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 사랑은 유년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내 의지는 아니었고, '공부할래' '등산 갈래' 고르라고 하니까 별수 없이 따라나선 것뿐이었다. 낑낑대는 걸음으로 엄마 꽁무니를 부여잡고 올라갔다. 오르막길에서 만난 내리막길의 아줌마 아저씨들은 엄마 따라왔어? 애가 기특하네. 안 오려고 할 텐데. 하시며 가방 속의 비스킷을 선뜻 내주셨다. 칭찬은 어린 마음속 고래를 춤추게 했다.
등린이부터 산신령까지 산 높이에 쿨하기란 쉽지 않다. 등린이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고고한 높이에 겁을 먹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산이 있었다. 꼭 정상까지 오르진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니 부담이 적어졌다. 갈 수 있는 만큼 갔고 중간의 사찰까지만 올라가는 것도 등산으로 여기기로 했다. 기분에 따라 케이블카를 타기도 했다. 등산의 하이라이트는 정산 정복이 아니라 하산 후에 먹는 도토리묵이었다. 그것은 신선한 산채비빔밥이 되기도, 뽀얀 닭백숙이 되기도 했다. 그중 파전과 모주의 걸걸한 조합을 제일 사랑했다. 용머리 돌조각상에서 졸졸졸 떨어지는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식구들 몫으로 한병 받아 집에 돌아왔다. '어디 물맛이 좋더라' 물 품평회가 종종 이어지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듯, 어느 산을 갈지 정하는 시간이 설렜다. 온갖 미디어와 뉴스로 인해 익숙해진 '경멸'에 대한 피로감은 자연으로 나와 '경탄'으로 바뀌었다. 그 극명한 전환에 한 번 중독되면 자꾸 나오게 된다. 낮은 산은 산책 삼아 다니기에 만만해서 좋았다. 느릿느릿한 걸음과 호흡으로 생각을 정리하기도 거르기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높은 산이 제격이었다. 등산인들 무리에서 '악'자가 들어가는 산은 악명이 높다. '설악산, 치악산, 모악산...' 올라가면서 그야말로 '악'소리가 절로 난단다. 높은 산의 억세고 위압적인 기운은 잡념을 없애기에 최적이었다. 정신적 번뇌는 육체 피로 앞에서 맥을 못 춘다. 우울증 환자에게 규칙적 운동을 권하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덕분에 한라산을 정복하고 하지정맥류를 선물같이 얻었다.
고향 땅 밟은 지 하루도 안되어 산에 왔다. 장마철에 비가 내려, 땅이 미끄러워, 바람이 불어 못 올 수 있는 경우를 빼고 나니 날씨 좋을 때 하루라도 더 와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등산화를 단단히 신고, 양손에 스틱을 들었다. 가방에는 간식과 얼린 생수병을 잊지 않았다. 한겨울 은회색 갈빗대 사이로 할퀴듯 불어오던 찬 바람은 그사이 어데 가고 청록색의 울창한 밀림을 웅장하게 펼쳐놓은 6월의 자연은 찬탄할 만했다. 만세를 부르며 숲을 깊이 들이마시는 사이, 나뭇잎과 가지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청설모가 시야에 들어왔다. 날쌘 발자국을 눈으로 좇기 시작한 지 얼마못가 속도전에 지고 말았다.
발이 덥고 축축했다. 양말까지 내팽겨친 발이 느끼는 산의 체온은 청량했다. 뾰족했던 흙도 오랜 시간 인간의 발을 지탱하며 납작하게 엎드려주었다.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듯 산에 꽂힌 발에 전기가 올라 내 몸은 더워지기도 시원해지기도 했다.
갓 출발해 오르기 시작하면 급한 마음과 달리 몸과 호흡은 아직 박자를 맞추기 어렵다. 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이 올 때까지는 그야말로 묵언수행이다. 어느새 '세컨드 윈드(second wind)*'가 찾아온다. 이때부터는 호흡과 다리의 쿵짝이 맞아지니 처음보다 힘이 확실히 덜 든다. 몸이 산에 적응하고, 산이 나를 받아주기로 한 이상, 산이 올려주는 힘에 의지해 나를 정상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일단 정상에 다다랐다면 최악의 일은 이미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스트레칭을 하는 이도, 물을 마시는 이도, 땀을 닦는 이도 하나같이 편안한 얼굴이다.
