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의 여인
횡성 촌놈 제갈상길은 방 한 칸 부엌 하나 딸린 전세방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중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어차피 전세 사는 거 학교 가까이 방을 얻어 살았다. S 중 시절에는 학교 야구장 담장 4/5 정도쯤 있는 영어선생님 댁에 세를 얻어 살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추첨번호 15번 받으면 그대로 S고등학교로 갈걸 14번을 받아 한강변 흑석동 검은 돌 고등학교로 배정되었다.
처음에는 대방동집에서 대방역까지 가서 111번 버스를 타고 흑석동에 내려 학교까지 걸어갔다.
일찍 일어나면 아무 문제없으나 늦잠 자면 택시를 타다 보니 도저히 시골서 보내온 돈으로 생활할 수가 없어 고마운 선생님 댁을 떠나 흑석동 부속여고 올라가는 담장길 끝에 방을 얻었다.
주인 할머니는 혼자 사시고 방을 세 개를 전세를 주었다. 전세 사는 3 집은 신혼부부 한집, 여자 자매가 사는데 언니는 버스 안내원이고 동생은 대학생이었다.
언니가 버스 안내양 해서 번돈으로 동생을 공부시켰다. 대학생이 되어 학생 과외를 했지만 언니가 버는 돈 절반 이상이 동생에게 들어갔다.
그녀들은 우리 할아버지 제갈재석에게
어르신!
이라고 호칭을 하면서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시골서 어머니가 가지고 온 것을 나누어 먹었다.
서로 친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대학생 누나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누나를 따라 지금은 많이 변한 달마사 쪽으로 데리고 갔다.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 가야 할 동생에게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이걸 일요일에 고등학생 가방에 넣어 Y대학교 정문 건너편독수리 다방에 들어가면서 주문한 거 가져왔어요! 하면 다방 주인이 받아서 조치한다는 것이다.
좀 찜찜했지만 예! 했다.
정말 일요일이지만 84번 버스 종점에 경찰들이 신분증 검사 가방 검사를 했다.
검정교복에 학생 가방이라 검문검색이 없었다.
서울역에서 Y대 방향 가는 버스를 갈아타는데 역시나 경찰들이 신분증 검사 소지품 검사를 했으나 검정교복에 무거운 가방은 무사통과였다.
다방에 도착해 주문한 거 가져왔어요! 외치니
주인 여자가 어머나?
이 무거운 걸 혼자 가져왔네!
학생 쌍화차 드려라! 다방 아가씨가 예! 알겠습니다.
마담언니! 했고 경찰 검문에 안 걸리고 가방 속 유인물을 넘기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쌍화차를 마셨다.
혹시 경찰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차만 마시고 다방을 나왔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 그것이 Y대학교 시위 전단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나와 연상의 여인은 그렇게 인연이 되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한번 나를 시켜서 단 한 번의 검문도 안 받고 흑석동 달마사 아래 허름한 자취집에서 학교 앞까지 운반했더니 다음에 또 심부름을 시켰다.
그 시절 선생님들이 경필로 써서 시험 문제 내는 가리방으로 찍어낸 유인물을 무사히 제작소에서 배포처로 이동시킨 것은 1977-78 년 신촌 대학가의 아는 사림만 아는 전설이 되었다.
하필 중간고사 일정표가 나온 상태라 나름 상위권을 유지하려고 각 과목별 시험 일정에 따라 공부계획을 세웠는데 연상의 여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문평 학생 월요일이 수학 시험이라는 거 아는데 수학은 귀신이지?
하면서 은근히 나를 비행기 태우는 바람에 또 그 일을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 심부름 대가로 누나가 수학 주관식을 예상해서 하나 출제해 주었다.
홍성대의 수학 정석을 펴서 누나가 낸 예상문제와 유사한 것을 먼저 풀고 누나가 내준 문제를 백지에 풀어 풀이과정과 답을 보여주었다.
누나는 와락 껴안으면서 나는 남동생 없이 딸만 셋인 집에 가운데라 이 리치이고 저리 치이는데 네가 찬동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린 걸 천재일우라고 하나 오비이락이라고 해야 하나 월요일 수학시험지에 앞에는 전부 객관식이고 마지막 문제가 주관식인데 누나가 예상문제 내준 것과 등호 다음 숫자만 누나는 4로 낸 것을 우리 수학 선생님은 8로 낸 것이었다.
만주벌판 주관식 답안지를 잘 정리된 경작지처럼 풀이와 답을 쓰고 여유 만만하게 제출했다.
정말 그 시험은 우리 600 명 중에 제대로 다 쓴 사람은 함 군이 유일했다고 다음 시간에 수업 들어오신 최경조 선생님 말씀이었다.
너무 기뻐 이 기쁜 소식을 연상의 누님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고하려고 종례를 마치자 바람을 가르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가 수학 600명 중에 제일 잘 봤어요!
