경에게
보고 싶다, 은경.
평양을 떠나면서 버마로 간다고 말도 못 하고 그냥 해외로 간다고 했는데, 미안하구나.
솔직히 나도 배를 타고 랑군 항에 와서 여기가 랑군 항인 줄 알았지 배안에서는 숨죽여 지냈다.
우리의 거사가 민족통일을 위한 밑 걸음이라고 들었고, 지금도 내 신념에는 변화가 없다. 오늘이 12월 31일 내 청춘 한살이 이 밤만 지나면 더해지는데, 난 한 해 동안 발전이 없고 발전할 수도 없음에 절망을 느낀다.
그래도 내가 자살을 하거나 자해 없이 지내는 것은 은경 네가 귀에 걸고 지냈던 ‘오각별 귀걸이’ 한 짝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난 힘들 때마다 이 오각별 귀걸이를 만지작거리지.
이건 내 부적이야. 힘들면 힘든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나에게 있는 그 상태로 버티고 지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말해주거든.
은경, 이 밤 지나면 1984년 새해야.
새해에 은경 더 건강하고 훌륭한 선생님 되기 바란다.
만약에 교원 경연대회라도 있으면 나가 금상을 받기 바란다.
1983년 12월 31일. 버마 랑군 하늘아래
은경을 사랑하는 민철 씀
1984년 1월 1일, 아버님께
아버님 그간 안녕하신지요?
불초자식 민철은 아버님이 알지도 못하는 버마 랑군 교도소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강원도 원통으로 부칠 수도 없는 편지입니다.
부치지 못할 편지일망정 쓰지 않으면 제가 미칠 것 같아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여기 랑군은 통천보다 뜻합니다.
겨울이지만 원통의 가을 날씨 정도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죄수들은 차라리 겨울이 좋다고 합니다.
여름은 옆 사람의 땀 냄새가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는 것, 죄수가 사회 사람보다 더 빨리 늙고 병드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새해면 아버님께 큰절 한번 올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할 텐데, 지금 제 형편이 아버님께 저의 생존조차 알리지 못합니다.
여동생 미정이도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어디 혼처는 정했는지 궁금합니다. 어머니 관절은 좀 어떠하신지요?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내에 있어도 부모님께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한 놈이 이역만리에 나와 있으니 더 죄송할 따름입니다.
버마, 랑군에서 정월 초하루
1984년 3월 3일, 봄볕이 그리워
랑군 교도소 작은 창문에도 봄볕이 방안을 따스하게 비춰줍니다.
교도소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볕이 어린 시철 통천에서 초가집 처마 밑 고드름을 녹이던 봄볕처럼 따뜻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허락도 없이 저는 평양의 한 여자를 품었습니다.
동평양 중학교 수학 담당 교원 박은경 여성 동무입니다.
제가 여기서 언제 조국으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으나 기회가 되면 아버님이 평양 보통강구역의 은경을 한번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교도소에서 맞는 봄이 왔지만 봄은 아닙니다.
버마 랑군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민철 씀
1984년 7월 27 일, 여름
내가 평양이나 개성에 있다면 오늘 7월 27일 전승기념일 행사를 볼 수 있는데.
이곳 랑군은 전승기념일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날씨가 더워 땀 냄새 사람 냄새가 싫다.
정말 처음 겨울에 교도소 수감 때 죄수들이 지내기엔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날이다. 더위야 빨리빨리 가거라.
1984년 8월 15일, 추석 명절
고향 통천에도 오늘 한가위 보름달이 떠 있겠지요.
이곳 버마 랑군의 보름달도 참 밝습니다.
어린 시절 통천에서 맞이하던 추석과 지금 먼 랑군 교도소에서 보내는 추석은 너무 차이가 납니다.
이곳 버마 교도소에서 추석을 명절로 생각하는 죄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 편지에서 언급한 은경이라는 여인의 얼굴이 꼭 보름달을 닮았습니다.
이렇게 보름달도 밝고 부모님과 제가 은경과 함께 한가위를 보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부모님과 은경이가 여기 버마에 죄수로 있는 것도 모르는데, 눈물이 납니다.
저 혼자 쓸데없는 공상만 하게 됩니다.
추석 명절에, 버마 교도소에서
고향을 그리며 민철 씀.
1984년 9월 1일
오늘도 마떼에게 버마 말을 몇 자 배웠다.
아버지는? (아페)
어머니? (아메)
할아버지? (아포)
할머니? (아퐈)
아들? (따)
딸? (따미)
남자? (야웃짜)
여자? (메잉 마)
1984년 9월 15일
오늘도 마떼가 저녁 식당 청소를 마치고 내 방에 와서 버마 말을 몇 자 가르쳐주었다.
안녕 하십니까? (밍갈라바)
잘 지냅니다. (네 까웅 바대)
감사합니다. (쩨주 핀 바대)
안녕히 계십시오? (또아 바오웅매)
안녕히 가십시오? (까웅 바비)
또 뵙겠습니다. (뛰야데 다 뽀)
1984년 12월 31일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어요.
은경, 보고 싶다.
은경, 사랑한다.
은경, 은경, 은경, 은경, 은경,
내 고향 강원도 통천
동해 푸른 바다.
평양 보통강구역 은경의 아파트.
내가 살아서 평양, 통천 다시 갈 수 있을까?
나는 이곳 버마 교도소서 또, 청춘의 한해를 넘긴다.
1985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김일성 수령님의 신년사를 읽고 싶다.
이곳 교도소에 노동신문 하나 안 보내는 버마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사나 참사 놈은 뭐 하는 놈들인지 모르겠다.
나 강민철이 이렇게 노동신문에 난 수령님의 신년사를 보고 싶어도 관심도 없는 놈들.
내가 밥은 먹었는지 관심도 없고 약간의 영치금이라도 넣어주면 좋겠는데, 어느 놈 하나 관심 두는 자가 없다.
차라리 이곳 교인들이 교회서 돈을 모아 위문 오는 것이 반갑다.
내가 나가 당에 고발하면 비판받을 놈들 한둘이 아니다.
새해 수령님의 신년사는 못 봐도 수령님과 당에 대한 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김일성 수령님 만수무강을 빕니다.
1985년 정초 버마 교도소에서
전투원 강민철 드림
1985년 1월 3일
버마 교회에서 교도소 위문을 왔다.
