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창고. 5

Agent Orange

by 함문평

에이전트 오렌지

(Agent Orange)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는 박 상사로 맹호부대 기갑연대 7중대 포 반장으로 참전했을 때 처음 봤다. 밀림에 우거진 활엽수를 제거하기 위해 고엽제를 살포했다. 200L 드럼통 상단에 노랑 띠가 둘러있었고, 미군들은 에이전트 오렌지를 줄여 에이오(A.O)라고 불렀다. 그 시절은 그냥 낙엽을 제거하면 베트콩이 숲 속에 은신처가 사라져 좋다고만 생각했다.

예비역 박 상사 쌍둥이 손녀가 TV 스포츠 뉴스에 보도되었다. 국기원 주체 전국 어린이 태권도 대회에 박예빈, 박다빈 쌍둥이 자매가 결승에 올랐다. 박 상사는 채널을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스포츠 소식만 봤다. 예빈이 다빈이 태권도 겨루기 모습이 몇 초 지나간 것이 몇 분 이상 되는 잔상이 남고 흐뭇했다. 눈물이 났다. 스포츠 뉴스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결승전에서 만난 쌍둥이를 엄마 아빠는 누구를 응원할 것인지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박 상사는 화가 났다. 미친놈들이지 뉴스를 보도하려면 최소한 예빈이 다빈이 집을 방문해 사실 확인을 하고 보도해야지, 어린 자매에게 아비도 어미도 없어 조부모가 키운 것을 모르니까 저렇게 보도했다. 박 상사의 아들 박영준은 십 년 전에 배순선과 결혼했다.

결혼하여 대방동에서 전세살이로 신혼생활을 하면서 쌍둥이 딸 예빈과 다빈을 낳았다. 딸이라 이름을 나무 목면의 심을 ‘식(植)’으로 하려고 하니 일식(一植), 이식(二植), 도식(道植), 지식(智植), 예식(禮植) 별의별 이름을 지어도 흡족한 것이 없었다. 옥편을 뒤적이면서 여자 이름으로 부르기 좋은 이름을 족보 무시하고 지었다. 언니는 예빈(藝斌), 동생은 다빈(茶斌)으로 지었다. 쌍둥이 손녀가 3세 때 영수가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몸속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다. 물에 잉크가 번져 알아볼 수 없는 것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부검하고 유서 판독도 했다. 참으로 끔찍한 내용이었다. 아버지 박형수 상사가 월남전 참전했고, 고엽제에 오염된 것을 모르고 결혼했다. 그 시절은 고엽제에 대한 의학 보고도 별로 없었다. 소문으로 기형아가 태어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아들은 멀쩡했다. 결혼하더라도 자식을 낳지 말아야지 고엽제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니 내 병은 나라 어느 병원에 가서도 처방도 모르고 치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유서였다. 국가에서는 유서를 공개하면 나라에 파장이 너무 클 것을 우려 유족에게 돌려주기만 하고 유족도 일절 발설하지 말 것을 서약서를 받았다. 더구나 아들이 도박하는 줄 몰랐는데, 도박으로 진 빚이 5억이나 되었다. 그러니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영수가 도박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프 배팅을 하거나 다이(Die)를 외쳐야 할 순간에 몸에 가려운 증세가 나타나거나 눈이 경련을 일으켜 도박에서 더 많은 실패를 한 것이라고 유서에 담겨있었다.

투 페어(Two Pair)가 쓰리 오브 카인드(Three of Kind)로 보여 풀하우스(Full House)를 노리고 하프 배팅하고 나면 아 투 페어(A Two Pair)였다. 그러니 스트레이트나 플러시에게 늘 최종에서 잡혔다.

이런 유서를 언론에 발표하면 국가 망신이라고 쉬쉬했다. 그것이 30년 전 이야기다. 박 상사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1965년 10월 20일 지금은 호찌민으로 불리는 사이공에 도착했다. 1진으로 간 전우들 대부분이 2진이 도착한 배를 타고 귀국했으나 횡성군 촌구석에 내 땅 한 평 없이 평생을 소작농으로 사는 아버지에게 여기서 고생해서 번 돈으로 논 10마지기라도 사드리려고 연장 복무했다. 월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면 강림에서 논 10마지기는 샀을 것이다. 그런 돈을 아버지는 받아서 도박으로 날렸다.

보내준 전투수당을 도박으로 날린 것도 분했지만 박 상사를 더 열받게 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 파병 전우에게 1인당 전투수당을 500달러를 미국이 한국으로 보낸 것을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으로 조성하고 50달러만 지급했다. 현역 상사로 근무 시는 몰랐는데, 원사 진급을 포기하고 상사로 전역하니 미국 국회청문회에서 박동선과 김형욱이 증언을 하고 프레이저 보고서인가 만든 하원 의원이 상세하게 미국 국방성 기밀해제 시기에 맞게 모든 것을 보고서에 넣었다.

