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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Dec 11. 2021

환상은 상像이 되고 - 초현실주의 거장들

 영화 <인셉션(Inception)>에는 약제사 유서프가 코브 일행에게 매일 꿈을 공유하는 이들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그 장소를 지키던 노인은 코브에게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하는데, "이들에게 꿈은 현실이야." 라는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초현실주의 거장들 展>은 꿈을 현실로써 꿔 온 작가들과 조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이번 전시는 초현실주의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보유하고 있는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의 컬렉션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회화, 조각, 사진, 심지어 관련 서적들까지 전시하고 있어 다양한 매체에 담긴 거장들의 초현실주의적 세계관과 그 예술적 형상화 결과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대표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작가로는 마르셀 뒤샹,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 등이 있다. 아마 이름만 듣더라도 관련 작품이 꼬리표처럼 떠오를 만큼 익숙한 작가들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전시를 관람하며 느낀 그 익숙함 속의 낯섦이란, 필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는 총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자가 방문한 그 어떤 전시보다도 짜임새가 좋다고 느꼈다. 각 섹션의 주제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맹점 삼은 여섯 가지의 키워드와도 일치한다. 첫번째 섹션에서 초현실주의의 혁명성을 개념화한 채 두 번째 섹션으로 넘어간 관람자는 초현실주의를 낳은 '다다(DADA)'의 개념을 통해 그 무질서적이며 파격적인 속성 또한 깨닫게 된다. 세 번째 섹션은 '꿈꾸는 사유'라는 명명 하에 길들여지지 않은 재료인 꿈을 다채롭게 형상화한 작품을 전시한다.  


다음 섹션에서 관람자는 꿈의 특성이기도 한 '우연과 비합리성'에 대해 재고하며 이들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해 실감하는 기회를 가진다. 다섯 번째 섹션은 '욕망'으로, 특히 성적 욕망에 대해 솔직히 묘사한 작품들을 통해 초현실주의자들의 파격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온통 빨간 벽지와 강렬한 인상의 작품들이 어우려져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섹션이기도 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섹션은 '기묘한 낯익음'이다.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모든 파괴적이며 비관습적인 특성을 압축하는 개념이라 느껴져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기존의 예술적 아우라와 그 숭고함을 흐트러트리고 일상적인 오브제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매우 능한 이들이었음을, 본 섹션에서 확인하게 된다.  


기이한 것은 언제나 아름답고, 기이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사실 기이한 것만이 아름답다./ 앙드레 브르통, 1924


초현실주의는 널리 알려져 있듯 세계 대전으로 인한 혼란과 이성에 대한 불신으로 이성, 합리성, 기존의 미적 기준, 질서 등을 해체하고 심지어 파괴함을 표방한 경향성이다. 앙드레 브르통은 프랑스 시인이자 미술 이론가로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해 초현실주의 예술의 시발점을 마련한 인물이다. 이번 전시 역시 초현실주의의 개념적 정의를 마련한 그의 논의를 중요하게 다룬다. 다소 난해한 작품들 속에서도 '기이한 것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 신기하게도 공포 속의 아름다움, 추함 속의 아름다움, 서늘함 속의 아름다움, 무질서 속의 아름다움을 차례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위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의 <서랍이 달린 밀로의 비너스>이다.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한 비너스상에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서랍을 달았을 뿐인데, 엄격한 신체미를 강조했던 그리스 예술의 정신을 비틀고 해체하는 효과를 지닌다. 작품의 제목을 읽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기까지 한 건 이 때문이다. 마치 상당한 수준의 블랙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을 작은 작품 하나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일방적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서랍의 존재는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비밀로 침묵해온 비너스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는다. 여신의 신체를 열어 젖히면 그 내면의 무질서한 꿈과 환상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달리는 비너스의 신성성보다도 그 혼돈을 더욱 찬양했으리라 감히 예상해본다. 


무엇보다 이 전시의 대표 이미지기도 한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1937)>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필자였다. 이 작품은 마지막 섹션인 '기묘한 낯익음'이라는 이름 하에 분류되어 있다. 꽤 오랜 시간 앞에 머물게 될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림 속 사람은 분명 거울 앞에 서 있는 듯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상은 인물의 정면이 아닌 뒷모습이다. 이는 분명 앙드레 브르통의 선언처럼 아주 기이하고 의미심장하기까지 한데 동시에 선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초현실주의적이다. 거울은 아주 일상적이고 익숙한 오브제로, 그 일차적 기능은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음에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거울은 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다. 아니, 또 다른 뒷모습의 상이 비친 저 물체가 과연 '거울'인지도 의심스러운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 구석에는 분명히 책이 놓여져 있고, 그 책의 상은 거울에 충실히 반영된다. 재현이 아주 금지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림 속 인물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감추려 하는 걸까. 그림 앞에 한참을 서서 그의 표정이나 외형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보통의 인간적인 얼굴이 떠오르기 보다는 점점 더 기이한 느낌에 휩싸이는 탓에 잠시 어깨를 떨기도 했다.  


어쩌면 현실의 우리가 거울을 보는 행위도 그림처럼 뒷모습을 비춰보는 헛된 일과 같을 지 모른다. 시각은 항시 우리를 속이고, 우리는 현실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르네 마그리트는 세상이 우리로부터 숨기려고 하는 바를 포착해 화폭에 담은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는 초현실주의 정신을 완벽히 회화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히 탁월하다 느낀다.


<초현실주의 거장들: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전>은 2022년 3월 6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다시는 초현실주의와 관련해 이런 방대한 양의 컬렉션을 볼 기회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알찬 전시였고, 일상의 비일상성을 발견할 눈을 기를 수 있었다. 독특한 기이함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미(美)를 발견하고 싶다면 꼭 방문하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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