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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클레어 Jan 27. 2024

너무 슬픈 성장통

감정에 관한 고찰

얼마 전에 언니랑 사소한 일로 다퉜다.


원인은 이렇다.

일단 내가 월경 전 증후군으로 인해 감정이 평소보다 더 롤러코스터처럼 널뛰었다는 것이 첫 번째.

그녀와 나의 성격 차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언니는 평소처럼 손가락으로 물체를 가리키며 "저것 좀 줘"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이 향한 곳엔 여러 개의 물체들이 즐비해있었고, 안타깝게도 나는 시그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과거에 한 두 차례 한 번에 알아듣게 쉽도록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이야기하라고 말했던 터라 왜 못 알아듣냐는 눈초리가 심기를 건드렸고, 나는 폭발했다.


참 별 것 아닌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감정의 널뛰기 속에서

방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힘없이 누워있었다.


언니랑 나랑 다툴 때 엄마께서 갈등을 중재하고자 노력을 많이 하시는데,

그 과정에서 어릴 적 내가 특히나 속상해했던 트리거가 당겨졌다.


진짜 별 것 아닌 이유였는데 화가 났고 울적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듯이 쏘아대는 탓에 엄마께서 둘 다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시면

나는 대부분 곧잘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언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화난 감정을 내게 들리는 혼잣말로 표출하거나 다시 갈등의 시작점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지혜롭지 않게, 나는 다시 반박을 시작했다.

다시 불붙은 싸움에 엄마께서는 우리에게 다시금 조용히 하라는 입단속을 시키셔야만 했다.

일단 감정을 가라앉히고 대화를 하거나 사소한 부분이라면 분위기가 자연스레 와해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런 것 때문에 혼자 억울해했다.

반박을 안 했으면 될 일이지만 언니만 하고 싶은 말을 양껏 하고, 나는 듣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조용히 하라고 해서 난 정말 조용히 했는데. 침묵을 깬 언니가 더 혼나야 하는데.

왜 내가 반박을 시작할 때만 혼이 나는 걸까?


이런 상황이 펼쳐지면 엄마께도 혼이 났지만 아버지께서도 참고 계시다가 화를 내는 경우엔 일이 심각해졌다.

별 것 아닌데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오는 울적함이 컸다. 객관적으로도 누굴 더 편애하시지 않았을 테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 자신에 대한 인정과 공감이 고팠던 데에서 온 피해의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 조용히 했단 말이에요. 상황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고요.

왜 언니를 더 혼내지 않는 건가요. 왜 나만 빼고 다 즐거워 보이는 건가요.

설마 나만 없으면 모든 게 문제없는 나이스한 상황이었던 건가?


그 원인은 내 생각의 흐름이 아래와 같은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엔 여러 배경이 깔려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고,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청소년 여드름에 그치지 않고 피부가 매우 안 좋아서 어마어마한 돈이 병원비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피부는 당장 치료해야만 하는 중한 질환은 아니었기에 내가 괜히 떼를 써서, 내가 또래보다 피부가 너무 안 좋아서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피부과에 몇 년 간 거금을 쓰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있었다.


피부는 쉽게 낫지 않았는데, 참 어이없게도 그간 어려운 형편에 한의원과 피부과를 전전하며 고액의 병원비를 지출해도 낫지 않던 피부가 대학병원에 도달하자마자 금세 나아졌다. 집에 피해만 주는 것 같아서 피부가 나아졌음에도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는데, 이 와중에 미술학원까지 등록하게 되면서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다른 형제에 비해 내게 들어가는 돈은 월등히 높았고 그럴수록 죄송했다.


들인 돈만큼 성과가 나지 않았고 그만큼 노력을 한 것 같지도 않아서, 그로 인해 정시와 반수로 돈을 더 지불하게 해서 더 죄송했다. 정말 철없고 못난 자식이었다. 피부 안 좋아도 그냥 살아갈 수 있는데.

똑똑하고 현명했다면, 그래서 공부를 잘했다면, 그림을 더 잘 그렸다면, 노력을 더 했다면 학원비를 많이 들이지 않고도 입시에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젠 의미 없는 생각들에 불과하겠지만 꽤나 오랫동안 나를 괴롭게 했다. 이따금씩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남들 효도할 때 나는 불효만 저질렀던 것 같아 마음에 무거운 돌이 얹힌다.


