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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Jul 09. 2019

재미와 행복이 목표가 된 사회

I. 정답이 존재했던 옛날


올바른 사회에 대한 정답'

중세·근대와 현대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다.

앞의 시대는 이게 있지만, 뒤의 시대는 이게 없다.


옛날에는 신의 말/왕의 말/이념의 말이 정답이었다.

성경에 써진 신의 계시, 전국에 붙은 왕의 선포문, 카를 마르크스가 보여준 사회주의 사상.

‘올바른 사회’에 대한 정답을 제시했다는 점이, 이 세 가지 말의 공통점이다.

신의 말은 신을 따르는 사회를, 왕의 말은 왕을 따르는 사회를, 이념의 말은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사회를 정답으로 제시했다.


불과 30년전만 해도, 세계는 ‘정답을 말하는 사람’들 간의 목숨을 건 싸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400년 전의 구교-신교 전쟁부터 30년 전의 자유주의-공산주의 진영의 대립까지.

서로가 ‘올바른 사회’의 정답 자리를 차지하고자 치열하게 경쟁했다.



II. 정답이 사라진 현대 사회


그런데 현대 사회에 진입하면서, 정답을 말하기 어려워졌다.


(1) 신의 말은 과학 반박당했다.

우리는 바티칸이 아닌 다윈과 아인슈타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생물학과 물리학이 밝혀낸 진화론과 빅뱅이론은 성경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


(2) 왕의 말은 민주주의반박당했다.

왕의 목을 자른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는 유럽-미국으로 퍼져나갔고 아시아에도 도착했다. ‘독재자’는 시대착오적 인물의 전형이 됐다. 옛날이었으면 리더십이 있다고 숭배 받았을 독재자. 이제는 몰아내야할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약간의 엘리트 의식도 비판의 소지가 되는 요즘, ‘왕의 말의 절대성’은 시대착오적인 소리다.


(3) 이념의 말은 자유주의로 인해 반박당했다.

자유주의는 공산주의를 이겼다. 자유주의가 대부분의 사회를 지배하는 원칙이 됐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정답’만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주장이든 근거가 타당하면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의 정답’만을 말하는 ‘절대적 이념’은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볼까?

페미니즘은 ‘여성성은 없다’라고 말하지만, 생물학은 ‘성별에 따른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경제는 정치와 독립적이다’라고 말하지만, 신제도주의경제학은 ‘경제와 정치는 상호의존적이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주장은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에, ‘절대적인 정답’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물론 여전히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주장이 대립한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하나인 ‘사건’에 ‘수백 개의 분석과 해결방법’이 딸려온다.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에 따라, ‘분석과 해결방법’의 유효성 판단은 제각각이다.

불평등은 모로지 제거해야 하는가?


아 잠깐, 거의 모두가 합의하는 게 있다.

바로 인간의 기본적 자유다.

맘에 안 든다고 사람을 패거나 가지고 싶다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과 같이,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는 악이다.


다만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바람직한 정치경제체제, 불평등에 대한 관점/해결 방법, 올바른 성적지향, 바람직한 결혼 형태 등.

본인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주장들이 있다.

물론 하나만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몇십 년 전만해도 우리 사회에는 국민 대다수가 합의하는 정답이 있었다. 바로 ‘반독재’. 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는 그 자체로 틀린 거다. 반독재는 정답이 됐다. ‘왕의 말’을 민주주의로 굴복시킨 셈. 근데 요즘 ‘그 자체로 틀렸다’라고 규정할 수 있는 사회적 이슈가 뭐 얼마나 있을까?


‘올바른 사회’에 대한 정답이 희미해졌다.




III. 정답이 된 ‘재미와 행복’


‘올바른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게 ‘올바른 인생’으로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다.

성직자를 보라. ‘종교의 말’이 지배하던 시대, 그는 올바른 인생 그 자체였다. 그런데 ‘올바른 사회’에 대한 정답 사라졌다. ‘올바른 인생’의 목표를 보여줬던 종교와 이념이 사라진 것.


그 자리 ‘재미와 행복’이 차지했다. 본인에게 주어진 사회적 사명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사적 영역인 행복과 삶에 집중하는건 당연하다. 이 상황에서 ‘재미와 행복’을 인생 목표로 설정하는 것보다 설득력 으면서 확실한 것은 없다.

인생을 걸고 헌신할만한 거대한 이념/종교는 식상해진지 오래. 우리는 ‘재미와 행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게 됐다.


‘12년 파이낸셜 뉴스 기사다. 직장인 24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다. 90%가 인생 목표가 있다고 답했는데, 그 중 72%가 ’행복한 삶‘을 최종목표로 꼽았다. 부와 명예는 9%에 불과했다.


‘재미와 행복’은 인생의 여정에서 때때로 마주하는 우연한 감정이 아니라, 극대화해야할 목표가 됐다.

사람들은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IV. 정답이 있는 재미와 행복?


‘재미와 행복’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그런데 ‘재미와 행복’은 개인적인 영역만은 아니다.

사회적 판단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한다. 사회는 ‘재미와 행복’에 필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집안 좋고/몸매 좋고/잘생기고/예쁘고/학벌 좋고/직업 좋고/친구 많고/성격 좋고/시간 많아서 종종 해외가는 누군가는, ‘재미와 행복’의 교과서다. 게다가 본인만큼이나 매력적인 애인이 있다면?

‘재미와 행복’은 이거야. 사회는 말한다.


뭐 어디 맨날 편의점 도시락 먹고/회사에 틀여박혀 있고 하면, 그 삶은 ‘재미와 행복’이 아니라고 주위에서 걱정스럽게 말해준다.


어떻게 보면 옛날보다 삶이 더 복잡해진 것 같다. 옛날에는 명확한 목표를 발견하기 쉬웠다. 그게 하나님의 명령일 수도 있고, 아담 스미스/카를 마르크스의 논리일 수도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스스로 목표를 찾아야 한다. 목표를 이룰 방법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게 보통 쉬운게 아니다.


게다가 ‘재미와 행복’이 인생 목표가 되면,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다. 기분 거지같을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는게 인생이다. 도파민만 분비되는 뇌는, 정상적인 뇌가 아니다. 그런데 ‘재미와 행복’이 인생 목표가 되면, ‘재미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기 쉽다.

그리고 '재미와 행복'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재미와 행복'이 숙제가 되는 순간이다.

숙제가 재밌을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은 재밌고 행복해야 한다는 말이 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항상 불행해도 괜찮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느 시점에서 어렵고 힘들고 지루해도, 그것 또한 인생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나는 ‘재미와 행복’을 목표로 놓고 달려갈 때보다, ‘이럴때도 있고, 저럴때도 있고, 어떻게 되겠지~’할 때 더 재밌고 행복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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