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창고. 17

망원

by 함문평

망원(望遠)


얼마 전에 모르는 전화번호 문자를 받았다가 보이스 피싱을 당한 후로 저장된 번호 아니면 받지 않았다. 부고가 왔다. 고민했다. 바로 삭제할까 하다가 아무리 세상이 사악하다고 해도 부모 부고장으로 나쁜 짓 할까? 하는 생각에 열었다.

[부고] 알려드립니다.

저희 아버지 이창호 님이 향년 68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빈소는 횡성장례식장 2호입니다.

장지는 청일면 유동리 775 선산

아들 이현우, 딸 이현정 드림

아무리 생각해도 이창운, 이현우, 이현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울 대방초등학교, 성남중학교, 중대 부속 고등학교, 서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군대서 알던 선후배, 직장서 만난 사람 다 떠올려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또 문자가 또 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노트 한 권을 주셨는데, 제목이 <망원 참회록>이라는 것입니다. 함 씨 어른 손자에게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 망원이 생각났다. ‘망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멀리 본다. 또는 멀리서 본다는 뜻이다. 망원동이 멀리 달이 잘 보이는 동네라고 망원동이라 하듯이 횡성군 강림면에는 ‘월현(月峴)’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도 달을 보는 고개라는 뜻이다. 지금은 국가정보원으로 변경된 곳이 중앙정보부였고 줄여서 ‘중정’이라고 불렀다.

‘망원’ 노릇을 하던 이가 찾아왔다. 그 사람은 함 씨가 아니면서 할아버지를 당숙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할아버지와 친밀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3이라 오직 명문대 합격이 지상과제라 할아버지와 그와의 대화를 엿들을 마음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다. 주전자를 들고 대방시장 술도가에서 한 주전자 들고 오면서 신호 기다리면 한 따까리 마셨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길을 건너고 언덕을 올라 내려오는 골목 입구에서 또 마셨다. 두 분 대화하는 술상에 막걸리 주전자를 내려주고 거스름돈을 드렸더니 잔돈은 손자 용돈 해 하였다. 완전 정복 한 권 값이 250원인 시절, 700원이면 큰돈이었다. 감사합니다. 책상에 앉으려고 일어서니 할아버지는 공부는 나중에 하고 손자도 막걸리 마시고 조카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하셨다. 속으로는 연합고사가 얼마 안 남았다고 하고 싶으나 꾹 참고 자리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셨다. 그 사람 이름은 이창호였다. 할아버지가 횡성군 청일면 유동리라는 곳에서 서당 훈장 시절 제자였다. 갑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갈 형편이 못 되어 할아버지 중산서당(中山書堂)에서 천자문부터 격몽요결까지 익히고 서울로 갔다. 망아지는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믿고 횡성 한우를 몇 마리 팔아 장손을 서울로 유학시켰다. 신라 시대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하던 열두 살 나이에 서울로 왔다. 공부 열심히 해서 경기 중학, 경기고등학교에 가라고 하셨는데, 이미 서울은 고교평준화가 시행되어 뺑뺑이로 성남중학교에 또 뺑뺑이로 중대 부속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고3 일분일초가 아까운 때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 몇 잔이 들어가자 속내를 털었다.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대학 내 동향을 파악하느라 망원이라는 조직을 가동하는데, 자신이 망원 활동한다고 했다. 할아버지 안색이 일그러졌다.

“어르신 불편하시겠지만, 제가 망원을 그만두고 싶어도 한번 망원이 된 자는 깡패들 조직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 듯 여기도 그래요. 이제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보고서를 대충 써서 자네가 그 망원에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행세해서 도태되는 방법을 써야지?”

“그런데, 그렇게 허술한 보고서 쓰면 제가 삼일 공사로 불려 갈까 두렵습니다.”

“삼일 공사 그게 뭐야?”

“예. 중앙정보부 부산지사 이렇게 간판을 걸 수 없으니까 일반사람이 중앙정보부지사라는 것을 모르게 일반회사로 위장한 이름인데 말만 위장이지 부산 사람들 그거 삼일 공사가 중정 부산지사라는 거 다 알아요.”

“하여튼 미친놈이야. 삼선만 하고 종필이도 한번 기회를 주어야지 유신이 뭐야? “

“어르신도 유신 반대하시나요?”