주월 한국군 초대 사령과 채명신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지급 전투수당을 장병에게 나누어주라고 건의한 것을 박정희가 묵묵부답이자 자신이 죽으면 파월 일반병사 묘역에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을 한 것이 소문으로 돌던 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한국서 떠날 때는 중사로 떠났는데 무공을 세워 현지서 상사로 특진했다. 맹호부대가 마지막으로 철수하고 참전군인에 대한 재분류되었다.

강원도 횡성이 고향이라 원주 1군 사령부 예하 부대를 신청했다. 군대 백 없고 뇌물을 안 써서인지 멀고 면 남쪽 경상북도 2군 사령부 예한 영덕, 강구, 안강 해안부대로 전출되었다. 특이한 것은 강원도는 깻잎으로 절임 깻잎을 해 먹는데 여기는 콩잎을 절임으로 했다. 처음은 콩잎을 누가 먹어? 했으나 옆집 아주머니가 멀리 강원도서 이사 왔으니, 경상도 절임 콩잎을 경상도 특별 반찬이라고 한 접시 주어 딱 한 장만 먹어 야지하고 먹었는데, 중독성이 있어 또 한 장, 또 한 장 하다 보니 그걸로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문제는 박 상사보다 부사관학교 선임이 중사가 많았다. 노골적으로 경례를 해도 건성으로 손바닥이 보이게 경례했다. 세월이 흘러 연금 수령 나이도 지났고, 원사 진급 대상 20명 중 19명이 다 부사관학교 선배였으나 대대장, 연대장이 월남전 참전 유공자 박 상사가 원사가 안 되면 누가 원사가 될 것이냐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바람에 선임들이 더 박 상사를 미워했다.

원사 진급을 포기하고 전역했다. 전역이 아니라 퇴역했다. 일반인은 전역과 퇴역을 국어사전 찾아보기 전에는 모른다. 전역은 전역 후 잠수함 강릉 무장 공비 사건이 나서 동원령이 선포되면 동원부사관으로 가는 것이 전역이고 퇴역은 동원령 할아버지가 선포되어도 동원 안 되는 것이 퇴역이다.

퇴직금을 연금 안 받는다고 일시금으로 받아 고향 횡성으로 갔다. 퇴직연금 일시금으로 소 10마리 논 10마지기 밭 6,000평을 샀다. 땅 한 평 없이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다 간 아버지 어머니가 불쌍했다. 월남전 전투수당 받은 것을 도박으로 다 날리지만 않았으면 강림에서 부자 소리 듣고 살 수 있는 것을 아버지는 월남전 전투수당을 다 도박으로 날렸다. 강림에서 강림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친 아들이 원주에 나가 치악고등학교에 다녔다. 고3 때 음대를 가고 싶다는 것을 말렸다. 촌에서 논 10마지기와 밭 6천 평 농사짓는 집 아들이 음악, 그것도 성악을 과외 한번 받은 적 없는 아들이 지원해 봐야 덜어진다고 말렸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 잘되는 경영, 경제학을 지원하라고 했다. 대학 졸업하고 서울 대림동에 있는 대림 탄소강에 취직했다. 대림 탄소강 옆 대동상사에 근무하던 여자 배순선과 눈이 맞아 연애했고 결혼을 했다. 음대 가려는 것을 말렸더니 직장 생활하고 바쁜 와중에도 대림동 교회 성가대에 들어갔다. 타고난 목청이 좋다고 성가대 지휘자가 환영했다. 회사생활과 교회 성가대로 바쁘게 지낸 아들이 쌍둥이 자매 손녀가 3세 때 한강에 투신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모범생으로 학교 다녔고 직장에서도 맡은 일 잘하고, 가정에서 좋은 남편 쌍둥이 자매의 좋은 아빠였던 아들이 한강에 투신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얼마 후 며느리 배순선은 쌍둥이 자매를 박 상사 부부에게 맡기고 재가했다. 쌍둥이 자매는 전교생이 20명인 강림초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교장 겸 저학년 담당 이종은 선생과 상급 학년을 담당하는 이미정 두 분 선생이 강림초등학교를 유지했다. 이미정 선생은 자신이 학생 시절 태권도를 잘한 기억을 더듬어 초등학교 태권도부를 만들어 가르쳤다.

