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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의 취미생활
Jan 01. 2024
# 행정고시, 사무관?
한번쯤은 사법고시, 행정고시라는 시험을 들어봤을 거다. 사법고시 붙으면 변호사-검사-판사가 되고, 행정고시 붙으면 5급 공무원인 사무관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는 안다. 그런데 5급 공무원은 잘 모른다.
나도 잘 몰랐다. 다만 정책을 만든다고 들었다. 어차피 월급 받고 살거면, 공공정책 만들면서 생계 유지하면 보람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직업을 택했다.
그럼에도 취업 준비 과정에서 항상 궁금했다. '근데 도대체 이 시험 붙으면 뭘 하지?'
마침 나는 현직에서 잠시 떠나게 됐다. 그간 내가 했던 일을 되짚고, 정보 공유도 할 겸 '중앙부처 사무관'의 일을 정리한다. 나도 나중에는 까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해에 약 200-300명이 행정고시를 거쳐 사무관이 된다. 그들마다 각자 생각하는 자신의 역할이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사무관의 일하는 방식, 일의 유형을 정리한다.
이 글은 사무관의 역할에 대한 수많은 생각 중 하나일 뿐이다.
# 그들은 어떻게 일 하나요?
내가 생각하는 사무관이 일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떨어지거나 아래에서 발견된 문제들을 최초로 검토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걸 보고서로 정리하여 리더급 공무원에게 보고한 후 계속 보완한다.
가령 이런거다.
담당 사무관 업무인 A 영역에서 이슈가 발생했다고 치자. 리더급 공무원이 문제의식을 느꼈을 수 있고 언론이나 국회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아니면 본인 스스로 문제를 발굴할 수도 있다.
그는 해당 이슈의 현황과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머릿속에 이 모든게 있으면 베스트다. 하지만 그럴리가 없다. 모든 이슈는 비슷하면서도 새롭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그간 있었던 정부의 고민을 살핀다. 대외 발표된 자료가 있고 내부 검토 자료가 있다. 전임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자료를 만든다. 그들의 지식과 고민을 빠르게 흡수하는게 좋다.
다음으로는 국책, 민간 연구소, 대학 등 사회 전반에 축적된 지식과 전문성을 활용한다. 이들은 수많은 보고서를 펴낸다. 이 중에 직면한 이슈와 가장 가까운 것부터 속히 살핀 후 활용한다.
'사람'과 일하는 것도 중요하다. 업무와 관련된 관계부처, 공공기관, 협-단체, 기업, 연구기관 등에 재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과 협업하여 자신의 최초 생각을 검증하고 살을 붙여야 한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에는 관련 자료 요청을, 기업과 협단체에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이중 검증을, 연구기관의 전문가에게는 추가적인 정책적 아이디어를 구하는 식이다.
사무관이 초기에 생각한 현황과 대책이 미흡하면 '삽집'할 확률이 높다. 필요없는 자료를 요청하거나 엇나간 아이디어만 검증받게 된다. 일을 한번에 하고 타인을 덜 귀찮게 하기 위해서는 머릿속 초안이 최대한 정답에 가까워야 한다. 이게 담당자의 역량이다. 정말 어렵다.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사무관은 '보고서'를 쓴다. 이거 잘 쓰는 사무관이 일 잘하는 사무관이라고 한다. 잘 쓰려면 이슈에 대한 적확한 이해, 실효성 있는 대안이 있어야 하고, 논리적이고 쉽게 풀어서 써낼 수 있어야 한다. 잘 알고 잘 써야 하는데, 언제쯤 이게 쉽게 될까?
짧게는 한 페이지, 길게는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얼마나 잘 쓰는지가 실무자의 가치를 결정한다. 물론 이건 혼자 못한다. 이 작품의 퀄리티는 좁게는 정부, 넓게는 사회 전반에 축적된 활용가능한 지식의 양, 업무를 뒷받침해줄 전문가와 공공기관의 역량, 임무 달성에 주어진 시간의 양이 결정한다. 담당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축적된 지식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시간도 부족하면 잘 못 쓴다.