과자, 빵, 음료수, 과일 등 푸짐하게 나누어 주었다.
가장 반가운 것은 치약 칫솔이다.
영치금을 넣어주는 죄수들은 그 돈으로 칫솔도 치약도 사지만 나는 아무도 영치금을 해주지 않으니 칫솔이 솔이 완전히 누웠다.
오는 교회 위문품 속에 들어 있는 새 칫솔로 이빨을 닦으니 약간 피가 났다.
그래도 개운해서 좋다.
조선민주주의공화국에도 이런 교회가 있으면 좋겠는데,
왜 수령님은 교회를 봉수 교회 하나만 남기고 다 없애셨는지.
교회 위문품 새 칫솔로 개운한 정초다.
버마 교도소 강민철 씀
1985년 2월 16일
오늘은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생신이다.
개성이나 해주에 있었으면 고기 한 점 맛봤겠는데,
여기 버마에는 고기 한 주는 일 없다.
전 세계 다른 교도소도 이 모양인지, 식사가 말이 아니다.
정말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먹는 식사다.
아 나도 누가 영치금 좀 넣어주면 좋겠다.
버마 교도소 강민철 씀
1985년 4월 5일
봄볕이 따뜻하다.
감옥에서 맞이하는 봄도 봄이다.
한시에 봄이 왔어도 봄이 아니다(春來不似春)라는 한시도 있지만
여기 교도소에도 봄이 왔다.
나무의 파릇파릇 새잎을 보니 평양 희수 생각이 난다.
통천 아버지 어머니는 잘 계신지
여동생 미정이는 시집을 갔는지 궁금하다.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어요.
은경, 보고 싶다.
은경, 사랑한다.
은경, 은경, 은경, 은경,
내 고향 강원도 통천
동해 푸른 바다.
1985년 4월 15일
오늘은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의 탄생일이다.
조국에 있었으면 돼지고기에 특식이 왔을 텐데 여기 버마 대사관 놈들은 뭐 하는 놈들인지 전투원에게 면회 한번 오는 법이 없구나.
나는 수령님을 위해 폭탄테러를 했는데, 수령님은 나를 감옥에서 빼주지도 않는구나...
이래서야 누가 전투원 총 폭탄 정신으로 할까?
버마 교도소 강민철 씀
1985년 7월 27 일
오늘이 전승기념일이다.
이 뜻깊은 날 나는 교도소에서
힘없는 나날을 보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은경 오각 별 귀걸이 한 짝만 보면
부적처럼 생각이 달라진다.
나 강민철은 꼭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은경을 다시 만나고
통천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미정이도 만나야 한다.
보고 싶은 얼굴
은경,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미정이.
버마 교도소에서 잠 못 이루는 밤에 민철 씀
1986년 9월 19 일
제10회 서울 아시아경기가 내일부터 열린다.
오늘이 전야제 하는 것을 버마 국영 방송이 녹화 방송으로
내보냈다.
서울 동대문 운동장이라고 자막이 나왔다.
너무 화려하고 좋다.
놀랍다.
남조선 거지가 많고
미군들이 먹다 버린 소시지를 가져다
부대찌개 해 먹는 남조선이
저런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르다니
놀라울 뿐이다.
우리 조선민주주의공화국도
아시아경기대회 할 날이 오겠지
버마 교도소에서 강민철 씀
1986년 9월 20 일
어제 전야제에 이어 오늘 정식 개회식을 했다.
3 개의 대형 북이 울리는 가운데 식전 행사 영고가 펼쳐진다.
서울의 여러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연합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마스게임도 잘했다.
마스게임 하면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가장 잘하지만
서울 학생들도 못지않게 잘한다.
우리 조선은 한 핏줄인 게 분명하다
남이나 북이나 남에게 보여주는 행사는 잘한다.
같은 방 죄수들이 저기 서울이 너의 나라냐고 물어서
아니다 저기는 남쪽 조선이고
나는 북쪽 조선이라고
지도를 보며 설명해 주었다.
버마 교도소에서 강민철 씀
1987년 12월 31일
오늘이 지나면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내가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떠나 버마 교도소에 수감된 지 5 년이 된다.
아! 5년, 아까운 내 청춘 이렇게 교도소서 사라진다.
보고 싶은 얼굴
아버지, 어머니, 은경, 미정,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은경 오각별 귀걸이 한 짝만 보면
부적처럼 생각이 달라진다.
나 강민철은 꼭 살아야 한다.
1988 년 1월 1일, 새해
교도소에서의 새해
별 의미 없는 새해다.
그래도
나는 여기서 포기해선 안 된다
이 귀걸이 오각별이
민철아 참아
그래야 나중에 은경에게
오각별 귀걸이 전해주지 한다.
버마 교도소에서 민철씀
1988 년 2월 16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전투원 강민철은 버마 교도소에서
청춘을 철창에 묻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데
지도자 동지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나요?
이거 일본 제국주의 시대 무장 투쟁
조국해방전쟁시기와 지리산 빨치산 부대원들은
마음대로 활개 쳤는데,
이 전투원은 새장 속의 새처럼
주는 먹이 쪼아 먹듯
주는 교도소 1 식 3 찬으로
근근이 연명하는데
오늘 지도자 동지 생신이건만
제가 해드릴 것도
지도자 동지께 받을 것도 없는
무료한 하루가 저물었다.
그래도
지도자 동지 생신 축하드리고
언젠가 나를 이 철창에서
빼내주시기 바랍니다.
버마 교도소에서
강민철 전투원 올림
1988 년 9월 16 일. 제24 회 서울 올림픽
제24회 서울 올림픽 전야제가 방송되었다.
교도소에서의 남조선 올림픽 방송을 봤다
하나의 조선이라 생각하면 나도 기분이 좋다
두 개의 조선이라고 생각하면
배가 아프고 부럽다.
화려한 음악과 가수들 음악 율동
너무 현란하다.
1988 년 9월 17 일, 서울 올림픽 개막
제24 회 서울 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녹화방송 되었다.
서울 놀라운 모습이다.
굴렁쇠 굴리는 어린이가 참 귀여웠다.
평양에 있는 은경도 이 방송을 녹화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94 년 7월 8일
점심시간에 뉴스를 봤다.
특별 뉴스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일성 수령님이 서거하셨다.
눈물이 났다.
수령님은 내가 살아 돌아갔을 때
나에게 훈장을 주실 분인데
이렇게 서거하시면
난 뭐야?
