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구마라톤
노구(老嫗) 마라톤
이학선, 박해임, 이심결은 노고소가 고향이다. 어린 시절 각림천에서 알몸으로 멱을 감았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비석 차기, 오징어놀이, 땅따먹기, 여자애들 고무줄놀이 고무줄 끊기 등을 할 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학선은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했다. 소년체전이 한창 국가에서 많은 예산을 지원할 때, 횡성군에 강림면 대표로 출전했다. 횡성군에서 1등 하고 춘천에 강원도 대표 선발전에 탈락했다. 심결은 아버지 어머니가 이북에서 내려와 친척 한 명 없이 어렵게 지냈다. 초등학교 학력이 최종학력이었다.
무작정 서울로 왔다. 구두닦이 찍새부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닦는 고수가 하는 것을 보고 집에 와서 연습했다. 푼돈이지만 모아서 고입 검정고시, 대입 검정고시 학원 다니고 마침내 합격했다.
해임은 노고소에서 어린 시절만 보냈다. 아버지가 화순으로 탄을 캐는 광부로 취직했다. 화순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 입국을 강조하는 시기라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태성정밀이라는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해주는 제도로 갔다. 가자마자 전남기계공고 선배가 밀링에 손이 끼어 절단되는 것을 목격했다. 방위산업체 근무를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대학시험 공부하겠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어디서 재수할 거냐? 물음에 노량진 재수종합반에 등록해 공부하고, 숙식은 염치가 없지만, 독산 군인아파트에 신세 좀 지겠다고 했다. 해임 엄마는 독산동 오빠에게 전화했다. 오빠, 해임이 방위산업체 근무하면 군대 안 가도 되는 걸 포기하고, 꼭 대학을 가겠다고 하는데, 재수 1년만 오빠 좁은 군인아파트서 같이 있게 해 주세요. 제가 한 달에 쌀 두 말씩 보내줄게요. 야, 무슨 쌀이냐? 해임이 학원비와 지 쓸 돈만 남 눈치 안 보고 지낼 수 있게 보내라고 했다.
해임 외삼촌 추대식 상사는 월남 백마부대 참전용사였다. 나중에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중령이 29 연대 대대장이었다. 월남전 참전은 백마부대로 했으나 철수 후 재배치된 것이 서울 근교 부대라 독산동 13평 낡은 아파트가 집이었다. 좁은 아파트에서 외삼촌 내외, 4촌 2명에 해임까지 힘겹게 살았다. 그래도 재수 1년만 이 악물고 한다고 했다. 명문 전남기계공고 기계과 출신이지만 다시는 기계를 만지지 않겠다고 일어일문학으로 방향을 정했다. 서울 근처의 일어 일문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목표를 정하고 공부하니 스트레스도 덜했다. 명문 서울대, 고대, 연대, 서강대를 가면 좋겠지만 공고 3년 내내 국어, 영어, 수학은 대충 공부하고 오직 기계로 전국기능대회 나가세 금메달 따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나라는 1등, 금메달 아니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나라다. 해임은 고교 시절에 세상 민심에 대해 터득했다. 지금은 인천대가 국립대학교지 그 시절은 백선엽 백인엽 형제가 자기 이름 한 자씩을 따서 ‘선인학원 인천대학교’였다. 재단에 형제가 서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려고 이사를 자기 인맥으로 충원하다가 재단 분규가 일었다. 분규가 심해지자 문교부가 개입했다. 관선이사를 파견하고, 인천대학을 인천시립대학으로 했다가 다시 국립인천대학교로 만들었다.
백선엽, 인엽 후손은 억울하겠지만 학생과 졸업생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다. 노량진 재수종합반에서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인천대 일어일문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한 그는 합격통지서를 환순 탄광 광부 박광선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 자신은 국졸로 화순탄광 광부지만 아들이 대학생이라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바로 화순 탄광조합에 가서 등록금과 인천에서 반년 보낼 예상 생활비까지 대출받았다. 요즘 학생들은 대학교 합격만 하면 명문대든 아니든 구분 없이 국가 장학금을 신청할 수 있지만, 1980년대는 대학교를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다.
