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방원과의 조우
뮤지컬 '창업'은 이방원을 주인공으로 한 퓨전 사극 뮤지컬이다.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의 횡포로, 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곪을 대로 곪았던 고려 말기 배경을 시작으로, 조선 건국 후 통칭 '왕자의 난'의 발생 과정까지를 관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극에는 흥미가 덜 한데다가 더더욱 낯선 장르인 뮤지컬의 합이었으니, 신선한 조합을 기대하는 동시에 한 편으로는 공연의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있을 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뮤지컬 <창업>은 퓨전 사극라는 장르적 특징답게 최신 문물과 현대적 언어들을 극 내에 적절히 배치해 오락적 재미도 극대화한 작품이었다. 호소력 짙은 노래로 감정을 건들이다가도 가벼운 말장난으로 분위기를 가볍게 하는 흐름의 고저가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인터미션이 없는 긴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지루함 없이 즐겁게 관람했다.
뮤지컬 <창업>은 극의 초반부부터 이방원의 성격 묘사에 집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릭터의 앞, 옆, 위, 뒷면을 천천히 붙여가며 종국에는 이방원이라는 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이방원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교차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왕좌에 눈이 멀어 가족과 친지들을 학살한 피의 군주로도, 뛰어간 정치적 감각을 지닌 권력가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가 단편적인 사건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입체적인 인물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뮤지컬 <창업>은 이러한 이방원의 '입체성 묘사'에 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 진행 방식이 매우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역사 교과서를 통해 인식한 이방원의 이미지는 '철의 군주' 그 자체였다. 조선 개국에 크게 공헌한 대표적 인물로, 권력의 분화와 균형을 강조한 정도전과 달리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장한 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물 한 방울, 망설임 하나 없이 계획한 일을 일사천리로 실행하는 군주로서의 그의 이미지와 뮤지컬 <창업> 속 이방원은 사뭇 다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 흘리며,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고, 어지러운 나라 안팎 상황에 곧바로 행동에 나서기 보다는 좌절해 절규하기도 한다. 우리네 일상에 스며든 비극과도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들이다.
특히 정몽주와 함께 하여가와 단심가를 주고 받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딱딱한 텍스트로만 접하던 두 시조가 배우들의 입을 타고 가락으로 형상화되는 순간 글자 하나하나에 꾸역꾸역 욱여 넣은 그들의 굳은 의지와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라를 유지하려는 자와 새로운 국가를 창업하려는 자 사이에 깃든 것은 그저 의견 차이에 의한 분노만이 아닌, 절박함과 처절함이었다. 시조가 현대적인 음악으로 재해석 되었을 때의 묘한 감동은 퓨전 사극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매력이지 않을까.
한마디로 후손들의 역사적 평가가 제거된, '인간 그 자체로서의 이방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 작품의 큰 주안점이다. 물론 극적으로 다소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은 있겠지만, 이방원이 주변인들과 맺고 있는 인간적 관계망을 보여주는 서사적 방식은 종국에 그의 선택을 더욱 비극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뮤지컬 <창업> 포스터 이미지는 인간에게 내제된 동물적 이면을 보여준다. 이 포스터가 작품을 효과적으로 압축했다고 느낀 것은, 인간으로서의 이방원에게 어느 순간 균열이 그어졌고, 그 아주 작은 틈으로 모든 것을 비극으로 치닫게 한 본능과 욕망이 새어나오고 있음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균열의 원인은 다름 아닌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인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결국 인간으로서의 이방원을 무너트린 것은 인간으로서 아주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던 사소한 욕망들의 무너짐인 것이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과 군사력의 힘을 주장한 군주이지만 한 편으로는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아들로서, 오래도록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아들로서, 최연소로 문과를 급제한 철인이 아닌 누군가의 벗으로서, 총명한 제자로서 존재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결국 모두를 등지고 남은 것은 피로 철갑된 왕좌 하나뿐인 상황까지 내몬 것이다.
배우들의 뛰어난 가창력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 화려한 볼거리로 꾸며진 뮤지컬 <창업>은 역사속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 바로 내 안에 웅크린 작은 나의 모습과 겹쳐지는 경험을 선사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무료한 주말, 혜화 예그린 씨어터에서 만난 뮤지컬 <창업> 관람 경험은 내게 '인간 이방원과의 조우'로서 오래도록 잔여해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