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머 장혁
사진_임종진
장혁의 연주는 화려하지 않다. 그는 좀처럼 기교를 과시하거나 팔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연주하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콘서트에서도 드러머 특유의 과장된 동작, 쇼맨십으로 눈길을 끄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악기를 가지고 놀 듯 복잡한 리듬을 여유롭게 풀어내는 쪽도 아니다. 그는 차라리 입술을 앙다물고 매 순간 전력을 다해 연주하는 듯 보인다. 그의 연주는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만큼이나 간결하고 또 정직하다는 인상을 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떻건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드러머인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20년 넘게 녹음실과 무대에서 검증을 받아왔으며 특히 동료들의 신망이 높아 함께 공연하려는 밴드들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다. 기타리스트 이근형은 장혁의 연주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좋아진다며 “진짜 록킹하고 깊이 있는 연주”라고 평한다. 활발하게 활동 중인 퍼커셔니스트 이수혁은 한 방송에서 존경하는 연주자로 장혁을 꼽았다.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악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장혁 씨가 연주한 앨범을 들었었다. 가장 기본적이라고 생각하는 8비트 리듬을 들었는데, 그 리듬에 큰 감동을 얻었다. 몇 개 안 되는 리듬으로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나 했다.”
어쩌면 이 말은 드러머 장혁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설명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리듬 악기 연주자이기에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장혁의 연주 철학은 “어려운 걸 잘하는 것보다 쉬운 걸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8비트 기본 리듬에서 감동을 받았다는 말은 그에게 최고의 찬사나 다름없다. 그가 음악에서 이런 철학을 갖게 된 데에는 두 번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장혁은 1980년대 중반 이태원의 ‘록 월드’를 드나들던 헤비메탈 키드 1.5세대였다. 시나위, 부활, 백두산이 활약하던 시절, 고등학생이던 그는 동창 친구인 손무현과 ‘셀프 서비스’라는 밴드를 결성해 부활 멤버들 앞에서 오디션을 보고 오프닝 무대에 서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잘 나가는 프로듀서와 신인 연주자로 다시 만나 ‘더블 트러블’이라는 팀을 결성하기도 한다. 당시 손무현은 선배들도 인정하는 수준급 기타리스트였던 반면 장혁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연주자로서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어느 날 ‘록 월드’에 새로운 밴드가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새로운 밴드의 드러머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 민기 드럼 치는 거 보고 살면서 그렇게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어. 무대 옆에서 보는데 너무 잘 치는 거지. 분명히 나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고2라고 하는 거야.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지.”
그는 그날 받은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연주자들 간의 경쟁은 분명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어도 더 뛰어난 누군가에 의해 빛이 바래기도 한다. 내가 꿈꾸던 기회를 다른 사람이 거머쥐는 것을 바라봐야 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김민기는 천재 드러머로 회자되며 신대철의 ‘시나위’ 2집 멤버로 전격 합류하고 이후 이근형과 ‘카리스마’, 90년대에는 또 다른 거물 밴드인 ‘H2O’에 합류하며 화려한 경력을 쌓게 된다. 그 사이 장혁은 밴드 ‘작은 하늘’의 2기 멤버로 합류하지만 활동을 하면서도 드럼을 계속 쳐야 하는지 고민했다. 동갑내기 김민기가 일찌감치 드러머로 뛰어들어 성공을 거둔 것에 비하면 자신의 재능이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작은 하늘’ 활동을 허무하게 마감한 뒤 음악을 포기하고 대학으로 돌아갔다.
사진_임종진
군복무를 육군 예술단에서 할 수 없었다면 그는 다시 스틱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록 음악 외에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경험한 것은 음악적 시야를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록 밴드 시절에 마냥 무시했던 가요, 트로트 등 가리지 않고 연주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연주 패턴을 다시 익혀나갔다. 그가 군에서 제대했을 때 손무현, 오태호 등의 친구들은 작곡가로, 프로듀서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군대 다녀와서 학교 전공 시간에 앉아 있는데 아무것도 귀에 안 들어오더라고. 마음은 음악에 가 있고. 그래서 어느 날 마음 굳게 먹고 뭐가 됐건 다시 드럼을 쳐 보자, 그렇게 해서 다시 뛰어든 거지.”
1994년 무렵, 그는 손무현과 윤상이 함께 차린 스튜디오에 딸린 연습실에서 본격적으로 연습에 매진했다. 노력의 결실로 그는 인기 토크쇼인 〈이문세 쇼〉의 밴드에 발탁되고 당대 최고 프로듀서인 김현철의 공연과 음반에 참여하면서 인기 연주자의 대열에 올라서게 된다. 한창 바빠지기 시작할 즈음 그는 또 한 번의 충격을 경험한다. 드러머 강수호의 등장은 당시 연주자들에게 매우 큰 자극이자 위협이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그렇게 라틴 리듬을 능숙하게 연주할 수 없었다. 송고, 아프로큐반 등 가요에는 잘 쓰이지 않던 악기들을 다룰 때면 그저 신기하게 바라봐야 할 정도였다. 연주에 대한 철저한 훈련과 내공에 있어서 맞설 수가 없는 전천후 드러머의 등장이었다.
그는 연주자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누군가의 기술을 따라잡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기본적인, 쉬운 연주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록 드러머로서의 힘과 간결함이 자신의 장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심화하고 대중음악의 반복되는 패턴에 있어서 누구보다 견고하게 연주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에서 재능은 상대적이지만 음악의 기본기가 단단해지면 그 실력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장혁은 천재적인 동료들과의 경쟁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재능과 음악에 대한 애정을 지켜낼 수 있는지 깨달은 것이고 꾸준한 노력으로 최고 연주자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그가 화려한 연주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네어 드럼을 한번 내려칠 때 리듬을 쪼개고 벽을 쌓아 올릴 때 집중한 채 모든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덜 화려하고 진지하게 보일 뿐이다. 나는 그의 연주에서 가장 프로페셔널한 세션 연주자의 모습을 본다. 동료 연주자들이 인정하는 섬세한 차이도 거기에서 비롯될 것이다. 8비트 드럼 연주의 감동은 괜히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의 근본에 대한 그의 철학과 한 연주자의 꾸준한 노력이 배음들처럼 겹겹이 쌓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드러머 장혁
1988년 헤비메탈 밴드 ‘작은 하늘, new little sky’의 드러머로 데뷔했다. 군 제대 후 고등학교 동창이자 음악적 동지인 손무현, 베이시스트 김우디와 함께 ‘더블 트러블’로 활동했고, KBS 음악 토크쇼 〈이문세 쇼〉의 밴드로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박상민 3집을 통해 스튜디오 세션으로 데뷔하였고 김현철 투어 밴드 등 전문 세션 연주자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한다. 록 드러머 출신으로 힘 있고 간결한 연주로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음반에 참여했고 현재 이선희, 성시경 등의 투어 밴드의 드러머로 활약하고 있다. 세션 뮤지션으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재결성된 헤비메탈 1세대 밴드 ‘H2O’의 멤버로 합류하는 등 록 뮤지션으로서의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