상아탑(象牙塔)을 학문의 전당이라 부르는 것을 비틀어 촌에서 한 학기 등록을 위해 소 두 마리를 파고 8학기면 16마리에 하숙비, 책값까지 한다면 소 50마리를 팔아야 대학생 한 명으로 가르치던 시절이다. 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다니면서 ROTC를 했다. 인천 앞바다 송도에서 소대장을 하고 중위 진급하고는 용인 병참선 부대 참모 대위로 진급해서는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 아래 명파마을 이남 20km를 담당하는 중대장이었다. 중대장을 하는 동안 중대 행정병 병기를 담당하던 병사가 중대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중대장으로 면담을 제대로 했고, 관심병사로 관리하던 것이 인정되어 중대장 징계는 ‘불문’이 되었으나 더는 장교로 군대에 장기 근무할 의욕이 없었다. 전역했다. 그 시절은 6월 30일 전역하는 장교를 위한 취업박람회가 전국 5대 도시에서 열렸다. 은행, 증권사, 제약회사, 의류회사에 합격했다. 그의 선택이 남았다. 의류회사로 가기로 했다. 의류회사 5년 근무하고 모은 돈과 퇴직금을 합하여 김밥천국 월곡점을 지하철역 월곡점 바로 옆에 냈다. 돈을 많이 번 정도가 아니라 긁었다. ROTC 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 전해진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전단을 뿌렸다. 상가는 간판마다 전단을 뿌렸다. 마라톤 풀 코스는 한 번도 뛰지 않았지만 10km, 20km는 여러 번 달린 경험이 있기에 전단을 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전단 효과가 나는지 점심시간에 손님이 너무 많아 대기 번호를 나누어주었다. 24시간 영업으로 주방과 홀서빙, 계산원까지 3교대가 되도록 직원을 증원했다. 김밥천국 월곡점은 매출이 전국 김밥천국에서도 상위가 되었다. 박수받을 때 떠나라는 말은 연극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업도 마찬가지다. 한창 잘 될 때 권리금 5천만 원을 올려 받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벌어놓은 9억과 권리금 5천만 원을 합하여 9억 5천만 원으로 스포츠용품 사업을 했다. 원래도 마라톤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업을 스포츠용품을 하다 보니 월곡 마라톤회, 성북마라톤회 양쪽에 다 가입했다. 한 주는 월곡 마라톤으로 한주는 성북마라톤으로 훈련했다. 해임이 넘겨준 김밥천국 월곡점에서 마라톤 주자들 점심을 했다. 마라톤 주자들이 김밥천국 월곡점에 데를 지어 들어가니, 그냥 지나가던 사람도 김밥천국 월곡점이 맛집에 푸짐한 집으로 생각하고 손님이 늘었다. 여기 점심시간은 번호표를 나누어주게 되었다. 마라톤 클럽은 월곡천과 성북동을 달리다 두 달에 한 번은 남산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남산 둘레길을 42.195km가 되도록 여러 번 돌았다. 남산을 돌 떼는 심결은 감회가 남달랐다. 무작정 상경해서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유식한 말로 3D (Difficult, Dirty, Dangerous) 업종 일을 했다. 어렵게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진학한 곳이 남산 S 대학교 연극영화과다. 현실 사는 것이 힘들지만 대본을 외우고 무대에 서는 순간은 행복했다. 내일 카드값 결제할 돈이 없어도 무대에 서는 순간은 내가 무대의 인물에 몰입해, 세상 근심 걱정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였다. 뛰는 순간은 앞 주자 등만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아스팔트였다. 그냥 무념무상으로 달린다. 어느 정도 달리면 그때부터 생각했다.
김환목은 이곳 남산 마라톤 클럽에서 초창기에 회장을 역임했다. 이제는 고문으로 물러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스턴, 뉴욕, 런던, 베를린, 도쿄 마라톤을 6대 마라톤이라고 한다. 이곳은 누구나 뛰고 싶다고 배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의 완주기록을 제출해야 마라톤추진위원회에서 참가자를 정해주었다. 이제는 그것도 경쟁이 치열해 기록증을 내고도 무작위 추첨으로 했다. 그러다 이제는 인터넷 지원 선착순 마감을 시키다 보니 접수 한 시간이면 끝이 났다. 요즘은 2030 젊은이들이 마라톤에 호응이 늘다 보니 나이 60 이상은 세계 6대 마라톤에 뛰고 싶어도 접수를 못 해 달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한 목은 이미 5년 전에 6대 마라톤을 전부 달린 마라토너가 되었다. 아마추어 마라톤 동우회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 춘천 마라톤은 20회 서울 동아 마라톤은 15회 완주했다. 순천 남승룡 마라톤도 1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진 적 없이 달렸다.
학선도 어려서부터 잘 달렸다. 전국 소년체전 강원도 선수를 뽑기 위해 100m, 400m 선수로 횡성군에서 1등을 했고, 춘천에 가서 강원도 각 군 대표 선수와 경쟁해 강원도 대표로 전국소년체육대회에 3번 출전했다. 강림에서는 달리기 하면 이학선이라고 말할 정도로 유명했다. 이학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도 학선 어머니를 학선 어머니로 부르고, 그 집을 ‘학선네 집’이라고 불렀다. 그런 학선을 남산 마라톤 클럽에서 만났다. 객지에서는 고향 개만 봐도 반갑다는데, 고향 떠나 50년 만에 학선, 해임, 심결 세 명이 만났다. 마라톤 훈련을 마치고 공식적인 만찬을 하고, 3명은 자리를 이동했다. 치맥을 하러 강원 통닭으로 갔다. 다른 유명한 통닭도 있지만,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듯한 이름 강원이 좋았다. 반반 치킨과 생맥주 500을 들고 잔을 부딪쳤다. 고향 떠나 50년 만에 만난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위하여!
