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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Jan 12. 2024

악마는 데테일에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 말을 누가 제일 먼저 사용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2013 년 9월 25일 제3 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대통령이 규제를 과도하게 해서 기업 발목잡지 마라는 취지로 한 말이었다.

  노동문제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연구원 안 재식은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예비조사 전문위원이 되었다. 기업들의 행태는 이중성이었다. 대통령이 부르는 청와대 만찬에서 기업들이 알아서 잘하겠다고 하던 기업들이 정작 안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된 순간 재식은 마음 한구석이 주저앉는 느낌을 받았다.

  재식은 H 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했다. 농화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등학교 이과반(理科班)에서 H 공대나 자연학대 화학과 갈 실력은 안 되고 농과대학의 농화학과는 합격가능이라는 담임선생의 족집게 맞춤식 원서 쓰기로 대학에 온 것이었다. 1980 년대 고 3 교실은 H 대학에 그 반에서 그 학교에서 몇 명 합격시키느냐에 따라 그 담임이 그 학교가 얼마나 유능했는지 평가받는 시대였다.

  흥미 없는 학과 공부보다 1980 년대는 지하서클이라는 무슨 독서회나 탈춤반, 농악반 등의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이 대학생활을 신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재식은 농악반에 들어갔다. 뭐 농악은 어려서 강원도 횡성군 강림에서 아버지 안 광수가 알아주는 상쇠였다.

열두 발 상모를 돌리면서 괭가리로 장단 맞추고 농악대를 리드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조금만 연습하면 아버지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학에서 축제에 흥을 돋우는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지원한 것이다.

  학교건물은 학교 건물이라기보다 강림 우체국이나 강림 중학교 건물처럼 보였다. 점심을 먹고 나면 재식은 철조망을 따라 학교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운동과 휴식을 병행했다. 원해서 들어온 농화학과가 아니라서 학과 사무실 학과 강의실 보다 농악 동아리 사무실 동아리서 만나 선배와 동기들이 더 매력적이었다. 수업을 빼먹는 날이 많아서 이제는 수업을 빠지고 농악 동아리 연습실에서 꽹과리 치는 것이 학과 수업보다 좋았다.

  학과공부는 재미없었으나 여름방학 동안에 농과대학교 시험장이 있는 강림에서의 추억은 아름다웠다. H 대학교 실습장을 가려면 태종대를 경유했다. 우리나라에 태종대가 여러 곳에 있는데 부곡 가는 길의 태종대는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임금이 되어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친 운곡(耘谷) 원 천석(元天錫)을 다시 조정으로 모시고자 치악산을 찾았다. 원 천석 입장에서는 어린 이 방원을 스승과 제자의 입장에서 학문을 가르치긴 했으나 고려의 선비가 새로 개국한 조선에서 벼슬하는 것을 마음 내키지 않아 멀리 치악산 ‘변암(弁岩)’이라는 곳에 은거한 것인데 제자가 왕이 되어 스승을 찾아온다는데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자 강림까지 마중을 나갔다. 강림서 부곡으로 향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왕을 만나고서는 벼슬자리를 사양할 수 없을 것 같아 빨래를 하고 있던 노파에게 내가 지나간 후에 누가 앞서 간 선비가 어느 방향으로 갔느냐? 고 물으면 저 바위 넘어 오른쪽으로 갔다고 말하라고 했다.

  이에 노파는 뒤에 오는 태종의 가마 일행에게 오른쪽으로 갔다고 대답을 했다. 가마의 행렬이 임금님의 행차인 줄 알고는 노파는 거짓말 한 대역죄를 알고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이곳의 명칭이 노파가 빠져 죽은 연못이라고 노고소(老姑沼)라고 부르고 바위에 태종이 쉬고 간 것을 기념해 정자를 지었는데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른다. 태종대 안에 비석이 있는데 주필대(駐畢臺)라고 새겨져 있다.

  태종 이방원이 우측으로 돌아간 고개는 수레가 넘어간 고개라고 이름이 ‘수레넘이’인데 발음 최소노력 최대효과라는 경제학 법칙에 의해 ‘수리네미’가 되었다. 수리에 미로 수레가 넘어간 것을 본 운곡은 태종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고 망배 했다고 해서  ‘배향산(拜向山)’이라고 한다. 수레가 넘어간 수리네미길이 요즘은 농촌의 경운기와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즐겨 달리는 도로가 되었다.

  지금은 문화재 관리부서에서 철망도 치고 자물쇠로 잠갔지만 재식이 대학시절에는 개방되어 있어서 탁본을 하고 표구액자를 교양국어 가르치던 이 경우 교수님과 Y 대 영문과 학생이던 김 선미에게 주었다.

  대학 2 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 졸업하는 4 학년 학점은 4.0이 넘는 우수하게 졸업했다. 이어 환경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 박사 학위를 마쳤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처음 참석한 것이 원진 레이온 직업병 관련 토론회였다. 발제자와 토론자의 발표문과 질의응답이 귀에 쏙 들어왔다. 산업재해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토론자의 의견을 경청하는데 바로 옆에서 한 50 대 중반 되는 어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에이 씨, 강아지 풀 뜯는 소릴 하네!” 하고는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순간 재식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발제자와 토론자들의 고담준론도 중요하지만 이 나이 든 중년의 단순 무식한 행동이 왜 그런지 알고 싶었다. 재식은 의자를 살살 들어 책상 밑으로 넣었다.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만 배가 아파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복도에는 전국 각지에서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손가락이 절단된 이, 팔 어깨 바로 아래까지 절단되기도 하였고, 발목이 이상이 있어 목발을 짚고 서있었고 그 옆에는 하체를 완전히 사용 못해 휠체어에 의지한 환자도 서너 명 있었다.

