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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연 Jun 02. 2021

일기일회

홀로 떠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유독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평소 그렇게 사교성이 좋은 편도 아닌데,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금방 친해졌다. 내일 이후에는 또다시 각자의 삶을 살아갈 존재들임을 알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만났음에도 가장 솔직할 수 있던 그 순간들. 그 순간들을 만들어낸 공간은 언제나 게스트하우스였다. 혼자 여행길에 떠난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던 나의 또 다른 집. 혼자임에도 혼자가 아닐 수 있던 그곳. 내가 말하지 않으면 기록되지 않을 기억과 함께 조금씩 얘기해보겠다.



교토를 정말 사랑했던 나는 핑계만 생기면 교토를 가곤 했다. 2018 봄에 교토를 가게  것도  이유는 없었다. 졸업을 했고, 시간이 넘쳐나던 나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교토행 버스를 예약했다. 3 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려 도착한 교토는 기억처럼 아름다웠고, 신기했다. 트렁크를 끌고 버스를 타고서, 도착한 곳은 하루야 우메코지(はる家 梅小路)라는 이름의 숨겨진 게스트하우스였다.



교토 수족관 근처의 조용한 주택가 사이에 존재하는 이 게스트 하우스는, 일본의 평범한 집을 개조해서 만들어졌다. 이 일대의 몇 개의 집을 동시에 운영하는데, 모두 조금씩 다른 분위기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나는 그중에서 책을 테마로 한 게스트 하우스에 들렀다.


사실 이 곳을 이유는 별 다른 이유는 없고, 가격이 1박에 2천엔 미만으로 매우 저렴했기 때문인데, 들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목조건물 특유의 아늑함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원래 2층 침대에서 자야 할 경우 언제나 1층을 고르는 편인데, 이 날은 운 나쁘게도 2층이 당첨되었다. 삐거덕 거리는 침대를 올라가 잠을 청하는데, 위에서 움직이는 소리,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고스란히 다 들려왔다. 평소 같으면 싫어했을 이 소음이 이 날은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아, 푹 잠에 들어버렸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다음날 아침은 이 게스트 하우스에서 추천하는 비건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비건을 지향하는 식당이라기보단, 교토의 야채를 소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식당인데, 아침은 비건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단돈 500엔으로 즐길 수 있다. 500엔인 만큼 음식의 종류는 적지만 그 모든 음식이 정갈하고 매우 맛있었다. 특히 좋아하는 음식인 卯の花(우노하나 : 콩비지로 만든 야채 음식)에 밥과 된장국을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굉장히 즐거웠다. 이 식당은 교토에 세 군데 정도 있는데, 수족관 근처의 이곳이 가장 사람이 적고 조용하다. 평소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이나, 야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와보는 걸 추천한다.




나는 하루 종일 신사를 돌아다니다 지쳐 다시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와서는 책이 가득한 거실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 말을 걸어온 여행자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신사가 좋아서 나처럼 神社巡り(진쟈메구리 : 여러 신사를 돌아다니는 행위)를 하던 중년 여성분과는 서로 숨겨진 신사를 추천하고 서로의 주인장을 자랑했다. 이 분이 알려주신 이마미야 신사는 앞 글에서도 소개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다음에는 카마쿠라를 가서 절을 돌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그 뒤로 가셨을까.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 초면의 사람과 두 시간 동안 했던 대화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또다시 거실에 앉아있으니 이번에는 영어로 말을 걸어온 친구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20대 여성분과는 서로 짧은 영어로 한참을 떠들었다. 본인 오빠가 후쿠오카에서 결혼을 한다는 얘기와, 다음에는 한국에 간다는 얘기까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서로 사전을 찾아가며 떠들던 순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그 뒤로 가본 적은 없지만, 교토 여행을 할 때마다 지나가면서 떠올리게 된다. 겨우 며칠 묵은 것뿐인데, 그곳에 살았던 것 마냥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책이 가득했던 거실과 그때 대화했던 친구들. 이미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조금씩 잊어가는 중이고, 아마 언젠가는 이 사실을 잊어버릴 것 같아서 이 곳에 글로 남긴다.






2018년 가을, 숙박비가 가장 비싸던 3 연휴의 어느 날, 숙소가 너무 비싸 PC방에서 잘 생각까지 하면서 교토행 버스를 탔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나는 그때 참 용감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계속해서 호텔 예약 사이트를 갱신하던 중,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 자리가 났다는 알람이 떴었다. 나는 고민도 안 하고 예약을 하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이 게스트 하우스는 왜 평점이 9.7점이나 되는 거지?


