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60대의 몸으로 견뎌낸 영국 유학 5년

나를 만든 시간들

by 씬날

부유한 집에서 여유롭게 간 유학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지만, 늘 돈에 대한 결핍과 갈증이 따라다녔다. 남들보다 여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 조금이라도 저렴한 기숙사, 가장 작은 싱글룸, 안전과 거리가 먼 동네를 선택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난 학업이 벅찼으니까. 그저 아꼈다. 첫 자취 생활 6개월 동안 라면과 잼 발린 빵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비자 갱신을 위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지금은 유학이 문제가 아니라 몸을 치료해야 할 때"라고 의사가 윽박질렀다. 아니. 스무 살의 몸이 60대라니. 하반신은 그래프조차 찍히지 않았다.


"그래도 어떡해, 해야지."


그래. 다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학교 - 집 밖에 없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지 왜 유학을 왔냐"는 말이 들을 정도였으니까. 아무도 날 잡아먹지 않는 걸 알면서도, 외모부터 배경까지 다른 이들과 영어로 맞닥드려야 하는 게 두려웠다.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대놓고' 인종차별과 '은근한' 인종차별은 불안을 더욱 키웠다.


그래도 사람을 너무 좋아하니까.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몇 시간이고 전화를 해댔다. 9시간의 시차를 견디며 푸념을 들어준 친구들은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존재들이다. 매일 우는 소리하는 사람 상대하기 힘들었을 텐데,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크다.


한국 친구들이 잠든 시간이면 유튜브를 보고, 책을 읽고, 혼잣말도 하며 공원을 걸었다. 일기도 정말 많이 썼다. 언젠가 이 외롭고 두려운 시간이 지나고 행복해질 날이 오길 바랐다.

공원을 정말 많이 걸었다


방학은 잠시나마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영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혀왔다. 출국 2주 전부터 울었다. 앞으로 펼쳐질 고난이 선명하게 보이면서도 예측할 수 없어, 부모님이고 친구고 상관없이 누구 앞이든 눈물을 쏟아냈다. 짐을 싸면서, 공항에 가면서, 부모님과 인사를 하면서, 비행기에서, 기숙사로 가는 우버에서, 짐을 풀면서도 울었다.


"그렇게 힘들면 돌아오렴."

부모님의 말씀에도 돌아갈 수 없었다. 한국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친구들은 대학에 가 있을 테고, 난 고등학교 때도 입시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고졸이 되는 거였다. 두려웠다.


결국 울고불고해도 영국에서 해결을 봐야 했다.

영국애들은 교수님 농담에 웃는데, 나는 농담은 무슨, 수업내용 따라가기 바빴다. 100% 알아들으니 수업 녹음본을 3-4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그때 AI가 있었으면 수월했겠지만, 당시엔 오직 반복 듣기만이 내가 생각해 낸 해결책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교수님 연구실을 수시로 찾아갔고, 학교에서 열리는 추가 강의(예: 리포트 쓰는 법)들을 들으러 다녔다.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결국 졸업했고, 심지어 석사도 했다.


20대 초중반, 영국이라는 값진 기회의 땅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방 안에 숨어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며 공부에만 매달렸던 시간들. 그때도 알고 있었다. 기회를 많이 놓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그때의 최선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고 애틋하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지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그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며,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런던 자취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