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감정을 배우는 중입니다

침묵의 대물림을 멈추기 위한 첫 문장

by 심우연

어느 날, 문득 멈춰 섰다.

바쁘게 달리기만 했던 내 삶엔 늘 일이 있었고,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없었다.

직장에서는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쫓기듯 살았다.

숨 돌릴 틈 없이 버티던 시간들.

그렇게 몇 년을 지나 회사를 떠났고, 그제야 처음으로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 안에는 오래 묵은 감정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현하고 싶다는 갈망,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욕구는

낡은 짐처럼 마음 한편에 쌓여 있었다.

실업을 계기로, 나는 그 무게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기 시작했다.


강변을 거닐다 떠오른 말들이 조용히 시가 되었고,

천천히, 마치 오래 끓인 국물처럼 마음 밖으로 흘러나왔다.


유튜브도 시도해 봤다.

혼자 기획하고 촬영하면서, 짧은 영상 안에 마음을 담아보려 애썼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내가 진짜 원했던 건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정리였다는 걸.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할까'보다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더 귀 기울이게 되었다.


브런치에 첫 글을 올리던 날,

처음으로 내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잇는 과정에서 깨달았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입을 다문 채 살아왔다는 걸.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문장 사이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딸과의 갈등을 글로 풀어내면서 나는 ‘나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은 늘 있었지만, 입을 떼는 순간 감정이 먼저 솟구쳤다.

딸의 말은 때때로 명치에 박혀 숨이 턱 막히기도 했고,

그 순간순간이 전쟁 같았다.


갈등의 원인을 곱씹다 보니,

문득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나는 그 시절의 나를 글로 쓰기 시작했고,

그때, 울음이 올라왔다.

묻어두었감정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감정은 갑자기 폭발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흔들었다.


그건 한 편의 글이라기보다 감정의 토로였고,

나 자신에게 보내는 고백이었다.


“엄마니까 참아야지.”

그 말에 기대어, 나는 오랫동안 버텨왔다.

그 말이 나를 지탱해 준 줄 알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족쇄였다.

감정을 억누르며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어릴 적 나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치를 봤다.

감정을 표현할수록 내 자리가 작아지는 것 같았다.

울면 약하다고 여겨졌고,

'그 정도는 참고 넘어가야지'라는 말들 속에서

나는 감정은 꺼내는 게 아니라 숨겨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괜찮아’라는 말로 나를 달래며 살아왔고,

그 방식은 어느새 딸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딸에게만큼은 그 방식이 닿지 않기를 바란다.

내 딸은 아직 모를 것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침묵했는지, 왜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쉽지 않았는지.


감정은 나에게 사치였다.

생계를 지키는 일이 전부였고, 그 속에서 감정은 짐이었다.

이제는 이해받기보다, 내가 먼저 말하고 있다.

나도 몰랐던 마음을 지금에서야 하나씩 들여다보고 있다.


언젠가 이글이 딸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말로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이제는 조용히 건네고 싶다.

그땐 몰랐다.

참아야만 살 수 있었고, 감정을 꺼내는 건 늘 두려운 일이었다.


네가 나처럼 참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의 허락도 없이, 너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기를.



여전히 서툴고, 때로는 두렵지만

이제는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쓴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너에게 진심으로 닿기 위해.


이 글은 감정을 배우기 시작한 나의 첫걸음이자,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작고 단단한 다짐이다.


혹시 당신도 꺼내지 못한 감정을 마음 어딘가에 묻어두고 있다면,

이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숨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