  그런 산업재해 환자 옆으로 어깨띠를 한 사람이 누에 띄었다. ‘사업재해를 돕는 사람들’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재식은 그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안 재식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산업재해를 돕는 사람들 사무국장 이 정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산업재해를 돕는 사람들 경기지회장 이 혁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산업재해를 돕는 사람들 서울 남부지회장 방 상범입니다.”

  자신들은 먼저 산업재해를 당해 회사로부터 퇴사당하고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는 최저등급의 판정을 받았지만 새롭게 산업재해를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이면 법 언론에 호소면 언론 호소로  돕는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남구로 역 근처의 컨테이너로 된 해병전우회 사무실 바로 옆 건물이 ‘산업재해를 돕는 사람들’ 사무실이었다.

  김 봉한은 1977년에 원진레이온에 입사하여 원액 2 과에서 7년간 근무하고 1983 년 퇴사했다. 이산화탄소 중독판정을 받고 산재요양 신청을 냈으나 불승인되었다. 이때부터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인정과 불인정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K 대학교 교수들이 원진레이온 환자에 대해서 산재승인을 위한 과학적 자료를 많이 찾아주었다.

  하필 이 무렵 K 대학교 총장을 하다가 1982 년 6월 25일부터 국무총리가 된 김  상협에 대한 관심이 컸다. 주요 현안에 대하여 전 두환 대통령과 마주해야 하는데 친척과 지인들은 대학총장을 했으면 가문의 영광이고 지조 있는 학자 집안 후손이 뭐가 아쉬워 전 두환 5공 정권에 부역을 자원하느냐? 질책을 했다. 김 국무총리는 총리를 자원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주변에 이런저런 압박을 받고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고려의 선비 운곡 원천석이 태종 이 방원을 돕는 심정으로 5공 내각에 들어간다고 했다. 결국 1 년 후 김 총리는 버마 <아웅산 사건>으로 국무위원과 주요 인사 17 명의 국민장 장례위원장을 끝으로 총리에서 물러났다.

  원진 레이온은 K 대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의 도움으로 산업재해 인정받은 환자가 900 명이 넘었다. 하지만 이 숫자도 산업재해 환자 판정 충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원진 레이온은 양복 안감에 사용되는 부드러운 실을 생산하는 곳이다. 공학명칭으로 비스코스레이온이라고 하는데, 목재 펄프를 가공하여 섬유소를 추출하고 이황화탄소를 유기용제로 처리한 것이 비스코스다. 이황화탄소는 휘발성이 높아서 공기 중으로 금방 날아간다. 비스코스레이온 제조에 이황화탄소가 이용되기 전에는 생산 공장에서  스프레이 공장, 살충제 공장에서만 사용되었다. 섬유공장에서 이황화탄소가 사용되다 보니 사용량이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예전부터 이황화탄소가 노동자들의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선진국은 알고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우리나라는 ‘수출보국’ ‘공업입국’ 구호 아래 산업을 육성시킨다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건강은 국가발전의 그늘 아래 있었다. 선진국은 이미 이황화탄소의 피해를 경험하고 이황화탄소가 사용되는 공장을 개발도상국가로 이전하고 있었다. 한국, 대만, 베트남, 중국 등이 이전장소가 된 것이다.

  재식이 근무하는 곳이 정식 명칭이 ‘노동환경 연구소 ’지만 사람들은 ‘원진 연구소’로 불렀다. 노동환경을 연구한다는 연구소의 설립취지보다는 연구소가 원진 레이온 산업재해 인정과 불인정의 치열한 싸움 시기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연구소가 일정 부분 산업재해 환자들에게 유리한 증거자료를 연구 결과물로 공표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노동환경 연구소 연구원 안 재식’이라는 명함으로 회사를 방문하면 문을 열어주고 ‘어서 오십시오’ 하는 회사는 하나도 없었다.

  ‘회사 방문 목적이 뭐냐?’

 ‘누구를 만나러 왔냐?’

 ‘사전에 그분과 전화약속은 했냐?’ 등등의 질문을 하고 바로 답변을 하지 못하면 돌아가라고 했다. 문전박대 그런 문전박대가 없었다.

  그렇게 수십 번의 거절을 당하고 나니 요령이 생겼다. 자신이 직접 회사나 공장, 하수처리장, 쓰레기 매립지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명함만 내밀면 출입이 가능한 변호사, 공인노무사, 손해사정인 등을 조력자로 섭외했다.

  그들이 재식을 대신하여 서울 독산동의 단추공장, 성수동의 구두공장, 인천 남동공단의 유리공장, 시화공단, 동두천의 염색공장 등을 두루 다녔다. 연구소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이들 대리인들이 수집해 준 자료가 연구소에 빼곡하게 채워졌다.