학선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공업고등학교를 마치고 공장 생활을 했다. 사장이 우리나라 최초 플라스틱 그릇을 만들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아들과 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선이 얼마나 성실하고, 바르고 정직한 회사생활을 했는지 은퇴하면서 회사 대표를 학선에게 맡겼다.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회사 대표가 되었다. 최선을 다해 회사 경영에만 힘썼다. 회사 매출도 늘고, 직원도 늘자 기업공개를 했다. 기업이 상장되자 자본이 크게 늘었다. 학선은 건강이 나빠졌다. 나이 55세에 회사 대표에서 물러나 건강회복을 위해 종합검진을 받았다. 간암 초기라고 했다. 일체의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의사야 의사니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지 이미 술에 중독된 환자는 술을 줄이라고 해야지 끊으라고 하면 거짓말을 한다. 학선은 마라톤을 시작했다. 자신의 간암을 마라톤과 함께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마라톤 경험자의 마라톤 코칭 책을 기본으로 10km, 20km, 30km, 42.195km까지 달렸다. 해외 6대 마라톤은 한 번도 도전 안 했지만, 춘천 마라톤, 동아 마라톤, 순천마라톤, 대구 마라톤, 고구려 마라톤, 서울 챌린저 레이스, 울산 태화강 국제마라톤, 군산 새만금 국제마라톤, 제주 국제관광 마라톤, 경주 국제마라톤, JTBC 서울마라톤, MBN 서울마라톤까지 완주했다.
환목어 마라톤 입문하는 해임에게 기초적인 이야기를 했다.
“마라톤 풀코스(Full Course)는 42.195km라는 것은 알고 있지?”
“응.”
“그 절반이 하프코스(Half Course)라고 하는데, 21.0975km를 달리고 기록증을 주는 것이야, 이해되지?”
“응.”
“울트라 마라톤(Ultra Marathon)은 50km, 100km를 뛰는 것인데, 이것은 세계 6대 마라톤에서는 없는 종목이라고 했다. 페이스(Pace)는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데, 소요된 시간이다. 예를 들어 10km를 한 시간에 달리고자 한다면 1km를 대략 6분에 달려야 한다. 마라톤 초보자를 위해 페이스메이커(Pace Maker)는 정식 마라톤 선수와 구분하기 위해 몸에 풍선을 달고 달린다. 풍선에는 완주 시간이 적혀있다. 앞으로 해임이 야금야금 훈련해서 풀코스를 달릴 때 내가 페이스메이커 해줄게.”
“고맙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100세 인생을 외치고 있다. 100세 인생 듣기는 좋은 말이지만 해임이 곰곰 생각해 봤다.
박해임은 노고소에서 어린 시절만 보냈다. 아버지가 화순으로 탄을 캐는 광부로 취직했다. 화순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 입국을 강조하는 시기라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태성정밀이라는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해주는 제도로 갔다. 가자마자 전남기계공고 선배가 밀링에 손이 끼어 절단되는 것을 목격했다. 방위산업체 근무를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대학시험 공부하겠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어디서 재수할 거냐? 물음에 노량진 재수종합반에 등록해 공부하고, 숙식은 염치가 없지만, 독산 군인아파트에 신세 좀 지겠다고 했다. 해임 엄마는 독산동 오빠에게 전화했다. 오빠, 해임이 방위산업체 근무하면 군대 안 가도 되는 걸 포기하고, 꼭 대학을 가겠다고 하는데, 재수 1년만 오빠 좁은 군인아파트서 같이 있게 해 주세요. 제가 한 달에 쌀 두 말씩 보내줄게요. 야, 무슨 쌀이냐? 해임이 학원비와 지 쓸 돈만 남 눈치 안 보고 지낼 수 있게 보내라고 했다.
