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으면서 상상한 알프스는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그곳에 간다면 달콤한 하얀 염소우유를 맛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는 그곳에 사는 상상을 하며 잠에 빠져들곤 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이 사는 곳을 상상하는 것.
만화를 좋아해서 일본까지 와서 살고 있는 내가 가끔 즐겁게 도전하는 여행이 있다. 만화의 배경이 되는 곳을 직접 가서 그 모습을 보는 것, 흔히 성지순례라고 부르는 이 여행 방식은 가끔 내 여행의 목적이 되곤 한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만화를 좋아한다면, 그래서 그 캐릭터가 살고 생활하는 곳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곳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면, 언젠가 꼭 가보라고 해주고 싶다. 그 여행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 될 테니까.
만화는 시각적인 매체이다. 글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애니메이션이 되면, 그 착각은 한층 더 심해지고, 어느새 캐릭터와 함께 웃거나 울거나 고민하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작가들은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본인이 사는 곳을 그려 넣기도 하고, 본인이 사랑하는 공간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곳을 그려낸 작가들은, 이 곳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내고, 캐릭터가 이곳에 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을 그려내기도 한다. 공간이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존재라서, 작가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이런 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들을 그려 넣은 작품들에게 여러 번 사랑에 빠졌고, 그곳을 여행하며, 그 작품을 표현한 음악을 듣곤 한다. 애니메이션이라면 OST를, 만화라면 작품 속에 나온 노래라도. 별생각 없이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이 곳에 살았던 주인공이 느끼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고, 그 순간 흘러나오는 음악이 그 감정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을 다른 사람도 겪어보길 바란다. 내가 그랬듯이.
(추천하는 음악 : 나츠메 우인장 ost 君が呼ぶ名前)
오늘 소개하고 싶은 곳은 쿠마모토현의 작은 마을, 히토요시다.
이 작은 마을은, 무척이나 조용한 곳이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히토요시 역은 한두 시간에 한번 수준으로 전차가 다닌다. 버스도 다니지만, 사실 나는 이 곳에서 머무는 몇 시간 동안 한 번도 버스를 마주치지 못했다. 조용한 논이 가득하고, 가끔 자전거 혹은 차를 탄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히토요시 온천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역에는 관광센터가 존재하지만, 그곳에조차 사람은 몇 없다.
히토요시는 나츠메 우인장이라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워낙 유명한 만화라 만화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유명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이 만화의 작가가 이곳에 살고, 그렇기에 이 동네는 작가가 그린 작품들 속에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나츠메 우인장이라는 작품은 나츠메라는 주인공이 요괴를 본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츠메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나츠메는 요괴가 너무 잘 보여서, 어렸을 때부터 사람과 요괴를 잘 구분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주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러던 나츠메가 이 곳에 이사를 오게 되고, 이 곳에서 이미 고인이 된 자신의 할머니 또한 요괴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와 알고 지내던 요괴들과, 그리고 자신을 받아준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살게 되는 내용이 이 작품에서 전개된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현대적 문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잘 등장시키지 않는다. 물론 차나 전차는 등장하지만, 캐릭터들이 핸드폰을 쓰거나 TV를 보는 장면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더 이곳을 이 세상과 동떨어진 곳처럼 느끼게도 하고, 엄청난 시골로 느끼게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어떤 곳일지 정말 궁금했다. 조용할까, 사람이 없을까, 나츠메가 보던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히토요시 역 앞
이 날은 날이 굉장히 좋았다. 맑은 하늘과 쏟아지던 햇빛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듯했다. 오늘 내 성지순례를 도와주기로 한 택시와의 약속시간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던지라, 잠시 걸어보기로 했다. 처음 오는 곳이지만 구글 지도를 외울 정도로 봐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놀라서 사람들을 쫓아가 봤다.
생각지도 못한 축제날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모여있다니,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구경을 했다. 작품 속에 나오는 축제 같은 분위기에, 나 또한 갑작스럽게 작품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1기 13화 같은... 사실 이 신사가 제대로 작품 속에 나온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야 할 곳이 많아서 금방 빠져나왔지만 정말 신기한 기분이었다. 마치 어느 순간 나 또한 이 세상의 일원이 된 기분.
이번 여행은 정말 잠시 들르는 일정이었던 탓에, 시간이 부족했다. 때문에, 나는 효율적으로 돌아다닐 방법을 찾았고, 그중에 가장 괜찮은 것이 바로 택시 투어였다. 히토요시라는 이 조용한 곳에도 택시회사는 있고, 이 회사 또한 성지순례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택시투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1시간에 4천 엔이 안 되는 적은 금액의 투어는 도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사람이 적은 시골에서는 가끔 만나볼 수 있다.