  2009 년 고용노동부는 총 56 종의 물질만 발암성 물질로 인정했다. 국제암연구소가 발암물질로 500 여개의 물질을 발표했는데 우리나라 고용노동부는 그 10% 정도를 발암물질로 명시해서 산업현장에서 그 56 종만 신중하게 다루도록 했다.

  2006 년부터 노동환경연구소에서는 민주노총 서울시지부와 손잡고 새로운 캠페인을 추진했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의자를’ ‘환경미화원에게 씻을 권리를’이라는 캠페인을 노조지부를 통해 산업현장에 청소하는 장소에 현수막을 걸었다.

  서울 도심의 골목마다 위치한 G S 25, C & U, 세븐 일레븐 등편의점과 고속도로 휴게소, 맥도널드, 롯데리아 등의 패스트푸드와 커피전문점의 종업원은 모두 서서 일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 잠깐 쉬도록 의자를 제공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법에는 명시되었으나 현장에는 없는 의자다. 검열이 나오면 의자를 보여주고 검열 마치면 치우는 의자였다.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에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은 자신들의 몸은 여러 세균으로 심각하게 오염될 위험에 놓여있다. 샤워시설과 방수처리가 된 작업복이 필수고 파상풍 예방접종도 해야 한다.

  발암물질이 고용노동부가 명시한 56 종이 아니라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재식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정부가 하지 않으면 민간 차원에서라도 해야 한다고 배짱이 맞는 사람들끼리 연구를 하고 발표와 토의를 하는 회의를 했다. 2009 년 6월 12일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첫 회의를 했다.

  동숭동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 모인 사람은 정부가 발암물질 목록을 작성하지 않는다면 정부만 바라보고 정부만 욕하는 학자가 아닌 행동하는 과학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뒤돌아보면 대학을 점수에 맞춰 흥미도 없는 농화학을 공부하고 군대를 마치고 농악 동아리 선배 중 한 명이 보건대학원에서 석사, 박사를 마치고 환경운동가가 된 것은 백 도명  교수를 존경해서 그분의 활동을 신문에서 보고 감명받아 환경대학원에 간 것이다.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 꿈만 같았다.

  정부가 인정하는 56 종의 물질 이외의 발암물질로 산업현장에서 근로자가 환자가 되고 근로복지공단은 56 종 물질 이외의 것은 산재 승인을 안 해준다고 하면 누가 책임지겠는가? 이 일은 국가가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조사 연구비와 교통비 식대는 모두 참석자 각자가 알아서 해결했다.

토론자 전원이 참석하는 식사는 백 도명 박사가 이 모임의 선임이고, 수입도 제일 많다고 스스로 많이 계산을 했을 뿐 다른 연구원들은 갹출을 하거나 한번 내가 사면 다음에는 당신이 사하는 정도였다.

  12 개 월 간의 모임과 토의를 하고 각자 연구 발표를 하고 교차 확인 실험을 하고 그들의 연구 결과를 하나로 모아 발표했다.

이름은  <발암물질 목록 1.0>이었다. 전자정부 2.0, 전자정부 3.0 시대인데 우리나라 발암물질은 이제 첫 시작 버전 1.0 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2010년 2월 25일 오전 10 시 국회본관 계단 앞에서 <발암물질 1.0> 선포식을 하였다. 고용노동부가 인정하는 56 종의 물질이 아닌 465 종의 물질이 발암물질이라고 당당한 선언을 한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즉각 반발했다. 노동부 보도설명 자료를 통해서 어느 나라도 이렇게 많은 발암물질을 인정하는 나라는 없다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해 보겠다고 보도했다.

  고용노동부에서 발암물질관리를 담당하는 공무원 정 규일 과장은 정부의 발암물질 관리에 문제가 있으며 이번 기회에 개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용노동부 내에 발암물질 제도 개선 태스크 포스(T F : Task Force)를 만들었으니 안 박사가 발암물질 감시네트워크의 주장을 태스크 포스에 와서 발표해 달라고 했다.

  고용노동부 내 ‘발암성 물질 관리제도 개선법안’을 만들고 정부에서도 <발암물질 1.0>의 목록을 인정함으로써 기업의 태도는 크게 변했다.

  2016 년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가장 큰 이슈는 ‘영업비밀’이었다.

삼성전자 피해노동자들이 요구한 자료에 대해 영업비밀이라며 제공을 거부했다.

그 비밀이라는 것이 작업 환경 측정결과나 안전진단 보고서와 같은 작업환경에 유해물질이 어느 정도 있는지 피해자들이 알아야 할 정보이고 사실 신규 근로자 채용 시 근로계약서 쓸 때 알려줄 사항이었다. 근로자들이 이 정보를 알지 못한다면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는 소송에서 어마어마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심 상정 의원이 삼성 출석자에게 집요한 추궁을 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메탄올 실명과 백혈병 환자에 대한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전국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직업병을 얻었으나 산재승인이 안된 잠재적 산업재해자들은 전국에 많이 있다.

  가습기 살균제로 어린이가 사망하여 국회에서 국정조사가 이루어졌다. 재식은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예비조사 전문위원에 포함되었다. 그동안 노동환경연구소에서의 활동과 발암물질 1.0 발표에 함께한 것이 국회에서도 공정하게 조사할 사람으로 여겼는지 위촉이 와서 수락했다. 국회의원들의 진실규명활동을 돕기 위해 화학 전문가로 자료를 요청해서 분석하고, 증인들의 답변 속에서 과학적 진실을 속이거나 은폐한 것을 찾아내는 일을 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가 이런 제품의 아이디어를 냈을까?’