보고서가 완성 되면, 담당자는 과장, 국장에게 '보고'한다. 잘 쓴 보고서를 '쉬운 언어'로 간부들에게 해설해주는 게 핵심 역량이다. 의사소통능력이 좋으면 보고가 쉽다.
많은 경우 보고는 한 번에 안 끝 난다. 리더급 공무원인 국장, 과장은 기준이 높다. 대개 그들은 좋은 학교 나와서 행정고시를 통과한 후, 사무관 시절을 이미 거쳤다. 해외 유학, 타 기관 파견 등 다양한 경험도 갖췄다.
지적은 계속 된다. 좋게 말하면 'Value-Adding' 과정이고 나쁘게 말하면 '털리는' 과정이다. '이 방향으로는 왜 검토 안 했지? 이거 확실한건가? 전문가나 다른 부처는 뭐라고 해? 실현가능성은 있어?' 물어보려면 끝이 없다.
사무관이 아무리 잘해도 리더급 공무원은 더 잘한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최종적으로는 내 시각에서 봐야한다'라는 마음이 있다. 다만 '내가 보기는 하지만, 너가 꼼꼼히 잘 가져오면 내가 품을 덜 쓰고 생산적인 곳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더 좋겠지?'라는 생각도 있다.
어쨌든, 지적이 나오는 만큼 보완을 해야 한다. 보고 후 지적 사항들을 공부하고 검토하여 보고서를 보완한다. 이 과정을 거쳐서 최종 보고서가 나온다.
가벼운 사항은 국장, 과장의 결재만 나면 끝난다. 중요한 사항은 장관, 차관, 실장 결재를 받는다. 이 과정이 종료되면 사무관은 '하나의 정책'을 만들었다.
이게 사무관이 일을 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할까?
# 일의 유형
공무원은 주로 법, 예산이 주요 정책 수단이다. 가끔은 이것들을 모아 '대책'을 발표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국회가 법을 만든다고 알고 있다. 맞다. 다만, 국회가 법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행정부도 참여한다. 정부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할 수도 있다. 법안 제정 필요성에 공감하는 국회의원실과 함께 신규 법안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이 과정을 경험했다. 국내 최고 권위자에게 정부가 구상하는 법률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조문 하나하나를 만들어 간다. 이 과정에서 기업, 협회, 공공기관 등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듣고 수정한다. 이후 이 법안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입법자를 찾고 국회에서 제정해 나갔다.
법안의 필요성, 조문의 의미, 시행령-시행규칙 등 하위법령을 '글로 풀어내고 설명'하는 게 사무관의 역할이다. 그는 실무자로서 해당 법안을 가장 잘 알아야 한다. 간부급 공무원들이 뭘 설명하다가 막히면 사무관이 서포트를 해줘야 한다.
예산 사업도 담당한다.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을 기획한 후 왜 추진해야 하는지 재정당국과 국회에 설명한다. 사업이 원래 취지대로 운영되는지, 개선할 점은 없는지 끊임없이 관리한다.
중요한 이슈가 발생하거나 법적으로 수립이 필요한 기본계획을 만들 시점이 되면 사무관은 수십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쓴다. 해당 보고서는 정부 정책 방향을 국민에게 집약적으로 발표하는 '전략 보고서'다. 그렇기에 보고서에는 정확한 현실 인식, 실효성 있는 다양한 대책이 담겨야 한다.
이 외에도 사무관은 작거나 큰 회의, 정부 주관 행사 준비, 언론에게 건네줄 보도자료 작성 등 여러 일을 한다. 이들은 조직 말단의 실무자다. 원래 실무자들은 별의별 일을 다 한다.
# 결론
내가 일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글을 남기는 것도 부끄러움이 크다.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너는, 일을 그렇게 잘 했어요?' 할 것 같다. 당당하게 그랬다고 말 못 한다. 아쉬움이 많다. 그럼에도 그냥 남기고 싶었다.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회사에 돌아가면 조금 더 열심히 책임감 있게 일하면 되겠지.
브런치에 썼던 글은 지운 적이 없다. 다만 이건 언젠가 부끄러워지면 지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