이변이 생겼다. 국기원 주최 전국 어린이 태권도 대회에 4강에 오른 박다빈, 박예빈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상대를 이기고 결승에 올랐다. 강림초등학교 쌍둥이 자매가 결승에 올랐다는 소식에 강림면 출신 재경향우회 최수남 회장이 내일 국기원에 강림초등학교 박예빈, 박다빈이 결승에 진출했다. 금, 은메달이 강림초등학교입니다. 강림향우회 회원 여러분 시간 되시면 10시 결승전 응원 바랍니다. 단체 문자를 보냈다. 우리나라 친목 단체 중에서 결속이 가장 잘되는 곳 1위가 해병전우회 2위 고대교우회, 3위가 호남향우회라고 한다. 누가 그런 말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해병전우회보다 인원이 적을 뿐이지 단결력 높은 것이 재경 강림향우회다. 강림향우회를 처음 만든 것은 김두한을 필두로 종로에 내려오던 조직 깡패 계보 마지막이 낙화유수다. 낙화유수 아래 기수에 권성돈이라고 있다. 촌에서 이름에 돼지 돈(豚)을 쓰면 돈을 잘 번다는 속설로 성돈으로 지었다. 성돈이 낙화유수 아래 기수로 종로를 누볐다. 그 후 강림에서 몸이 날렵한 사람이 야금야금 올라왔다. 뭐 벌교에서 주먹 자랑 마라는 말이 있지만, 벌교 주먹이 강림에 오면 권성돈에게 뼈도 못 추린다는 말이 돌았다.

쌍둥이 자매가 어린이 태권도 대회 금, 은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오자 강림초등학교 교문, 강림면사무소 현과 강림 노인정에 현수막이 붙었다. ‘경축, 강림의 딸 박예빈, 박다빈 전국 어린이 태권도 대회 금, 은메달 획득’이라고 걸렸다. 춘천 KBS방송국에서 취재도 했다. 지도교사 이미정 선생에게 전교생 20명인 학교에서 전국대회 금, 은메달을 획득한 원인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물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비결은 없습니다. 배우는 학생 20명을 40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이 환생한 어린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지 모르는 첫사랑 남자가 태권도를 잘했다.

그 시절은 운동선수가 어른들에게는 힘들고 고생만 한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이 친구는 부모 몰래 태권도를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고3 때 바로 춘천교대 대학생이 되었는데, 3 수로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갔어요. 그 친구 어록이 이 세상 교육의 기본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차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20명을 잃어버린 첫사랑 대하듯 가르쳤습니다. 아이들도 아직 첫사랑을 모르는 나이지만 나의 사랑에 보답한 것입니다. 기자는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무슨 뜬구름 소리냐? 는 표정이었다.

강림초등학교는 쌍둥이 자매의 태권도 우승으로 전국에 소문이 났다. 이미정 교사가 태권도 지도에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으로 알고 전국에서 태권도 유학을 왔다. 20 명이던 학교가 48명으로 전교생이 늘었다. 이미정 교사는 교장 선생님께 건의하여 횡성교육청에 젊은 선생 한 명을 보충해 달라고 했다. 처음은 태권도를 2개 반으로 나누어 가르치려고 했다. 아이들을 타 지역서 전학을 시킨 학부모들이 항의하면서 이미정 선생에게 자기 아이를 배우게 한다고 하면서 야외용 앰프와 무선 마이크를 학교에 기증했다. 하는 수 없이 운동장에 전교생 48명을 양팔간격으로 세우고 젊은 선생님은 태권도 부사범이 되어 학생들 줄 사이를 다니면서 자세 교정을 하고 단상 위에서 이미정 선생이 구령과 시범 동작을 보였다. 금메달, 은메달 쌍둥이 자매는 시범 조교가 되었다.

학생 수도 늘고 태권도 전국대회 메달리스트가 조교인 태권도반은 날로 발전했다. 쌍둥이 자매가 졸업하고 강림중학교 진학한 해는 전국태권도 대회에서 초등부와 중학생부 금, 은메달을 수확했다. 쌍둥이 자매는 강림중학교를 졸업하고 안흥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태권도부가 없었다. 박 상사도 쌍둥이가 손자라면 무리해서라도 계속 태권도를 가르쳤겠지만, 손녀라 태권도를 포기하고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쌍둥이 자매는 원주에 있는 간호조무사 학원을 마치고 간호조무사가 되었다. 다빈은 대방동에 있는 내과의원에 예빈은 대림동에 있는 정형외과에 취직했다. 자매가 거주할 청년 주택을 신청했다. 탈락이었다. 탈락이유는 쌍둥이 자매를 3세에 버리고 재가한 배순선 재산세와 월간 납부 건강보험료가 80만 원이 넘는다는 이유였다. 화가 났다. 청년 주택 심사하는 곳에 80 노구를 이끌고 찾아갔다. 별 효과는 없겠지만 베트남 전쟁 참전 유공 휘장과 무공훈장을 들고 갔다. 서울시 주거 안심 센터 한쪽 사무실에 청년 주택 부스가 있었다.