‘누가 독성 물질을 가습기 물에 넣어 사람들에게 노출시켰을까?’

‘이거 아이디어 낸 사람은 아기가 있을까?’

‘이거 연구한 사람은 친척들에게 이걸 사용하게 권했을까? 아니면 말렸을까?’

‘정부는 이런 물질이 들어있는 제품을 유통되고 환자가 발생하는 것을 왜 몰랐을까?’

  가습기 살균제 최초 개발자는 노 승권이었다. 국회의원 김 삼화가 증인 노 승권에게 질문을 했다.

  “개발자 노 승권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개발한 발명가로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야기한 어떻게 보면 최초의 시작점에 있는 분이라고 보는데, 피해자들에게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노승권이 대답했다.

  “상품을 개발하고 최초로 출시할 때 후속 상품이나 모방상품이 일으키는 문제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상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 회사는 회사의 몫이 있습니다. 각 회사의 책임 하에 안전성도 검증하고 좋은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초 개발자라고 해서 이후에 일어난 상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김 삼화 의원이 입을 열었다.

  “책임을 지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부분에 대해서 증인의 생각을 물어본 겁니다. 피해자들에 대해서 당신 생각이 머냐고?”

노 승권 증인이 말하려 할 때 우 원식 위원장이 말을 받았다.

  “ 그래서 최초 개발을 해서 이렇게 국민들이 많은 상처를 입고 사망했는데도 전혀 죄송한 마음이 없습니까?” 호통을 쳤다.

노 승권 증인이 말했다.

  “이후에 개발된 상품들에 의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로서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한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개발자로서 질문을 하셨기 때문에 그에 대해 답변을 드린 겁니다.” 방청석에서 야유와 탄식과 고함이 나왔다.

  이 훈 국회의원은 SK케미컬 김 철 증인에게 질문을 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그 회사 스스로 만들고 있고 그 물질이 생활화학용품이나 가정용 살균제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인데 거기에 사용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무하다고 생각하셨어요? 그 당시에?”

  “예, 저희는 그쪽으로 흡입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말끝을 흐렸다.

이 훈 의원이 다시 다그쳤다.

  “그것을 상식적으로 누가 납득하겠습니까? 이것을 보고 있는 국민들 중에? 본인들이 가습기 살균제나 생활화학용품들을 만들고 있고, 가정용으로 휴대용 가습기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분석하고 시험 데이터도 유지한 분들이 이걸 가습기 살균제로 사용할 가능성에 대해서 100%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였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안 가요!”

  청문회 공기는 무거웠다. 옥시는 무거운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옥시는 호흡독성도 확인되지 않은 물질을 호흡기에 노출되도록 사용했다. 옥시는 제품의 안전성을 어떻게 검증하고 제품을 만든 것일까? 옥시 가습기 살균제 포장에는 ‘아이에게 안심’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안심의 근거는 어디에서 왔을까? 안 재식 박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를 주문자 제작방식(OEM :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으로 제조했다. 쉽게 말해 외부업체에 제조를 위탁했다. 위탁업체가 한빛화학이었다.

  정 춘숙 국회의원이 한빛화학 정 의웅 증인에게 질문을 했다.

  “더불어 민주당 정 춘숙입니다. 한빛화학 정 의웅 증인께 질문하겠습니다. 간략하게 답변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가습기 당번을 제조할 때 제품의 살균제 성분을 결정한 것은 한빛화학입니까, 아니면 옥시입니까?”

  “옥시가 제일 처음 저희한테 이 가습기 당번 레시피 및 제조공정을 알려줄 때요, 그게 2000 년 10월 16일입니다. 그러니까 레킷 벤키지가 옥시를 인수하기 전 날짜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일단 옥시에서 먼저 제시했다 이 말씀이시지요?”

  “예, 그래서 그때는 옥시가 우리한테 OEM 의뢰한 레시피에 의하면 SKAN B 1125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또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옥시는 살균제 성분뿐만 아니라 지금 레시피라고 말씀하셨지만 함량, 제조방법, 제품단가, 공급처, 이런 모든 것을 지시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예, 맞습니다.”

  “또 제품용기, 라벨, 박스포장 등등 사소한 것까지 옥시가 지정해 준 업체에서 공급받은 것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정 춘숙 의원이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여러분이 말씀하셨습니다만 결국은 제조공정을 지시한 옥시나 제품을 만든 한빛화학이나 모두 어떤 실험이나 안전성 검사 없이 ‘아이에게 안전하다’ ‘인체에 무해함’ 이런 라벨을 붙여서 제품을 판매했다 이 말씀인가요?”

  “오히려 옥시가 그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라벨을 붙일 때 저희는 100%....... 지금은 그게 허위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습니다만 당시 라벨을 처음 붙일 대는 옥시를 100% 신뢰했고 옥시가 100%를 쓸 때는 당연히 독성시험이나 모든 안전성 검사를 했기 때문에 붙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옥시 레킷  벤키지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런 헬스 케어 쪽에서 많은 부분을 판매하고 있는 업체이기 때문에 저희는 그걸 그대로 믿고 오히려 저희는 아주 전혀 걱정을 안 했습니다.”

