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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 Dec 20. 2018

Hell is other people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장 폴 사르트르.

"싱가폴에서, 스타트업을? 일이 진짜 바쁘겠다. 당연히 그만큼의 보수는 많이 받지?"

싱가폴에서 내 사업인듯 아닌 듯 내 사업인 듯 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중인 나. (전 CEO도, 디렉터도 아닙니다. 생계형 C-level.) 한 영국인을 만났을 때 그가 물은 질문이다. 내 친구의 먼 친구인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막 주재원으로 도착한 사람이었다. 그 아이는 나와 동갑으로, 20대에 벌써 내 연봉의 10배를 버는 ......... 전 세계 TOP5 안에 드는 유니콘 스타트업에서 스카웃되어 일하고 있는 수재였다.

"어? 글쎄..........음.........많이 받기 위해 나도 노력하고 있지.하하."

이 말을 하며 내가 얼굴을 붉혔던가, 아니면 33층에 위치한 펍의 흐릿한 조명에 새빨개진 얼굴이 가려지길 바라며 초조하게 기도만 올렸던가. 그건 옛 일이라 기억나질 않는다.


 그의 '취미'는 억 소리가 나는 고가의 명품을 수입해서 중동 및 북미의 부호에게 갖다 팔며 차익을 버는 것이고,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싱가폴 브랜치에서 매니저 역할을 맡아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내 대답은 이래야 했다.

 "아니. 못 받아. 내가 일한 만큼 비례한 돈은 아직 못 받고 있어. 내 월급은 네 월급의 1/10이고, 내 렌트는 네 한달 월세의 1/N이야. 월세마저 너는 회사에서 다 대준다고 하지만 난 내가 알아서 내고 있어. 내가 일하는 스타트업은 이제 막 시작한 곳이라 손이 많이 가고 체계가 없어. 네가 일하는 전 세계 몇 위안에 드는 그런 곳이랑 완전히 달라. 난 네가 일 주일에 일하는 것보다 1.3배는 더 일해. 솔직히 말하면 말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솔직할 수가, 없었다.


그는 또 물어봤다.

"넌 대학교 어디를 졸업했어?"

"나? 그건 왜 물어봐. 한국에 와본 적도 없는 너한테 내가 말해도 넌 모를텐데?"

"알 수도 있지. 한국에 있는 학교야? 아님 너도 미국에서 학교를 나왔니?"

"아니. 한국에 있는 대학교야!"

"아! 알겠다! 그럼 서울대학교인가 보구나. 맞지?"


내 대답은 이래야 했다.

"아니. 서울대학교는 정말 똑똑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 성실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곳이야. 나는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머리도 좋지 않아서 서울대학교는 커녕 서울에 있는 학교도 가지 못했어. 수능이란 시험도 망쳤고. 그래서 그냥 그 근방 학교를 입학했지. "

 난 그렇게 말할 수 없었고, 다시 얼버무렸다. 그냥 서울 근처 학교를 나왔다고.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남프랑스에서 온 착한 남자애는 말했다. 추운 겨울 밤하늘의 북극성 같은 별을 눈동자에 담고. 반짝반짝대는 눈길을 가득 담으며.

"가끔 그렇게 생각해. 내가 싱가폴에 오지 않았으면, 난 너같이 멋지고 정말 대단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거 라고. 나한테 싱가폴은 그래서 진짜로 멋진 곳이야. 여길 오지 않았다면 난 평생 후회했을 거야. 널 못 만났을 거 아냐. 넌 정말 특별해. 너 같이 특이한 한국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넌 이것도 해봤고, 저것도 해봤고, 또 이런 일도 하고 있는데 심지어 이러이러한 능력도 있잖아. 나랑 동갑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넌 대단해."


내 대답은, 이랬어야 했다.

"아니야. 난 평범해. 난 다른 한국의 20대 여자들 처럼 여행을 좋아했을 뿐이야. 난 지금 싱가폴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하나도 특별하지 않아. 내 영어는 완벽하지 않고, 난 네가 생각하는 만큼 멋진 일을 하지 않았어. 난 진짜 평범해.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 네가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나는 달라. 넌 진짜 하나도 몰라."


하지만 나는 어물쩡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환상을 부수고 싶지 않았던 내 욕심 또한 대단했다. 내가 특별하단 그 칭찬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순간 내가 아주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긍정하게 되는 게 싫었다.


싱가폴에는 잘난 사람들이 많다. 일반 평범한 로컬들을 제외한, 소위 말하는 외국인 주재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생각 외로 자괴감과 열등감에 무너지곤 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뿌리 깊은 패배의식이 있었던 거다.


 억대 연봉은 기본이고, 몇 백만원 하는 집을 서포트 받아 유유자적 혼자 살며, 나와 몇살 차이 나지 않거나 나와 동갑인데도 비즈니스 클래스/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다니며, 심지어 나와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임원급의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발에 치이고 넘쳐서였다. 일 년이 지나면 여권을 새로 갱신해야 될 만큼 출장을 많이 다니는 31살의 북유럽 기업의 디렉터, 몇 백억 짜리 요트를 사서 20살 짜리 여자친구를 끼고 다니는 러시아 신흥 재벌, 몇천억에 해당하는 돈을 매일 매일 마음대로 굴리는 전업 투자가, 인도 및 싱가폴에서 유명한거로 유명한 (?) 인플루언서이자 배우인 커플 등. 무의식적으로 그들과 나를 비교하는 순간 나는 철저하게 조각조각이 났다.