그래 장하다 우리 장손! 장손이 최고야! 하시고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바로 정육점에 가서 돼지고기 두 근을 끊어 오셨다.
자주 먹지 못하는 고기 늘 한 근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나 셋이 먹으면 할머니는 늘 고기를 별로 좋아 안 해 두부가 더 좋아! 하시면서 할아버지와 손자를 더 먹이는 것을 안 할아버지가 셋이 원 없이 먹게 두 근을 사 오신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고 84번 막차 운행을 마치고 들어온 옆방 큰 누나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작은 누나는 오늘 집에 안 들어오나요?
나도 걱정이다.
사실은 어제도 안 들어와서 내가 일하면서 내내 그년 어디 교통사고라도 났나 잠이 안 온다.
중간고사라 안 들어온 건만 확인하고 내 다른 과목 공부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암기과목은 일단 외워야 하는데 외워지지가 않았다.
연상의 여인이 내가 전달한 유인물 뿌리다 경찰에 잡혀가 남영동에서 조사받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 당시 우리 학교는 정규 수업 전에 새벽반 수업을 했다.
나중에 신문기자들이 0교시 수업이라고 명칭을 붙였는데 학원에 새벽반 수강증을 제출하지 않은 학생은 그냥 학교에서 새벽반 수업을 받는 셈이었다.
어차피 새벽 공부할 거 수학 가장 소문난 이길동 수학 새벽반에 등록했다. 공통을 마치고 수학 2는 황승기에게 배웠다.
새벽에 나가서 수업하고 학교 매점에서 라면이나 빵 우유로 저녁 먹고 야간 자습을 해야 했다.
우리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는 무조건 명문대 많이 합격시킨 학교는 좋은 학교라는 시절이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명문대 합격자 숫자 늘이는 것이 고교 교육의 전부였다.
북한의 샛별 보기 운동처럼 새벽에 나가 밤 열 시에 집에 오는 개미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느라 연상의 여인이 집에 안 들어온 일자가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6월 우리 동네에 좀 잘 사는 집 정원에 장미꽃이 필 무렵 난리가 났다. 연상의 여인이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서대문 경찰서에 수감 중이고 그 사항을 경주 부모님에게 연락해서 경주서 그녀의 아버지가 달려온 것이다.
그녀 아버지는 서대문 경찰서에 가서 다시는 딸이 이런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딸을 데려왔다고 한다.
경주에서 완전 중심가도 아닌 변두리에서 철물점을 해서 겨우 살아가는데 언니가 버스 안내원해서 번 돈을 보태 너를 공부시키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이나 받지 데모 유인물이나 만들면 되겠냐?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내려가자? 한 것을 우리 할아버지 한번 만나 뵙고 가자고 연상의 여인이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방으로 온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 야간 자습을 하고 밤 10시 넘어서 집으로 오니 우리 할아버지와 그녀 아버지가 돼지고기 안주에 소주를 어르신 한잔 하시죠?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중에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여자 아버지는 딸을 경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을 할아버지가 경주 촌에서 얼마나 공부 잘했으면 여자가 명문 Y대를 갔겠냐? 그리고 이 늙은이도 솔직히 박대통령 3선 했으면 종필이에게 물려주거나 국민이 직접 투표해 대중이한테 지고 물러나는 것이 이 나라 제대로 발전 위해 좋지?
안 그러우 아우님?
예, 저도 뭐 체육관에서 대통령 뽑는 거 맘에 안들지예?
그래 딸이 잘못한 게 아니고 바른말하는 학생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나라 판사 검사 경찰 놈들이 잘 못하고 있다고 봐.
이러다 아마 피바다 될 날이 올 거야.
4.19 같은 소리 하지 마라고 해. 장기 독재 더 끌고 가면 4.19보다 더 큰 피 흘리고 정신 차릴 날이 올 거야!
완전 재야인사 함석헌 옹같은 말씀을 함재석 옹이 하였다. 실제로 같은 강릉 함 씨 유전자라 턱수염이 함석헌 옹이나 재석 옹이나 똑같았다.
아이고 어르신 누가 신고 들어갈까 겁나네요.
신고? 이 늙은이 국가서 밥 먹여주면 좋지?
아이고 알았습니다. 어르신 말씀 대로 이 여식을 데모만 하지 말고 계속 공부하게 하겠습니다.
결국 우리 할아버지가 연상의 여인 경주행을 막아주었다.
그렇게 겨우 경주행을 면하고 공부를 하게 된 그녀는 자기 말로 나는 놀 때 놀고, 데모할 때 데모해도 공부한다면 집중해서 하거든!
하더니 1학년 1학기 성적이 전 과목 A 거나 A플러스로 2학기에는 경주 부모님 소 안 팔아도 공부할 수 있다고 다 할아버지 덕분이라고 우리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돼지고기 술안주를 해왔다.