여성분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이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나츠메 우인장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법한, 바로 그 다리였다.
작품 속에서 나츠메가 매일 등교를 하고, 요괴를 만나고, 사람을 만나던 이 다리는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당연하게 존재했다. 여기서 나고 자랐다는 기사님은 이 다리를 보시며 추억에 잠긴 채 말씀하셨다. 이곳은 지금 차로는 다닐 수 없고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야 한다고. 본인이 어렸을 때는 차를 타고 건너곤 했지만, 차로 건너면 다리가 흔들리는 게 느껴져서 무척 무서웠다고. 저 다리 너머에 보이는 학교를 다녔다고 회상하시는 모습은 정말로 이 곳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져서, 그리고 이 곳을 그려낸 나츠메 우인장을 사랑하시고, 그 때문에 보러 오는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 게 느껴져서, 행복해졌다.
이곳은 비샤몬도(毘沙門堂)라는 이름의 작은 불당이다. 바로 위의 텐만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불당은, 여러 번 작품 속에서 흐릿하게 등장했다. 이곳이 언제 나왔더라, 하고 고민하던 내게, "여기 뒤에 돌탑을 보세요" 하고 기사님이 말씀해주셨고, 돌탑을 보고 나는 아... 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 나츠메 우인장이라는 작품이 그렇듯, 인간과 신과 맞닿은 듯한 이 공간은 내가 있는 곳이 과연 어딜까, 하고 잠시 고민하게 했다. 아주 옛날부터 사람의 마음이 가득 쌓인 이 곳은 그렇게 아득해서, 숙연해지기도, 나 또한 마음을 쌓고 싶어 지기도 했다.
다음으로 온 곳은 '나나츠치야'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떡집이 있는 곳이다. 실제로 떡집은 존재하지 않고, 그 앞에 그려진 불당이 또 유명하다. 정말 별 거 아닌 이 곳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뭔가 가슴이 뭉클해져서, 한참을 사진을 찍고 찍어댔다. 작품 속에 불당이 제대로 등장한 적은 없지만, 주인공은 이 곳에 갔겠구나. 이 길을 걸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나 또한 작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2기 오프닝에 등장한 것으로 유명한 타마치스가와라텐만구(田町菅原天満宮)
택시 기사분이 마지막으로 데려가 주신 곳은 나츠메 우인장 속에서도 꽤 유명한, 이곳 현지 분들의 호칭을 따르자면 '나토리 신사'다. 2기 오프닝은 히토요시의 이곳저곳을 꽤 재밌게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이 곳은 나토리가 앉아있던 탓에 (사진 속 모자를 눌러쓴 캐릭터다) 이렇게 불리곤 한다. 나 외에도 중국어를 쓰는 커플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고, 이 곳 주민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이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 중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하나씩 소개를 하자면,
5기 오프닝 시작에 나오는 관음상
작품 속에 가끔 흐릿하게 등장하는 히토요시 성
이런 곳들이 있다. 나는 이 곳을 걷고 걸으면서, 계속해서 ost를 들었다. 君を呼ぶ名前(너를 부르는 이름)이라는 ost는 나츠메 우인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는 곡인데, 이곳에서 들으니 조금 느낌이 달랐다. 마치 이 지역의 bgm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슬프다는 감정보다는 쓸쓸하다는 말이 조금 더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쓸쓸하다는 것은 아니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적고, 집보다는 논과 밭이 더 많고, 혼자 걷다 보면 생각이 많아져서,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모두 담아낸 곡과 같았다. 나츠메가 이 곳에서 느낀 건 이런, 슬프지 않은 외로움이었겠구나, 하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이곳에서 산다면, 내 인생의 bgm 또한 이런 곡이었겠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었겠구나. 하고 생각해버렸다.
성에서 조금 더 걸어서 역 쪽으로 가다 보면, 꽤 유명한 다이키치(大吉)라는 나츠메 우인장 전용샵이 나온다.
없는 게 없는 이곳이 정말로 이런 굿즈가 언제 나온 건지 알 수 조차 없는 각종 한정품들과, 잡지 부록, 지역 한정 굿즈가 쏟아진다. 그렇다고 비싸지도 않고 꽤 살만한 가격으로 내놓고, 엄청나게 깔끔하게 정리해둔 걸 보면 이 가게 주인이 얼마나 이 작품을 사랑하는지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컵들. 비매품이지만, 조금 있으면 판매를 시작할 거라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또다시 가야 할 이유만 늘었을 뿐이다.