“반대 정도가 아니야. 오카모토 미노루를 패 죽여도 시원치 않아.”

그는 망원 번호가 79-37이라고 했다. 79년에 37번째로 부여된 망원인데, 그가 마지막이면 37명의 망원이지만 그 뒤로도 몇 명이 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철저하게 점조직, 단선으로 이어진 망원이라고 했다. 대학 등록금 한 학기에 40, 50만 원 시절에 대학 내 잠입해 동향 보고 하나 보내면 20, 30만 원을 봉투에 담아주었다.

청사포와 해운대에 지금은 횟집이 100개도 넘지만 1979년은 10개 정도였다. 구룡 횟집이 망원 보고하는 곳이었다. 횟집 사장은 중앙정보부 운전기사로 은퇴했다. 퇴직금을 받아 김해에 땅을 사려다 아내가 횟집을 차리자고 했다. 아내는 제주가 고향이었다. 제주에서 횟집을 하는 부모 심부름을 해주 경력이 있어 횟집을 하면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말한 것인데 남편이 따라준 것이었다. 횟집은 잘되었다. 삼일 공사가 연말 회식, 간부 전출입 회식, 시무식 후 신년 회식을 구룡 횟집서 하는 것이 소문이 나자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여기를 많이 찾았다. 부산대학교 학생들 동향을 파악했다.

―보고서. 37-01―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 10월 15일 ‘유신철폐’,‘독재 타도’ 문구가 들어간 유인물을 뿌리고 100여 명 학생들이 구호를 외쳤습니다. 데모가 크게 확산 안 되고 해산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15일 김길수 드림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군법회의에서 진술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발생한 데모를 직접 목격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부산에 학생들만의 시위가 아니고 일반 민간인이 포함된 ‘민란’ 수준의 데모라고 보고했다. 박정희는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앞으로 서울에서 4.19 같은 데모가 일어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어’라고 했다. 옆에 차지철 경호실장이 ‘각하, 탱크로 밀어버리면 됩니다.’ 했다. 이 말에 분노를 느껴 시해했다고 했다.

1979년은 대통령에게 버거운 해였다. 전년도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 수는 민주공화당이 많았어도 득표율은 야당이 1.1% 높았다. 8월에는 YH무역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했다.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영숙이라는 노동자가 사망했다. 근로자뿐만 아니라 당사에 있던 신민당 국회의원과 당 사무처 직원들도 경찰 곤봉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 10월에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비판했다. 독재 종식을 위해 미국은 박 정권에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분개한 박정희 분을 달래려고 민주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10월 15일 데모가 용두사미로 끝나자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 정병민은 경제학 박유영 교수 화폐금융론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공책에 낙서했다.

― 선언문 ―

부산대 청년 학우들이여! 너희들은 오늘 무엇하느냐? 온 나라가 유신독재의 신음 아래 있거늘 마냥 보고만 있느냐? 청년 학우들이여!

전문적인 민주화운동 계보 데모 전문가가 아닌 서툰 문장이나 진심이 묻어났다. 몇 자 더 적었다. 동학운동 전봉준 흉내를 냈다. 폐정개혁안이라고 적었다.

― 폐정개혁안 ―

1. 유신헌법 철폐하라!

2. 학원 사찰 중지하라!

3. 안정성장 정책과 공평 분배하라!

4. 학도호국단 폐지

5. 언론, 집회, 결사 자유 보장

6. YH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7. 전 국민 정치보복 금지

구룡 횟집에서 보고서를 건네주고 회를 안주로 소주를 박 사무관과 마셨다. 박 사무관은 부산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군대를 마치고 고졸 출신으로 입사해서 학력 차별에 대해 눈물을 삼키고 차별을 건널 수단은 고시라고 생각해 고시 공부를 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성적이 좋아서 국무총리실로 차출된 것을 중앙정보부가 특채했다. 그가 군대서 축구, 족구, 배구를 잘했는데, 부대장이 육사라고 대령으로 전역해 중앙정보부에 상급 직위로 특채되자 부서를 5급부터 7급까지 채우라고 해서 데려간 것이었다. 그가 삼일 공사 사장이 되고 박 사무관은 대공 과장이 되었다.

“힘들지?”

“예, 학생들 데모대열 중간에 학생도 아닌 제가 학생인 척하고 유신 철폐하라 외치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래도 자네가 보고서 준 덕분으로 삼일 공사가 서울 본부로부터 욕 안 먹고 지낸다. 힘들어도 좀 더 참고 잘해, 알았지?”