좁은 흑석동 검은 돌고교 담장 따라 부여고 방향으로 올라가는 중간쯤 문간방에 할머니 할아버지 주인 할머니 연상의 여인 4명이 소주 막걸리 파티를 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여름방학이 있었으나 보충수업이라는 명목으로 보충수업비 만 몇천 원 씩 내고 국어 수학 영어 공부를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보충수업비는 그렇게 학생들에게 징수해서 수업하신 3과목 선생님들에게 일정 수고비 드리고 남는 것은 학교재단으로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우리 학교 해직된 선생님을 졸업 후에 세배를 가니 그 돈도 선생님들에게 갈 돈을 줄이고 교장이 착복한 것을 이의제기 했다고 12.12거사 후 이어진 전두환 집권 초기 사회정화 운동과 삼청교육대 창설에 그 해직교사를 흑석동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고 노량진 경찰서에서 해직선생님이 포함되어 갔다.
졸업 후 한참 후에 그 일을 알게 되었다. 계속 학점 A를 기록하면서 장학생으로 공부하던 연상의 여인을 다시 데모 주동자로 만든 것은 내가 고3이 되어 새벽에 시커먼 바탕에 하얀 글씨로 박정희 대통령 서거 호외 신문 이후 12.12 때문이었다.
예비고사 본고사 다 봐야 하기에 박 대통령 서거고 12.12고 안중에도 없이 공부해야 하는데 할아버지와 연상의 여자가 대화 코드가 맞다 보니 우리 방에 소주 안주와 소주를 사들고 할아버지 한잔 드시죠? 할머니는 막걸리로 한잔! 하면서 완전히 우리 할아버지를 의식화시켰다.
그전에도 할아버지는 71년 선거만 박통이 해 먹고 종필이에게 넘겨 종필이 영삼이 대중이 세 놈 중 국민 지지 많이 받는 순서대로 셋이 다 대수만 다르지 대통령감이라고 말하신 분에게 12.12이건 수양대군이 단종 영월로 보낸 거보다 더한 짓이라는 여자의 말에 할아버지는 흥분하시면서 또 한잔 도저히 내방에서는 공부할 수 없어 학교에서 마땅히 공부방 없는 학생 밤낮없이 공부하게 개방해 준 자습실로 책을 챙겨 슬며시 나갔다.
왜 시험 보는 날은 그리 추운지 예비고 사는 용산공고에서 보게 배정되었다.
시험 부정행위 방지한다고 우리 반에서 6명 정도만 고사장이 용산공고고 52 명이 각자 정해진 고사장마다 흩어졌다.
그 추운 날씨에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사장 밖에서 평소에 믿지 않는 하느님 부처님에게 우리 손자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고 연상의 여인은 전날 찹쌀떡과 수성펜을 시험 잘 보라고 전해주었다.
1979년이 지나고 1980년 명문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 신입생이 되어 문무대 입소를 했다.
입소 전에 교련반대 데모를 했으나 학교에서 일단 입소일자에 입소하라고 했다.
우리 과는 2조였는데 1조 다녀온 학생들 말이 크게 힘든 훈련은 없다고 받을만하다고 했다.
그렇게 입소한 문무대에서 5.18을 맞이했다.
계엄이 전국계엄으로 확대되어 대학 수업 전체가 휴강이면 병영훈련도 휴강이라고 병영훈련 거부하고 돌려보내달라는 농성에 계엄군이 해산을 시켰다.
다들 도망갔는데 각 과대표와 신입생이지만 운동권에 연이 다은 주동자급만 남았는데 나도 같이 연행되었다.
연행된 것은 주동자이거나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고 할아버지가 장손자 입학선물로 해주신 단화가 너무 딱 맞아 학교 언덕배기 오르내리다 보니 왼쪽 발톱이 빠지게 되어 꺼멓게 멍이 들어 뛰지 못하니 붙들 린 것이라 진술서에 이상 사실대로 기술하였습니다 하고 지장을 찍어 제출했더니 나는 바로 훈방조치되었다.
나머지 주동자급은 바로 군법회의로 넘겨졌다.
정말 현재의 잣대로 그 시절을 평가하면 안 되지만 그런 시절이니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사건이 발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 시대가 암울 그 자체였다.
5.18 전국 계엄 확대로 전국의 대학이 휴교가 되자 연상의 여인은 경주 집으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연상의 여인이 제안을 했다.
어르신! 따님 경주사신 다는데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보고 싶지!
그럼 어차피 전국 계엄으로 학교가 다 쉬고 학점은 리포트로 대체하는 판이니 이참에 어르신 따님 댁에나 다녀오시죠?
정말 기막힌 제안이었다. 할아버지 생신에나 다녀가는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외손자를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싶은 마음을 콕! 집어서 제안하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싱글벙글이었다.
연상의 여인은 그 당시 귀한 계란을 한판을 삶고 소금에 고춧가루를 잘 배합해 준비하고 기차 안에서 소주병 역무원이 제지한다고 소주를 사이다 환타병에 위치이동을 해서 준비했다.
