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범 Apr 27. 2024

머무르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리뷰

영화 <트랜짓>의 주인공 게오르그는 마르세유의 한 호텔 주인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이곳에 머물고 싶으면 머물지 않을 것을 증명하시오." 영화에서 마르세유는 일종의 경유지이다. 즉 존재를 증명받을 수 없는 이들이 '일시적'이라는 상태를 방패 삼아 머무는 곳이다. 떠나야만 머물 수 있는 이들. 머물기 위해 떠나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지표를 잃고 흘러가는 이들. 어떤 땅에도 완전히 안길 수 없는, 그들을 우리는 '난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더이상 사회 정치적 개념에만 머무르는 것도, 아주 먼 국가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난민화된 삶들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고 있다. 누구든 난민의 정체성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파편화된 세상에서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는 '지금 여기, 콜로노스는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 네 개의 사연이 있다. 정치 박해로 본국에서 추방 당했으나 조사관과 통역사의 정보 조작으로 정당한 심사를 받지 못한 여자, 본국에서 성폭행 피해를 입고 난민 출입국사무소에서 심사를 받지만 절대 자신의 피해 사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 여자, 살던 섬이 물에 잠겨 아내와 떨어지고 기후 난민이 되어 버린 남자, 불법체류자가 된 탓에 늦은 밤 공장에서만 일할 수 있게 된 남자. 넷은 따로, 또 같이 오늘날 난민화 된 삶의 유형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들이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들은 제각각이다. 심사 내용이 조작되었음을 깨달은 여자는 사무소 앞에서 1인 시위와 단식 투쟁을 통해 싸움을 이어간다. 여자는 알고 있다. 자신이 이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며 첫번째 사례가 되어 준다면, 이후 부당한 취급을 받은 다른 난민들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성폭해 피해를 입었던 여성은 침묵이라는 방패로 자신을 지킨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명백한 증언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을 도운 활동가의 손을 붙잡고 백 마디 말보다 더 의미 있는 감사를 전한다.  


기후 난민이 된 남자는 댐을 바라보며 아내에게 끝없이 말을 건다. 사람들에게 기후 난민이란 그저 하나의 개념일 뿐, 그 실체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아내의 말이 남자를 자꾸만 울린다. 아내와 나눴던 고국의 언어, 건너 오는 아내의 희미한 목소리만이 남자를 붙잡는다. 야간에만 공장 일을 하는 남자는 항상 여덟 걸음을 센다. 그 걸음만이 그에게 허락된 행동 범위임을 곱씹으며, 그는 다른 이주노동자가 자신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어 본다. 그들은 모두 '진심'이라 일컬어도 모자랄 것 없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것만이 지금 많은 것을 잃은 그들을 수호한다. 


이 사연들은 난민을 그저 덩어리진 개념이 아닌 개별적인 서사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들이 '집을 잃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닌 '집을 찾기 위해 존재적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한다. 사연도, 투쟁 방식도 제각각이다. 그 개별성을 이해하는 것, 모두 각자의 살아 있는 사연을 지니고 흘러 들어온 이들임을 깨닫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이 네 난민들의 사연은 아테네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끊임없이 겹쳐진다. 비극 오이디푸스의 테마를 '운명에 저항하지만 결국 굴복하고 마는 인간'정도로 아주 납작하게 일축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난민이라는 정의 위에 우뚝 선 오이디푸스는 소리친다. 나는 이 모든 잘못을 알고 저지른 게 아니라고. 사실을 알고 있던 이들은 나를 비웃었지만, 나는 내 손으로 눈을 찌르고 기꺼이 이곳까지 흘러 왔다고.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굴복한 인간이 아니라, 굴복을 도약 삼아 저항을 계속해가는 인간 그 자체가 된다. 


아테네가 '난민 오이디푸스'를 기꺼이 받아 들일 수 있었던 건 이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의 사연을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기를 기꺼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는 그 자체로 테세우스를 비롯한 아테네 시민들의 방식을 시험해보고 있다. 연극이라는 형태로 다양한 난민들 앞에 마이크를 밀어 준다. 그들의 삶을 발화하고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그 자체로 존중의 표시이다. 누군가 물리적 자리를 내어줄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감과 쓰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존재함에도 존재를 증명 받지 못하는, 국가라는 울타리의 수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그 '자리'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 투쟁 속에서도 한 조각의 인간적인 마음들을 잃지 않는다. 오늘날 아테네가 오이디푸스에게 허락했던 것 같은 환대는 가능할까. 이 질문에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는 마음을 쓰고 귀를 여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으로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쓰는 이야기- 뮤지컬 <피에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