고생한 보람도 없이......
말 그대로 개죽음이지.
개죽음.
개죽음.
개죽음.
개죽음.
1995년 12월 31일
또 한 해가 간다.
83 년에 버마 감옥에 들어와
십 년 지나 십이 년 되었건만
버마 잡범들은 하나 둘 나가는데
조국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통일의 초석이 되고자 미제국주 위 앞잡이 전두환 일당을 처단하려다 피라미만 잡고 대어를 놓친 전투원 강민철은 조국에서 위문 한번 오는 법 없구나
이래서야 어디
후배 전투원들이 목숨 걸고 전투원 한다고 나서겠소.
지금 생각하니
사살당한 신기철 동지
묵비권으로 사형당한 진영관 소좌가
참으로 부럽소.
나도 묵비권으로 사형이나 당할 것을 이렇게 긴 세월 구차하게 교도소에서 늙어가다니 정말로 나 자신이 한심하오.
나도 감옥서 옥사하려 해도
나의 부적 은경이 귀에 걸었던
부러진 오각별 귀걸이가
내 맘을 흔들어 죽을 수가 없다.
칫솔이 다 닳았는데 새 칫솔 하나 얻으려면
버마 교회 교인들 면회나 기다려 봐야겠네.
버마 교도소 강민철 씀
2008 년 5월 18일, 랑군 교도소
25년이나 아버지 강민철은 버마 감옥에서 보냈다.
20대의 청춘, 겁이 없던 아버지 강민철도 50 대 중반의 중년이 되었다.
나이 들면서 꿈에 흉몽을 많이 꾸었다.
꿈속에서 민철과 은경은 대동강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보통강 다리를 걸어갔다. 정체불명의 벤츠가 은경을 들이받았다.
민철은 악! 은경의 비명에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아니 은경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나?
민철은 고향 통천이 꿈에 나타났다.
마떼가 왔다.
마떼와 민철은 버마어로 말을 하거나 한국말로 말을 했다.
교도소에서 버마 말을 마떼가 민철에게 가르치고, 어느 정도 버마어가 수준에 오르자 민철이 마떼에게 한국말을 가르쳤다.
버마 다른 죄수나 교도관이 들으면 곤란한 내용은 민철과 마떼는 한국말로 대화를 했다.
마떼, 어제 꿈을 꾸었는데, 평양에서 내가 애인과 나란히 길을 가다가 애인 은경이가 차에 받혀 죽는 꿈을 꾸었어.
꿈은 반대라고 하지? 아마 애인에게 좋은 일이 있나 보다.
그래, 좀 좋은 일이 은경에게 있었으면...... 민철은 눈물이 흘렀다.
은경은 아직 나만을 기다리며 시집 안 가고 있을까 장인 장모의 성화에 못 이겨 시집을 갔을까?
1983년 11월 10일 잡히던 날이 생각났다.
수류탄으로 자폭하려고 안전핀을 뽑았다.
머리 위로든 순간 펑! 터졌다.
최소한 안전핀을 뽑고 목표물을 정해 던지는 시간을 고려해 3-4초 후에 터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건 안전핀을 뽑자마자 터지는 순간 신관이었다.
민철은 은경을 생각하고, 은경 생각이 나자 주머니 은경의 ‘오각별 귀걸이’ 한쪽을 만졌다.
지금까지 사상교육받은 대로 자폭하려던 생각이 이 오각별 귀걸이로 인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폭하라는 의지를 눌렀다.
그렇다 나 강민철은 이 오각별 귀걸이가 부적이 되어 죽음의 순간에도 나를 죽음에서 생으로 인도하는 부적이다. 나는 이 부적을 지니고 있는 한 죽어서는 안 된다. 꼭 살아서 은경에게 오각별 귀걸이를 마주 대 징표를 확인하고, 새로 구입한 오각별 귀걸이를 은경 양쪽 귀에 걸어주고 목덜미에 키스를 해야 한다.
나 강민철은 죽으면 안 된다.
감옥에서 25 년을 보내다 보니 강민철도 ‘습관화된 무기력증’에 걸렸다.
밥을 먹어도 밥맛이 없다.
창밖을 봐도 희망이 없다.
흰 구름만 무심히 흘러갔다.
25년 수감기간 동안 교도소의 규정을 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번 성탄절에 모범수로 풀려날 수 있을까?
이곳 교도소에서 풀려나면 평양으로 가야 하나 아니 남조선으로 갈까 이도 저도 아니면 미국으로?
일본으로 갈까?
이런저런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요즘 들어 민철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원래 통천에서 어린 시절 다부진 놈으로 동네 소문이 자자했다.
강창수 부대에서 잘 먹고 고난도의 훈련을 잘 넘긴 몸이지만 이국땅 버마에서 25 년의 수감생활이 그의 건강을 조금씩 조금씩 나쁘게 했다.
교도소에 랑군 국립의료원 구급차가 도착했다.
감옥에서 구급차가 강민철을 태우고 랑군 국립의료원에 도착했을 때, 민철의 몸은 맥박이 멈춰 있었다.
유언 한마디 없이 50 중반의 테러리스트 나의 아버지 강민철은 그토록 바라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2008년 5월 18일, 오후 4시 30 분이었다.
국립의료원 의사가 시체에 부분을 검사하고 사인은 간암이라고 진단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 강민철의 유품은 망가진 한쪽 오각별 귀걸이, 그리고 랑군 관광기념품 판매점에서 1983년 10월 8일에 구입했던 오각별 귀걸이 3 세트, 나무십자가 묵주 하나가 전부였다. 아버지 강민철의 시신은 북한 대사관에서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한국 대사관에서도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결국, 국립 버마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변해 인야인 호수에 뿌려졌다.
2009 년 2월 16일, 인천 국제공항
승객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곧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대한항공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혁명열사 강민철의 아들로 조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스위스까지 가서 유학을 하였는데, 조국을 버리고 남조선에 온 것이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배려로 평양에서 혁명유자녀학원을 마치고 김일성종합대학교 물리학과와 스위스 취리히 국립대학에서 핵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오늘이 2월 16일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생일이다.
승객 여러분! 하는 아름다운 승무원의 기내방송에 내 가슴은 쿵 쿵 뛰었다.
비행기 유리문으로 내려다본 인천국제공항 모습은 아름다웠다.