지금이야 기차 속도가 빠르지만 당시는 청량리에서 경주 가는데 통일호로 꼬박 10시간이 걸렸다.
경주에 도착해 고모 고모부에게 인사를 하고 연상의 여인은 나를 경주 구경 같이 하고 이틀 후에 고모님 댁에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말씀드리고 나를 경주 황남동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 집은 딸만 셋이라서 제일 큰언니는 버스 안내원 가운데가 그녀 막내딸은 아예 경주서 대학 안 가고 취직한다고 여상을 졸업해 경주 모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막내딸이 나랑 동갑 호랑이라서 바로 친구가 되었다.
여자 아버지는 네 명의 꽃밭에 유일한 남자였는데 나를 보더니 정말 굴러온 아들 취급을 했다. 술상이 차려지고 나랑 연상의 여인과 아버지는 소주를 어머니와 나랑 동갑 여자는 맥주를 마셨다.
역시 대화는 광주 이야기였다. 지금은 명칭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지 당시는 광주사태였고 불순분자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부모님과 동갑 여자는 알고 있었다.
동갑 여자는 내일 출근해야 된다고 9시 뉴스 끝날 때 잠자러 가고 나와 연상의 여자 부모님은 밤을 꼬박 새우면서 대화를 했다.
뉴스로 세뇌된 머리를 연상의 여자가 논리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부터 오죽하면 김재규가 쏘았겠는가?
전두환이 조금 지나면 최규하를 하야시키고 지가 체육관 대통령 될 것이고 재야 운동권과 대학생 시위서클은 또 전국적인 데모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은 너희 둘은 여기서 말하는 건 좋은데 절대로 데모는 하지 마라고 신신 당부하셨다.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잠 좀 자자 고 해서 아버지와 내가 한방 연상의 여인과 어머니가 한방 나누어 자고 오후 늦게 일어났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에게 경주 구경을 시켜주었다.
동생 경주 처음이지?
아니요. 중2 때 속리산서 1박 하고 영주 부석사 보고 경주 불국사 토함산 구경했어요.
그래 수학여행은 여행이니? 너 여관방서 고스톱만 쳤지?
아니요. 우리 방에 20명이 잤는데 다 고스톱 치고 저는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아버지가 도박으로 날려 너 화투 치기만 치면 손목아지를 잘라버린다는 어머니 말씀에 저만 고스톱 안쳐서 이정재 담임 선생님이 선생님 숙소로 저를 데리고 가서 선생님과 맥주 마셨어요.
와! 천연기념물이네!
연상의 여인 부모님과 나와 여인은 불국사 구경을 했다.
수학여행은 많은 인원이 빨리빨리 구경을 했는데 그날은 세월아 날 잡아먹어라 그런 마음으로 천천히 구경하고 여인이 친절하게 경주출신 자부심으로 설명을 했다.
구경을 마치고 밤이 되어 집에 오니 동갑내기 은행원이 저녁 준비를 다 해놓았다.
역시 이날도 식사를 하면서 나 여인 아버지는 소주 어머니와 동갑 여자는 맥주를 마셨다.
어느 정도 술이 된 상태서 함 군?
예?
자네 지금 다니는 학과 때려치우고 다시 공부해서 공군사관학교 진학해 빨강 머플러 될 수 없나?
왜요?
음 내가 공군에서 정비사로 일했는데 제일 부러운 사람이 조종사더라.
함 군이 공부 다시 해서 공군사관학교 가면 내가 우리 막내딸을 자네 짝으로 보내겠네! 하시는 거다.
나도 놀랐지만 그날 저녁 준비한 동갑 여자는 얼굴이 홍딩무가 되어 얼른 화장실로 숨었다.
옆에 있는 여상의 여자가 발끈해서 아빠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아니 아빠! 내가 함 군을 안 것도 먼저고 부모님께 인사시킨 것도 내가 한 일인데 왜 빠이롯드 되면 막내 짝이야? 내 짝이 우선 아냐? 하는 거다.
참 난감했다. 영계로 치면 동갑과 결혼하는 것이 좋은데 연상의 여인 말처럼 나를 먼저 안 것은 연상의 여인이 아닌가?
한참 후 밖에 나갔던 동갑내기 여자가 방에 들어오자 연상의 여인은 동생에게 협박의 말을 던졌다.
학생이 빠이롯드 되어도 내가 다른 남자 생겨 시집가면 네 차지지만 아니면 기득권은 나에게 있는 거 알지?
졸지에 두 여자 사이에 장난감으로 전락해 나는 더 이상 황남동 그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인사를 하고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하고 나는 그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황남동 고모님 댁으로 왔다.
연상의 여인집에서 부어라 마셔라 했던 동안 고모 고모부 할아버지 할머니는 경주에서 좀 떨어진 곳의 온천을 다녀오셨다.
할아버지는 해방 전 횡성 우시장에서 씨름을 해서 황소를 상으로 탄 경험이 있는 분이라 일제 강점기부터 경상도 백암 온천이 좋다는 걸 알고 계셨다.
