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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Feb 15. 2024

선택지 없어서 다행이다

트라우마를 지나치던 기억

 불과 1년 전 나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나쁜 일이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 몇 번이고 이미 글로 쓴 적 있어 더는 자세히 쓰지 않으려 한다. 나는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한동안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내가 좋지 않은 선택을 할까봐 두려워한 친구가 나를 불러 그 친구와 한동안 같이 지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 어쨌든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간 나는 한 며칠 지났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멀쩡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하다가도 갑자기 생생하게 나쁜 기억이 떠올라 눈물을 줄줄 흘리곤 했다.


 무엇보다 나는 막막했다. 평생동안 이 기억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가리라는 게.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고 그 기억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오히려 내가 더는 손 댈 수 없는 영역이라 훨씬 더 야속하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수도 없이 피부에 닿는 것처럼 이 괴로운 사건을 느껴야 한다는 게 너무 힘겨웠다. 그래서 나는 그때 세상에서 없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문제는 방법이 없었다. 뭘 하든 실패할까 겁이 났다. 두 가지로 선택지를 좁히긴 했는데 혹시나 제대로 끝맺지 못하면 모두에게 민폐일 것 같아 고민을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현실처럼 되살아나는 트라우마가 괴로워서 한시라도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난 결국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했고 나쁜 기억에 몇 달을 시달렸다. 나에게 이렇게 힘든 마음을 가져다 준 이가 다시 연락을 해오면서 또 한번 온 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일년이 지났고 어떻게, 멀쩡히 살아있다.


 내가 그때 예상했듯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난다. 들었던 말이나 마주쳤던 행동이 가만히 떠오르곤 한다. 그 일 이후로 그 전보다 더 악몽에 자주 시달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억이 떠올라도 그냥 길 가다가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제대로 보지 않고 가다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친 것처럼, 아파는 하되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고마워한다. 내가 그래도 잘 살아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내가 그토록 괴로워서 몸부림치던 시절에 힘이 되어줄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여전히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싫고 세상에 어떻게 그딴 인간이 있을 수 있나 생각하면 밖에 한 발자국 나가는 것도 무섭다. 하지만 그 모든 싫어하는 마음을 감쌀 만큼, 춥지 않았던 일 년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던 선택이 없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트라우마는 지나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다만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나만 좀 잘 버티게 될 뿐이다. 꿋꿋이 버티는 나 자신이 마음 속 깊이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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