박예빈, 박다빈이 내 손녀다. 나는 베트남 전쟁 참가하여 무공훈장도 받은 예비역 박형수 상사다. 예빈이 다빈이 아빠는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다. 엄마 배순선은 쌍둥이 자매가 3세에 재혼을 했다. 돈 많은 늙은이 후처가 되었고, 늙은 남편이 죽자 상속으로 엄청난 재산세와 건강보험료 80만 원 넘게 내지만 쌍둥이 자매가 초등학교 입학 때 가방 하나 공책 하나 사준 일이 없고 딸이 엄마라고 안 부르고 그년이라고 부른다. 그런 여자가 세금 많이 낸다고 청년 주택 떨어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청년 주택 심사담당자는 어르신 사정은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현행법과 시행령, 심사 규정 모두 그렇게 세부적인 것까지 확인은 아니고 법적으로 드러나는 세금과 건강보험료 납부기준입니다. 상부에 이런 사례가 있다고 보고할 테니 오늘은 돌아가시라고 해서 돌아갔다. 주월 맹호부대 기갑 제2대대 7중대 중사 박형수는 포 반장이었다.

우리는 적에게 용감하고 무서운 군인이 되자. 우리는 월남인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따이 한이 되자. 우리는 우방 군에게 군기 엄정하고 신의 있는 코리안이 되자는 주월 한국군 신조를 나이 90에도 줄줄 외운다. 하지만 그 시절 신조를 외우는 것과 실제 행동에서 신조를 지키는 군인도 있었지만, 아닌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신조를 지켰지만 어디 가나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는 있는 법 베트남전에 참전 군인 중에서도 고가초소 바로 아래 월남 여자를 달러 몇 푼 주고 오입을 하는 일도 있었고, 현지처를 만드는 간부도 있었다. 심지어 현지에서 아이까지 낳고도 철수할 때 베트남에 두고 온 군인도 있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로 통일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했다. 베트남에는 미군과 한국군 현지처와 태어난 2세들이 고아가 되었다. 박 상사 군대 동기 박해임 상사는 90 나이에도 베트남 하이퐁 마라톤에 참가하고 완주 메달 한 개를 여분으로 가져와 박 상사에게 주었다. 박해임은 마라톤을 마치고 맹호부대 격전지를 다녀왔다. 사진을 박 상사에게 보여주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맹호부대가 싸우던 전적지 주변이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쌍둥이 자매는 초등학교 때 어린이 태권도 대회에서 금, 은메달을 땄지만, 촌에서 아비, 어미 없는 손녀를 태권도를 계속시키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하고 간호조무사로 서울에서 병원직원 생활을 하는 것이 기특했다.

억울하지만 쌍둥이 자매는 청년 주택을 포기하고 각자 저축으로 서울에서 원룸이라도 얻기 위해 월 70만 원씩 적금을 부었다. 고엽제가 자식에게도 영향이 미친다는 말은 들었지만, 박 상사가 원주보훈병원에 고엽제 후유증을 검사해 달라고 했으나 몸의 반점이 고엽제 후유증인지 강림에서 농사지은 농약의 후유증인지 인과관계를 알 수 없다는 의사 소견이었다. 박 상사 후배 원 중사는 고엽제로 판정되어 보훈병원에서 모든 것을 무상으로 치료받고 보훈연금도 월 400만 원을 받았다. 물론 400만 원 안 받고 고엽제 환자 아닌 것이 좋지만 박 상사처럼 퇴역한 군인에게 몸에 반점이 나는 상태라면 억울했다. 박 상사를 속상하게 한 것은 죽은 아들이 유서에 고엽제 후유증을 의심하는 내용을 썼다. 한 번도 아들에게 월남전에서 고엽제 살포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얼마나 괴로우면 그런 유서를 쓰고 자살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다.

