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이 아니라서 더 소중한 이야기의 시작
주기적으로 이때까지 쓰던 일기장을 죽 넘겨보는 시기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은 아마 나 자신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목적으로(?) 쓴 이 비밀스러운 일기장일 것이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최근의 일기들을 읽다가 작년 이맘때쯤 썼던 일기에 눈이 꽂혔다.
말도 안 되게 행복하게 결혼식을 준비해 가고 있다. 오늘 퇴근길에 문득, 이런 운명적인 사랑에 푹 빠질 수 있단 것이 소름 돋게 행복했다.…….
남편과 나는 딱 1년 전, 2021년 4월에 처음 알게 되었고, 두 달만에 약혼을 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도 주변에서 깜짝 놀랄만했다. 나도 내 옆의 친구나 가족이 만난 지 두 달도 안된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했으면 한번 더 생각해보라며 걱정이 앞섰을거다.
어릴 적 나는 결혼에 대해 많은 상상을 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내 미래를 상상하다, 교회에서 결혼 이야기에 대해 들을 때, 그냥 걸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다. 이런저런 다양한 모습이 많았지만… 주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멋-진 사람과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동화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이었다. 어릴 땐 나이가 차고 결혼할 때가 되면 누구나 그런 주인공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건 정말 동화 속 이야기뿐이라 생각하게 됐다. 물론 우리 부모님이 관계가 소원하신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안 좋은 결혼의 현실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을 거치고 직장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더 이상 그런 상상은 하지 않게 되었다. 결혼은 현실이고 사람은 어느 정도 괜찮으면 조건이 중요하단 말을 하도 들어서 그랬을까? 여하튼 정말 좋은 사람과 서로에게 빠져 결혼한단 기대는 하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갖게 된 건 분명하다.
그런데 작년 4월 어느 날, 온라인 모임 상으로 알게 된 한 사람이 나를 보기 위해 찾아왔고, 그 뒤로 매주 주말마다 4시간 거리를 내려왔다. 당시 모든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우린 서로 각자 그려왔던 대상임을 직감했다.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게 가능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또 서로 몇 번이나 이야기했을까.
그런데 우리 둘 다 공통적으로 생각한 게 있었다. 결혼은 동화 속 핑크빛 이야기는 아니란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내가 상상하던 동화 속 장면은 결혼식에서만 끝났었다. 모든 동화들이 해피 에버 애프터~ 하며 해피엔딩으로 딱 끝나버리는 그 장면. 그런데 사실 진짜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실제로 결혼은 현실이다. 현실을 함께 부딪치고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것을 함께 겪겠지? 그렇기에 핑크빛이 아니라서 더욱 소중한 이야기다. 흰색, 검은색, 노란색, 초록색, 보라색 무수히 많은 빛깔을 함께 겪으며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이야기다. 핑크빛으로만 한정해버릴 수 없는 가치 있는 이야기.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둘 다 잘 알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손잡고 함께 걸어가자고 이야기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생각한, ‘멋진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한다.’는 건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맞았다. 그런 건 애초에 없다. 나도 멋지고 완벽한 사람이 아닐뿐더러. 그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일 뿐. 그리고 서로 가치관이 맞는,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건 당연한 동화 속 엔딩이 아닌, 평생 감사해야할 행운이란 것.
30대가 가까워지고 있는 난 가끔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나? 생각한다. 음,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어릴 적 내가 하던 뜬 구름 잡는 소리, 상상만 하던 것들을 직접 겪으며 그게 무엇인지 알아갈 때 조금 더 어른이 된다고 느낀다. 조금 더 어른이 되어간단 거 별 것 없다. 어제보다 조금 더 인생에 대해 배워가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