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로 중국 채우기
상하이에 오면 누가 안 알려줘도 '동방명주' 가고 '와이탄'에 간다. 한국인이라면 '임시정부'와 '루쉰공원'도 잊지 않는다. 훠궈를 먹고 마라탕을 먹어도 여기가 중국 맞나 아리송한 상하이다. 상업화와 국제화로 도시 색이 더 짙어진 탓에 중국스럽다 할 2프로를 찾기 위해 들르면 좋은 곳이 있다. 즐비한 노점과 다양한 먹거리, 취두부 냄새가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이곳은 '신장 옛 거리'다.
신장 옛 거리 (新场古镇)
주소: No. 128 Haiquan Street, Xinchang Town, Pudong, Shanghai
가는 법: 대중교통 추천하지 않음. 택시/자가용 이용. (디즈니랜드, 상하이야생동물원 가는 일정에 포함하기 좋음.)
로컬 관광지인 이곳은 외국인보다 현지인에게 더 많이 알려진 옛 거리다. 주가각(朱家角)이나 우쩐(乌镇)도 좋지만 뭔가 꾸며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옛 거리를 감상하고 싶다면 이곳, 혼돈 속의 질서를 추천한다. 평일 낮 시간에 오면 인파를 피할 수 있는데, 외곽에 위치한지라 근처 논밭에서 재배한 농산물로 싸게 장을 볼 수도 있다. 좁쌀로 튄 막대모양 뻥튀기를 봉지에 가득 담아 막대 저울추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한 근을 채운다. 눈금을 볼 줄 모르는 나로서는 준 만큼 받아오면 되었다. 뻥튀기를 양손에 들고 걸음이 이끄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걸어 본다. 뻥튀기를 먹는 입과 감탄하는 입이 쉴 새가 없다.
참새와 방앗간의 관계처럼 게살 만두를 빚는 노포를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상하이 특산 '게살 샤오롱바오(蟹粉小笼包)'다.
100년 노포답게 주인은 손님을 반기지 않고, 손님도 주인의 안내가 필요하지 않다. 오랜 시간 주인으로 손님으로 살아온 이들이 제집에 드나들 듯 임의롭다. 메뉴판에 '엄치척'을 하고 있는 메뉴 두 개를 시켜본다. 하나는 게살이고 다른 하나는 게 알이다. 주문이 들어감과 동시에 작업대에 앉은 며느리가 부지런히 샤오롱바오를 빚어낸다. 자기 주먹보다도 작은 밀가루 반죽을 어찌 저리 얇게 펴서 터지지도 않게 속을 꽉 채우는지 구경하는 맛도 이미 식사의 일부다. 잔잔하게 주름진 형태로 동일하게 빚어내는 솜씨는 전통과 내공을 과시했다. 한 김 쪄서 식탁에 오른 샤오롱바오의 자태가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인의 치맛자락 같았다. 젓가락으로 아랫자락을 조심스럽게 들어 숟가락에 얹은 뒤 피(皮)를 살짝 꼬집듯 눌러 구멍을 낸다. 그 사이로 밀려 나오는 육즙의 감칠맛에 준비되지 않은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주인장이 작은 종지에 따라준 흑색의 레몬 식초를 곁들여 육즙 빠져 쪼글 해진 만두 본체를 한입에 음미해 본다. 게살의 짭조름하면서 비릿한 맛을 레몬 식초가 단단히 잡아준다. 아는 맛 같으면서도 먹지 않으면 절대 모를 맛이다.
요기가 끝나면 옛 거리의 골목골목을 구경한다. 사탕수수대를 꺾어다 쌓아놓고 기계에 압착으로 즙을 내는 사탕수수 주스, 석류 알을 분리해 휴롬에 갈아주는 석류 주스, 지독한 냄새로 크리미한 고소함을 위장한 취두부, 각종 절임, 술, 육가공품, 떡, 요구르트... 그야말로 간식의 낙원이다.
시식으로 내놓은 강정이나 과자들로 디저트 삼으며 걷다 보면 가만히 앉아서 차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아메리카노나 라테보다는 말갛고 빨간 중국 홍차가 생각난다. 무심코 들어간 좁은 골목에 낯익은 '茶' 글자판이 목마른 걸음을 붙잡았다. 문이 굳게 닫히지 않고 빼꼼하니 열려있어 환영의 제스처로 해석했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나직한 가야금소리에 따라 걸음을 더 안쪽으로 옮겼다. 물을 마주 보며 앉은자리 창밖으로 백로 한 마리가 곁눈질로 나를 의식한다. 눈이 머리의 양쪽에 달린 이유로 곁눈질로 시선을 보내는 네게 나는 앞눈질로 인사했다. 인사는 곧장 헤어짐의 인사가 되어 하얀 손수건처럼 날아갔다.
한지로 만든 부채 위에 정성껏 붓글씨로 적어놓은 메뉴가 주인장의 성정을 짐작하게 한다. 한 자 한 자 공들여 쓰다가 배려서 버린 부채가 몇 개나 될까 농담하며 헤아려본다. 오후에 마시는 카페인이 밤수면에 영향을 미칠까 온화한 보이숙차로 주문했지만, 더 엷게 마시고 싶었던 차는 오히려 더 짙게 우러났다.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한 주인장은 빈 공도배를 하나 더 갖다 주는 센스로 객을 감동시킨다. 물 반에 차 반, 그윽한 차향에 심장은 들뜨지 않고 가만했다.
그 사이 해가 지고 홍등이 켜지며 제법 중국 영화스러운 배경이 연출되었다. 대롱대롱 달려있는 홍등, 그리고 물에 비치는 붉은 그림자에 찻잔을 기울여 찻물 위에 고요히 담아본다.
티타임을 마치고 나서는 길, 핸드폰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던 주인장이 화들짝 놀란다. 한국인이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끄덕하니 주인장 입에서 예상치 못한 우리말이 쏟아진다. 알고 보니 주인장은 우리와 반가운 한 뿌리였다. 많이 잊어버렸다는 겸손한 그녀의 우리말이 의외로 유창했다.
올해 수확한 것이라면서 내 손에 쥐어준 노란 모과가 향긋했다. 같은 언어가 묶어주는 민족의 정이 이국타향에서도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