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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Aug 14. 2024

어리석은 방패라 하더라도 - 연극 <너츠>

우연의 우연성만큼 우리를 당황시키는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이 아무 이유도 없이, 우연히, 그저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설명은 누구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인과를 이해할 수 없는 일에마저 '우연'이라는 이름을 붙여 나름의 정의를 해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 체계 하에 이해될 수 없는 일을 무척이나 두려워 한다. 우리만의 질서를 부여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 앞에서는 놀랍도록 작아진다. 그렇게 내몰린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주에서는 우연만이 자연스럽다. 그 사실을 충실히 받아들이기에 인간이 꽤 까다로운 것뿐이다. 그 때문에 탄생한 것이 바로 이야기이다. 우연에 그럴듯한 논리를 붙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엮은 것이 운명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서사가, 플롯이 되어왔다. 원칙을 얻은 우연은 부자연스러운 규칙을 통해서만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다.인간은 그를 통해 삶의 면면을 배우고, 경험과 경고를 주고 받아왔지만 그것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를 야기한 것은 아니다. 


새롭게 대학로를 찾은 미스터리 연극 <너츠>를 관람한 후 문득 우연에 대한 단상을 늘어놓게 된 것은 놀랍지 않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우연을 논리로 엮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었던 것처럼, 연극 <너츠>는 이야기라는 허구의 방패로 자신의 과오와 불행을 감춰온 남자의 이야기이다.



대표 이미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너츠>는 미스터리 드라마의 문법으로 분열된 자신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미국 북부의 작은 펍에서 시작된다. 사건 해결을 위해 현장에 파견된 FBI 요원 세미와 조수 레온은 오래된 신문 등을 증거로 수사를 이어간다. 그 중 세 명의 참고인을 조사하는데, 곤란하게도 셋 모두 자신이 진짜 살인범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진술을 한다.


이후 그들 각각이 저지른 살인이 삽입극처럼 펼쳐진다. 전기수리공 토드는 크리스마스 밤,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일깨우고만 한 남자를 살해한다. 분장사인 잭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두고 괴롭힘을 지속해온 여성을 웨딩 메이크업 중 살해한다. 여성은 괴롭힘의 주축인 친형의 오랜 애인이자 예비 신부였다. 한편 사람들을 천국의 문 앞으로 데려다 준다는 교주 다이머는 수많은 신도들의 기차 동반 자살을 야기한다.


이 세 사건은 큰 연관성이 없는 듯 개별적으로 흘러가지만, 점점 묘한 국면에 접어든다. <너츠>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관객이 직접 이야기의 빈 부분을 채워가며 퍼즐을 끼워맞추는 재미를 보장한다. 결국 극의 후반부, 세 인물이 사실 세미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임이 밝혀진다. 세미는 형 레온을 살해한 죄책감과 유년의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셋으로 나누고 그에 따른 살해 서사를 꾸며낸 것이었다. 


한편 세미의 밖에서는 모성애의 미명 하에 이를 그저 덮어둔 친모 마리아가 있다. 세미는 자신이 만든 서사로 가득한 내면과 폭력적인 우연성만이 날뛰는 외면을 오가며 끝나지 않는 방황을 지속한다. 레온에 의해 부정당하고 억압되고 수치심에 젖어간 세미의 세 부분은 그의 죽음 후에도 끝나지 않는 것이다.


<너츠>는 분명 이런 특징적인 인물인 세미를 주인공으로, 그의 두드러지는 특성을 연극의 소재로 삼으며 미스터리적인 오락성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광적인 충동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 분열을 택한 이의 심리를 끝까지 쫓는 치밀함도 보인다. 그리고 관객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광기에 휩싸인, 완전히 분열된 인간을 어떻게 보아왔느냐고. 당신의 안에서는 그러한 분열된 조각이 끝없이 돌고 돌아 스스로를 상처내는, 나아가 주변인들까지 끌어들이고 마는 비극이 발생하고 있지는 않느냐고.


혼을 쏙 빼놓는 90분의 드라마의 끝에서 우리는 총을 든 남자의 뒷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가 끝내 뱉어놓은 총성은 우리 자신의 광기와 분열의 조짐을 일깨우는 신호탄이 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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