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생년월일만 입력하면 무료로 사주를 볼 수 있다는 인터넷 링크를 우연히 타고 들어가서, 사주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지살'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그걸 보고 한참을 웃고 친구들한테 자랑하듯 말했던 기억이 있다.
타지를 전전하며 살게 된다는'지살'은 내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7년째 일본에서 살고 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직장을 가졌고,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일본에서 아직도 여행을 하고 살고 있다. 사주가 말했듯이.
타지, 특히 외국에서 오래 살아버린 사람은 집이라는 개념이 영원히 망가진다고 한다. 나 또한, 그랬다. 내게 집은 엄마가 사는 집이기도 했고, 유학을 와서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기도 했고, 지금 사는 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어느 곳을 가도 나는 집을 그리워한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이것이 무척이나 힘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많이 어렸고, 분명히 일본어를 배우고 왔음에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혼자서 사는 집은 늘 조용했고, 집에서는 청소도 안 하던 내가 혼자 살림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무서웠다. 한국에서의 나는 불행했고,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벗어났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그런 삶이 스무 살의 내게 찾아왔었다.
그때 우연히 보게 된 만화가 있었다.
그 만화의 배경이 에노시마였고, 행복하지 않았던 나는, 찬란하고 아름답게 표현되던 에노시마를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가면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혼자 전차를 타고, 도쿄를 벗어나 카나가와의 작은 섬, 에노시마로 왔다.
일본에 와서 하는 처음으로 하는 여행이었다. 늘 보던 도쿄를 떠나서 낯선 전차를 타고, 낯선 곳으로 도착했다. 인터넷으로 본 정보와 만화에서 보던 장면들을 떠올려가며 에노덴에 탔다.
에노덴, 지금은 이 단어만 떠올려도 벅차오르지만, 그때는 잘 몰랐다. 노면 전차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바닷길을 따라서 전차가 달린다는 게 어떤 모습일지. 그렇게 탄 전차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전차에 탄 모든 사람이 그 풍경을 보고 웃고 있었다.
이 풍경을 나는 아직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우연히 읽은 만화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이 경치는 저도 정말 좋아해요. 처음 에노덴을 탔을 때는 감동받았죠. 사실 예전에 영화 같은 데서 쇼난(湘南:카마쿠라와 에노시마를 포함한 지역을 통칭하는 이름)이 아름답다고 소란을 피울 때마다 뭔가 호들갑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아름다운 건 아름답더라고요."
에노덴에서 내려,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며, 그 추운 겨울날 서핑을 하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외롭던 나처럼, 외롭지 않으려고 여행을 떠났던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외로웠지만, 동시에 외롭지 않았다. 혼자여도,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살아간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혼자 나마시라스동(생멸치를 얹은 덮밥)을 먹고, 신사에서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는 또다시 아름다운 바다가 존재했다. 괜찮다는 위로 같았다.
전망대에 올라가, 카나가와를 내려다봤다. 반짝반짝한 도시와 점점 어두워지는 바다는 아름답고 무서웠고 슬펐다. 한참을 그렇게 섬을 산책하던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일본으로 와서 행복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나와 세상만이 존재하는 듯한 그 아득한 외로움은, 그래서 덜 외로웠고, 슬펐지만, 그래서 행복했다.
그때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세상을 조금 더 많이 본다면, 어쩌면 덜 외로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아득한 외로움이 너무 좋아서, 혼자가 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직 혼자 이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은 행복하고 슬프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떠올리지 않기도 한다. 이 순간을 위해, 오늘도 또다시 여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