연상의 여인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할아버지 고모는 바로 돌직구 질문을 하셨다.
장손 재수해서 빠이롯드 될 거냐?
글세요. 그거 돈 많이 버는 거 알지만 들어가기가 힘들 거 같아서요.
야 지금 허름한 한교 때려치우고 죽어라 공부하면 된다.
하거라 조카!
하는 고모부 말씀에
예 하겠습니다! 했다.
당시 고모부는 월남전 참전으로 중사서 상사를 너무 일찍 달아 선임 중사에게 상사인 자기가 말해도 면전에서는 예! 해놓고 뒤에서 행동 안 하는 바람에 고모부는 딱 연금 받을 기간만 채우고 전역해서 고향은 저 남쪽 땅끝마을이지만 경주에 정착했다.
군대생활 하면서 가장 부러운 신분이 육군 장교 그보다 멋있는 해군장교 그보다 더 멋있는 공군 장교 공군장교 중에도 파란 머플러 지상근무 장교보다 공중근무 빨강 머플러가 최고라고 하시면서 빠이롯뜨는 10년 복무하고 민항으로 이적하면 연봉 1억이라는 말씀에 나는 공군사관학교 33기로 목표를 세우고 공부했다.
1981년 10월 ㅇㅇ일 대방동 성남고등학교 교실에서 1차 국어 영어 수학 공사 33기 입학시험을 보았다.
이날도 성남고등학교 교문 앞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연상의 여인이 나의 시험 잘 보기를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했다.
그 기돗발이 먹혔나 국어는 원래 중대부고 종 ㅇ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이과반 국어 수제자라고 공표하는 바람에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데 국어는 확실한 만점이고 영어는 과락 60점 이상이면 되었는데 카운트해보니 70은 되는 거였고 하이라이트는 수학이었다.
앞에는 객관식 맨뒤에 2문제가 주관식인데 세상에 그 옛날 내가 완벽하게 답 쓰고 여유 부리느라 최경조 수학 선생님께 고난도 문제 감사드려요 했던 문제가 등호 다음 숫자가 연상의 여인이 낸 숫자였고 다음 이어진 문제는 그걸 도식을 해서 삼각형 내접원의 반지름을 구하라인데 두 번째 문제는 풀이 없이 반지름만 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성남중 시절 서성천 수학 선생님이 너희들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면 수학 시험에 직각삼각형 주고 내접원의 반지름 아니면 지름을 구하라 그런 시험 많이 나온다.
내 제자들 중에 대학교 수학과 가서 헤론의 공식을 도출할 놈은 없을 거 같고 공식만 설명해 줄 테니 다른 중학 출신들에게 전파하지 말고 너희들만 써먹거라 하시고 알려준 것이 오늘 주관식 시험 두 번째 문제였다.
혹시 이거 출제 위원서 성남고 교사가 출제하면 성남고에만 유리하니 중학교 권 선생님이 출제위원 잡혀갔나?
그런 상상을 하면서 남들 열심히 풀 때 암산으로 풀어라 하면서 알려주신 것이 마지막 수업인데 오늘 그걸 써먹는 날이었다.
시험 문제 속 삼각형은 빗변이 5이고 다른 두 변이 3과 4였다.
헤론의 공식은 빗변 아닌 주변 3 더하기 4에 빗변 5를 빼면 2가 지름이고 반지름은 그거의 절반 1이 정답이었다.
수학 답을 다 쓰고 씩씩하게 나오면서 통로 좌우를 보니 모두 만주벌판을 한 줄도 못 채웠다.
성남고 교문을 나와 원석문방구를 지나 대방교회 삼거리에 있는 중국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연상의 여인 나 네 명이 탕수육에 고량주를 마시면서 수학 시험에 누나가 나 고 1 때 연습으로 내준 문제가 주관식 두 문제 중 하나라고 하니 모두 박수를 쳤다.
공사 33기는 따놓은 단상으로 여겼다. 운명은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6.25에 의용군 입대자라는 청일면의 기록에 의해 나는 최종탈락했다.
그 시절은 그렇게 암울했다.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하고는 새벽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 아버지와 내가 한방 연상의 여인과 어머니가 한방 나누어 자고 오후 늦게 일어났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에게 경주 구경을 시켜주었다.
동생 경주 처음이지?
아니요.
중학교 수학여행 와서 경주 불국사 토함산 구경했어요.
야 수학여행은 그게 여행이니? 너희들 여관방서 고스톱만 쳤지?
아니요. 우리 방에 20명이 잤는데 다 고스톱 치고 저는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아버지가 도박으로 날려 너 화투 치기만 치면 손목아지를 잘라버린다는 어머니 말씀에 저만 고스톱 안쳐서 이ㅇㅇ 담임 선생님이 선생님 숙소로 저를 데리고 가서 선생님과 맥주 마셨어요.
와! 천연기념물이네!