저 멀리 푸른 벌판은 북한의 산하와 다를 바 없었다.
나의 서울행은 다른 탈북자와는 달랐다.
배가 고파서 탈북한 것도 아니고 북한 체제가 싫어서 탈북한 것도 아니다.
다만 아버지 강민철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다고 어머니 박은경이 스위스를 떠나 미국이나 남한이나 연구하기 좋은 곳으로 가라고 해서 실행한 것이다.
나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랑스 파리를 경유하고 필리핀과 일본을 거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인천국제공항 관제사의 통제에 따라 활주로를 서에서 동쪽으로 미끄러졌다. 덜컹하는 소리와 엔지소리가 들리더니 시동이 꺼졌다.
2009년 4월 15일
서울 세곡동 국가정보원 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한영빌라가 있다.
4층 빌라 건물 3 동이 한영빌라 101호, 102 호, 103 호다.
가운데 102 호가 국가정보원 신문관 함영세 서기관이 사무실로 사용하는 안전가옥이다. 원래 국가정보원 안전가옥이 서울 궁정동에 있었는데, 1979년 김재규가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만찬을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피비린 내 나는 사건을 기억하기 싫어하는 김영삼 대통령이 궁정동 안전가옥을 철거하고, 대신 세곡동 빌라를 독채로 구입해 안가로 사용했다.
안전 가옥 거실의 원탁 테이블에 3 명이 마주 앉았다.
함영세 서기관 그는 국가정보원이 과거 안전기획부라 불릴 때부터 신문관을 해왔다.
강미정, 1960년 11월 20일 생으로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데 탈북해서 중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개인에게 돈을 주고 탈출한 경우이다.
나 강영수는 1984년 7월 25일 생이다.
북한에서 만경대혁명학원을 마치고 김일성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스위스 취리히 국립대학에서 핵물리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핵의 인도적 활용 방안에 대해 연구 중에 탈출했다.
함영세 서기관은 미정에게 먼저 물었다.
강미정 씨, 생년월일이 언제입니까?
1960. 11. 20입니다.
가족사항을 말해보세요.
예, 아버지 강석준, 어머니 김옥선, 오빠 강영철 이렇게 네 식구입니다.
오빠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세요.
오빠는 통천에서 소문난 천재였습니다.
머리가 좋아 물리학 박사가 되고 싶었는데,
군대 입대 후 특수부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휴가를 나왔는데,
특수부대에서 훈련하고 나중에 훈련 마치면 남조선이나 외국으로
특파임무를 떠난다고 했습니다.
특파임무가 뭐냐고 물으니 넌 알 필요 없어하며 답을 피하더군요.
그렇다면 오빠 사진을 가지고 온 것 있습니까?
예, 오빠가 중학생이고 제가 인민학교 학생시절 가족사진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네 식구의 다정한 모습을 함영세 서기관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영수 씨, 가족관계는?
예, 어머니 박은경과 저 단둘이 살았습니다.
친척은 아버지 쪽 친척은 없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같은 동네 사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습니까?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 성함은 강영철, 해외 파견 전투원이었습니다. 1983 년 해외 나간 이후 한 번도 평양에 오지 않아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해외라면 어느 나라라고 들었나요?
아니, 모릅니다. 어머니도 어느 나라인지 몰랐습니다.
아버지 사진은 본 적이 있습니까?
예, 어머니는 늘 지갑에 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을 휴대하고 다니셨습니다.
강미정 씨, 오빠가 어느 나라로 나간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예, 오빠가 1983년 여름휴가차 와서 집에 하루만 묵고 평양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 가봐야 한다고 하룻밤만 자고 갔는데, 그날 밤 어머니 아버지와 오빠의 대화에서 오빠는 인도나 버마로 갈 것 같은데, 정확한 것은 부대로 복귀해 봐야 안다고 했습니다.
오빠 사진을 보면 기억하겠습니까?
그럼요. 기억하지요.
함영세 서기관은 원탁 위에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놓았다.
사진을 보는 순간 미정은 오빠! 우리 오빠 맞아요! 오빠 어디 계셔요?
미정은 오빠 영철의 사진을 붙들고 가슴에 안았다.
이 흑백사진 한 장은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후 1993 년, 버마 순직자 가족들이 버마를 방문할 당시 버마에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안내 및 안전 책임자로 동행하면서 함영세 서기관이 강민철이 수감된 인세인 감옥에 면회를 하고, 국가정보원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강민철의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사진 속의 강민철은 강영수와 붕어빵이었다.
오빠 강영철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미정에게 오빠의 아들 조카였고, 미정은 나에게 아버지의 유일한 여동생 고모였다. 나는 미정을 향해
고모! 하고 불렀다.
고모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영수, 영수야!
세상에 이런 일이! 난 오빠가 아직까지 장가도 못 가고 총각으로 해외에서 들어오지도 못했구나 생각했는데, 세상에 이런 오빠랑 똑같은 아들이 있다니!
함영세 서기관은 주머니 속에 강민철이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소에서 테러를 하고 버마 군경에 잡힐 당시의 사진도 가지고 있었으나 차마 고모와 나에게 그 끔찍한 사진을 보여주지 않고 주머니 속에서 손만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고모와 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함영세 서기관이 신문을 이어갔다.
강미정 씨, 강원도 통천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세요.
예, 우리 통천은 남조선의 유명한 사업가 정주영 회장님의 고향으로도 유명하지요.
바닷가라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곳입니다.
관동 8 경의 하나인 ‘총석정’이 있습니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통천평야에서는 곡식도 많이 거두어 살기 참 좋습니다.
오빠 이름이 강민철 맞습니까?
아니요, 오빠 이름은 강영철입니다.
선생님이 보여준 자료에 강민철 1955년 4월 18일 생으로 된 것은 가짜입니다.
진짜 생년월일은 1957년 7월 29일 생입니다.
오빠와 저는 3 살 차이입니다.
제가 1960 년생이니까 오빠는 1957년이 맞습니다.
강미정 씨, 북한을 탈출한 이유와 어떤 경로로 왔습니까?
1994 년부터 이어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배가 고파 식량을 구하려고 통천에서 청진으로 갔습니다. 청진은 통천보다 먹을 것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청진에 갔는데, 거기서 국경 연선에 나가 밀무역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사람 말을 듣고 나진 선봉까지 따라갔습니다.