  새누리당 박 인숙 국회의원이 옥시의 아타 사프달 대표에게 같은 내용을 질문했다.

 아타 사프랄이 답변했다.

  “아이에게 안전하다는 것은 어떠한 테스트 없이 저희가 문구를 사용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드립니다. 이것은 아이에게 안전하다는 그런 문구를 사용한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어떠한 확인도 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만 전에 유공, SK에서도 어떠한 확인도 하지 않고 이런 문구를 사용했다는 것을 제가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비자 민원에 관해서는 저희가 답변을 드렸습니다만 이번 의원님 말씀과 마찬가지로 많은 세월 동안 저희가 이런 잘못된 답변을 드린 것에 대해 사죄를 드립니다.”

  옥시의 거짓말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준 거짓말은 실험결과 조작이었다. 2011 년 질병관리 본부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미상 폐 손상 원인을 밝혔음에도 옥시는 서울대학교와 호서대학교 교수들을 통해 동물 실험과 노출 실험을 실시하고 옥시에게 유리하게 실험을 한정하거나 실험 결과 중에서 불리한 것은 빼고 유리한 것만 결과에 넣는 방식으로 보고서를 조작했다.

  그 보고서를 법무법인 김 앤 장을 통해 법원에 제출했다. 법원은 국가기관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는 무시하고 서울대학교와 호서대학교에서 실험 결과물로 내놓은 것을 보고 가습기 살균제가 아기 사망의 원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옥시와 김 앤 장은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불리한 피해자 가족들에게 강제 합의를 종용했다.

  김 앤 장 측에서 서울대학교에 실험 공간이 좁아서 공기 중 농도가 높아지니 실험 장소를 바꿔 달라고 하였고, 현장 내 농도 측정법 개발과정을 삭제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구체적으로 실험에 개입한 정황에 대한 증언도 있었다.

  김 앤 장은 옥시가 서울대학교에 의뢰한 실험에서 실험동물의 태아에서 기형이 발생하는 등 심각한 증세가 나타나자 옥시 측이 불리하다고 여겨질 만한 결과들을 삭제한 채 재판부에 실험 결과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것도 증언했다.

  2011 년 이후 옥시 레킷 벤키저와 피해자 간 소송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고 경제적 심리적으로 급박한 점을 이용하여 불합리한 합의를 종용하는 과정에 법무법인 김 앤 장이 개입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악마의 변호사 김 앤 장은 퇴출하라’ ‘죽음을 판매한 옥시는 물러가라’ 등의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국회 중앙 현관을 가득 메웠다.

  청문회나 특별위원회 보고서에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재식을 포함한 예비조사 위원들은 각 기업을 방문해서 회사 대표나 영업직과 연구원들을 면담 조사했다.

  재식이 회사 대표나 영업사원 연구원에게 ‘안전성 확인’을 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확인하셨나요?라고 물으면 옥시와 SK에서 오랫동안 판매해 온 제품인데 한 번도 리콜이나 안전성에 문제가 없어서 믿었다고 했다. 순간 안 재식 박사는 회사 대표와 연구원들이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 시대 독립군을 잡아다가 생체 실험했다는 731 부대장과 그 부대의 고용된 과학자 중간 관리자급의 장교로 겹쳐 보였다.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고 소비자가 불만을 제기하거나 부작용을 호소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고 만약에 문제가 된다면 그때 가서 회수조치 한다면 회사는 된다는 것인가요? 소비자를 동물 실험의 실험용 동물이나 731 부대의 마루타 정도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요?

  재식이 국회 가습기 살균제 사고 진상규명 특별조사 마지막 날 방청석에서 고함치는 아기 엄마가 있어서 가까이 갔다.

순간, 재식은 심장이 터지거나 멈출 뻔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나 가습기 살균제로 사망한 ‘허 가영’ 아기의 엄마 ‘김 선미’였다.

  그 순간 재식의 머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빠르게 1980 년대의 대학시절로 이동했다. 여러 장의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선미는 Y 대학교 영문과 학생이었다. 학보사 기자였다. <백양로>라는 고정 칼럼을 담당했다. 198년 ‘국풍(國風) 81’이 여의도  5.16 광장에서 개최된 것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읽고 공감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백양로>

  ‘요즘 여의도에서는 「국풍(國風) 81」이 한창이다. 이것을 전 두환 대통령에게 아이디어 제공한 사람은 문화공보 비서관 허 문도라고 한다. 허의 말로는 멀리 신라시대 화랑도의 풍류의 맥을 잇는다고 했는데 백양로 김 기자 보기에는 80년 광주가 피를 씻어내는 씻김굿이 차라리 좋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프로야구 컬러 방송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의 하나가 「국풍 81」이라는 혼자만의 착각일까?’      

  H 대학교 농화학과 학생인데 우리 학교에서 Y 대학의 학보를 읽었다. 백양로에 선미 기자의 글에 공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오면 다행이고 안 오면 말고 식의 편지를 보냈다. 1 주 일 후 답장이 왔다. 재식은 흰색 표준 규격 봉투에 대학 노트 한 장을 뜯어서 편지를 보냈는데 돌아온 답장은 발신 Y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2 학년 김 선미 예쁜 글씨에 편지지는 하얀색 한지로 만든 편지 봉투에 편지지도 한지로 된 고급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재식과 선미의 편지는 서너 차례 오가니 여름방학이 되었다.