연상의 여인 부모님과 나와 여인은 불국사 구경을 했다.
수학여행은 많은 인원이 빨리빨리 구경을 했는데 그날은 세월아 날 잡아먹어라 그런 마음으로 천천히 구경하고 여인이 친절하게 경주출신 자부심으로 설명을 했다.
구경을 마치고 밤이 되어 집에 오니 동갑내기 은행원이 저녁 준비를 다 해놓았다.
역시 이날도 식사를 하면서 나 여인 아버지는 소주 어머니와 동갑 여자는 맥주를 마셨다.
어느 정도 술이 된 상태서 함 군?
예?
자네 지금 다니는 학과 때려치우고 다시 공부해서 공군사관학교 진학해 빨강 머플러 될 수 없나?
왜요?
음 내가 공군에서 정비사로 일했는데 제일 부러운 사람이 조종사더라. 함 군이 공부 다시 해서 공군사관학교 가면 내가 우리 막내딸을 자네 짝으로 보내겠네! 하시는 거다.
나도 놀랐지만 그날 저녁 준비한 동갑 여자는 얼굴이 홍딩무가 되어 얼른 화장실로 숨었다.
옆에 있는 여상의 여자가 발끈해서 아빠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아니 아빠! 내가 문평이를 안 것도 먼저고 부모님께 인사시킨 것도 내가 한 일인데 왜 빠이롯드 되면 막내 짝이야? 내 짝이 우선 아냐? 하는 거다.
참 난감했다.
영계로 치면 동갑과 결혼하는 것이 좋은데 연상의 여인 말처럼 나를 먼저 안 것은 연상의 여인이 아닌가?
한참 후 밖에 나갔던 동갑내기 여자가 방에 들어오자 연상의 여인은 동생에게 협박의 말을 던졌다. 너 문평이가 빠이롯드 되어도 내가 다른 남자 생겨 시집가면 네 차지지만 아니면 기득권은 나에게 있는 거 알지?
졸지에 두 여자 사이에 장난감으로 전락해 더 이상 황남동 그 집에 있을
황남동 연상의 여인집에서 부어라 마셔라 했던 동안 고모 고모부 할아버지 할머니는 경주에서 좀 떨어진 곳의 온천을 다녀오셨다.
할아버지는 해방 전 횡성 우시장에서 씨름을 해서 황소를 상으로 탄 경험이 있는 분이라 일제 강점기부터 경상도 백암 온천이 좋다는 걸 알고 계셨다.
연상의 여인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할아버지 고모는 바로 돌직구 질문을 하셨다.
문평아 재수해서 빠이롯드 될 거냐?
글세요. 그거 돈 많이 버는 거 알지만 들어가기가 힘들 거 같아서요.
야 지금 허름한 한교 때려치우고 죽어라 공부하면 된다. 하거라 조카!
하는 고모부 말씀에
예 하겠습니다! 했다.
당시 고모부는 월남전 참전으로 상사를 너무 일찍 달아 선임 중사에게 상사인 자기가 말해도 면전에서는 예! 해놓고 뒤에서 행동 안 하는 바람에 고모부는 딱 연금 받을 기간만 채우고 전역해서 고향은 땅끝마을 해남이지만 경주에 정착했다.
공군사관학교 33기 낙방하고 대학생이 안되면 바로 군대 입대 영장이 나올 판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징집 연령을 한 살 줄였기 때문에 내 동창 중에 61년생 소띠들은 군대 입대를 몇 명이 했었다.
장손이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시골 교장선생님을 졸라 62 호랑이 그것도 생일이 음력 사월인데 당당하게 소띠와 동급생이 되었고 전두환 정권이 징집 나이를 줄였어도 나는 修가 가능했다.
이과출신이지만 연상의 여인과 캠퍼스 생활 딱 1년만이라도 같이 하고 싶어 그녀 다니는 대학 국문과에 원서를 냈으나 낙방했다.
더 이상 修가 어려운 것이 징집연령을 낮추는 바람에 소띠 동창 군입대 환송회를 했기에 8X 년에 대학생이 안 되면 나는 바로 입대였다.
생일도 4월이라 전반기 징집 대상이었다.
전기대 국문과 떨어지고 지금 종합대 서원대학교가 된 청주시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원서를 냈다.
졸업생은 담임이 없어서 3학년 담임이 아닌 선생님이 원서 추천을 해주셨다.
하필 나의 입시 상담은 수학 김우빈 선생님이었다.
원서 국어교육과를 보시더니 너는 이과반 출신 아니야? 했다.
예 이과반입니다.
야 인마 그럼 사범대 원서내면 수학교육과를 마치고 나 정년퇴직 직전 내 자리 물려받아야지 국어 헐렁한 안병태 선생이나 깡패 조태현 물려받을래?
제가 SKY 아닌데 모교서 교편 잡기는 틀렸고 제고향 가면 할아버지 아버지가 유지라 어떻게 해주실 겁니다 하고 청주사대 국어교육과 원서를 냈다.