박 상사가 베트남전에 참전해 받은 전투수당을 아버지는 강림에 논을 사라고 했더니 모두 도박으로 날렸다. 그것이 미워 박 상사는 화투도 포커도 안 배웠다. 반대로 박 상사 아들은 화투도 포커도 잘했다. 생물학적으로 한세대를 건너가는 유전이 있다. 쌍둥이 자매의 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하고, 할아버지는 도박을 싫어했다. 쌍둥이 자매의 할아버지는 사실 태어나기는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쌍둥이 형이 3세 때 홍역으로 죽었다. 쌍둥이도 한세대 건너 유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것이 다 보는 것이 아니다. 꿈을 꾸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맹호부대가 큰 승리로 기록된 작전이다. 헬기 수십 대가 하늘 날아갔다. 나중에 그것이 안케 패스 작전이란 것을 알았다. 베트남 밀림 지역 무성한 잎이 다 떨어졌다. 앙상한 나무가 마치 지리산 고사목(枯死木)처럼 변했다. 베트콩은 숨을 곳이 사라졌다. 급한 마음에 땅을 파고 참호를 만들었다. 참호전투는 1950년에 6.25 전쟁에서 단련된 맹호부대 전우 상당수는 참호 전투경험자라 베트콩은 대적 수준이 못 되었다.

그때는 미군이 밀림 나뭇잎을 없애주어 전투에 도움이 된다고 엄청 고맙게 생각했다. 월맹이 공산화로 통일하고 맹호부대가 철수했다. 철수한 이후 서서히 고엽제 환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단순 피부병으로 생각했다. 피부과 의사가 처방해 준 약으로 아무는 듯하다가 다시 붉은 반점이 올라왔다. 아무리 군사비밀이라고 해도 그렇지 혈맹, 동맹국이라고 하면서 미군은 에이전트 오렌지 살포하니 옥외활동을 금지하라고 하면서 한국군에는 알려주지 않고 살포했다. 맹호부대원은 그냥 무성한 수풀이 고사목으로 훤하게 보이니 베트콩 은신처가 없어지니 좋았다. 땅굴을 파고 참호전투에 돌입했다. 한국군은 3년 동안 6.25 전쟁으로 참호전투에 단련된 인원이 절반이고 베트콩은 간부들 이외 병사는 참호전투 경험이 없었다. 그러니 맹호부대와 베트콩의 참호전투는 헤비급과 플라이급의 권투 경기 수준이었다. 명수는 학생 시절 수학과 음악을 잘했다. 박 상사는 수학과를 가라고 했는데, 음악 그것도 성악을 하고 싶다고 해서 돈도 없고 성악 개인 교습 한 번도 안 한 네가 원서를 내봐야 떨어질 거라고 경영이나 경제학과 가라고 했다. 가고 싶은 성악과 신학과가 아니다 보니 대학 4년을 건성으로 다녔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눈이 맞은 여자 최영경과 연애를 했으나 그녀 부모가 가족 사항을 물어보고 사귀지 못하게 막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설자재 도매하는 곳에 취직했다. 인접 회사 경리직원 배순선과 연애했고 결혼했다.

마의상법에 머리를 흔드는 여자는 남자의 앞길을 막는다는 말이 있지만 수천 년 전의 마의상법이 21세기는 안 맞을 것이라고 결혼을 시켰다. 아들이 성악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을 막았더니 결혼하고 교회 성가대 일을 직업과 가정 보살피는 것보다 더 열심히 했다. 설과 추석에 며느리가 오면 아내에게 하소연이 어떻게 남자가 가정일이나 회사 일보다 성가대에 목숨을 거냐고 하면 아내는 아비가 하고 싶은 것은 음대 성악과나 신학대에 가서 목사님 하고 싶었는데, 성악은 돈이 많이 들어 안되고 신학은 집안이 몇 대가 불교 집안인데 무슨 신학이냐고 막아서 반감으로 그런 것이니 좀 참으면 정상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구랬는데 쌍둥이 자매가 태어나고 3세 때 아들이 자살했다.

교회 성가대에서 합창 중에 솔로로 멋지게 고음을 부를 때는 테너 엄정행이나 신영조가 성가대에 합류했나 의심이 될 정도로 성가대에 지난 주일에도 노래 부르던 사람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어 대림동 교우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아들이 극단적 선택하고 떠나자 며느리는 쌍둥이 딸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세요 하고는 재혼을 했다. 재혼해서 먹고살만하면 딸이 입학하면 책가방이나 학용품이라도 사 올 줄 알았는데 전혀 지우개 하나 사 온 적이 없었다.

