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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 May 23. 2024

마음에도 여백이 필요합니다

안면도 - 편안할 안, 잠잘 면

자연 앞에서 느끼는 보편함이 참 좋습니다

 안면가스, 안면카트, 안면수산시장 등 스쳐 지나는 가게마다 '안면'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어요. 오랜만에 충남시 태안을 찾았습니다. 안면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어릴 때는 가족과 함께 웃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부딪혔던 기억이 애틋하게 남아있는 곳입니다. 십여 년 만이군요.


 몽돌과 깨끗한 모래가 뻘을 대신하는 이곳의 바다는 참 깨끗합니다. 하늘을 담은 바다는 푸르고 맑아요. 구름 한 점 없는 오월의 푸른 하늘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와 부서지는 모양이 소리를 만들더니, 이내 파도와 파도가 만나 서로를 밀어내며 아우성치곤  모래에 근사한 무늬를 만들어요. 보고만 있어도, 듣고만 있어도 참 편안합니다. 자연 앞에서 느끼는 보편적인 편안함이에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칩니다

 지난주 사무실에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경쟁사가 좋은 상품을 만들어 출시한 까닭이죠. 이미 작년에 예측되었던 일이었습니다만 그때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기업의 특성 때문이지요. 내년보다는 올 해가 중요한 임원들의 자리 특성상 내일의 위기는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작년의 임원이 올해 그대로 남게 된 것이지요. 긴급회의가 소집되고 대응방법을 세우고 있지만 이미 떠난 버스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이지요. 파트 별로 대응방안을 고심하느라 직원들이 모두 울상입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이에요.


 모두가 그렇게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한편으로는 조금 이상합니다. 이미 소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제 와서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고요. 동료들은 왜 그렇게 마치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요? 대응책을 만들라는 지시에 대한 응답일까요? 암묵적인 셀프 최면 같습니다.


'큰일이다. 위기다. 걱정하자. 걱정하자'


 이 위기는 사실 회사가 아닌 특정 임원이나 관리자의 위기입니다. 그것을 직원들에게 전가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사실 크게 걱정되지 않습니다. 물론 회사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큰 문제가 아닌 이유가 크지요. 수심 가득한 표정과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  회사를 위한 충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임원에게 보이기 위해 근심 어린 표정을 만드는 재주도 없지만요.



마음에도 여백이 필요합니다

 마음에서 회사를 조금 덜어내었더니 그만큼 공간이 생깁니다. 그 작은 공간이 만드는 여유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업무 분야를 다룬 주제가 아닌 책을 읽어요.  운동과 야외활동을 즐깁니다. 여행을 통해 순수함과 지혜를 얻기도 해요. 안면도가 편안할 안자에 잠잘 면자를 쓴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안면도에 있는 안면가스라는 상호가 재미있다며 킥킥거리고 웃는 아이와 유치한 대화를 나누는 능력도 생기고요.


 "아빠. 그럼 이 동네에서는 얼굴로 가스를 만드나 봐요? 그럼 안면마트는 얼굴로 계산을 해서 못생기면 돈을 더 내야 돼요? 와 그럼 누나는 돈을 더 내야겠네. 깔깔깔"


 빠르고 강한 도파민에 중독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보가 너무 빠르고, 넓은 세상이에요. 경쟁은 심화되고 치열해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의도적으로 느림을 지향합니다. 느림을 찾아요. 너무 빠른 나머지 속도에 미쳐가는 세상입니다. 제 스스로라도 늦추지 않으면 제 마음에 공백을 만들 수 없을 거 같아요. 느려야만 보이는 것들을 찾고 있습니다. 집단 최면이 요구하는 근심에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었거든요.


깨어 있는 동안 쓸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애써 참을 청하거나,
게임이나 스포츠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며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게 아니라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 최재천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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