학습성과와 경제적인 부분에서 자존감이 낮아진 것도 있지만, 나는 타고난 기질이 특히 예민하고 민감한 데다 옳고 그름을 많이 따지는 성격이었기에 집에서 까탈스럽다고 여겨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싸울 때도, 혼날 때도 이게 다 나 때문인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 온전히 내 잘못이 아닐 때에도. 개인 간의 싸움에서 부모님들 간의 싸움까지 번질 때 특히나 더.


나만 없었다면 집이 더 행복하고 화목했을 것 같은 느낌. 싸우고 나서 혼자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오는 것도 나뿐이고, 가족들은 곧 다시 분위기를 회복했다. 나만 갈등으로 인해 홀로 파생시킨 우울함 속에 갇혀있던 것이다. 그들에겐 내게 없는 관계에 대한 뛰어난 복원력과 회복력이 있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경제적으로 더 부유했을 것만 같은 예감. 내가 더 넓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다면. 병원과 학원에 쓸 돈으로 다른 투자를 했더라면.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더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한이 담긴 후회.


부모님의 마음도 아프고 속상하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애써주시고 지원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괴로웠다. 부모님께서 나로 인해 스트레스받고 가슴 아파하셨다는 사실 또한 나를 애달프게 한다. 마음앓이와 걱정 없이 잘 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 나만 아니었다면. 딱 나 하나만 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니와 남동생 둘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여유롭고 화목하고 평화로웠을 텐데.

이런 생각.


갈등에 반응하는 생각의 방향이 나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때로는 아버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사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많이 부딪혀왔다. 어릴 때 사소한 이유로도 많이 혼나면서 자라서 내 자존감이 낮았을 거라는 원망과 탓, 그리고 애증. 그래서 제대로 된 인간관계와 자아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정당치 못한 추론. 아버지는 어쩌면 나의 결핍에 대한 죄 없는 원망의 표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엄하기만 한 분이셨다면 더 나았을 텐데. 왜 때로는 따뜻하고 사랑을 주고 왜 이유 없이 나를 지원하고 지지해 주는 걸까. 차라리 차갑기만 했다면 차가움에 적응하면 됐을 텐데. 나를 혼란스럽게 해서 이토록 현재까지 마음이 시리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 걸까.


혼란형 애착으로 큰, 어른이 된 나는 과거의 나도 현실의 나도 완전히 용서하지 못할 것만 같다.

너무 오랜 시간 아버지를 탓하고 미워하고 원망했던 나는, 내 곁에 있던 주변의 질 나쁜 사람들의 입김으로 자라온 환경을 탓한 나는, 아버지의 잘못이 아닌데도 분노의 화살을 아버지에게 쏘아 올리던 나는, 이제야 생각의 키를 바로 세워 침몰하려던 우리의 관계를 돌려보려 한다.


그런데 는 과연 아버지께 온정을 주는 좋은 딸이자 자식이었을까?

"아니. 항상 퉁명스럽고 톡톡 쏘아붙이는 말투로 대화한 것 같아. 그런데 이 와중에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셔.."


누구 덕분에 편히 놀고먹고 잘 수 있고, 오직 에게만 집중하며 자유롭게 꿈을 위해 달려갈 수 있었을까?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는 따뜻한 말 한마디 먼저 한 적 있어? 제대로 된 대화는? 이해나 공감을 해보려고 한 적은 있고?

"아니 아버지가 먼저 노력하시고 다가오셨던 것 같아. 내게 미안하다는 말도 하셨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아.."


그럼  어떤 노력을 했어? 죄송한 일에 용서를 구하거나 감사하다는 말은 해본 적 있어?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


이제야.

아버지의 지치고 나이 든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 이제야.

그 눈빛에 서린 슬픔과 거기서 묻어나는 외로움.

위축된 어깨, 조금은 더 노쇠한 몸이 보이는 이제야.

.

.

결국 나는 오만하고 거만했구나. 난 참 철없고 어리석고 멍청하기 그지없었구나.

참으로 미련하고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이자 못난 자식이었구나.

사랑이 있었는데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화답하고 표현하지 못했구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 옆에 있는데 남들만 신경 쓰고 살았구나.

그것도 귀중한 시간을 낭비시키는 여러모로 상대할 가치도 없이 형편없는 사람들을 말이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가족들을 무시하고 가벼이 여기며 살았던 것인지, 사실 모든 문제는 내게 있던 게 아닐지 진실을 마주하면 무너질까 외면하던 순간이 아닐까.