해임 외삼촌 추대식 상사는 월남 백마부대 참전용사였다. 나중에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중령이 29 연대 대대장이었다. 월남전 참전은 백마부대로 했으나 철수 후 재배치된 것이 서울 근교 부대라 독산동 13평 낡은 아파트가 집이었다. 좁은 아파트에서 외삼촌 내외, 4촌 2명에 해임까지 힘겹게 살았다. 그래도 재수 1년만 이 악물고 한다고 했다. 명문 전남기계공고 기계과 출신이지만 다시는 기계를 만지지 않겠다고 일어일문학으로 방향을 정했다. 서울 근처의 일어 일문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목표를 정하고 공부하니 스트레스도 덜했다. 명문 서울대, 고대, 연대, 서강대를 가면 좋겠지만 공고 3년 내내 국어, 영어, 수학은 대충 공부하고 오직 기계로 전국기능대회 나가세 금메달 따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나라는 1등, 금메달 아니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나라다. 해임은 고교 시절에 세상 민심에 대해 터득했다.
노량진종합반에서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인천대 일어일문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한 그는 합격통지서를 환순 탄광 광부 박광선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 자신은 국졸로 화순탄광 광부지만 아들이 대학생이라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바로 화순 탄광조합에 가서 등록금과 인천에서 반년 보낼 예상 생활비까지 대출받았다. 요즘 학생들은 대학교 합격만 하면 명문대든 아니든 구분 없이 국가 장학금이 신청되지만 1980년대는 대학교를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했다. 상아탑(象牙塔)을 학문의 전당이라 부르는 것을 비틀어 촌에서 한 학기 등록을 위해 소 두 마리를 파고 8학기면 16마리에 하숙비, 책값까지 한다면 소 50마리를 팔아야 대학생 한 명으로 가르치던 시절이다. 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다니면서 ROTC를 했다. 인천 앞바다 송도에서 소대장을 하고 중위 진급하고는 용인 병참선 부대 참모 대위로 진급해서는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 아래 명파마을 이남 20km를 담당하는 중대장이었다. 중대장을 하는 동안 중대 행정병 병기를 담당하던 병사가 중대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중대장으로 면담을 제대로 했고, 관심병사로 관리하던 것이 인정되어 중대장 징계는 ‘불문’이 되었으나 더는 장교로 군대에 장기 근무할 의욕이 없었다. 전역했다. 그 시절은 6월 30일 전역하는 장교를 위한 취업박람회가 전국 5대 도시에서 열렸다. 은행, 증권사, 제약회사, 의류회사에 합격했다. 그의 선택이 남았다. 의류회사로 가기로 했다. 의류회사 5년 근무하고 모은 돈과 퇴직금을 합하여 김밥천국 월곡점을 지하철역 월곡점 바로 옆에 냈다. 돈을 많이 번 정도가 아니라 긁었다. ROTC 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 전해진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전단을 뿌렸다. 상가는 모든 점포에 전단을 직접 뿌렸다. 마라톤 풀 코스는 한 번도 뛰지 않았지만 10km, 20km는 여러 번 달린 경험이 있기에 전단을 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전단 효과가 나는지 점심시간에 손님이 너무 많아 대기 번호를 나누어주었다. 24시간 영업으로 주방과 홀서빙, 계산원까지 3교대가 되도록 직원을 증원했다. 김밥천국 월곡점은 매출이 전국 김밥천국에서도 상위에 랭크되었다. 손뼉 칠 때 떠나라는 말은 연극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업도 마찬가지다. 한창 잘 될 때 권리금 5천만 원을 올려 받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벌어놓은 9억과 권리금 5천만 원을 합하여 9억 5천만 원으로 스포츠용품 사업을 했다. 원래도 마라톤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업을 스포츠용품을 하다 보니 월곡 마라톤회, 성북마라톤회 양쪽에 다 가입했다. 한 주는 월곡 마라톤으로 한주는 성북마라톤으로 훈련했다. 자기가 넘겨준 김밥천국 월곡점에서 마라톤 주자들 점심을 했다. 마라톤 주자들이 김밥천국 월곡점에 데를 지어 들어가니, 그냥 지나가던 사람도 김밥천국 월곡점이 맛집에 푸짐한 집으로 생각하고 손님이 더 왔다. 여기 점심시간은 번호표를 나누어주게 되었다. 마라톤 클럽은 월곡천과 성북동을 달리다 두 달에 한 번은 남산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남산 둘레길을 42.195km가 되도록 여러 번 돌았다. 남산을 돌 떼는 이심결은 감회가 남달랐다. 무작정 상경해서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유식한 말로 3D(Diffcilt, Dirty, Dangerous) 업종 일을 했다. 