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꽃밭

by 싱클레어

이 글은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서 시작된 저의 개인적인 상상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 작품 18, 제2악장과 함께 들으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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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Monet, <Poppies at Argenteuil>, 1881, Musée d'Orsay(출처 : Artvee)


초여름, 붉은 양귀비꽃이 들판을 가득 메운다. 마치 빨간 물감으로 콕콕 찍어 낸 듯, 우리 집에서 20분만 걸으면, 만개한 양귀비들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점심 먹기 1시간 전쯤, 나와 어머니는 양귀비 들판으로 산책을 나간다. 고작 8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살았지만,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후부터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캔버스의 한 장면으로 나를 인도한 것이다. 나의 집은 빨간 지붕에 하얀 벽을 가진 아주 큰 궁전 같은 곳이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릴 적부터 부족함 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인들이 매일 상주하는 큰 집과, 비싼 가구들이 늘어서있는 거실, 그리고 붉은 실크 이불과 햇빛이 잘 들어오는 나의 방. 내 방에서는 양귀비 꽃밭이 아주 잘 보인다. 아, 적어도 늦봄부터 초여름까지는 그 붉은 빛깔들이 눈앞에서 넘실거리며 빛에 반짝거린다.


나의 어머니는 말이 그다지 많지 않은 분이다. 표정도 거의 없고, 어두운 색 옷을 즐겨 입는다. 어머니는 밥을 먹을 때도 크게 수다를 떨지도 않으시고, 아버지가 오면 싱긋 웃고는 나를 재우러 내 방에 들어오시곤 한다. 가끔 나는 책을 읽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가정부 이모 한 명에게 나를 맡기고는 방을 떠난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 즐겁지는 않다. 영혼 없는 인형과 함께 하는 시간 같달까.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혀서 일수도 있다. 어머니는 내가 튀는 행동을 하는 것도 싫어하시고, 뛰거나 게걸스럽게 먹는 것은 천박한 행동이라며 나를 다그칠 때도 있었다. 적막하고 무뚝뚝한 집안 분위기에 맞춰, 나도 집에서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가정부와 함께 공부를 하거나, 양귀비꽃밭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있을 뿐이다.


9살의 여름, 평소였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왔을 그 여름이, 그 해만큼은 은밀하게 내 눈앞에 가슴을 드러냈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햇빛이 노랗게 차오르던 어느 아침, 나는 커튼을 치고 한 폭의 그림 같은 양귀비꽃밭을 내 눈에 담았다. 그런데, 그 붉은 물결의 틈에 작은 하얀색 물체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 옆엔, 조금 더 키가 큰 푸른 무언가가 조심스레 움직였다. 나는 침대 옆 서랍에 있는 망원경을 급히 꺼내 그곳을 바라보았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하얀색 옷을 입은 아이, 그리고 푸른색 옷을 차려입은 여성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저 양귀비꽃밭은 나와 엄마의 산책 장소인데. 저들은 누구지? 나는 궁금증에 더해 불편한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을 한참을 바라보고, 특히, 어린아이를 눈으로 따라가 보았는데, 그는 양귀비꽃을 가는 길마다 한 송이씩 꺾어 품에 안고 여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고,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행복한 눈으로 그녀에게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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