가족 고생 안 시키려 늘 열심히 일하며 회사에서 배부된 간식을 한 입도 대지 않고 집에 가져와 나눠주는 그.


힘들고 고되어 고통스럽지만, 몸 여기저기가 아프고 피곤하지만 새벽부터 더우나 추우나 항상 출근하는 그.


당신께서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자식들은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힘들게 번 돈을 늘 아낌없이 지원하는 그.


고기를 구우면 가장 먼저 아내와 자식들 그릇에 얹어주며 굽느라 여념이 없어 매번 제대로 식사하지 못하는 그.


아픈 상처를 극복하고 가족들과 잘 지내고자 항상 노력하며, 가끔은 자라온 환경이 그렇지 않았기에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이기에 후회하고 눈물 흘리며 외로움과 고독과 싸우는 그.


_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혼자서 가정의 경제와 안전과 힘을 책임지는 슈퍼맨 같은 아버지, 아니 아빠.


어떻게 미워할까. 어떻게 지난 세월을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벌어진 이 멀고 먼 거리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당신의 얼굴을 따뜻한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오래 내 곁에 건강하게 머무르게 할 수 있을까.

_우린 가족이잖아... 그래 우린 가족이었어. 아니 언제나 영원히 가족이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 앞을 가로막던 뒤틀리고 잘못된 사고방식과 시선에서 물러난 나는.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최소한의 인연만 인생에 남겨 외톨이가 된 나는 이제야 완전한 슬픔을 마주한다.

뜨거운 눈물들이 방울방울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이토록 서글픈 순간에 난 속절없이 온전히 삼키기 힘든 현실을 마주한다.


괜히 내가 이렇게 비뚤어진 건 아빠 때문이라며 이유 없이 탓을 하고, 조금은 더 상냥하게 날 대해줬다면 조금 더 친절하게 내게 알려줬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근거 없는 헛된 망상이 오히려 나를, 우리 가족을 해치고 있었다.


흘러가버린 시간(세월)을 어찌할까. 상처를 보듬고 회복하기엔 우리 관계가 너무 멀리 와버린 건 아닐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수도 없이 남긴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좋을까, 어떻게 사죄하고 어떻게 용서를 빌지?

정말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내가 아빠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트집 잡고 비난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문드러졌을까. 용기를 내야 하는데 왠지 가족들을 대하는 데 있어 용기를 내는 게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슬퍼해야 했던 건, 내가 원통해해야 했던 건 도대체 무엇일까.


지나치게 많은 생각들을 열거하다 스스로 우울해질 지경에 이르자, 잠이 쏟아졌다.

나는 갈등을 겪거나 막막함이 느껴지는 등, 스트레스를 받으면 겨울잠을 자듯 잠에 빠져든다. 이게 나의 회피본능인가 보다.


느지막한 시각에 눈을 떴다.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밤이었다. 지금껏 먹은 나이가 무색하게 엄마가 불러도 투덜대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엄마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뜨끔한 감각에 망설이다 이내 밖으로 나간다. 나이가 조금은 더 들면서 그나마 어릴 때보다 나아진 점 하나는 내 마음을 가능한 한 솔직히 이야기해야 남들이 내 문제와 감정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한테 서운하고 섭섭하게 느꼈던 포인트와 갈등을 빚게 된 이유와 과정을 설명드린 뒤에야 분위기가 해소될 수 있었다. 내 작은 우울의 방에서 해방감을 느끼며, 순식간에 공감에 목말라 답답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언니는 무던한 타입이라 늘 그랬듯 아무렇지 않은 듯이 넘어갔다. 이렇듯 별 거 아닌데도 난 엄살쟁이라서 사소한 것에 곧잘 통증을 느끼고 아파한다. 부모님께서 많이 피곤하고 스트레스받으실 것 같아서 죄송스럽다. 타고난 기질이 민감한 데다 생각이 많고 매사 진지한 사람은 이렇게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힘들게 한다.


내 몸은 컸는데 마음과 정신은 왜 이리 늦게 자라날까.

성장 속도가 남들보다 빨랐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아직도 지나치게 어리다. 가족들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미숙함에 깃든 순수함이 가진 투명함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춰진 무책임한 무지가 주는 고통이라는 교만함도 있다는 걸 나는 오늘에서야 목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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