거기서 밀무역 심부름을 해주고 돈을 좀 벌어 통천으로 왔지요.
번 돈 다 쓰고 다시 밀무역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 이번에는 혜산으로 가서 거기서 압록강을 도강했습니다.
중국에서 어떤 선교사 분을 만나 그분 도움으로 한국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북에 계신 부모님이 고초를 겪지 않겠습니까?
일 없습니다. 북에서는 지금도 내가 돈벌이 나가 밀무역하는 줄로만 알지, 남조선까지 온 것은 모릅니다. 그러니 제발 선생님, 저의 이름과 신상이 신문이나 방송에는 절대로 나가지 않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하지요.
우리는 탈북주민에게 북에 남은 가족을 염려하는 분은 절대로 신분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어 함영세 서기관은 나에게 질문했다.
강영수 씨, 스위스 유학만 마치고 북으로 돌아가면 핵물리학자로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편히 지낼 수 있는데, 왜 탈출하였습니까?
예, 스위스에 유학하고 있는데, 2007 년 5월 31일 날 어머니가 국제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버지가 해외로 나가 전투임무를 수행하다 잡혔는데, 같이 잡힌 전투원은 묵비권으로 사형을 당했고, 아버지는 사실대로 자백을 한 것이 뒤늦게 당에서 비판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여자 혼자의 몸으로 나를 키우는 것을 가엾게 여긴 고급 당 간부가 어머니를 돌봐주고 어머니는 가끔 그 고급 당원의 애인 노릇을 했다고 하시며 우시더군요.
영수 너에게 미안하고, 민철 씨에게 더욱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어머니는 스위스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가든 한국으로 가든 네가 연구하기 좋은 곳으로 탈출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와 통화 후 어머니는 전화가 도청되니 너는 더 이상 나에게 전화해서는 안 된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어머니와 통화 후 저는 신문 기사에서 전 세계의 테러 사건은 다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1983 년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에 대한 영문 기사와 흑백 사진의 강민철, 진 영관 소좌의 사진을 보고 저는 머리가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희미한 흑백 사진 속의 강민철은 ‘나의 아버지 강영철’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위스에서 바로 버마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현실은 쉽게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유학에 나와 다른 유학생을 감시하는 당 세포 동무에게 일일 행동을 다 보고해야 했습니다.
하늘이 도와 나를 감시하던 당 세포 동무가 스위스에서 줄리아 김이라는 한국 이미 2 세와 부화 사건이 발생해 2007년 12월 23 일 평양으로 소환되고, 새로운 당 세포 동무는 12월 31일에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에서는 임시로 유학생 중에 가장 출신 성분이 좋은 ‘ 손성원 박사’를 유학생 책임자로 지명했습니다. 같은 유학생끼리의 감시라 당 세포 동무에게 보고하는 것보다 편했고, 여행도 편리를 잘 봐줬습니다. 그래서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독일과 프랑스를 여행하고 오겠다고 손성원에게 보고하고 독일로 갔습니다.
거기서 독일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남한으로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스위스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망명은 약간의 외교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으나 스위스 정부에서 개인의 망명의사를 존중해 준다며 독일에서 국제법에 따라 난민 신청을 하고 한국으로의 망명을 허락했습니다.
함영세 서기관은 더 이상 고모와 나에 대한 신문을 계속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냉장고로 가서 캔 음료수 3 개를 꺼냈다.
고모와 나에게 하나씩 주고 자신도 한 캔 마셨다.
창밖을 보았다.
새털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갔다.
왜, 하필이면 이때 고모 강미정과 내가 한국으로 왔을까?
참으로 하늘도 하느님이 계신 것인지 없는 것인지.
조금만 빨리 고모나 나 둘 중 한 명만 일찍 한국으로 왔다면, 그래서 버마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이 강민철이 아닌 ‘강영철’이라고 그 혈육이 남한으로 왔다면 톱뉴스가 되었고, 한국 정부도 강민철 아니 강영철을 외교적 노력을 다해서 강민철을 한국으로 이송요청 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질 좋은 의료 서비스가 그의 간암도 초기에 발견했고,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 나의 아버지 강민철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외로운 영혼이 되었다.
1983년 10월 9일의 테러가 아버지 강민철 자신은 조국통일을 위해 이 한 몸 바친다는 각오로 임했다.
한 가지 아버지 마음이 무거운 것은 사형집행 된 진영관처럼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사건의 전모를 미주알고주알 다 까발린 것이 비판받을 일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여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강민철은 불꽃처럼 살다 간 청춘이다.
제12, 13 대 대통령 이 취임식
여의도 광장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단임제를 실천하고 떠나는 전두환 대통령과 1987년 역사적인 국민 직접투표로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사이좋게 식장을 들어서고 있었다.
두 분의 대통령 내외를 보기 위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거리마다 ‘단임 실천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두환 각하 내외분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그런 류의 현수막과 피켓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들의 시위로 청와대서 쫓겨 하와이로 망명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3 선 개헌을 하여 장기집권에 성공했으나 임기 말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갔다.
장면, 윤보선 대통령 시기는 데모로 해가 떠서 데모로 해가지는 엉망의 난국에서 5.16 혁명인지 군사 쿠데타인지 불분명한 상황으로 하야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일당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 대통령에서 하야했다.
주어진 임기를 꽉 채우고, 내 발로 청와대를 걸어 나가는 최초의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이다.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는 전두환 대통령을 단군 이래 최고의 통치자라고 감탄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런 서정주 시인의 호 ‘미당(未堂)’을 이순자 여사가 ‘말다(末堂)’ 서정주로 읽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개그프로그램의 한 코너 ‘말다(末堂) 학교’가 1988 년 전후해 인기 프로가 되었다.
우리나라 여의도 방송국이 한쪽은 ‘봉숭아 학당’으로 인기를 얻을 때, 다른 방송국에서는 ‘말당학교(末’堂學校)가 방송되었다. 봉숭아 학당보다 말당학교의 인기가 높았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 未堂 서정주-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아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임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으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 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세계에 넓히어
코리아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시안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 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 능력은 옛것이나 새것이나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하 생 략 )
1988년 2월 25일, 이날이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평화적으로 대통령을 떠나고 취임하는 오천 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의도에는 우리나라 KBS, MBC, SBS, 연합통신, 내외통신 등의 기자와 NHK, CNN, BBC, 신화통신, AP, UPI 등 세계적인 언론이 모두 모였다. 대통령 이·취임식을 생중계하거나 녹화하기 위해서다.