“예.”

“그런데, 소문에 이화여대 학도호국단에서 부산대 학도호국단에 가위를 보냈다는데 사실이야?”

“저도 소문을 들었는데, 학도호국단에는 안 가봤어요.”

“학도호국단 안에 안 들어가도 학생 연대장이나 문화부장에게 구내식당서 옆자리에서 먹으면서 한번 물어봐?”

“예. 알겠습니다.”

10월 15일 도서관 앞의 시위가 용두사미가 된 것을 보고 정병민은 마음이 착잡했다. 경제학과 친구들이 부산대는 안 된다고 했다. 오죽하면 이화여대에서 가위를 보냈겠냐? 가운데를 자르라고 보냈을 거 아니야. 정말 부산대학교가 유신 대학교로 불리는 것이 학생들 자존감을 상실시켰다. 병민은 태인에게 내일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하자 태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병민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인 박종세에게 아버지 시험출제 다 하셨으면 등사기 하루만 빌리자고 했다. 흔쾌히 등사기를 들고 예약한 여관으로 갔다. 여관에서 밤새도록 등사했다. 10월 16일 경필로 희미하게 등사한 선언문을 도서관 앞에서 뿌렸다. 학생들이 몰려왔다. 100여 명에서 200, 300, 500, 700명 늘어 어림잡아 1,000명은 넘게 스크럼을 짰다. 도서관 주변이 좁아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천여 명의 학우들이 군대서 신병교육대 훈련병 앉은 번호 하듯이 8열 종대로 모였다.

자동으로 뒤에 8열 종대로 어깨동무하고 거대한 기차가 되었다. 유신철폐! 독재 타도! 외치는 함성이 학교 건물에 울려 메아리로 돌아왔다. 급하게 박모 대학 총장이 운동장에 내려와 방송했다. 학생에게 이렇게 소요하는 것은 여러분이나 학교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교실로 돌아가 학생 본연의 임무인 학업에 매진하라는 공자님 말씀했으나 학생들에게는 전혀 감동이 없는 메아리였다. 학생들이 교문을 뚫고 새내로 들어갔다.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김밥 장사 아주머니는 김밥, 일반 점방 주인들은 우유와 빵을 학생들 데모대열에 전달했다. 일부 시민과 학생이 아닌 젊은이들이 대열에 합류했다. 학생들 천여 명으로 시작한 데모대가 2만 3만 되었다.

부산경찰서는 긴급회의를 했다. 도저히 경찰력을 총동원해도 데모를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데모가 마산으로 확산했다. 부마항쟁은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주 시대를 시작하는 시발점이었다. 4.19 혁명이 3.15 부정선거가 시발점이라면 1980년대 민주화의 시발점은 부마항쟁이었다. 뉴스에는 부산 마산 지역에 시위가 노숙자, 불량배, 때밀이들이 김영삼 총재 제명에 불만을 품고 김 씨 추종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일어난 데모라고 일축했고, 경호실장은 박정희에게 탱크로 밀어버리면 된다고 해서, 천치 같은 박정희가 귓불이 발갛게 되면서 미소를 지었다. 김재규를 향해 중앙정보부는 그 많은 예산을 쓰고도 부산 마산에 데모하는 놈들 성분 파악 못 하느냐고 질책했다.

옛말에 서울서 남대문 기둥을 본 사람과 과천에서 남대문을 본 사람하고 싸우면 과천서 돌아온 사람이 남대문 기둥을 싸리나무라고 우기면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처럼 박정희와 차지철이 의견충돌 시 박정희는 늘 차지철 말을 들었다. 병민은 학생들이 모인 강의실 교단에 올라가서 ‘여러분, 우리가 이제는 강의실에서 답답한 억눌림으로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투쟁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나가서 싸웁시다. 10월 15일 용두사미로 끝난 시위가 끝이면 우리 부산대학교는 영원한 유신대학이 될 뿐만이 아니라 이화여대서 보내온 가위로 가운데를 잘라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부산대가 침묵의 대학 유신 장학생 대학에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시다. 그 말에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운동장에선 누가 선창했는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통일 대신에 <자유>로 바꾸어 불렀다. 노래를 마치면 유신철폐! 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다. 대학 총장이 마이크를 들고 방송했다.