어렵게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진학한 곳이 남산 숭의 대학교 연극영화과다. 현실 사는 것이 힘들지만 대본을 외우고 무대에 서는 순간은 행복했다. 내일 카드값 결제할 돈이 없어도 무대에 서는 순간은 내가 무대의 인물에 몰입해, 세상 근심 걱정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였다. 뛰는 순간은 앞 주자 등만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아스팔트였다. 그냥 무념무상으로 달린다. 어느 정도 달리면 그때부터 생각했다. 김환목은 이곳 남산 마라톤 클럽에서 초창기에 회장을 역임했다. 이제는 고문으로 물러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스턴, 뉴욕, 런던, 베를린, 도쿄 마라톤을 6대 마라톤이라고 한다. 이곳은 누구나 뛰고 싶다고 배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의 완주기록을 제출해야 마라톤추진위원회에서 참가자를 정해주었다. 이제는 그것도 경쟁이 치열해 기록증을 내고도 무작위 추첨으로 했
해임은 매일 5km 정도 달렸다. 미아리가 집이라 우이천과 월곡천을 주로 달렸다. 비가 와도 달리고 눈이 와도 달렸다. 달리면서 군가 ‘전선을 간다’에 나오는 가사처럼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가사처럼 달렸다. 연습량을 늘렸다. 익숙해지자 10km를 달렸다. 2026년 3월 제26회 인천 국제하프마라톤에 처음 도전했다. 환목어 페이스메이커로 노랑풍선을 엉덩이에 달고 해임보다 약간 앞에서 달렸다. 출발 전에 환목어 겁먹지 말고 무조건 풍선만 보고 따라오라고 했다. 3월 22일 08시 30분에 출발했다. 출발선에서 3km 정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3km가 지나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달리면서 양희은이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와 군가 전선을 간다. 교대로 부르면서 달렸다. 해임이 재수 시절 신세를 졌던 외삼촌 추대식 예비역 상사는 월남전 참전 유공자였다. 그가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위산업체에 취직했다. 5년을 근무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처리하는 제도였는데, 하도 불공정이 심해서 퇴사하고, 재수했다. 노량진 학원 다니면서 독산 군인아파트 13평에 더부살이를 했다. 물론 화순탄광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월급을 받으면 어머니가 얼마씩 외숙모에게 돈을 보내는 줄은 알고 있지만, 그 시절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외삼촌 댁에서 재수했다. 공고 기계과 3학년 때 현장실습 갔다. 현장실습 중에 그 공장 직원이 밀링작업을 시범을 보였다. 옷소매가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실습생 해임과 다른 고3 학생이 바로 전원을 껐다. 하지만 이미 오른손 엄지와 집게손가락이 대학병원에서도 원상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다쳤다. 그 기억으로 재수학원에서 공부하고 원서를 쓸 때 기계과가 아닌 일어일문학과를 썼다. 하프마라톤이라 10km 지점을 통과했다. 반환점에 마라톤준비위원 측에서 물병을 전해주고 팔뚝에 도작을 찍었다. 도장은 묘한 힘이 있었다. 도장을 팔뚝에 찍고 나니 힘이 솟았다. 눈앞에 보이는 노랑풍선만 보고 달렸다. 노랑풍선 환목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환목은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강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 못 하고 바로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직종 일을 했다. 배운 전문 지식이 없으니 닥치는 대로 일했다. 껌팔이, 구두닦기, 아이스께끼 장사, 나이 들어서는 자장면 배달, 건설일용직, 정리고, 해체공, 하스리, 철근, 경량철근공, 중량철근공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하고, 악착같이 살았다. 건설일용직으로 일하다 건설자재 임대업을 하는 사장 눈에 들었다. 목수들이 사용하는 노랑 유로폼을 건설현장에 임대해주고 돈을 받는 백인빈 사장은 아들이 없이 딸만 하나였다. 딸 백미정과 결혼시켰다. 아들이 없으니 사위에게 건설자재 임대업을 물려주었다. 일이 잘되려니, 파주에 LG디스플레이 공장이 세워질 때 목수 형틀과 동바리 자재 임대 두 가지를 했다. 돈을 갈퀴로 긁는다는 표현처럼 돈을 벌었다. 돈을 벌 만큼 벌고 나니 병이 찾아왔다. 병원에서 위암이라고 했다. 다행히 초기라 너무 걱정마라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수술을 마치고 건강회복을 위해 마톤을 했다. 아내 백미정도 함께 달렸다. 처음 5km, 10km, 20km, 42.195km 완주했다.