  여름방학에 재식은 농과대학에서 필수로 수행해야 하는 강림면 부곡리 실습장에서 실습 겸 봉사활동을 했다. 부곡에서 실습을 하면서 부곡의 특산물 강원도 찰옥수수를 우체국 소포로 선미에게 보냈다. 다음 주에는 태종대의 비석 주필대(駐畢臺)를 탁본을 뜨고 하나는 선미에게 보내고 다른 하나는 교양국어 이 경우 교수님께 보냈다.

  2 학기 개강을 하고 서로 편지만 할 것이 아니라 만나자고 해서 만난 것이 Y 대학교 축제 때 선미가 영어연극 셰익스피어의 ‘더 템페스트’의 주인공을 맡았다. 재식은 장미 세 송이에 안개꽃을 듬뿍 묶어 풍성한 꽃다발을 만들고 연극공연장을 찾았다. 연극을 마치고 출연자 전원이 관객들에게 인사할 때 재식은 선미에게 꽃다발은 전달했다. 선미의 함박웃음이 예뻤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선미의 편지가 왔다.     

  TO. 재식

의례적인 인사말은 생략하고 지난주 우리 학교 축제에 혹시 영어연극 보고 저에게 장미 꽃다발 주고 가지 않았어요? 상하 감색 양복에 Y셔츠는 베이지 색, 꽃을 주면서 나, 재식이야! 한 마디 하지 그냥 꽃만 주고 가면 난 어떻게 하라고?

  그 꽃 때문에 완전 우리 과도 난리, 친한 여자 4인방도 난리입니다. 어디서 그런 멋진 남자를 숨겨두고 몰래 만나고 자기들을 뭘로 보고 인사도 안 하냐고 야단입니다. 여자애들 시샘 알지요? 얼마나 집요한지.......

이 편지 받으면 시간 내서 서울 올라와서 여자 4인방에게 한턱 쏘세요.

                                  1981. 10. 25.

                                    신촌 선미 씀          

 재식이 답장을 했다.     

  TO. 선미 공주님

맞아요. 장미 세 송이에 안개꽃 듬뿍 꽃다발을 만들었어요. 원래 돈만 많으면 장미 스무 송이를 할 텐데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라 저렴하게 한 다발 했어요.

  촌티 복장을 보고 꽃만 주면 재식으로 알아보겠지 하고 말은 안 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꽃을 들고 선미 앞에 섰는데 눈이 부셔서 말이 안 나왔어요. 친한 친구 여자 3 명이 있어 선미까지 4인방입니까?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을게요. 오늘이 11월 1일이니 다음 주 토요일 서울 가서 촌놈이 서울 공주님들에게 한턱 단단히 살 테니 굶고 기다리세요.      

                                  1981. 11. 1.

                                       촌놈 재식     

  요즘 유행어로 ‘썸’ 탄다고 하겠지만 1980 년대는 이렇게 촌스러운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대학 2 학년을 마치고 재식은 군대를 갔고, 선미는 졸업을 하고 더 이상 서로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진 사이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 지금 선미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둘째 아기 ‘가영’을 잃고 이 자리서 통곡하는 것이다.

  피 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에서 선생이 한 여인을 세 번 만났는데 마지막 만남은 차라리 안 만난 것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담겨있는데, 재식이 연애편지만 주고받던 선미를 이렇게 사고대책 조사 전문위원과 피해 당사자로 만난 것이 피천득의 세 번째 만남보다 더 후회가 된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함이 재식에게 밀려왔다.

  재식은 선미에게 ‘가영’이의 죽음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보상을 많이 받게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선미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나온 모든 피해 가족들에게 잘못한 기업과 국가가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하도록 과학자로 양심껏 일하겠다고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국회 특위조사가 다 끝나고 선미와 재식은 여의도 ‘거목’이라는 한식집에서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가영 엄마!”

  “가영 엄마가 뭐야?

  “그럼?”

  “너 안 재식 아냐? 재식아! 할 테니 넌 선미야~~ 해봐!”

  “선미 공주님!”

  “그래 재식 마당쇠 오랜만이군!”

  “공주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나도 마당쇠를 만나니 옛날 생각이 난다. 이 선희가 부른 <J에게>의 J가 난 <재식의 J>로 불렀다. 아~옛날이여~~”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선미 공주님은 얼굴이 그대로입니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어?”

  “음, 군대 제대하고 복학하고, 환경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마치고 지금 노동환경 연구원에서 연구원 생활 하고 있지.”

  “아들은 있어?”

  “아들? 결혼도 못한 노총각에게 아들? 너무한다.”

  “그랬었구나. 미안 미안 정말 모르고 한 질문이야.”

  “넌 결혼했으니 이런 사고를 당했겠지?”

  “응, 난 네가 군대 간 사이 졸업하고 서울서는 교사하기 힘들어 강원도에 원서를 내고 처음 영월여자고등학교에서 영어 선생을 시작해서 4년 근무하고 원주여고로 왔는데 중매로 결혼해서 서울과 원주 주말 부부 하고 있어.”

