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을 주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

by HOoOng
'다섯살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어린이집을 다녔다. 지금와서도 그 어린이집의 건물 크기를 상상하면 나름 큰 어린이집었던 것 같다. 건물 내부에도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 만큼 아주 어린 아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다양한 아이들 반으로 구성된 그런 곳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다른 아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잘 생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부의 큰 놀이터에서 같이 놀기도 하고, 여름엔 바깥에서 물놀이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러다 어느 날 여자아이가 같이 화장실을 가자고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남자아이인 나에게 왜 같이 가자고 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겨우 이해하려 노력해도 아마 혼자 가는 것이 무서웠으리라 보는 수준..?
(사실 지금 얼굴도 기억 안나 것으로 보아는 친한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도 왜 같이 가주겠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아이도 누군가와 잘 못 어울리는 아이였을수도..?)

그 어린이집의 화장실은 각 교실의 뒤편에 작은 화장실이 있어서 쉬는 시간이나 수업 중 빠르게 볼일을 보고 올 수 있는 형태로 기억한다. 문제는 문이 남녀 공용이라 중앙의 칸막이를 기준으로 남녀의 공간이 나뉜 형태라 여자아이와 같이 화장실을 들어가는 것이 큰 위화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여자 쪽으로, 난 당연히 남자 쪽에서 볼일을 본 후 그 아이가 볼일을 다 볼 때까지 대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곧 그 아이도 볼일을 다 봤는지 나를 불렀고 나는 같이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칸막이를 넘어 여자 쪽으로 갔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이건 명백한 나의 잘못이다. 룰을 어긴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때마침 화장실을 들어와 이 장면만 목격한 보육교사가 우리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나를 향해서만 심하게 꾸짖었다는 것이다. 말할 틈을 주지 않는 교사때문에 나는 해명할 시간이 없었고, 그 아이도 놀랐는지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평소에 보육교사에 혼난 기억이 없던 나는 아마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심지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일러주지 않고, 다른 아이들 앞에서 대놓고 큰 소리로 다그치다 보니 어린 나는 판단을 잘못했던 것 같다.


내가 화장실을 가서 혼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웃긴 결론이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알게 될 내용인

여자화장실에 남자가 들어가면 범죄가 될 수 있음을… 그때는 그 행동에 대한 죄의식이 희미했던 것이다. 목욕탕에 가서도 엄마랑 같이 들어가는 때 이거나 그런 방식의 이용 형태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 테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해, 선의를 갖고 행동했으나 혼났다는 당혹감과 다른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는 엄청난 수치심과 배변 활동을 통제 당했다는 위협에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그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쉬는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수업 및 활동 시간은 교사의 통제에 따라 적당히 움직이면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고 따분하지 않았는데,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혼자 창가 쪽에 있는 책장과 책장 사이의 틈에 껴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서있었다. 그러다 배변욕구가 생기더라도 그 사건때문에 배변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소변 욕구를 참지 못하고 팬티에 일을 저질렀다. 처벌의 합당한 이유와 해명의 시간을 주지 않은 잘못된 교육과 오해가 만들어 낸 수치심의 굴레였다. 흔치 않은 일에 주변 아이들은 당황했고,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성인인 교사가 어린 아이에게 잘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하고 다른 아이들 앞이 아닌 조용한 공간에서 따로 교육해주었더라면

나는 아무리 혼나는 상황이라도 잘못한 점을 정확히 파악했을 것이다.


더불어 선의의 감정으로 같이 화장실에 가준 것에 대한 나의 의도를 들어주는 것까지 동반했더라면 내 감정의 혼란은 훨씬 덜 했으리라.





다섯, 여섯 살이면 아무리 젊은 보육교사의 말이라도 불복 불가능한 큰 어른의 말처럼 들린다. 평소에 잘 혼나지도 않던 아이가 그런 방식의 교육(을 가장한 폭력)을 받았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내가 폭력이라 더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그 사건 이후에 부적응을 겪고 있었던 것을 교사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보육교사는 내가 팬티에 일을 저지를 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교사가 담당해야 하는 아동의 수가 적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최소한’ 쉬는 시간에 혼자 떨어져 있는 아이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 사건이 떠오를 때 마다 물어보고 싶다.
“어린 아이에게 잘못의 이유를 설명할 시간도 없이 큰 소리로 혼냈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냐고.”



비단 이런 문제는 어린이집 뿐만 아니라 초, 중,고등학교에도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 교사가 아이들이 잘못한 점을 제대로 짚어주지 않고 본인의 화를 못 이겨 다른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로 훈계하는 것.


교육의 탈을 쓴 폭력일 뿐이다.

교육을 받을 때의 학생이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수치심은 오해를 만들며, 좌절감, 원망을 비롯한 상대방을 향한 공격성을 강화한다. 이는 또 다른 공격적, 반항적 행동의 토대가 된다. 그렇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아이들은 나의 사례처럼 자신을 사회와 고립시키는(자신을 괴롭히는) 방향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잘못한 점과 그 아이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물어보고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것.

선의는 인정해주되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처벌하는 것.

그래서 다음에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

이 점이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