사회자의 사회에 따라 국민의례가 거행되고, 대통령 선서, 축하 노래, 이임사, 취임사로 이어졌다.
이임 대통령의 리무진이 행사장을 빠져나가 연희동을 경유하여 백담사로 향했다.
이임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는 7년 동안의 단임 대통령 기간 정말로 휴식이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퇴임하면 바로 백담사로 가기로 예약되었다.
백담사 주지였던 ‘일해(日海)’ 스님이 과거 전두환 대통령이 군인 시절 제1 사단장을 했는데, ‘일해(日海) 스님’이 그 1 사단 군내 사찰인 ‘일문사(一聞寺)’의 군종법사로 봉직했었다.
그 인연으로 전두환 장군은 머리가 복잡한 사단 내의 문제가 생기면 일해 스님을 찾아가 환담을 했다.
그때마다 일해 스님은 아주 샘물 같은 지혜를 주었다.
아니, 전두환 장군의 내면에 이미 들어있는 총명의 기운을 밖으로 내뿜게 한 것이다.
사단장을 마치고, 국군 보안사령관 시절에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10.26 사건이 터진다.
김재규와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친분 관계가 깊어 10.26 사건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해야 하나 대통령의 재가 없이 계엄사령관을 조사할 수 없어 머리가 복잡할 때, 전두환 보안 사령관은 백담사 일해 스님을 찾았다.
그때, 일해 스님이 전두환 보안 사령관에게 해준 말은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높으나 하늘 아래 있고, 물은 아래로 흐르나 바다 위에 있구나’라는 아주 묘한 말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의 내면의 총기(聰氣)를 밖으로 분출했다.
전두환 보안 사령관은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12.12 거사 암호명 ‘백일집 잔치’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방조자 혐의로 체포했다. 이어 1980 년 광주에 5.18 광주 민주 항쟁에 도화선이 되는 공수 특전단을 광주에 파견하여 광주 민심을 자극했다.
1983 년 8월, 선양과 연변
서초동 정보사령부 지하실 벽면에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다.
태극기 아래 단상이 하나 있다.
특수임무 수행요원 파견신고가 있었다.
정보 사령관 김영철 소장은 3 명의 특수임무 수행자 신고를 받고 있다.
군번이 제일 늦은 함영국 소령이 맨 좌측에 서고 가운데 안광수 소령, 군번이 제일 빠른 조하영 소령이 제일 우측에 위치했다.
왜냐하면 사령관이 단상에서 걸어 나와 좌에서 우로 친서 임무수행 사령장을 수여하였기에 서는 건은 군번의 역순으로 섰다.
사령관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바로! 지금부터 해외 파견 특수임무 수행자에 대한 사령장을 수여하겠습니다.
(임명장)
소 속 : 제7777 부대
계 급 : 소령 군번 : 7977310 성명 : 조하영
위 사람을 선양 해외 공작임무에 명함
1983년 8월 16 일
국군 정보사령관 육군 소장 김 영 철
(다음) 안광수 이하 내용은 같습니다.
(다음) 함영국 이하 내용은 같습니다.
사령장과 함께 부상으로 사령관님 친필 서명이 들어있는 금장시계 남녀 부부용이 수여되겠습니다.
3 명의 소령 급 장교는 해외공작 임무 사령장을 받고 출국을 하였다.
임무 사령장을 받을 때만 군인 정복을 입었지 출국부터는 정말 새로운 신분이었다.
아니, 자기의 성과 이름을 숨기고 제3의 가공인물로 살아야 했다.
출국 여권을 받았다.
여권의 이름은 함영국은 함영국이 아닌 ‘천금성’으로, 안광수는 안광수가 아닌 ‘장백산’으로, 조하영은 조하영이 아닌 ‘백세주’로 살았다.
이것은 만약에 공작이 탈로 나도 한국에 이런 사람 없다고 가짜 여권 위조여권이라고 발뺌할 도구를 미리 위조 여권으로 만든 것이다. 천금성, 장백산, 백세주가 그렇게 탄생된 것이다. 북한도 해외 공작 임무 수행 전투원에게 가명으로 여권을 만들어 주고 혹시 실패하면 그런 사람 없다고 발뺌하듯이 한국 정보 장교들도 해외에서는 가명을 썼다. 한 마디로 실패하면 남의 이름으로 죽어야 했다. 천금성, 장백산, 백세주는 중국행 비행기도 따로 탔다.
서초동 정보사령부 정문을 나온 후로는 서로 알 필요도 없고 아는 척할 수도 없었다.
만약에 실패해도 혼자만 처단되고, 성공해도 혼자의 성공이었다.
각자의 방법으로 첩보수집 임무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천금성은 김포 공항 행 리무진 버스를 탔다. 집이 대방동 군인아파트라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공항 리무진을 탔다. 출국 수속을 밟는데, 누가 어깨를 치면서
어머, 함 소령님 아니세요? 했다. 이 많은 출국 인원 중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여권상의 이름이 아니라 본명 함영국을 부르다니?
천금성이 옆을 봤다.
여군 신윤희 중사였다.
정확히 표현하면 예비역 육군 중사 신윤희였다.
어, 신 중사 웬일이야?
에이, 숙녀에게 신중사가 뭐예요? 제가 제대한 지 2 년이 넘었는데요.
신윤희 양, 여기 웬일이야?
예, 그렇게 부르셔야지요.
역시 함 소령님은 센스 쟁이야! 하며 깔깔 웃었다.
이거, 정말 신윤희 양을 김포 공항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저도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전방 155 마일 철책을 지켜야 하는 함 소령님이 이 밝은 대낮에 김포공항 그것도 해외 출국장에 있다니.
내가 잘못 봤나 하고 자세히 봤어요.
비슷한 사람을 보고 인사했는데, 아닌 경우 참 민망하거든요.
자세히 보니 서류에 볼펜 들고 쓰는데 왼손으로 쓰는 것을 보고 함 소령님이다 확신했죠. 그리고 벗은 모자에서 특유의 대머리도 확인했고요.
하며 까르르 웃었다.
함영국은 신윤희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신윤희 양, 부탁이 있어.
뭔데요?
저, 미안한데 나를 함영국 소령으로 부르지 말고, 천금성, 천 씨 오라버니 아님 천 씨 오빠라고 불러주기 바라.