  “그럼 애는 누가 키워?”

  “친정엄마가......”

  “힘들겠다.”

  “주말 부부 하다가 남편이 모 경제신문 기자야. 주말부부 접고 애나 잘 키우라고 해서 교사 사표 내고 애 잘 키우는 전업엄마 했는데 이런 사고를 당했다.”

  “학보사 날리던 여기자 출신이 경제신문 기자 만났으면 성공했네?”

  “아니야, 기사는 내가 쓰는 것이 나을 정도로 못써!”

  “야, 경제신문 기자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남편 알기를 하늘처럼 잘 모셔.”

  “잘 모시고 살다 보니 이런 액운이 온다. 만약에 내가 너랑 결혼했다면 이런 액운이 왔을까?”

  “역사에 가정법 없고 인생에도 가정법 없다.”

이런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는 동안에 음식이 들어왔다.

  “자, 공주님 드시지요?”

  “그래, 음식 앞에 두고 말 많으면 예수쟁이나 공산당이지?”

  “오랜만에 축배 한잔!”

  “오케이, 서로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실없이 던지는 농담이지만 선미가 ‘만약에 재식이 너와 결혼했다면 이런 슬픔이 없었을 거야’ 하는 말에 가슴이 쿵! 쿵! 요동쳤다.

술이 한잔 두 잔 건배를 더해가자 선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재식아?”

  “왜?”

  “넌 남자도 아니야?”

  “왜?”

  “남자 거시기만 달고 나오면 남자니?”하면서 손으로 재식이 가운데를 만졌다.  “야! 왜 이래?”

  “어쭈구리, 남자라고 섰는데?”

  “애기 엄마가 왜 그래?”

  “너 축제에 나에게 꽃다발 안겨주면서 왜 아무 말 안 했어?”

  “말이 안 나왔어.”

  “더 솔직히 말해 봐!”

  “내가 지방대고 과도 공학도 아닌 농대라서 내세울 것이 없어 말 못 했지.”

  “그래서 내가 넌 남자도 아니라는 거야, 알아?”

  “야, 선미야, 많이 취했다. 택시 잡아줄 테니 이만 들어가자?”

  “아니,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간다고 선포하고 왔어.”

  “그럼, 이렇게 취한 상태로 어디 가려고?”

  “왜? 너 나 모델이나 호텔 데려갈 용기 있어?”

  “......”

  “없지? 노래방이나 가자?”

  “그래, 노래방이 좋겠다.”     

  노래방에서 선미는 <뒤늦은 후회>를 불렀다. 재식은 최 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재식이 어느 정도 음치냐? 강림 초등학교 5 학년 때 58 명 학급에서 50 명의 합창단을 뽑는데 떨어진 8 명 중에 한 명이 재식이다.

   굳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 에다/ 짙은 색스 폰 소릴 들어 보렴/ 첫 사람 김 선미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첫사랑 그 소녀’ 대신에 ‘첫사랑 김 선미는‘ 하고 부르는데 선미가 재식의 목을 끌어안았다. 재식 얼굴에 키스세례를 했다. 마이크를 노래방 기기에 꽂고 선미는 주얼 리가 부른 <원 모어타임>을 연속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재식을 다시 끌어 앉았다. 한참 재식 품에서 울더니 울음을 그쳤다.

  선미가 아픈 사연을 털어놓았다. 남편이 경제신문사 기자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첫 교사 발령을 받은 영월 여자고등학교에서 88 올림픽 전해에부터 근무했다. 학교에 여선생 기숙사가 부족해서 영월 읍내에 방하나 부엌 하나 얻어 자취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휴일 주인집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다.

  학교에 찾아가서 소문을 낸다는 협박에 아들이 원할 대 마다 옷을 벗어야 했다. 그러다 임신을 했고 주인집에서 알고 빨리 결혼시키려고 했는데, 서울 친정 부모는 어렵게 대학공부 시켰더니 겨우 촌놈 건달 사위 얻으라고 그랬냐고 야단을 치고 집에 얼씬도 못하게 해서 친정과 인연을 끊고 지낸다고 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첫째를 낙태시키려고 하다가 산부인과에 가니 너무 늦었다고 그냥 출산하라고 했는데, 영월 촌에서 의료 시설이 좋지 않은 곳에서 태어날 때 산소부족으로 아이가 정상이 아니게 태어났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평생 첫딸 유영이 뒷바라지해주고 유영이가 죽은 다음 날에 죽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연을 듣고 나니 아까 인생에 가정법은 없지만 만약에 말이야 재식이랑 결혼했다면 이런 불행은 없었겠지? 한 소리가 괜히 한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2012 년 구미 국가 제4 단지에 있는 허브글로벌 회사에서 불산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노동자 5 명이 사망했고 인근 주민과 공단의 다른 회사 근로자들이 대피하는 큰 사고였다. 화학물질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만들어졌다. <화학물질 관리법>, <화학물질 분류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 탄생했다.

  분명히 국민을 위해 좋은 취지의 법과 법률이건만 기업들이 반기를 들었다. 친 기업 성향의 신문들이 논설에서 일제히 화학물질 관리법을 공격했다. 화학사고 발생 기업에 대한 과징금을 총매출액의 5%로 하는 것을 낮추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사람을 다섯 명이나 죽게 하였고 지역 주민들과 공단의 다른 회사 근로자들을 대피시킨 불산 누출사고를 경험하고도 기업과 대형 언론들은 기업 편을 드는 논조의 기사의 연속이었다.