작품의 무대가 된 히토요시에서는 여름만 되면 이 작품의 일러스트로 불꽃축제 홍보를 한다.
날 가장 감동시킨 건 히토요시에서 열리는 축제 태피스트리를 지금도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벌써 몇 년째 새로 나오는 일러스트를 볼 때마다, 포스터를 구하지 못해서 눈물이 나던 내게, 지금도 당장 정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2012년 태피스토리를 샀다니. 정말 아직도 안 믿긴다.
여행 당시 쪼들리던 지갑 때문에 뭘 살지를 한참을 고민하다가, 2012년판을 달라고 했더니 주인 분께서는 태피스트리가 가득 들어있는 쇼핑팩 안에서 한참을 고르셨다.
"2012년판이 없나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제일 평평하고 깨끗한 거 주려고요. 조금만 기다려요." 하고서는 그 뒤로도 한참을 꺼내보시더니, 제일 판판한 것을 꺼내 주셨다. 이렇게 소중한 마음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잠시 울컥할 정도였다.
계산을 끝내고는 "혹시 시간 좀 있어요?" 하고 물어오시더니, 갑자기 보여줄 게 있다면서 DVD를 꺼내셨다.
"여기 걸어가는 길 보여요? 여기가 가게에서 나가면 바로 보이는 이 길이에요."
"여기 위에 나무 보이죠. 저 나무가 저 가게 위에 보이는 나무예요"
어안이 벙벙해져서 "세상에... 와..." 소리밖에 못하는 내게 사진을 꺼내시고는 더 이것저것 보여주시기 시작했다.
여기가 극장판에서 작아진 냥코 센세 중 한 마리가 들어간 여자애 집이었고 6기 오프닝에서 냥코 센세가 보던 작은 신사 타누마 집 앞 근처 길 1기에서 그 작은 신이 살던 곳 어린 나츠메가 걸어가던 거리
나는 정신을 놓고 사진을 찍어댔고, 그분은 기쁘다는 듯이 아는 모든 것을 얘기해주려고 하셨다.
"어떻게 여길 다 찾아내셨어요?" 하고 물으니, "저는 여기 사니까요."라고 단순하게 대답해주셨다.
겨우 몇 시간밖에 못 있을 거라고 하니 너무 아쉽다는 듯, "다음에는 꼭 하루, 아니 이틀은 묵어요. 여기는 정말 볼 게 많아요." 하고 말씀하셔서, 이 분이 얼마나 이 곳과 이 작품을 사랑하는지 정말로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성지순례는 단순히 사진을 찍고, 그곳에 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사는 공간 안에 나 또한 가보는 것, 그리고 그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작품을 그려낸, 그려낼 수밖에 없던 작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나는 이번 여행에서는 한 가지 더 경험했다. 이 곳에서 살고,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을 직접 듣는 것.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 속의 공간에 실제로 살아본 적이 있다. 갓챠맨 크라우즈라는 애니메이션의 배경인 타치카와에 살았었고, 작품 내 등장인물이 다니는 학교에 다녔었다. 단순히 그곳을 객체로 경험하는 것과 주체가 되어 경험하는 것은 정말로 다르다. 캐릭터가 다니는 모든 길이 내가 생활 속에서 다니는 길이고,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를 누구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작품 내의 분위기가 내 삶의 분위기와 비슷했고, 캐릭터가 갖고 있는 사상마저 나와 비슷했다. 그게 놀라웠고 정말 신기했었다.
아마 히토요시에 사는 사람들 또한, 그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나는 감히 추측만 해본다. 몇 시간 머문 정도로 아는 척할 수는 없지만, 이 곳에 사는 사람들 또한 나츠메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살아왔고, 그래서 더 이 작품을 사랑한 건 아닐까. 그래서, 이토록 모두가 작품 속 등장인물들처럼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은 아닐까.
이 짧은 성지순례는 금방 끝나버렸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어제 갔다 온 듯, 생생하게 기억된다. 아, 나는 정말로 네가 사는 마을을 갔다 왔구나.
+ 2020년 7월
이번 달, 히토요시는 계속된 집중호우로 인해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분들의 사망하는 재해가 일어났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비며, 히토요시와 재해지역의 빠른 복구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