 내 비자를 물어보진 않을까, 내 월급을 알아내진 않을까, 내가 '진짜 누군지'를 알아내진 않을까 하는 비교의식과 자격지심에 늘 고통스러워했다. 내가 철저히 나일 수 없었고 그 때부터 갑갑한 암흑이 도래했다. 그들은 '싱가폴에서 일하는 외국인'인 자신들의 상황에 나를 끼워맞춰 당연히 나도 '싱가폴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주재원' 일 것이라 단정지었다. 어리고 똑똑한데 심성도 착하다는 칭찬은 사실 비수가 되어 내게 날아왔다.

 언젠가 그들이 내 정체(?)를 알아낼 거라는 생각에 부담스럽기 일쑤였다.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내 초조함은 결국 납덩어리처럼 내 심리를 짓누르기까지 했고,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혼자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발버둥치던 나는, 오히려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로 했다. 마음이 원하지 않는 데 그들의 연말 파티에 초대되었다고 차려입고 가지 않기로 했다. 함께 있을 때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과는 잠시간 떨어져 있기로 했다. 나에 대한 평판과 나에 대한 칭찬, 비난, 욕, 찬사 어느 것에도 신경을 덜 쓰기로 굳게 다짐했다. 누군가 내 연봉이나 월급, 보너스 등등에 대해 물어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설사 그들 눈에는 말도 안될 정도로 좋지 않은 대우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내가 민망함(?)과 수모를 당하는 게 낫지, 그들 입맛대로 꾸며진 내가 찬사를 받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어린 나이에 싱가폴로 와서 화려하고 멋진 인생을 사는, 능력도 쩌는데 매력적이고. 아는 것도 많고 재미있는데 동시에 심성도 고운 인맥 넓은 동양인인 나'와 진짜 '나 - 생계형 스타트업 매니저에 월세가 부담돼 작은 집으로 옮기고, 집에 세탁기가 고장나서 세탁물 뭉탱이를 등에 이고 코인 세탁방에 가며, 20% 세일하는 초밥으로 한 끼 때우고 부족한 영어실력을 감추느라 전전긍긍하며 내년에 당장 서비스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이기적이고 똑똑하지 않으며 기분파인 한국인'의 갭을 들킬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온전한 나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과 조금 더 귀한 시간을 나눠 쓰기로 했다.

 내가 에어컨 사이에 숨은 바퀴벌레를 죽이지 못해서 콘도 1층 경비아저씨에게 울면서 부탁하는 찌질이어도, 라면도 제대로 못 끓여서 냄비 바닥에 눌어붙게 만드는 요리고자여도, 엉망진창인 영어 작문 실력을 쪽팔려하며 알량한 스피킹 실력으로 먹고 사는 토종 한국인이어도, 쐬주 한병 나발을 불고 야밤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에게 12개의 왓츠앱을 보내버리고 아침에 일어나 고함지르며 삭제 버튼을 누르는 진상이어도, 그저 옷만 대충 입고 꾸밀 줄만 알지 내실은 부족한 속빈 강정이어도, 때로는 집과 가족과 강아지가 그립다며 엉엉 우는 부족한 사람이어도, 갑자기 걸걸하게 쌍욕을 내뱉고 과격한 발언을 내뱉는 선머슴이어도 다 괜찮은. 그런 사람들과.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듯 타인은 지옥이지만. 가끔 시리도록 빛이 나는 구원은, 결국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온다. 이 난해한 명제를 증명해주는 사람들과 동남아의 더운 연말을 보낼 예정이다. 더 이상의 자격지심도, 낮은 자존감도, 온갖 자괴감들과 잘난 멋진 사람들과의 동시다발적 비교도 안녕. 

 그래. 타인은 지옥이자 구원이었다.


**저는 크리스마스 준비 / 깜짝 생일파티 준비를 하고, 각종 연말 파티에 참석 / 불참 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30분 넘게 까불면서 러닝머신에서 달리다 발목을 삐어서 '나홀로집에' 케빈처럼 혼자 있는 시간도 많구요. 통통한 가름이 되어가고 있고, 정 심심할 땐 넷플릭스로 정신수양(?)중이랍니다. 

어떠세요, 즐거운 성탄절과 연말이 기다려지시나요? 저는 행복해지려고, 부단한 노력 중입니다. 전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잘 나가고 멋진 이들과의 쓸데없는 비교를 금하고 자존감을 키워나가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제가 이겨요. 저는 전데. 작년의 저보다 올해의 제가 낫다면, 어제의 저보다 내일의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될거라면, 전 그게 다구나,라고 생각하려고요. 행복하세요! 떡볶이 한 입이면, 다 괜찮아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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