― 학생 여러분!

총장입니다. 여러분의 충정은 충분히 알았으니 해산하고 교실로 들어가 공부에 매진 바랍니다. 총장의 마이크 방송 소리보다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외치는 유신철폐, 독재 타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리자 총장도 더 이상 방송 못 하고 총장실로 들어가서 문교부 장관에게 전화했다. 총장이 막아보려 했으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고 보고했다.

성난 시위대는 경찰서와 경찰차를 불태웠다. 부산대학생과 시민들이 이렇게 과격한 데모를 하는데 보도 한 줄 없는 KBS 부산방송국, MBC 부산방송국, 부산일보, 부산매일, 국제신문을 불 질렀다.

유신 세력들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 7주년 행사했다. 유신이여 영원하여라! 외치면서 축배를 들었다. KBS 전속 악단과 인기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밤 9시 조금 지나서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가갔다. 귓속말로 부산에서 데모가 너무 과격해지고 학생보다 일반 시민의 숫자가 더 많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손짓으로 사회자에게 만찬을 끝내라는 신호를 보냈다. 중앙정보부장, 경호실장,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 정권 실세들이 박정희 서재로 모였다. 긴급회동을 하고 최규하 국무총리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국무회의 결과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고 의결했다.

시위가 시민들의 합세로 커지자 엄태연은 병민에게 자기 옷을 벗어주고 병민의 옷을 입었다. 형장에서 주머니를 털어 친구들이 노잣돈을 주었다. 그 돈으로 현장을 이탈했다.

― 보고서 2호

1979년 10월 17일 정병민은 친구 옷을 바꾸어 입고 데모대열을 빠져나갔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1979. 10. 17. 김길수 드림

친구의 옷을 갈아입고 현장에서 탈출한 그는 일단 마산으로 갔다. 거기서 마산 가는 버스를 탔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중앙정보부의 정보망이 있음에도 경호실이 자체로 정보망을 가동했다. 부산에서 차지철에게 정보 보고가 올라왔다.

―정보 보고 제1호

수신 : 북악산 회장

참조 : 정보과장

발신 : 부산지국장

내용 :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한 데모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제명한 것에 거부감을 가진 부산에 김영삼 추종자들과 구두닦이, 때밀이, 부랑아들이 데모를 일으킨 것입니다.

보고자 부산지점장 홍성수 드림

1979년 5월 30일에 신민당 총재 선거에 김영삼이 선명 야당 재건을 선거공약으로 당선되었다. 6월 11일 취임 첫 외신기자 클럽 연설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그에 북한은 6월 18일 부주석 김일의 이름으로 김영삼 총재의 제안에 동의하며 판문점이나 제3 국 어디에서든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렇게 김영삼과 북한의 대화 분위기가 좋아지자 상이군경 100여 명이 각목을 들고 신민당사에 난입했다. 우리가 어떻게 지킨 나리인데 감히 김일성을 만나느냐고 신민당사를 각목으로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8월에는 YH 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여자 근로자들이 당사에서 농성했다. 172 명의 여성 근로자들이 밀린 임금을 해결하라고 농성하고 경찰이 진입 해산하는 과정에서 김영숙이라는 여성 근로자가 사망했다. 죽은 김 양 나이 21세였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박봉으로 남동생 학비를 대주던 소녀 가장의 죽음은 사람들을 눈물을 흘리게 했다.

9월 16일 김영삼 총재가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 미국은 한국에서 이란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주한미군을 내정간섭으로 볼 수 없다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압력이나 내정간섭으로 보지 않는다. 미국은 국민과 유리된 정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국민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때가 왔다고 한 것 때문에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뒤를 봐주고 국회의원이 된 민주공화당과 유정회 소속 의원들이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는 안을 상정했다. 김영삼 제명이 확정되자 김영삼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상도동 자택에 가택연금 되었다.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와 서울의 주요 대학이 9월 4일 유신철폐를 외치면서 데모했으나 신문에 보도도 안 되었다.

