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이스트에게 형벌이라는 이름의 기회를

연극 <키리에> 리뷰

by 래범

가까운 지인의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을 찾았던 날이 기억 난다. 그는 내가 온 것을 핑계로 잠시 구석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벽에 등을 붙이고 작게 몸을 만 그는 내게 여상한 얘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수상할 정도로 새카만 옷차림과 빈소를 가득 채운 쿰쿰한 육개장 냄새, 효과음처럼 깔리는 곡소리가 조금씩 익숙해질 때가 되어서야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대화를 하며 우리는 작게 웃었다. 별 이유는 없었고, 그냥 웃을 만한 이야기였다. 다만 웃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놀랐는데, 지인은 괜찮다며 머리를 기대고 있던 벽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거기 뭐 숨겨뒀냐며 애써 우스갯소리를 하는 나에게, 그는 밤새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보다 깜빡 잠이 든 얘기를 해주었다. 선명한 꿈을 꿨다고. 꿈에서 일어나려고 벽을 짚었는데 손이 안으로 쑥 들어갔고, 그 너머로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잡혔다고 했다. 보이지 않아도 돌아가신 분의 것임을 알 수 있었기에, 한참 벽을 통과한 팔로 손을 붙들고 아래위로 흔들었다는 말에 나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긴 침묵을 깨듯 나도 팔을 뻗어 보았다. 내 손끝은 그저 까끌하고 차가운, 벽의 지극히 물리적인 속성밖에 느낄 수 없음에 애석해 하며.


연극 <키리에>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 지은 건 이 기억이 힘을 쓴 결과이다. 내 내밀한 기억을 엿본 듯, 연극 <키리에>는 죽은 후 집이 되어버린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집이라는 새로운, 또 어찌 보면 기이한 몸을 갖게 된 영혼이 그 안에 담긴 삶들에게 집으로써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가 어쩌면 위로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오랜 철학적 논의를 재생산하면서도, 독특한 상상력과 진정성 있는 연기로 관객에게 생사의 새로운 이면을 보여주는 연극, <키리에>를 소개한다.


[국립정동극장] 2026 연극 키리에_포스터 ©국립정동극장 (1).jpg


독일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여성의 긴 독백으로 시작한다. 30대의 건축가였던 그는 사랑하는 언니와 조카를 위해 집을 지었지만, 곧 목적을 잃은 그 집에서 홀로 죽어간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그의 의식은 집으로 옮겨가 있었다. 집이 된 그는 이제 집으로써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가 슬픔을 느끼고 울면 누수가 일어나고, 원한다면 몸을 뒤척여 벽지를 뗄 수도, 조명과 온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년 간 그의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는 생전의 기억들을 곱씹어 가며 이 시간들을 버티지만, 더 이상 회상할 기억도 바닥난다. 그는 말한다.


"죽어서도 집으로서 자의식이 남아 있는 건, 이기적인 에고이스트에게 주어진 형벌일까?"


이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집' 캐릭터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가 인간의 언어로 사랑을 말하는 데에 서툴렀던 이였기 때문일 테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집을 지어줄 줄은 알았어도 집이 되어주지는 못했다는 회한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런 그에게 딱 어울리는 형벌을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람이 아닌, 집의 언어로 사랑할 또 다른 기회를 얻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침내 그에게 찾아온 기회는 사랑스러운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


25년이나 방치되었던 그곳을, 누군가 열고 들어온다. 그의 이름은 '엠마'. 죽어가는 남편과 함께 입주한 엠마는 젊을 적 에우리디케 역을 맡기도 했던 무용수였고, 집은 생전에 그의 공연을 봤던 사실을 기억해 내며 그에게 애정을 품는다. 엠마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보듬으며 사계절을 함께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엠마는 그러나 점점 노쇠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집은 점차 마음을 졸인다.


한편, 이 집은 '검은 숲' 근처에 위치해 있다. 한낮에도 나무가 빽빽히 하늘을 가려 밤처럼 컴컴한 숲. 그런데 그 무서운 곳을 몇몇의 한국인들이 찾아온다. 연고 없는 이 타지까지 온 손님들의 목적은 하나.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들은 엠마의 집에 숙박하며 생의 끝을 그린다. 그런 그들에게 엠마는 자신이 만든 버섯이 든 초콜릿을 건넨다. 아마도 환각 버섯으로 추측되는 그것을 먹은 손님들은 생의 끝에 와서야, 생의 최초의 공간을 닮은 축축하고 검은 그곳에서 진짜 삶의 모습을 마주한다.


그들이 죽음을 단념하고 삶을 택한 이유는 '키리에'라는 작품 제목에서 살펴볼 수 있다. 키리에는 가톨릭에서 주님을 뜻하는 '키리오스'의 호격이다. 기도문의 포문을 여는 이 단어는 이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모두 간절한 기도를 품고 지친 생을 이끌어왔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한 줄기 빛을, 어떠한 기적을,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연들을 바랐지만 절망하고 이 검은 숲으로 밀려온 것이다. 그러나 엠마와의 만남으로, 검은 숲과의 만남으로 그들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줄 이가 신이 아닌 또 다른 결함투성이의 타자, 나와 닮은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개체'일 뿐 아니라 '관계망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작품의 결말은 보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기둥에 목을 매달고자 하는 엠마를 보며 집은 문득 깨닫는다. '내가 무너져야 엠마를 살릴 수 있다'는 독백과 함께, 그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짜내어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절정의 사랑 앞에서야 그는 스스로 붕괴하는 법을 배운다. 이는 곧 자의식의 붕괴를 뜻한다. 에고이스트인 그가 자의식에서 시선을 돌려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타인을 향한 마음으로 꽉 채운 삶을 깨닫게 되었음을 뜻한다. 유일한 언어인 나의 목소리를 무너뜨리면 살만 해진다. 역설적으로 살만 해진 그때가 무너질 때라는 걸, 집은 알 수 있다. 집이 된 것이 형벌이 아닌 기회였던 것이다.


손님들이 다시 검은 숲을 빠져나와 밝은 삶의 방향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들은 검은 무대 위에서 '다른 존재'를, 그것이 설령 오래 키워온 개일지라도, 오늘 처음 만나 겨우 3일을 함께 한 낯선 이일지라도 인지하게 된다. 자의식의 목소리는 끊기고 타인을 향한 작은 자리가 마련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순진하고 대책없는 희망만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무턱대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서로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자의식을 걷어내고 난 자리에 희뿌연하게 드러난 타인의 체온은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연극 <키리에>는 동아연극상 3관왕에 빛나는 명성 만큼이나 의미있는 관극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단순한 무대 장치는 오히려 배우들의 열연을 빛나게 하고, 휘몰아치는 무거운 텍스트들은 설령 휘발될지라도 관객의 머리에 묵직한 기억의 추를 내려준다. 기분 좋게 비워진 서사는 관객이 틈입하고 참여할 틈을 주는 듯 하여 더 좋았다. 또 다른 기회로 무대에서 만나볼 날을 기다린다.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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