그것이 내가 마마의 집에 가게 된 날의 기억이다.


이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 곳은 교토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소박하고,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호리카와 도오리다. 너무 조용해서 내 트렁크 소리가 너무 큰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고요한 동네에 이 작은 게스트 하우스는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걸까 싶을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에 걱정을 하며 문을 여니, 우리 엄마 나잇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계셨다. 바로 마마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조용히 들어가니, 마치 친구 집에 온 딸 친구를 대하듯, 슬리퍼를 챙겨주시고 잘 왔다고 웃어주셨다. 도착하자마자 체크인이라는 명목으로 무슨 일을 하고 여긴 왜 왔는지에 대해 한 시간 넘게 떠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주변에 어떤 음식점이 있고 어떤 마트가 있고 오늘은 근처에서 크리스마스의 일루미네이션이 시작되었다는 말까지, 모든 것이 상세히 설명해주고 지도에 그려주시던 그 정성스러움이 이 곳에 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줬다. 이때 그려주신 지도가 너무 소중해서 그 뒤로도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지도를 들고 밖을 나가 한참을 돌아다녔다. 길 건너에서 한다는 일루미네이션을 보고, 추천해준 식당을 들어갔다. 마마가 추천해주면서 "한국에서도 유명하다는 심야식당이라는 드라마 있지? 거기랑 비슷해."라고 해줬기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이른 저녁이었던 탓일까, 식당에는 주인 분만 계셨고,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말로 심야식당의 마스터와 비슷한 분위기의 주인 분이 나를 반겨주었다. 조심스레 인사를 하니, 혹시 마마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왔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하니 그래? 하면서 외국어가 가득한 메뉴를 쥐어주었다. 먹고 싶은 걸 말하라며.


가게 이름은 大八(다이하치)


나는 워낙 평소에 계란말이를 좋아해서, 그것과 함께 카운터에 놓인 음식 몇 가지를 부탁했다. 이런 식으로 카운터에 음식을 잔뜩 놓아두고 손님이 원하면 주는 방식을 흔히 おばんざい(오반자이 : 원래 뜻은 반찬에 가깝다)라고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정말 맛있는 음식과 맥주를 마시며 한국인의 주량을 자랑하고 있으니, 새롭게 출근한 여성 직원분이 말을 걸어왔다. 일본인처럼 일본어 하지? 한국인이야. 정말? 같은 대화를 직원분들이 하셔서 쑥스러워했더니, 이번에는 마스터의 형이 영화배우라는 얘기를 꺼냈다. 그런 별 거 아닌 대화를 잔뜩 나눴더니, 마스터가 이번에는 카라아게를 내어주며 "이건 서비스야"라고 말해왔다. 처음 온 곳에서 단골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너무 들뜨고 기뻐서 또 한참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한국인의 주량은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마마가 술자리를 제안했다. 나가보니 중국인 여행자와 한국인 여행자, 그리고 마마와 마마의 남편분이 계셨다. 우리는 그렇게 위스키를 까며 한밤중까지 한참을 대화했다. 한국어와 영어와 일본어가 난발하고 서로 번역을 해줘야 하는 자리였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기에, 앞으로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과거에 대해서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래서 그렇게도 즐거웠고,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이 날, 마스터의 남편 분은 조용히 얘기를 들으시다가 붓을 꺼내 그림을 그리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름의 한자가 뭐냐고 물어오셨다.

한자를 알려주니 그림을 완성하고 이름을 써주시더니 내게 건넸다. 이것이 일기일회一期一會라며.


단 한 번뿐인 인연이니 소중하다는 이 말이 그렇게나 좋아서 한참을 쳐다봤다. 아직도 집에 갖고 있을 정도로 소중한 추억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늦잠을 자서 식사시간에 못 맞췄음에도 꼭 먹으라고 식사를 챙겨주시던 마마는 정말로 엄마 같은 분이었다. 나는 교토에도 엄마가 생겼구나,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아주 마지막까지 이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게 집이 생긴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삐걱거리던 마룻바닥의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이란 단 한 번의 우연과 만남으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때, 그날, 그 사람들과 만난 건 비록 한 순간이었지만, 여전히 내게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언젠가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이 글을 다시 읽고 떠올릴 순간이 오지 않을까.



교토 여행기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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