부산사태가 커지고 부산지역에 계엄이 선포되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이 가세한 시위는 민란으로 생각되었다. 김재규는 눈앞이 캄캄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부산에서 직접 확인한 바로 이번 데모는 민란 수준이라고 보고 했다. 누이 와이셔츠 단추 같은 박정희 눈이 일그러졌다. 이창호는 초등학교 때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 못 외운 학생은 교실에 남아 외울 때까지 집에 못 간다는 담임의 엄포에 더 외워지지 않아 고생했다. 중학생 시절은 유신헌법이 반포되었다. 학교 교실은 온통 유신 찬양 홍보물 장식으로 가득 찼다. 교과서도 유신에 관한 이야기 ‘한국적 민주주의’로 가득 차게 변경되었다.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알송 달송 용어로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유신 전까지만 해도 자유, 평등, 인간 존중, 삼권분립을 강조하던 선생님이 영혼 없는 강의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보고서. 37-02―

광복동, 남포동 일대 경찰차 20여 대 파손, 광복동 파출소 포함 10여 개 파출소 파손되었습니다. 부산 시내는 학생들보다 시민 숫자가 더 많고 대략 3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1979년 10월 17일 김길수 드림

경찰에서 파악한 광복동, 남포동 일대 시위대는 5만 명이었다. 경찰차 20여 대가 불타고 파출소, 민주공화당 당사, 세무서, 방송국이 습격당했다. 10월 19일 오후 6시 30분에서 20일 새벽 3시까지는 부산과 마산 대학생과 시민데모를 하는 곳에 심지어 서울, 대구, 대전, 광주 등 타지 대학생들이 유입되었다. 계엄이 선포되고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투입되어 완전 진압 때까지 처참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수부대가 주둔한 상태에서도 시민들의 데모는 목숨을 각오한 시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등학생과 그 또래의 근로자도 상당수 가담했다. 계엄 군법회의 발표에 의하면 부·마 민주항쟁 과정에서 부산 1,058명 마산 505명 등 1,563명이 연행되었다. 그중 학생 37명과 일반인 50명 등 87명이 군법회의에 회부 20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정병민도 최후 20명에 포함되었다. 친구의 옷을 갈아입고 도피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잡혔다. 부산경찰서 유치장에서 10월 26일 경찰들이 수화하듯이 손짓으로 대화하는 것을 의심했다. 27일에서야 경찰들이 박 대통령 서거 소식을 유치장에 잡혀있는 학생들도 알 수 있게 떠들었다. 기쁨보다 슬픈 생각이 들었다. 우리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유신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쳤는데, 박정희의 자발적 퇴진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장이 시해로 종식되었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망원 생활도 김재규가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넘겨지자 끝이었다. 부산에서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왔다.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심부름으로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받아오고, 할머니는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김치찌개를 하셨다.

“당숙 어른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죠?”

“뭘 어떻게 살아, 전혀 망원을 잊고 살아야지. 그거 발설하면 자네는 어디 취직도 못 할 것이고 결혼해서 자식이 태어나면 자식도 아비가 부끄럽다고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않을 걸세.”

“정말 잠도 잘 안 옵니다. 자다가도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정병인 학생이 너 때문에 내 인생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놀라 깨면 꿈인 적이 여러 번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한 짓을 아니라고 한다고 아닌 것이 될 수 없어. 반성하고 이 시간 이후는 그런 짓 안 하고 살면 될 거야. 내가 왜 박정희랑 백선엽 두 놈을 미워하는지 아나? 그 두 놈은 만주에서 광복군을 때려잡고도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였어. 최태민 그놈은 황해도에서 일본 놈 순사 끄나풀을 한 것이 김일성이 친일파 청산한다고 하니 피해서 남으로 내려온 놈이라 자기 잘못 알고 숨기는 놈이고 박정희와 백선엽은 나 잘못한 거 없어하는 놈이야.”

부산과 마산 민주항쟁이 유신독재의 종식을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30일 미만 구금자는 배상 또는 보상에서 제외되었다. 1980년 발생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특별법으로 제정되어 구금 일수에 제한 없이 국가로부터 생활지원금을 받는 것과 너무 형평성에 어긋났다. 부·마 민주항쟁 피해자와 관련해 부산과 마산에서 구금된 인원 중에 국가의 배상 또는 보상을 받은 사람은 30%도 안 되었다. 1979년 10월에 2023년 10월이면 44년의 세월이 흘렀다. 점점 피해자들이 사망해 인원도 줄어들고 기억도 희미해서 이 나라 유신독재 타도에 최초 학생과 시민이 연합 시위를 한 것인데 정확한 기록을 아직도 역사적 평가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서글프다. 그 시절 집압 부대 공수부대 참가자나 해병대 참가자의 양심적인 증언 한마디 없다. 할아버지와 망원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는 30년 전에 돌아가셨고,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고, 나이 30에 결혼하고 발가락 40개를 책임지느라 정신없이 살다 보니 나이 육십이 넘고 망원과 연락도 없이 살았다. 어제 부고를 받았다.