한번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나니 중독이 되었다. 완주 100회 이상 달린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는 ‘백회 마라톤 클럽’에 가입했다. 백회 마라톤 클럽은 김평기 회장이 10년 동안 회장을 하고 있었다. 백회 마라톤 클럽 회원 절반 이상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 참가했다고 자랑했다. 환목 부부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2018년에 참가했다. 2019년은 세계적으로 코로나 19 유행으로 대회를 거르고 2020년에 참가했다. 보스턴 마라톤 경험한 사람들은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이라는 곳을 통과한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매년 4월 셋째 주 월요일에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1935년 존 켈리라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선수가 마라톤 대회에 처음 참가하여 전 세계 유명한 서수를 제치고 일등을 했다. 1936년에도 존 켈리는 대회 2연패를 자신했다. 출발은 2위로 했다. 20km 지점에서 1등으로 달리는 앨리슨 브라운을 추월했다. 추월하면서 앨리슨 브라운에게 힘내! 파이팅! 격려를 하면서 추월했다. 존 켈리 마음은 1등으로 추월한 이상 마지막 결승선까지 자기가 1 등할 것을 확신하고 시건방지게 덕담했다. 반환점을 돌고 32km 정도 달릴 때 이번에는 앨리슨 브라운이 존 켈리를 툭! 치고는 힘내! 파이팅! 하고 추월했다. 존 켈리는 열을 받아 추월을 노렸으나 발을 앞으로 디디기만 하면 뒤에서 고무밴드 줄이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누가 그런 개 같은 말을 지었을까 존 켈리는 열받았다. 이를 악물고 달렸으나 1등 앨리스 브라운, 2등 존 켈리였다. 사람들은 32km 구간을 ‘상심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해임은 환목어 엉덩이에 차고 달리는 노랑풍선만 보고 달렸다. 하프마라톤 첫 완주기록 1시간 29분 50초였다. 박해임이 속한 월곡 마라톤, 성북마라톤, 인접 텐트 백회 마라톤 선수들도 해임 첫 하프 완주를 축하했다. 김평기 회장 주선으로 백회마라톤, 목멱 마라톤, 월곡 마라톤, 성북마라톤 러너들이 모두 인천 백승 회관으로 모였다. 해임 첫 하프 완주 축하하는 덕담과 백회 마라톤을 시작으로 각 마라톤 클럽 회장들 건배 제의가 있었다.
환목어 해임에게 한국마라톤 역사적인 이야기를 했다. 1932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고) 손기정,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고) 서윤복,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1, 2, 3등을 휩쓸었던 (고) 함기용, (고) 송길윤, (고) 최윤칠 이야기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고 이봉주가 여러 국제마라톤에서 우승한 이후는 한국을 빛낼 마라톤선수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세계 6대 마라톤 대회뿐만 아니라 국내 유명한 춘천 마라톤, 동아 마라톤, JTBC마라톤, 남승룡 마라톤 대회 등이 모두 인터넷으로 신청받기에 2030 젊은이가 대회신청 접수 시작되면 2시간 이내에 접수신청이 마감되는 바람에 전국 마라톤 동우회에서 열심히 달리는 60, 70, 80대 노인들을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도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낙심한 박해임, 이심결, 이학선, 김환목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마라톤 대회를 나이 60 이상으로만 참가신 청을 받고, 1, 2, 3 등 수상도 60대, 70대, 80대 나이를 10년 단위로 구간을 정해 심사하는 노구(老嫗) 마라톤 대회가 생겼다.
노구 마라톤 정식명칭은‘태종과 노구 문화제 마라톤’이나, 줄여서 ‘노구마라톤’이라고 불렀다. 이방원은 13세에 각림사(覺林寺)에서 운곡 원천석 문하생이 되었다. 천자문, 소학, 사서삼경을 배우고 과거에 응시해 문과로 급제했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나 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21세기에도 온천지 법대 나온 인간들이 국가 주요 부서의 장을 맡고 있다 보니 과학기술 분야 전공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같은 과거 합격해도 무과 합격보다 문과 합격을 더 영광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지금까지 내려온 결과다.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그 옛날 각림 촌구석에서 학문을 가르쳐준 스승을 조정으로 모시고 싶었다. 지금도 각림은 버스가 하루에 한 번밖에 다니지 않는 촌인데, 조선 시대는 얼마나 깊은 산촌이었겠는가? 여기를 태종이 탄 가마가 원천석을 만나러 왔다. 강원도 관찰사가 있는 원주 강원 관찰사에게 간단한 업무보고를 받은 태종 일행이 횡성, 안흥 경우 주천강을 따라 각림으로 왔다. 각림천을 거슬러 원천석이 사는 변암을 향했다. 원천석은 각림천에서 빨래하는 할미에게 내가 가고 난 후에 뒤에 오는 사람이 앞에 지나간 선비가 어느 쪽으로 갔느냐고 물으면 오른쪽 재를 넘어갔다고 말해주오. 했다. 가마 일행 선두가 노파에게 물었다. 앞서간 선비가 어느 길로 갔느냐 물음에 오른쪽 재를 넘었다고 대답했다. 태종이 탄 가마를 들고 가는 인원이 힘이 들어 잠시 가마를 내려놓고 쉬었다. 태종이 쉰 것을 기념하여 정자를 지었으니, 태종대(太宗臺)다. 빨래하던 노파는 가마에 그려진 용 그림을 보고 왕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물에 빠졌다. 늙은 할머니가 빠진 늪이라고 노구소(老嫗沼)가 되었다. 태종대 옆이 노구사당이다. 노구 할미가 한양에서 잡으러 오기 전에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을 후세 사람들은 충절로 생각했다.