맹호부대는 베트남 정부의 전투부대 파병 요청과 미국이 한국에도 전투 수당을 지급한다는 것과 무기를 무한으로 공급한다. 약속받고 1965년 10월 22일 베트남 항구도시 퀘논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훈 손 마을에서 첫 전투에 승리했다. 이때 참전한 한국군 부사관과 장교 중에 6.25 참전경험이 있는 간부가 많았다. 특히 6.25에 북한군 포로가 되었다 탈출해 다시 한국군에 편입해 싸웠던 박경석 중령은 북한군의 진지구축과 소부대 대부대 전술을 10 사단잔 전문섭을 따라다니면서 사단장이 지시한 사항을 기억하고 있어 월맹군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풍손 마을 전투에서 승리 후에 1966년 3월에는 고보이 지역에서 사단 규모의 대부대 작전을 펼쳐 승리했다.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 역시 6.25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사령관이 직접 전투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휘하 여단장에게 지침을 정확히 하달했다. 특히 박경석 중령은 북한군 10사단에 포로가 되었는데 사단장 전문섭이 너무 어린 청년이 계급장은 소위라 가짜 소위로 알고 직접 사단장이 심문했다.

가짜 소위 아니냐? 는 장군의 질문에 박 소위는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똥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데 장군 계급 가짜니까 소위 계급장이 가짜로 보이는 것 아닙니까?라고 발칙한 답변을 했다. 전문섭 10 사단장은 허허 웃으면서, 해방군관 기백이 대단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전속부관 소위가 있음에도 박 소위를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해방 군관이라고 부르면서 은근히 북한군으로 전향을 유도했다. 박 중령은 육사 2기로 교육 중에 6.25가 발발하자 바로 소위로 임관되어 전선으로 나갔다. 전문섭 북한군 10 사단장을 따라다니면서 북한군 진지구축과 사단장이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는 것을 기억한 것이 중령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무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는 기초가 되었다. 이 시기 전두환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는데 귀국 후에 박 중령은 훈장이 여러 개이고 자신은 한 개뿐인 것에 불만이 컸다. 술만 마시면 노태우에게 박경석은 훈장이 치렁치렁하게 많은데 자기는 없다고 푸념했다. 박 상사 나이 90이 되어도 잊지 못할 작전은 안케 패스 작전이다.

1972년 4월 1일부터 26일까지 맹호부대 기갑연대가 베트남 중부 교통요충지에서 19번 도로를 월맹군에게 제압당해 미군과 한국군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맹호부대는 638 고지 전투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도 했고 패배도 했다. 뉴스에는 승리한 전투만 보도했고 패전과 사상자는 숨기거나 숫자를 줄였다. 638 고지 전투도 공식 기록은 75명 전사 222명 부상이라고 대한뉴스에 나오지만, 박 상사 전우의 사망자는 173명이다. 이제라도 국가보훈처나 국방부는 기록을 사실대로 죽기 전에 바로 잡아주기 바랄 뿐이다. 기록뿐만 아니라 참전 전투수당 500달러를 주기로 했고 미국은 한국에 500달러로 지급한 것이 미 국방성 기밀 해제문서에 나오는데 50달러만 지급한 차액을 스위스 은행에서 찾거나 비밀계좌라 본인 사망으로 찾을 수 없으면 박지만이나 박근혜라도 가서 찾아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정부가 지급해야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 아닌가? 박 상사 나이 90이지만 술만 마시면 이놈의 나라 개판이라고 욕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200개 국가 중에서 상위 경제 대국 10위라면서 목숨 걸고 싸운 전투수당을 국가가 삥땅하고 60년이 넘도록 국가가 모른 척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했다. 베트남은 말라리아모기와 거머리가 많았다. 소문은 미군이 모기와 거머리 퇴치를 위한 에이전트 오렌지를 했다. 실제는 베트콩 은신처를 무성한 활엽수 잎으로 발견이 어렵다고 나뭇잎을 떨어뜨리려고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했다.

살포하면 살포한다고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말로만 우방, 혈맹이지 아니었다. 고엽제를 살포한다고 미리 알려만 주었어도 그 살포 시간에 옥외로 나가는 것만 막았어도 고엽제 환자는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박 상사도 그것이 고엽제인 줄 모르고 물로 씻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귀국하고 바로 증세가 나타난 후배들은 보훈병원이나 수도통합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았다. 상사로 퇴역군인이 되어 고향 강림에서 농사를 짓는 중에 반점이 생기고 가려워 피부과에 갔으나 안흥 의원이 실력이 없어 그런가 하고 원주 기독교병원 피부과에 가봐도 소용이 없었다. 베트남전에서 처음 미군이 많이 당한 것이 부비트랩이었다.

대꼬챙이나 못을 이용한 부비추랩에 전투화 가죽울 뚫고 걸음을 걸을 수 없게 했다. 스파이크 글러브라고 고슴도치 침 같은 공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군이 사단급 이상 대부대 작전을 많이 했으나 베트남전에서는 밀리지 역이 사단급 이상 대부대 작전이 어려웠다. 밀림으로 소부대작전에 베트콩에게 당하기만 하다가 6.25 경험이 있는 한국군이 소부대전투에서 작은 승리 여러 개를 올리자 미군도 사기가 높아졌다.