―<부고>―

(故) 이창호 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아래 같이 부고를 전해드립니다.

상주

이상철, 이경숙

장례식장 : 횡성장례식장 2호실

발인 : 2024년 11월 22일

장지 : 횡성군 청일면 선산

국화꽃 한 송이를 빈소에 올리고 묵념하고, 상주와 맞절은 다리가 불편해 악수로 대신하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아들이 함 선생님 문상 오면 전해드리라고 했다고 하면서 공책 한 권을 전해주었다. 제목이 <망원 비망록>이라고 적혀있었다. 첫 장에 정병인에게 쓰는 편지가 있었다.

―부산대 정병인 학생에게

정병인 학생이 그날 1979년 10월 16일 선언문을 뿌리고 데모주동자가 된 것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망원 보고서를 쓴 것을 늦었지만 후회하고 있소. 이 노트에 이렇게 쓴다고 뭐 정병인 학생 인생에 도움이 되겠소만 성도 다른 함재석 어르신께 당숙으로 부르면서 살았고, 그 손자 함 군이 언젠가는 작가가 된다면 이 편지를 기초로 정병인 학생의 진실함과 정의와 진리를 위한 순수한 열정을 소설로 다시 만들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보고서 한 장 쓰면 부산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이 40만 원 시절에 20만 원을 받았으니 큰돈이라면 큰돈입니다. 돈에 눈이 멀어 일제 강점기 일본 순사 끄나풀보다 더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내에게 자식에게 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살았다. 이 노트가 함 군에게 전해지고 ‘망원’을 했지만 이렇게 참회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는 ‘망원’인데 그해 ‘공수부대’나 ‘해병여단’ 참가자 중에 가해 입장에서 참회록이나 양심선언이 있었으면 이 나라가 얼마나 좋을까?

함 당숙과 막걸리를 마시면서 다시는 ‘망원’을 안 한다고 했는데, 김재규를 처단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고, 어떻게 알았는지 고향 강원도 횡성군 각림(覺林)까지 찾아와서 ‘망원 38호’를 시켰다.

나쁜 남자가 여자를 한번 강간하고 나면 그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해서 계속 여자가 자기 노리개가 될 수밖에 없듯이 ‘망원 37호’ 한번 한 것 말 안 들으면 가족에게 폭로한다고 협박해 1980년 광주에서 ‘망원 38호’를 했다. 망원 38호는 망원 37호 보고와 상대가 안 될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지금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변경된 중앙정보부의 비빌 보관소 어디 깊숙한 곳에 먼지 뽀얗게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죽기 전에 이 정도는 당숙 어른께 도움받고 인생 상담을 한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남기기 위해 기억나는 것만 써 본다. 첫째,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것이 아니라 북한군처럼 보이는 왜소하고 얼굴색 까무잡잡한 특전사 요원을 뽑아 공작편의대로 운용했다. 공작편의대 운용은 계엄사령부 일지, 2군 사령부 상황일지 육군본부 상황일지 또 제5공화국 이전의 역사라고 보안사에서 딱 3부만 만들었던 <五共前史>에 잘 나온다.

편의대 행동은 특전사 출신이지만 기획, 운용, 조종, 통제는 육사를 졸업하고 광주일고 출신이면서 당시 대공 분야 자타가 공인하는 에이스라 불리던 홍성철 대령이 했다. 같은 육사 출신 ‘지백원’이라는 사람이 광주에 5.18 시기에 ‘북한군 광수’ 600여 명이 활동했다는 말은 홍 대령이 얼마나 편의대 운용을 북한군처럼 잘했으면 그런 주장이 나오겠는가?