노구사당을 짓고, 태종과 함께 기리는 태종 노구 문화제가 매년 10월에 열렸다. 태종과 노구할머니를 기리는 횡성군 지역축제로 만든 것이 ‘태종 노구 문화제’다. 2020년 10월에 제1회 태종 노구 문화제가 열렸다. 2026년 10월 제7회부터는 노구 마라톤 대회를 추가했다. 전국각지에서 60대부터 80대까지 마라톤 좀 한다는 노인들은 다 모였다. 박해임, 김환목, 이학선, 이심결이 모두 참가했다. 강북 마라톤 클럽에서도 김우준, 최성학, 김미동 등이 마라톤 접수를 했다. 조선 시대 태종이 수레를 타고 운곡 원천석을 찾아왔으나 노구할머니 거짓말로 돌아간 그 길을 마라톤 코스로 만들었다. 태종대와 노구사당은 터가 좁아 부득이 강림초등학교와 강림중학교 운동장을 이용했다. 촐발은 강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출발하여 각림천을 거슬러 상류로 달렸다. 노구사당과 태종대를 지나 우측 고개를 넘었다. 수리네미 고개는 평소에는 산림 보호 목적으로 일반인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다. 횡성군에서 산림청과 협조하여 태종노구 문화제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개방했다. 덜컹거리면서 수레너미 길을 넘은 태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치악산 줄기 변암에 은거한 원천석은 멀리서 임금이 넘어간 수레너미를 보고 절을 했다. 산 이름이 배향산(拜向山)이 되었다. 자신은 고려의 유생이지만 자신이 사서삼경을 가르친 제자가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이름이 ‘마치골’이 되었다. 강림초등학교를 출발하여 태종대까지는 이학선이 선두로 달렸다. 그 뒤로 박해임, 김우주, 이심결, 김환목, 최성학, 김미동이 2그룹으로 달렸다. 태종대를 지나자 수리네미길은 경사가 급했다. 이학선이 다리에 힘이 빠졌다. 2그룹과 함께 달렸다. 이때 언덕길을 마치 황영조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인 선수를 제치는 심정으로 김우준이 선두로 나섰다. 수리네미길은 좌우에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수리네미길을 나와 매화산 하단을 지나 주천강을 거슬러 달렸다. 안흥이 보였다. 42번 국도를 따라 달렸다. 웰리할리 파크 입구가 반환점이었다. 반환점에서는 이심결이 선두, 박해임과 김우준이 2위 그룹을 형성했다. 이학선, 김미동, 이철봉이 3위 그룹을 형성했다.
안흥을 통과할 때 박해임이 선두로 나섰다. 그 뒤에 이심결, 이학선, 김미동, 이철봉, 김우주, 김환목, 최성학 순이었다. 안흥을 통과할 때 순서가 주천강을 따라 하류로 올 동안은 순위 변동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안흥 다리를 건너 각림 방향으로 진입하자 김우준과 김환목이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박해임은 달리면서 김우준에게 지면 안 된다고 어금니를 깨물고 달렸다. 김환목이 해임에게 해준 이야기다. 김환목과 김우준은 원래 백회 마라톤 회원이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42.195km 완주기록 6회를 보스턴에 제출해야 한다. 김우준이 5회 기록뿐이라 국내 마라톤 한 곳을 김우준이 접수하고 김환목이 김우준 배번을 달고 달렸다. 운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환목어 달리는 중에 설사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중간에 화장실에 가서 설사를 다 마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로 달리다 보니 보스턴 마라톤에서 요구하는 기록 이하의 시간이 나왔다. 결국, 그해 김우준은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일로 김우준이 김환목을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2026년 1월 일이다. 2025년 백회 마라톤 클럽 송년회에서 김평기가 회장으로 뽑혔다. 김평기는 사무총장에 김환목을 지명했다. 2026년 1월이 되었다. 백회마라톤 신년회 식사 자리에서 김우준이 김평기 회장과 김환목 사무총장을 싸잡아 비난했다. 2026년 연간 사업계획도 안 만든 회장과 사무총장은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다. 백회 마라톤 20년 역사 동안 무슨 대한체육회처럼 연간사업계획을 거창하게 수립한 적이 없었음에도 회장과 사무총장이 맘에 안 든다고 연초에 돌직구를 날렸다. 김환목은 그 자리에서 사무총장 사퇴했다. 여기 백회 마라톤 아니더라도 마라톤 할 곳은 많다고 떠났다. 그런 김우준을 노구 마라톤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고 있다. 