미군은 깡통만 보면 발로 차는 고약한 습성이 있는데, 그 깡통 속에 수류탄을 안전핀을 아슬아슬하게 걸친 상태로 둔 것을 미군이 깡통을 발로 차면 깡통 속 수류탄이 터져 반경 5미터 이내 미군 전우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런 사례를 채명신 장군이 사전에 정신교육을 해서 한국군 맹호부대원은 깡통을 보면 피해 갔다. 베트남 전쟁에 철의 삼각지 전투는 유명했다. 정글 속 교통호가 개미굴이나 거미줄처럼 형성되었다. 지상으로 이동하는 미군을 베트콩이 땅속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기습사격을 하고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6.25 전쟁에서 북한군이 황해도와 평안도에 이런 교통호를 구축한 것을 탈취해 본 경험 있는 맹호 부대에게 적수가 안 되었다. 맹호부대는 개미굴 교통호 베트콩 진지를 한순간에 초토화했다. 화염방사기와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교통호 속으로 뿌리고 화공을 한 후에 진격했다. 이것이 와전되어 베트남전에서 양민학살 또는 마을을 통째로 불을 질렀다고 했다. 작전상 이런 화공에 희생된 민간인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그런 베트콩 속에 섞인 민간인까지 고려하면 작전 자체를 할 수 없다.

정글의 무성한 나뭇잎 제거를 위해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제품에 다이옥신이 포함되었다. 요즘은 다이옥신이 발암물질이라고 제조 자체를 못 하게 하지만 그 시절은 그런 개념이 없었다. 다이옥신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2세, 심지어 3세까지 영향이 미친다는 것이 의학계 내부에서는 처음부터 알았지만, 공개 안 하다 최근에 공개했다.

다이옥신 후유증은 몸에 반점은 기본이고 기형아 출산, 불임까지 다양한 의학 보고가 학술지에 연구논문으로 등재되었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의학 논문 이야기가 일반 신문에 보고되는 것을 막았다. 국가가 어떤 것을 비밀로 지정하더라도 3년, 30년은 비밀로 할 수 있으나 영원한 비밀은 없다.

비밀이 해제되자 여기저기 정의감이 있는 잡지에서 ‘에이전트 오렌지’에 대한 비화를 공개했다. 미국과 한국 정부도 더 숨길 수 없어서 고엽제 환자, 베트남전 참전 유공자에 대한 특별법을 국회서 만들었다. 전국 보훈병원에는 고엽제 환자가 모여들었다. 에이전트 오렌지 피해 군인들에 대한 전수 조사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작전명‘린치 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에서 처음 에이전트 오렌지가 사용되었다. 목적은 정글에 은신해서 찾기 어려운 베트콩을 발견하기 위해 나뭇잎을 제거했다. 효과 만점이었다.

헬기가 저고도로 비행하면서 살포한 에이전트 오렌지는 무성한 밀림을 환하게 보이는 고사목으로 만들었다. 지상에 은신이 어려운 베트콩은 지하로 내려갔다. 호찌민 갱도라는 것을 팠다. 동서남북 종횡으로 연결된 거미줄 같은 호찌민 갱도는 갱도 내에 창고와 식수 보관 장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그런 교통호 전투에 익숙한 맹호부대는 순식간에 호찌민 갱도를 마비시켰다. 갱도 내에 대량의 드럼통에 휘발유를 대보름 쥐불놀이 깡통처럼 구멍을 숭숭 내고 교통호 안으로 굴렸다. 이어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갱도 안으로 던졌다.

갱도는 불길에 휩싸였다. 옷에 불이 붙은 베트콩이 갱도 밖으로 뛰어나오고 나오자마자 알아서 자수했다. 항복했다. 맹호부대가 처음 퀘논에 도착했을 때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겸 맹호부대 사단장 채명신 장군은 연병장에 군인들을 모아놓고 훈시했다. 제군들은 1950년 6월 25일 김일성 공산주의자 침략에 자유 우방 국가들이 대한민국을 도와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았다. 이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우리도 베트남 공산화를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는 목숨 걸고 싸울 것이고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당부할 것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희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사령관 훈시를 듣고 각자 중대별로 숙영지로 이동했다. 안케 패스 작전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고지는 탈환했지만, 중대원 150명이 전투 참가하여 최종 생존자는 29명이었다. 29명 패잔병은 7중대로 재배치되었다. 중대장은 내일 전투에 우리가 모두 전사할지도 모른다. 고국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했다.