국어교육과가 뭐야? 촌스럽게 니 국어 선생처럼 한복에 흰 고무신 신고 다니려고?
예 저 청주사대 국어교육과 합격하면 한복에 흰 고무신으로 4년 다닐 겁니다.
그래 이과반 이 점수로 지방대 가는 거 억울하지만 합격은 되겠다.
가서 한복 입고 흰 고무신 사진 찍어 보내라 하시면서 입학원서 학교장 직인을 쾅! 찍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연상의 여인과 한 지붕 아래 3년 살고 4년 차에 청주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원래 과는 교육학과인데 부전공을 수학교육을 해서 경주에 자기가 졸업한 모교로 교생실습을 갔고 졸업 후 경상도에서 수학교사가 되었다.
청주에서 修를 많이 한 올드파로 행세하려다 더 올드파를 만났다.
윤병화라는 청주상고 출신 축구선수 최순호랑 동기인데 고3 때 인대 파열로 선수생활 접고 군대 마치고 국어교육과 신입생이 있어 나는 올드파 왕고가 아닌 올드파가 되었다.
수로는 再修지만 햇수로 三修인 것을 생각해 정말 무지막지하게 공부했다.
4년 졸업 시까지 국어국문학 책은 학교도서관 있는 것 다 읽고 졸업한다는 각오로 공부했다.
재수생 원서 교장을 대신해 학교장 직인을 찍어준 수학 선생님과 약속대로 한복에 흰 고무신을 신고 모충동 구룡봉을 넘나들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한 모충동이 당시는 청주사대 회색 건물과 형석아파트 회색 건물 사이는 기존의 가옥과 형석아파트 이외는 공터 거나 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다가 여동생 경화가 대학생이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를 고향 강림으로 가시게 할 때까지 모충동 논 옆에 두 칸 세 들은 방에는 출입문 이외 벽에는 책이 꽉 차 있었다.
도서관에서 대여도 많이 했고 나는 서울 청계천과 성수동 서대문 등지의 헌책방을 알고 있어서 싸게 필요한 책을 많이 구했다.
그건 서울에서 있는 동안 데모도 잘했지만 나를 데리고 헌책방에 가서 당시 지니기만 해도 잡혀갈 칼 막스의 자보논 독어로 다스 카피탈 로자 룩셈부그의 생애와 사상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 이영희의 여러 책들 조선공신주의 운동사 등등의 책을 사서 내 고등학교 교복을 졸업하고도 입고 가방 들고 그 안에 불온서적을 넣어 다정한 척 다니면 수많은 경찰을 만나도 유유자적 통과했다.
검은 돌 고교 졸업식에 교복 교모를 찢어버리려 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상의 여인이 꽃다발 주면서 졸업 축하하는데
교복 교모는 버리지 마! 해서 왜?라고 묻지도 않고 교복을 안 버린 몇 안 되는 모범생이었다.
결국 연상의 여인이 짭새를 속이기 위해 교복과 교모를 고이 간직하게 한 것이었다.
영어 관용구에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다.
시야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청주 모충동에서 1982년 봄부터 1983년 겨울까지 정말 한복에 흰 고무신으로 꽃다리 육거리 본정통을 누비고 다녔다.
미팅도 많이 하고 법학개론 시간에 무용과 여학생이 한자가 너무 많아 읽을 수가 없다고 음을 달아 달라기에 국어교육과 39명 여자들의 눈흘김을 당하면서도 음을 달아주었다.
ROTC 최종합격 발표받은 주 토요일에 국어교육과 편지함에 편지봉투가 아닌 백지에 편지를 쓰고 딱지 접듯 접은
겉면에 국어교육과 2 함문평 뒷면 발신은 아는 여자라는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도 같은 과라 드러내놓고 사귀지는 못했으나 내가 소위 달고 전방 가면 내 책을 보관해 주기로 한 여자가 눈을 흘기면서 아는 여자가 무슨과야? 하면서 주길래 풀어보니 연상의 여인이었다.
수신: 문평학생
발신: 검정교복과 신세 진 여자
내용 : 수업이 언제 끝날 지 몰라 시내 전설의 언덕 키피숍에서 기다리니 수업 마치면 행차바람
지참금:없어도 되나 돌아갈 차비는 있어야 함.
난감했다.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저 저저기 말이야...
왜 말을 더듬어?
아니 저 그게 말이야 이 편지는 경주 우리 고모님 근처 누나인데 고등학교 교복 입은 학생은 가방검사 안 해서 데모 유인물을 내가 운반해 준 적 있는데 고맙다고 인사 왔네.
나 먼저 간다.
미안 그녀는 눈빛이 싸늘해졌고 나는 그래도 부지런히 전설의 언덕으로 갔다.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그녀는 죄 없는 성냥개피만 부러뜨리면서 내가 나타날 때까지 커피 한잔으로 4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차를 마시고 술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다음 어딜 가나? 생각 중인데 이미 그녀가 본정통 좋은 모텔을 예약해 두었다.