아주 오래전 김환목이 동아 마라톤을 2시간 20분에 일반인이 1등을 했다. 국가대표급 엘리트 마라톤선수도 아닌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마라톤업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동아 마라톤 1등을 했고, 그 결과로 보스턴 마라톤에도 참가했다. 마라톤 전설 손기정 옹이 보스턴까지 응원을 왔다. 돈이 넉넉하지 못한 한 목은 체류비 아끼려고 마라톤 대회 하루 전에 보스턴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마라톤을 한 것이다. 동아 마라톤 자신이 세운 2시간 20분보다 19분이나 뒤처지는 2시간 39분으로 골인했다. 창피했다. 죽고 싶었다. 그때 손기정 옹이 달려왔다. “수고했어!”“낙심하지 말고 체계적으로 자세를 좀 고치고, 주법도 바꾸면 좋은 기록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동아 마라톤 1등 하고 보스턴 마라톤에서 형편없는 기록을 낸 환목어게 관심 가지고, 후원하는 기업이 없었다. 한목 아내 양경숙은 이제 마라톤 그만두고, 가정에 충실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보스턴 마라톤을 마치고 귀국하자 손기정 선생이 환목 포함 보스턴 마라톤 그해 출전 선수 4명을 장충동 자매족발집으로 초대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한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기록이 저조하다고 자책할 수도 있으나 절대로 대한민국 태극기를 생각해서라도 좌절, 포기는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옛날 이야기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선수단 파견을 위한 선발전을 일본 육상연맹에서 공개 대회를 열었다. 일본 마라톤 기대주 시오아꾸, 스즈끼 2명과 조선인 남승룡, 손기정 중에 3명을 뽑기로 했다. 일본육상연맹은 일본인 2명과 조선인 2명 중에 그날 잘 달리는 1명을 뽑아 베를린으로 파견 보낼 예정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체육과 공무원이던 손기정 양정고등학교 몇 년 선배가 일본 방침을 미리 조선에서 일본으로 출발 전에 알려주었다. 일본에 도착한 손기정은 남승룡을 찾아가 선배님, 제가 일본 놈 힘이 빠지도록 잡았다 놓았다 여러 번 반복할 것입니다. 선배님은 선배님 속도로 달리십시오. 했다. 총성이 울리고 손기정이 100m 선수처럼 달렸다. 400m 정도 달려 나가니 스즈끼와 시오아꾸가 놀라 손기정을 따라붙었다. 800m 구간에서는 손기정을 추월했다. 2km 구간에서 손기정이 또 속도를 냈다. 두 명 일본 선수를 제치고 손기정이 1등으로 달렸다. 5km 지점에서 천천히 일본인 선수 2명이 추월하도록 했다. 10km 지점에서 다시 손기정이 속도를 냈다. 일본 선수를 추월해서 1등으로 달렸다. 16km 지점에서 다시 일본인 선수에게 선두를 내주었다. 20km 지점서 다시 추월했다. 24km 지점서 다시 일본인에게 선두를 내주었다. 30km 지점에서 손기정이 다시 속도를 냈다. 1등이 되었다. 일본 선수 2명은 거기서 완전 다리에 힘이 풀렸다. 4등으로 자기 속도로 달리던 남승룡이 32km 지점에서 일본 선수 2명을 제치고 2등이 되었다. 손기정은 뒤를 봤다. 남승룡이 똑같은 속도로 2등으로 달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씩 속도를 늦추었다. 40km 지점에서 남승룡이 손기정을 추월해 1등으로 달렸다. 그 후로는 쭉 결승선에 도달할 때까지 손기정은 남승룡 등 번호만 보고 따라 달렸다. 선발전에서 남승룡 1등, 손기정 2등, 시오아꾸 3등, 스즈끼 4등이 되었다. 결국, 일본은 3명 방침을 은근슬쩍 보도도 없이 베를린 올림픽에 4명을 내보냈고, 손기정 1등, 남승룡 3등을 했다.
한 목은 손기정이 일본 선수 농락하였듯이 김우준을 농락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본인이 아닌 김우준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달렸다. 선두에 박해임, 2등에 이심결, 3등 김환목이 가리네를 통과했다. 송실까지도 그 순위는 변함없다. 마지막 강림 다리를 지나고 강림중학교 결승선이 보였다. 심결이 속도를 냈다. 박해임도 1등 자리를 유지하려고 힘을 썼다. 환목이 마지막 속도를 올렸다. 강림중학교에는 횡성군민들이 마라톤 결승선 통과를 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 1등으로 환목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2등 박해임과 3등 심결은 불과 2초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