망월동에 묻힌 139기 유해 이외 행방불명으로 지금도 소재도 모르는 인원 중 일부는 광주교도소 담장 옆에 암매장하였고, 일부 시신은 광주통합병원이 현재 신축 건물이지만 해체된 건물 굴뚝으로 며칠 동안 밤낮없이 시신을 태웠다. 그 공로로 전시도 아닌 때 광주통합병원장 대령이 국가 무공 훈장을 받았다가 국회 여소야대 시절 훈장이 박탈당하는 수모를 당해도 찍소리 못하고 박탈당한 것이다. 만약에 정당한 무공 훈장이라면 그 당사자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이의 신청을 했을 것이다. 그런 이의 신청 못 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훈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하나회 출신이거나 5공 시절 고위직 사람들이 광주는 북한의 사주를 받아 김대중으로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망언을 하고 있다. 망원 참회록 쓰듯이 진실 기록을 남긴다. K-공작을 보면 안다. 이상재 준위 나부랭이가 다른 이름으로 가명으로 언론 통제 반장이 된 것은 그 K-공작 보고를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그 K- 공작계획을 읽어보면 답이 있다. 이미 그 공작계획대로 전두환 대통령 만들려는 계획하에 광주에서 일부러 특전사 요원에게 과잉 진압으로 광주 시민을 자극해 과격 시위로 유발하고 발포를 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계엄사령관 자위권 담화는 합리화일 뿐 이미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지휘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말을 맞춘 것이다.

공작편의대들이 어디서 어떻게 활동한다는 것을 사전에 중요한 것은 중앙정보부 광주 전남지사의 김 사무관에게 들었다. 보고서에 그들이 데모 주동자급에 옷 등 뒤에 주동자급 암호 표시를 해주면 계엄군 공수여단이 다른 인원보다 먼저 체포했다. 3 공수여단이 투입되어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진압되었다. 3 공수여단은 부산에서 망원 37호 보고 시절에도 진압부대다. 부산사태의 진압을 하고 자신들이 계엄군으로 부산에서의 활동을 사후 강평으로 만든 자료에서 시위 진압은 초기에 조심조심 진압보다 강경 진압으로 시위대를 겁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강평한 보고한 것이 1980년 광주에서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마지막은 부마 민주항쟁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있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부·마 민주화운동’으로 부른다. 부마가 ‘부마(夫馬), 부마(副馬), 부마(駙馬) 부산과 마산을 앞 글자를 따서 <부마>로 조어한다면 요즘 사람들이야 알겠지만 50년, 100년 후 사람들은 알 수 있을까? 각종 국가기념일 명칭을 정할 때 정말 그 시대를 반영하고 지명을 명확히 살리는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다. 또한 요즘도 기업이 해외 수주 다 해놓으면 대통령 내외가 정상외교라고 방문해서 MOU 서명하고 마치 그 MOU 때문에 수주가 성공한 것처럼 젓가락 하나 더 올리는 것이 꼴 보기 싫은데 부산에서 1979년 10월 16일 어디 있었는지도 불분명한 목사, 신부 이런 것들이 ’부·마 민주화운동‘ 유공자라고 온천지 기념행사에 강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날의 데모주동자 정병민을 밀착 감시를 한 ’ 망원‘의 자존심으로 인정할 수 없다. 박민식 신부나 김정식 목사나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와 부산 시내 데모에 아무런 공적이 없는 인물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다. 광주에서 아직도 후손들이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은데, 서울, 대전, 대구에서 유신반대 데모 주동했다고 은근슬쩍 광주민주화운동유공자 명단에 들어간 인원을 친일 인명록 만들 듯이 가짜 민주화 유공자 인명록을 만들어야 한다.

TV에서 정병민이 요즘 사는 모습이 나왔다. 10월 16일 선언문 쓴 고초로 평생을 변변한 직장 한번 없이 살았다.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일본으로 건너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라도 있으면 교수를 할 수 있겠다.라는 희망에 공부했다. 하지만 유신독재 타도를 위해 데모하다 잡힌 전과자는 어느 대학에서도 교수로 채용해 주는 곳이 없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요즘 외교안보연구원 산하의 연구원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자 이곳도 떠났다. 정말 이 나라는 정의길 정직의 길을 가는 사람보다 불의의 길 부정직의 길을 가는 사람이 더 잘 사는 나라다. 마치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고 살고 독립군 후손들은 불우하게 최저시급으로 연명하듯이, 민주화운동 그것도 유신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된 부산과 마산의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희생한 사람에 대한 국가 차원의 국가기념일 이름부터 잘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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