  2013 년 9월 25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의 ‘제3 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최 순실이 써준 메모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윤 O 규 환경부 장관을 향해 대통령은 규제를 강화하는 기본 취지는 이해하나, 민관협의체를 통하여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서 과도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면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했다. 좋은 취지가 시행과정에서 기업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 달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제정할 때 기업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새로 탄생한 법과 법률이 시행하기도 전에 규제 완화를 노골적으로 명령한 것이다. 환경부 장관은 즉각 반응했다.

  화학물질 관리법에서 매출액의 5%인 최대 과징금을 처분할 때는 고의, 반복적 위반 등 기업들의 책임이 중대한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하고 경미한 사안에 대해서는 계도와 경고 중심으로 이행을 촉구하며, 경고가 누적되거나 미 이행 반복 시 단계적으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시행령에 반영한다고 했다. 화학 사고를 유발한 기업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할 때 사고를 한번 낸 기업은 봐주고 1 년에 몇 번 사고를 내거나 경고를 받고 또 사고를 냈을 때 과징금을 물린다는 것이다. 그런 법을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재식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법치국가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업들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지금까지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었는데 갑자기 법을 지키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부터

  “제품을 만들 때 화학물질의 독성검사를 다 마치고 어느 세월에 제품을 만듭니까?”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 마시오.’ ‘해외 기업에게 독성 정보 요청하면 살려면 사고 말려면 말라는 식의 답변이 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라도 사서 써야 하는 기업의 고충을 알기나 하나요?” 등등 다양한 소리가 들렸다.

  제3 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대통령의 유명한 발언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를 출처를 찾아보았다.

 독일의 유명한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1886~1969)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를  변형하여 누군가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고 변용한 것을 최 순실이 전날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인 안 봉근, 이재만, 정 호성 비서관들과 김밥을 먹으면서 회의하고 노랑 메모지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써준 것을 대통령은 앵무새처럼 낭독한 것이 2016 년 가을과 겨울에 촛불시위를 하고, 대통령 탄핵이 되고 503번 수인번호를 달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후에 새로운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청장 아래 검찰수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은 ‘옥시 싹싹 뉴 가습기 당번’ 제조사의 본사 영국으로 항의방문을 했다. 김 선미와 경북 구미의 119 구급대원 김 덕종 씨, 환경보건시민센터의 백 도명 대표와 다른 몇 명이 영국으로 떠났다. 레킷 벤키저 본사 앞에서 준비한 현수막을 펼치고 데모를 했다. 이어 다음에는 영국 의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했다. 하지만 영국 언론들은 원정항의 소식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 독일, 미국의 C.N.N. 이 더 크게 보도를 했다. 영국의 옥시 본사는 이번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모두 ‘옥시 한국 법인’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법이 가습기 살균제를 팔아 번 돈의 상당 부분을 본사와 지사 처음 개학한 이윤 배분 비율로 가져갔다. 한마디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인이 가져간다.’였다. 그래도 영국 원정방문 항의 귀국 무렵에 옥시 본사에서 차후로는 관리 감독을 더 엄격하게 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한 것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온 선미는 딸 가영을 위로하는 진혼제를 올렸다. 원주 치악산에 있는 상원사에서 진행했다. 진혼제를 했으나 선미는 가영을 놓아주지 못했다.

  해를 넘겨 2015 년에도 환경보건시민센터는 가습기 살균제 사고를 잊지 말자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전거 투어 ‘전국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찾기’ 캠페인을 벌였다.

  국회에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활동을 할 때는 온 신문들이 앞 다투어 경쟁보도를 하더니 ‘세월호’ 사건이 나자 ‘세월호’에 묻혀 가습기 사고는 먼 옛날 다른 나라 얘기처럼 되었다. 잊혀갈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환기시키고 다시는 이 나라에 이런 부도덕한 기업 더 나아가 방조하는 국가의 안일함을 일깨우고자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자전거 대열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상의는 노란색 조끼로 통일했다. 캠페인 문구는 ‘살인기업 처벌’, ‘내 아이를 살려 내라’, ‘침묵의 세월호’ ‘안방의 세월호’, ‘잊지 말자 가습기 살균제’ ‘악마의 변호사 김 앤 장’ 등등 다양한 문구가 자전거의 이동 순서에 다라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고 이동했다. 길거리 시민들은 자전거 행렬에 음료수도 주고 삶은 옥수수도 주고 성금도 기탁했다.

  자전거 행렬의 마지막 종착지점은 여의도였다. 여의도는 국회의사당도 있지만 상징적으로 국제금융센터(I. F. C : International Financial Center)의 옥시 본사와 그 주변에 텐트를 치고 노숙 농성을 하던 가습기 피해자 가족이 있어서 여기를 종착지점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이날 하늘은 슬퍼했는지 비가 주적주적 내렸다. 노란 우비를 입은 재식과 선미와 유영은 자전거 행렬을 눈물로 맞이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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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 본문에 나오는 국회의원과 증인들의 대화는 국회 회의록 <가습기 살균제 사고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 제1차부터 6 차까지 회의록 중에서 부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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