말이 편지지 유언장을 쓰라는 소리였다. 나누어준 편지지에 <부모님 전 상서> 편지를 쓰고 이어 나누어준 비닐봉지에 손톱, 발톱, 머리카락도 비닐봉지에 담고 편지 봉투에 편지와 함께 넣었다. 소대장이 소대원의 편지를 모두 회수하여 중대 행정반에 제출했다. 나이 90인 지금도 그날 편지와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로 시작한 편지가 강림에 도착했다. 받아 본 아버지 어머니는 베트남에서 아들이 죽은 줄로 알고 대성통곡했다. 귀국 후 강림에 와서 부모님을 만나자 아버지, 어머니는 박 상사를 안고 펑펑 울었다. 야 이놈아! 편지에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넣어 보내면 죽은 줄로 알지? 죄송합니다. 중대장 지시라서 그렇게 했습니다. 자유월남이 패망하여 수백만 명이 숙청되고 백만 명이 넘는 보트 피플이 떠돌아다녔다.

가슴이 짠했다. 세월이 60년이 흘렀어도 맹호는 간다 노래 가사가 귓전에 맴돈다. 맹호는 간다.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이하생략) 홍천에서 맹호부대 1 연대 기갑부대는 월남 정글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다. 더운 나라라 식수가 부족해도 살아남을 생존 훈련을 시켰다. 평소는 수통을 물을 가득 채워 훈련 출발했으나, 반만 채워 출동했고, 다음 주는 아예 수통에 물이 없이 출동했다. 이유는 갈증에 대한 참는 훈련을 한 것이다. 요즘 21세기 생각으로는 생수병을 보내주면 될 것 아니냐? 바보 아니야? 하겠지만 그 시절은 생수병도 없던 시절이다. 반대하던 야당에서 신민당 박순천 여사가 파병 지지를 했다. 1965년 10월 8일 홍천에서 군용 트럭을 타고 춘천으로 이동했다. 도로변에는 시민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격려했다.

춘천역에는 강원도지사, 춘천시장, 횡성, 원주 국회의원 이우현, 2군단 예하 장군들과 시간이 되는 대령들이 눈도장을 찍으려고 파월 맹호부대 환송했다. 경춘선 기차로 서울에 도착한 맹호부대는 여의도에 천막을 치고 숙영 했다. 10월 12일 현재 여의도 공원이 된 여의도 비행장에서 범국민 맹호부대 파월 환송회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3부 요인, 외교사절, 정당 및 사회 단체장, 학생과 시민이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환송회를 했다. 강림 촌구석 부모님도 오셨다. 다시 살아서 부모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 조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겉으로 표현은 못 하고 속으로 두려움이 천근만근이었다.

나이는 피 끓는 청춘이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맹호부대원을 실은 배는 베트남 퀴논 항에 도착했다. 예빈, 다빈이 베트남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무슨 베트남이냐고 물으니 우리나라 남자와 맞선도 보고, 연애도 했지만, 한국 남자는 TV에 나오는 아이유나 트와이스 같은 여자만 좋아하고 맹호의 딸 다빈이 예빈이는 신붓감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베트남 남자를 짝으로 정했다고 했다. 손녀가 박 상사 여권 발급 대행했다. 그 옛날 베트남전에 참전할 때는 배로 열흘 넘게 걸려 갔었는데 쌍둥이 손녀 결혼식 참석은 비행기로 3시간에 도착했다. 베트남전 참전 시기에도 길거리 오토바이 천지였는데 지금은 더 많아졌다. 붉은색 바탕에 노랑 왕별이 그려진 베트남 국기가 약간 눈에 거슬렸으나 공산화 통일이라지만 인민들 사는 모습은 대한민국이나 별 차이 없었다. 허망했다. 이렇게 될 거라면 구태여 미군이나 한국군이나 그렇게 목숨 걸고 싸울 필요가 있었나 회의가 들었다. 쌍둥이 손녀 합동결혼식을 마치고 혼자 베트남 여행을 했다. 맹호부대 대원으로 참전한 베트남 땅을 쌍둥이 손녀 결혼식을 하고 손주사위 2명이 베트남 남자라니 참 묘한 인연이라 생각했다. 맹호부대 상륙지 다낭 항과 치열한 전투를 했던 19번 도로를 택시를 타고 달렸다. 에이전트 오렌지 살포로 앙상한 고사목이 된 밀림 지역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성한 밀림이 되었고, 시가지는 서울 못지않은 고층 빌딩과 호텔이 들어섰다. 1975년 4월 30일 민 장군은 대통령 취임 선서 이틀 만에 월남군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자유 월남공화국 마지막이고, 미군과 한국군은 배를 타고 고국으로 귀국했다.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눈이 침침했다. 몸이 가렵고 반점이 생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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