그럼, 호적이 바뀐 겁니까?
아니, 호적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해외 특수임무 수행자로 가게 되어.
알지 신윤희 양 예전에 신윤희 양이 대북 방송할 때, 탈북한 사람 대담에서 가명으로 방송하듯이 내가 그런 입장이거든.
예, 알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흑색 여권으로 일하러 가시는 군요, 하며 웃었다.
신윤희 양은 제대해서 뜻한 대로 유학을 갔나?
예, 이제 3학년 올라가요. 천금성 오빠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제대한다고 했을 때, 심리전 단장님이 방송요원 부족하니 신임 여군이 보충될 때까지 전역지원 보류하라고 해서 참 난감했는데, 천금성 오빠 덕분에 전역했잖아요.
그렇다.
신윤희 중사는 1975 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운명하신 해 겨울에 앵무새가 되었다. 대북 방송하는 여군을 주어진 원고를 보고 반복 방송을 한다고 여군 방송요원을 앵무새로 불렀다.
원래 신 윤희 중사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은 여군이었다.
영월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상경하여 모 방송국의 성우 지망생이 되었다.
층층시하 기라성 같은 성우들이 많이 있고, 방송국은 KBS, MBC 뿐이라 정말로 특이한 목소리 아니고는 제대로 된 수입을 올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국군 심리전단에서 방송 요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의무복무 기간 4년 8 개월을 복무하고 장기 신청을 한 상태서 전역을 하고자 했다.
함영국 소령은 그때, 국군심리전단에서 대위로 인사 장교였다.
전역지원서를 가져온 신윤희 중사에게 전역 사유를 물어봤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대학공부를 하고 싶어요.
제가 4 년 8 개월 동안 저축한 돈으로 중국에 유학 가면 2 년 정도는 그냥 공부할 수 있고, 그 후 중국말 유창하게 되면 한국 관광객 중국어 통역을 하거나 관광 가이드로 아르바이트가 가능해 도전하는 것이라 했다.
신 윤희 중사의 전역지원서를 가지고 국군심리전단장실에 결재를 받으러 갔다.
국군심리전 단장 서경원 준장은 결재 서류를 집어던졌다.
야, 인사장교 너 정신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단장님, 신윤희 중사 본인 면담 한번 해보시고 결재하시든지 하지죠?
필요 없어. 당장 여군 방송요원 부족해서 여군들이 전방 G.P(General Post) 올라가면 교대를 1 주 단위 못하고 한 달에 2번 하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아는 놈이 여군 방송요원 전역지원서 기안을 해?
단장님이 여군 신윤희 중사의 인생을 책임져주실 것 아니면, 결재하시는 것이 순리입니다. 만약에 단장님이 결재처리 안 해주시면 신 중사에게 개인적으로 대방동 여성법률 지원센터나 국민 고충처리 위원회에 가서 상담하라고 할 것입니다.
뭐야? 너 함 대위, 제정신이야?
이거 대위에서 소령 진급 취소시켜야지 안 되겠군!
진급을 단장님이 시켰습니까?
뭐야? 이놈이 정말 겁 없는 놈이네!
솔직히, 제가 이놈의 국군심리전단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고. 진급은 이미 제가 전 부대 국군정보사령부에서 그동안의 첩보 수집 성과를 고려해 진급한 것이지 단장님 도움 하나도 없습니다.
신 윤희 중사의 전역지원서 결재를 놓고 국군심리전 단장 장군과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는 함영국 사이에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일주일 정도 대치하다 결국 국방부 민사심리전 부장 장영하 소장의 전화를 받고 전역지원서를 결재받고 육군본부로 보냈다.
인사장교 함영국과 국군심리전 단장 서경원 준장의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국군심리전단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다.
부하의 남은 인생까지 다 책임질 자신 없으면 전역지원서 막을 단장은 이 세상에 없다. 전역 후 신윤희 중사는 북경 외국어 대학교 중어중문과에 유학을 떠났다.
신윤희 양이 천금성을 선양까지 안내해 주고 안전한 숙소까지 알선해 주고 북경으로 떠났다. 사람 인연의 소중함을 천금성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때, 국군심리전단장의 야단에 주눅이 들어 신윤희 중사의 전역지원서를 보류했다면 오늘 김포공항에서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천금성은 선양에 장백산은 연변 백세주는 화룡에 각각 안착했다.
안착하자 공작금으로 가져간 100만 달러를 일부는 중국 화폐로 환전을 하고 일부는 달러로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력자에게 중국화폐보다는 달러가 유용했기 때문이다.
3 명의 첩보장교들은 현지에서 조력자를 구했다.
중국말도 잘하고, 북한 말에도 능통한 조선족을 찾았다. 어차피 첩보 수집을 하더라도 북한 땅에 직접 들어가기에는 여러모로 제한 사항이 많았다. 중국과 북한의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면 첩보 수집 장교의 조력자로 안성맞춤이었다.
천금성은 ‘제갈 정도’를 장백산은 ‘박기서’를 백세주는 ‘김진대’를 조력자로 구했다.
제갈 정도, 박기서, 김진대 모두 북한과 중국의 무역을 하는 조선족이었다.
제갈 정도 아버지 ‘제갈 정의’는 제갈량의 후손으로 중국 한족 출신이고, 어머니는 북한 여자였다.
어머니 쪽 친척들이 평양에 거주하면서 조선노동당의 고위층에 많이 있었다.
그 덕분에 국경연선에서의 검문에 크게 시달리지 않고 무역을 했다.
정보보고 제1 호
수신 : 정보사령관
참조 : 정보처장
제목 : 국화작전 행사에 대한 천금성의 보고
내용 : 천금성이 고용한 조력자 ‘제갈 정도’에게 득문한 사항임.
북한의 5천 톤 급 무역선 동건애국호가 9월 초 황해도 옹진항 출항 예정 목적지는 버마 랑군. 새로운 사항 득문 시 추가 보고. 이상. 끝.
1983년 9월 1일. 보고자 천금성
정보보고 제2 호
수신 : 정보사령관
참조 : 정보처장
제목 : 장백산 등산 준비에 대한 보고
내용 : 장백산이 고용한 조력자 ‘박기서’에게 득문한 사항임.
북한의 강창수 부대에서 해외 공작을 위한 인원 선발함. 진영관 소좌,
신기철 대위, 강민철 대위 임. 추가 득문 시 보고함. 이상. 끝.