완전히 연상의 여인이 거의 엄마가 일 학년 학교 데리고 가는 표정으로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내가 먼저 씻고 나올 테니 나한테 잘한 일은 무엇이고 잘못한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어.
예!
예가 뭐야? 응 해봐?
응!
그녀는 욕탕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다고 나오면서 타올로 몸을 가리고 나와 병영훈련서 샤워시간 1분 주었다며 나는 30초 준다 30초에 샤워 마친다 실시!
실시!
샤워가 아니라 그냥 소나기에 흠뻑 젖은 꼴로 나와 대충 물기를 닦고 그녀가 얼굴만 내민 이불속으로 들어갔다.(중간생략)
이불속에서 그녀가 물었다. 나에게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야?
검은 교복 모자 쓰고 가방에 누나가 전달하라는 대로 해준 거.
그래 맞아.
가장 잘못 싼 거는?
청주 내려와서 누나에게 연락 한번 안 한 거.
알긴 아네? 영어로 Out of sight Out of mind가 뭔지 알아?
시야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그래 나는 네가 이렇게 멀어지더라도 다음 여자는 잘해. 아라찌? 했다.
그 일로 나는 정말 망했다. 2년 동안 공들인 여자가 정말 졸업하는 순간까지 찬바람이 불었고 연상의 여인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부모님 등살에 거의 강제적으로 경주서 잘 나가는 집안 가운데 며느리 되는데 시집가기 전 꼭 한번 보고 싶은 사람이 09였다고.
뒤늦은 후회지만 이승기가 부른 너라고 부를래하는 노래가 1982년에 나왔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텐데~~
때는 1980년 5월15일이다.
서울의 봄이라고 하지만 수상한 봄이었고 사람들이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서울인근의 모든 대학과 재야시민 단체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시국대회를 열었다.
역시나 그 모임을 알리는 전단지를 이번에는 흑석동 까치고개라고 하는 언덕 정상에 가면 이화약국이라고 있었다.
이화약국이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그당시 흑석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이정표가 이화약국이었다.
지금이야 마을버스가 그런 높은 고개도 다니지만 당시는 84번 종점에서 이화약국 까지 걸어가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뻐근해서 그 구부 능선에서 쉬었다 올라가야 했다.
연상의 여인이 나를 불렀다.
문평 학생 교복 교모 가방 안버리고 그대로 있지?
있지.내가 버리려는거 누나가 보관해 해서 옷걸이에 잘 걸려있어.
그래 나는 바로 신촌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미팅주선 할테니 너는 교복입고 교모는 쓰지말고 들고 가방에 이화약국 앞에 가면 수염 많이난 사람이
에이 씨팔!
날씨가 뭐 이래 봄인데 추워! 할거야.
그럼 넌 공부도 안되고 날씨도 춥고 미치겠어요!해 그러면 강ㅇ숙 동생이구나? 하고 가방에 채워주면 그걸 가지고 신촌 이화여대 정문으로 와!
알았어요.
조심해 경찰깔려 있다.
예.
정말 힘들게 이화약국까지 올라가니 약국 옆에 거지보다 조금 나은 복장에 리어카에 고물을 실어 주섬주섬 정리하는 척! 하더니 검정교복에 모자를 안쓰고 손에 쥔 나를 보더니 위에 적힌 대사
에이 씨팔! 날씨가 뭐 이래~~~~해서
난 공부도 안되고 날씨도 춥고 미치겠어요! 했다.
얼른 내 빈가방을 받더니 유인물을 가득 담아주었다.
갈때는 빈가방으로 가도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픈데 가방을 빵빵하게 채우고 흑석동 84번 종점에 중간에 쉬어서 왔다.
84번 타고 서울역에서 신촌 이화여대 방향 버스를 타고 가서 이화여대 정문 옆 다방에서 가방을 전달했다.
내가 미팅은?
응 미팅 끝났지?
이거 가져다주면 나 미팅시켜준다는 말 아니었어?
야 내가 너 교복 교모 가방 보관시킨 이유가 이런 건데 너를 여자 미팅시켜주면 그년이 나보다 예쁘면 너가 내 심부름 할거같아?
나는 할말을 잃었다.
그 유인물을 이화여대부터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 등등 서부지역에 돌려서 서울역 광장에 많이 모이는 역할을 했다.
그당시 서울역광장에 나타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우리의 주장을 할만큼 했으니 이제 더 이상하면 시위 탄압에 군인투입 빌미가 된다고 자진 해산합시다 했다.
연상의 여인은 뭔소리야 청와대로 가야지?
유ㅇ민은 연상의 여인보다 더 강경파였으나 심재철 회장 보다 학번이 아래라 말발이 안먹혀 심재 철 말에 따르기로 했다. 강경파는 위화도 회군에 빗대어 서울역 회군이라고 말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