내려가는 건 공짜다.하산은 올라올 때 걸린 시간의 반이면 된다. 가뿐한 마음으로 내려오며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한 이들에게 격려를 잊지 않는다. "다 왔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드는 공포감이 있다.
오늘 딱 그랬다. 그 감정은 왼팔이 워치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채 흔들리며 느껴지는 허전함과 어색함이었다. 버클이 풀려 스틱을 타고 떨어진 것일까, 손에서 달아나는 느낌을 몰랐던 것일까, 온갖 가능성을 두고 생각해 보아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문득 며칠 전 밴드에 살짝 금이 가있던 것을 스치듯 본 기억이 났다. 그렇다. 아마도 거기서 뭐가 빠져버린 것 같았다. 멍하니 서서 겸연쩍은 손목만만지작만지작했다.
못 찾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행여 어느 마음 착한 분이 내 물건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분은 분명 주인을 찾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셨을 것이다. 그렇게 주변을 몇 차례 두리번두리번 하셨을 것이다. 그 다음, 본인이 쓰거나, 아님 팔아 쓰거나 두 옵션이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떠올랐을 것이며, 발견한 물건이 중국어 버전임에 갸우뚱했을 것이다. 그분이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지구상 한 명뿐인 나를 찾아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고 나 역시 그분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애초에 인정했다.
포기였다. 씁쓸한 자책감을 안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랑도 아닌 것을 단톡방에 늘어놓았고 한 친구가 던져준 말에 귀가 솔깃했다.
"당근에 올려봐."
엥? '당근'은 중고거래 app이 아닌가? 누가 '당근'에서 분실광고를 보고 주인에게 연락을 준다는 말인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전화기 사진첩을 열어 손이 찍힌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 워치가 잘 보이게 손목을 줌인하여 편집했다. 흰 프레임에 보라색 플라스틱 밴드가 연결된 샤오미 워치.
"주우신 분 계시면 연락부탁드려요."
'찾으려고는 해봤니'라는 물음에 대답할 거리를 마련하는 정도의 기대였다. 워치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해보는 건지도 몰랐다. 한 문장을 무심하게 적고 사진을 업로드했다. 설정해 둔 우리 동네 망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해 친구들을 동원해 다른 동네에도 소문을 내는 것까지 성의를 더했다.
맘마 미아!
친구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은 건 5시간 반만의 일이었다.
등산인의 수, 등산로의 수, 물건의 위치, 습득자의 의지, '당근'app의 사용 유무, 유실자의 물건에 대한 애착과 적극성 등 모든 것을 계산에 담아보니 어아어마한 우연과 확률의 작용이었다.
미라클!
오죽하면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는 말이 속담으로도 있을까. 영어 문화권에서도 'looking for a needle in a haystack'이라는 표현이 있는 걸 보면 지역과 민족에 걸쳐있는 불가능에 관한 고정적 관점이 인류 역사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때 묻은 사고의 틀 안에서 반복되는 삶을 통해 사고의 패턴이 굳어지고 불가능이 절대 불가능으로 고정되기는 쉬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물론 나조차 확률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환자는 확률로 대변되는 예후에 집착하고 수험생은 진학률에 울고 웃는다. 안된다고 생각한 이상, 확률이 크지 않은 이상, 그건 안될 것이라 쉽게 믿어버린다.좋은 쪽이든 그렇지 않든 나에게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올 놈은 오고, 갈 놈은 간다.불가능이라 오판하고 시도해보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가능성에 대한 계산과판단에 자신감이 없을 때, 사물과의 인연에 기대어 한 번쯤 애써보는 건 어떨까.
연분을 가장한 행운의 여신이 대기 중일 수도 있다.
Special thanks to...
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불어준 '당근' 이용자 (친구1)
습득자와 '당근' 동네망을 공유한 또 한 명의 '당근' 이용자 (친구2)
물건 발견과 돌려주기 두 가지 신공을 발휘한 '당근' 이용자 고운님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선하고 강한 영향력의 '당근'app
*세컨드 윈드: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
제2차 정상상태라고도 한다. 운동 초반에는 호흡곤란, 가슴통증, 두통 등 고통으로 인해 운동을 중지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데 이 시점을 사점이라고 한다. 이 사점이 지나면 고통이 줄어들고 호흡이 순조로우며 운동을 계속할 의욕이 생기는데, 이 상태를 세컨드윈드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