1983년 9월 2일. 보고자 장백산
정보보고 제3 호
수신 : 정보사령관
참조 : 정보처장
제목 : 국화꽃을 건조하는 방법에 대한 보고
내용 : 백세주가 고용한 조력자 ‘김진대’에게 득문한 사항임.
국화 재배 단지에서 국화를 대량으로 건조할 방법을 연구 중.
연구단지 버마 아웅산 묘역 일대임. 추가 득문 시 보고함. 이상. 끝.
1983년 9월 3일. 보고자 백세주
하루씩의 시간 차이는 있지만 3 명의 첩보 장교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조력자로부터 나름의 충실한 보고서를 본부로 타전했다. 이 보고는 모두 난수표로 암호화되어 보고한 것을 서초동 정보사령부에서 다시 해역 해 옮긴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진다는 말이 있지만 각자 자기 나름의 보고를 정보사령부 정보처장 오현택 대령은 정보보고서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점을 찾아 선을 이어 통일 성업에 한 몸 바치는 심정으로 퍼즐 맞추듯 첩보 조각들을 모아 정보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보장교의 보람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한 장 정보보고서가 채택되었을 때 그 기분은 어떤 금전적 보상보다 큰 의미가 있다.
수신 : 정보본부장/국가 안전 기획부장
참조 : 정보 1 처장/ 해외공작단장
제목 : 정부 추진 국화작전에 대한 최초 보고
내용 : 정보사령부는 정부 추진 중인 국화작전의 성공을 위해 중국에 3 명의 영관
급 장교를 파견했다. 3 명의 첩보 보고를 종합 분석 결과
북한 동향은 다음과 같다.
1. 북한은 해외 테러리스트를 파견할 것으로 예견된다.
2. 장소는 버마 아웅산 묘소 일대
3. 이동 수단은 동건애국호라는 화물선으로 랑군항 근처까지 이동 후 수영이나
소형 보트 등의 수단으로 랑군 시내 진입 예상됨.
4. 건의사항
국화작전 대상국에서 버마를 제외바람.
만약, 제외가 어렵다면 실내 행사만 참석하고 옥외행사(참배, 관광 등)는 취소할
것을 건의함.
1983년 9월 4일. 보고자 국군정보사령관 육군 소장 김영철
(분석관 정보처장 대령 오현택)
정보사령관 김영철 소장은 정보본부장에게 부사령관 이진석 준장은 안기부장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노신영 안전기획부장은 청와대로 갔다. 경호실장 장세동이 배석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서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순방 국가에서 버마를 제외시킬 것을 건의했다.
만약에 국제 신의를 생각해서 취소가 어렵다면 실내 행사만 하고 옥외 행사 묘소 참배나 관광 등은 취소할 것을 건의했다. 보고하는 사람이나 보고 받는 사람이나 이런 경우는 침묵이 길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전두환 대통령이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솔’이었다. 한 모금 길게 빨았다. 보고하는 노신영 안기부장과 배석한 장세동 경호실장에게도 담배를 피우라고 건넸다. 전두환 대통령은 장세동 경호실장에게 물었다.
경호실장, 임자 생각은 어때?
저는 뭐,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국제관계 신의라는 것이 있으니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옥외 행사는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경호원 수를 늘리지 뭐. 어때? 경호실장이 테러를 겁내면 되겠어?
겁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1980. 12.12 일에 죽음을 각오하고 백일집 잔치 거사를 했으니까 지금은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현지 공관에 지령을 내려 대사관의 경비를 철저히 하고 국가정보원 해외 각 근무자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로 했다. 안전기획부 버마 랑군 주재 파견관 허남태 서기관은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랑군 경찰청과 군부 정보 실무자 정보 최고 책임자까지 만나고 다니면서 북한 선박, 비행기의 출입에 대해 철저한 검문검색을 요청했다.
1983년 9월 5일 버마 랑군항에 북한의 화물선 ‘동건애국호’가 입항을 했다.
입항 목적은 건설 자재 운반이다. 버마 경찰과 군인의 합동 검문 속에 동건애국호의 하역 작업이 진행되었다.
동건 애국호의 화물과 공식 선원은 신분증 대조 결과 본인들이 맞았다.
강창수 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3인의 테러리스트들은 이미 랑군 항에 도착 전에 공해상에서 소형 선박을 타고 랑군 항의 반대편 야산으로 은신하였다.
1983년 10월 7 일, 아웅산 묘소 동건 애국호를 타고 랑군항 근처에서 미리 소형 선박으로 침투한 3 명은 진영관 소좌, 신기철 대위, 강민철 대위였다. 3 명의 전투원은 폭발물을 가지고 아웅산 묘소에 잠입했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려는데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들도 맨손으로 천장에 오를 수 없었다. 강민철이 아웅산 묘소 관리소장을 찾아갔다.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 경호원이라고 말하고 사다리를 빌렸다. 사다리 빌리는 대신 1만 차트를 주었다. 1983년 환율로 1만 차트는 한국 돈 1 백만 원 정도였다. 사다리 덕에 짧은 시간에 지붕에 폭발물 설치를 완료했다.
한편 아웅산 묘소 관리소장은 자신이 한국 경호원에게 사다리를 빌려주었고, 사다리 빌려준 대가로 1만 차트를 받았다고 랑군 경찰에 신고했다. 사다리를 빌리는데 돈까지 주고 빌린 것이 수상히 여긴 랑군 경찰청 정보과장은 2명의 형사를 대동하고 현지 순찰을 나왔다. 사다리를 다 사용한 후 강민철은 관리소장에게 사다리 잘 썼다고 영어로 ‘땡큐, 땡큐’ 하면서 사다리를 반납했다. 랑군 근처 야산에서 아버지 강민철은 군경 합동 추격조에 체포되었다. 체포되자 강민철은 처음 1주 동안은 배운 대로 묵비권에 들어갔다.
버마 경찰은 묵비권 사용해도 좋다. 당신이 묵비권 행사하는 동안 우리도 물 이외의 음식제공을 거부한다고 했다. 일주일 굶고 나니 더 이상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한 톨의 음식이라도 먹으려면 말을 해야 했다. 아버지 강민철은 자백했다. 진영관 소좌는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다. 진영관 소좌는 사형이 구형되고 아버지 강민철은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끝>(원고 분량 20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