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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Dec 30. 2021

몇 번째 불합격한 거니?

얼마 안 돼. 6번밖에 안 떨어졌어!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그런지 자격증이라는 이름에 무착 익숙하다. ITQ, 전산회계, 전산세무, 컴퓨터활용능력, FAT, SMAT 등 취득한 자격증도 제법 많은 편. 난이도와 인지도는 제각기 다르지만, 어떤 자격증이든 4번 이상 불합격한 적은 없었다. 많이 떨어져 봤자 3번. 방과 후 수업의 힘을 빌리기도 했고, 집에서 놀고 싶은 욕망을 누른 채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천재로 태어나지 못했다. 흔히 말하는 공부나 성적이든 그게 아닌 어느 분야에서든. 타고난 천재도 노력형 천재도 아닌 나는 그저 흔하고 평범한 '노력형 일반인'이다. 원하는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하는 게 필수다. 이런 나는 어느새 6번의 불합격 고비를 마셨다.


그 대단한 자격증의 정체는 여섯 글자의 찬란한 이름을 가진 <워드프로세서>. 사이트에서 자격증 개요를 보면 '컴퓨터의 기초 사용법과 효율적인 문서 작성을 위한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운영 및 편집 능력을 평가하는 국가기술자격 시험'이란다. 필기시험은 총 3개 과목이다. 워드프로세서 일반, PC 운영체제, 컴퓨터와 정보 활용.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문서 작성 능력이나 프로그램 활용 방법이야 그렇다 쳐도, 도대체 왜 컴퓨터 운영 체제와 정보 활용 과목까지 달달 외워야 하는 걸까. 이 정도면 온 국민을 컴퓨터 천재로 만들려는 국가의 큰 그림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마 누군가는 1~2번 정도로 쉽게 필기시험을 통과했겠지. '저게 왜 어려워? 아무리 그래도 실기도 아닌 필기를, 서너 번도 아니고 6번이나 떨어지는 건 그냥 공부를 안 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조금도 부정하지 않겠다. 만약 내가 하루에 1시간이라도 열심히 암기 항목을 외우고, 기출문제를 풀고, 오답 노트를 꾸준히 하며 공부했다면 불합격 6번이라는 신기록을 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끽해야 회사에서 업무를 하다가 중간중간 남는 시간에 조금씩 책을 보며 어설프게 공부하고, 컴퓨터로 몰래 인터넷에서 랜덤 모의고사를 풀면서 점수를 측정한 게 전부다. 집에서까지 자격증 교재를 펴고 오답 노트를 쓴 기억 따위 없다.


이유야 간단하다. 귀찮고, 공부하기 싫고, 회사에서 돌아오면 놀고 빈둥거리기 바쁘니까. 더군다나 워드프로세서 필기시험은 3과목 모두 40점 이상, 평균 점수 60점을 넘어야만 합격이다. 두 과목을 100점 맞는다 해도 다른 한 과목이 40점 미만이라면 얄짤없이 불합격. 신기하게도 나는 머피의 법칙―하려는 일이 항상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현상―이 아주 잘 적용되는 사람인지라, 평소 저조하던 한 과목을 잘 보면 다른 한 과목 점수가 낮아서 평균이 60점을 넘지 못하고, 두 과목을 잘 보면 다른 한 과목이 40점을 넘지 못해서 불합격 딱지를 받는다.




12월 26일, 영하 15도의 무시무시한 한파를 뚫고 가서 본 시험은 무려 한 문제 차이로 2과목이 40점을 넘지 못해 불합격했다. 자격증 시험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면 언제나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곤 한다. 겨우 1~2문제 차이로 떨어지면 형용할 수 없는 짜증+자괴감과 함께 어렴풋한 희망이 올라온다. '그래. 이 정도면 다음에는 꼭 합격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 꿈과 희망에 부푼 나를 냉정하게 터뜨리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쯤 되면 오기가 시작된다. 흔히 주식이나 도박을 할 때 스멀스멀 피어나는 무서운 심리. 이렇게 손해를 많이 봤는데 어떻게 여기에서 끝낼 수 있겠냐는 고집. 물론 자격증 시험은 주식이나 도박과는 전혀 다른 분야지만, 불합격 횟수가 늘어날수록 합격을 향한 갈망이 강해지는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돈을 잃을수록 반드시 한 방을 터뜨려야 한다는 갈증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적어도 한 번에 18200원의 금액을 지불하는 자격증 시험은 수백 번 낙방하여 패가망신하는 길로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아마도.


수능, 공무원 시험, 대기업 공채, 끝에 '사(士)'가 붙는 자격증처럼 누구나 '대단하고 어려운 시험'이라고 하지 않아도, 실패가 거듭되면 인과관계처럼 얽힌 자괴감과 무력감이 찾아온다. 그 원인이 온전히 나의 공부 부족 노력 부족에 있으니 감히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낄 자격도 없겠지만, 나란 사람은 본래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왜 이렇게 필사적이지 못할까. 성실함과 인내심. 두 개만 갖추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어떤 일이든 미지근하니 좀처럼 뜨겁게 불타오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토록 실패를 거듭했던 적이 없는데. 겨우 자격증 시험 하나를 이렇게 힘들게 질질 끌다니. 스스로가 괜히 작아 보이는 순간이었달까.


도전과 실패. 기대와 실망. 힘들다는 건 그만큼 노력했다는 뜻이고, 실패는 도전의 증거라고 한다. 힘들지만 노력했고, 노력했지만 힘들고, 실패했지만 도전했으며,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어떤 일이든 그 무게감을 감히 예측하려 하진 않겠다. 어렸을 때는 카드 쌓기 놀이를 하면서 몇 시간이나 두 칸 이상 쌓지 못해 속상해하기도 했다. 실패의 쓴맛은 언제 어디에서든 혀끝을 아리게 만드는 것 같으니까.




여기 자격증 시험을 6번이나 불합격한 사람이 있다. 상업 고등학생은 물론 중학생, 심지어는 초등학생도 도전하는 자격증 필기시험에서 자꾸 데굴데굴 떨어지는 사람. 하지만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겨우 6번밖에 안 떨어졌으니 포기하기는 이르다. 나는 한 번의 도전으로 우수한 성과를 이루어내는 사람보다 열 번의 도전 끝에 간신히 버저를 누르는 사람을 더 멋지게 바라보는 사람이니. 일취월장하는 것보다 천천히 차곡차곡 올라가는 과정에 훨씬 관심을 가지곤 하므로, 나도 그렇게 나아가면 되는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 중이다.


솔직히 막힘 없이 적토마로 달려가는 사람이 뭐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난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굳이 되고 싶지도 않고. 세상은 속도에 맞춰 걸어가는 게 제일이다. 오늘 시간에 쫓겨 우체국까지 뛰어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던지. 겨우 10초 뛰고 눈앞에 핑 돌고 목이 아프기까지 하더라. 달리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다. 주변 풍경도 볼 수 없고 힘들기만 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거듭되는 실패는 실망과 절망을 안겨주기도 하겠지만, 아직 6번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7번째 시험은 나의 고된 노력과 시간과 돈을 환산하는 큰 성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도전하며 계속 길을 방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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