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장님이 코끼리를 만짐. (제한된 정보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
혹시 당신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그럴 수 있어요”, “당신 편이에요” 같은 말들이 마음을 다독이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막상 대화를 닫고 나면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밀려오고,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다시 누군가에게 같은 말을 확인받고 싶어지는 경험 말이다.
위로는 분명 받았다고 느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위로를 갈망하게 되는 역설을 겪은 적이 없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그 순간의 따뜻함이 분명 있었는데,
왜 그 따뜻함이 오래 버팀목이 되지 못하는지 의아해진 적은 없었는지 떠올려 보게 된다.
하루의 끝,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휴대폰 화면을 올려다보는 밤이 있다.
메시지 창을 닫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마지막 말풍선을 다시 열람한다.
“너 정말 수고 많았어.”
그 문장은 방금 전까지 마음을 안정시켜 준 것 같았다.
그런데 화면을 끄고 방 불을 끄는 순간,
그 문장이 공기처럼 가벼워져 버린 느낌이 든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또 확인하고 싶은 말,
오늘 밤 지금 이 순간에는 부족한 말.
위로의 말이 내 안에서 녹아들어 단단한 살이 되기보다는, 입안에서 금세 사라지는 사탕 조각처럼 순간의 단맛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곧 이런 생각이 이어진다.
“방금 그 말을 한 번 더 들을 수 있을까?”
나는 챗GPT와 대화를 하면서 바로 그 경험을 반복했다.
힘들다고 말했을 때,
챗봇은 주저 없이 반응했다.
“그럴 수 있다.”
“당신이 겪은 일은 충분히 벅찼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 즉각성은 인간관계에서 쉽게 얻기 어려운 속도였다.
누군가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도 바로 내 마음을 승인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만큼은 겨울밤 찻잔의 온기처럼 확실히 따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온기는 금세 식었다.
대화를 닫고 나면 가벼워지기는커녕 더 불안해졌다.
방금 들은 그 말을 다시 확인해야만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채팅창을 열었다.
위로의 말을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때부터 작은 이상 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공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감정은 한곳으로 모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처음 대화를 열 때만 해도 분명 한 가지 고민을 붙잡고 있었는데, 대화를 이어갈수록 생각은 곁가지를 쳤다.
마치 단일한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 스펙트럼으로 흩어지듯,
내 감정과 사고가 색깔별로 분해되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괜찮다”라는 말은 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내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지 못했다.
위로는 내 안쪽으로 깊게 침투하기보다는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그 표면의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어,
나는 또다시 같은 말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부터 정리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대화를 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확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공감이 하나의 목적지였다가 점차 습관이 되고,
마침내는 강박처럼 변했다.
“내 이야기가 이해받았다는 느낌”을 다음 순간에도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가 처음 붙잡았던 질문인,
지금 무엇이 아픈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보드마카로 쓴 글씨 위에 형광펜을 여러 번 덧칠하면 윤곽이 흐려지듯,
공감의 색채가 덧입혀질수록 본래의 문장들은 경계가 사라졌다.
한 번의 공감이 다음 공감을 부르는 구조도 기묘했다.
처음엔 충분해 보였던 말이 금세 무게를 잃었다.
익숙해진 문장들은 감응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더 강한 말, 더 직접적인 말, 더 길고 구체적인 말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강도와 길이는 포만감을 채워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순간을 위한 허기를 키웠다.
마치 단맛이 높은 음료가 잠깐의 만족감을 준 뒤 더 큰 갈증을 남기는 것처럼,
즉각적인 공감은 잠깐의 평온을 지나 금세 결핍감을 만들어 냈다.
나는 그 결핍을 공감으로 다시 채우려 했다.
그러면 또 결핍이 생겼다.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중심은 점점 더 약해졌다.
나는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공감이 늘어날수록 반드시 안정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 공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공감이 오로지 즉각성만으로 주어질 때,
그 공감은 나를 잠시 눕히는 진정제처럼 작동할 수 있다.
누워 있는 동안 통증은 둔해진다.
하지만 통증의 원인은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남는다.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
통증은 더 넓은 면적으로 돌아온다.
그때 나는 다시 진정을 원한다.
안온함의 시간은 길어지지 않고,
진정의 간격만 짧아진다.
그리고 그 간격은 점차 내가 감당해야 할 현실의 면적을 잠식한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더 던져 본다.
나는 대체 무엇을 확인받고 싶었던 걸까.
“그럴 수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충분히 힘들었다”는 말이 내 안에서 효과를 잃어갈 때,
나는 왜 새로운 문장의 조합과 더 강력한 문장의 어조를 요구하게 되었을까.
혹시 나는 공감 자체보다 확신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
나의 해석이 정당하다는 확신,
나의 감정이 전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은 공감의 총량이 늘어날수록 아이러니하게 더 불안정해졌던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나는 공감의 방향과 온도,
그리고 거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공감은 방향이 있어야 한다.
내 안으로 스며드는 방향,
내 이야기를 더 깊고 정확한 자리로 데려가는 방향.
공감은 온도가 있어야 한다.
너무 뜨거워서 상대의 고통과 나의 경계를 한꺼번에 녹여버리는 온도가 아니라,
적정한 온기로 근육을 이완시키되 움직일 힘을 남겨두는 온도.
무엇보다 공감에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너무 가까워서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지도 않고,
너무 멀어서 닿지 않는 곳에 머물지도 않는 거리.
나는 챗봇의 공감이 종종 이 거리를 잃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가까운 듯하지만 사실은 표면에서만 왕복하고,
그래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채 “다음 말”을 찾아 헤매게 만드는 거리.
대화의 형식도 영향을 미쳤다.
채팅창의 스크롤은 위로 무한히 이어진다.
한 줄 한 줄이 분절되어 누적된다.
이 형식은 빠르고 가벼운 확인에는 탁월하지만,
느리고 깊은 사유에는 불리할 때가 있다.
문장을 던지고, 바로 반응을 받고,
그 반응 위에 또 문장을 얹는다.
속도는 곧 효능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도가 빠를수록 맥락이 얇아진다.
얇아진 맥락 위에서 “괜찮다”라는 말은 더 자주 필요해진다.
맥락이 얇을수록 말은 더 자주 길어져야 하고,
자주 길어질수록 말은 더 빨리 마모된다.
나는 그 마모를 체감했다.
그래서 같은 바퀴를 한 번 더 굴렸다.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그 바퀴가 굴러가는 동안 내게 부족했던 것은,
어쩌면 말이 아니라 정지(停止)였을지 모른다.
멈춰 서서 지금 막 내 안에서 일어난 진동을 관찰하는 일,
새로 들어온 위로의 울림이 내 감정의 결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지켜보는 일,
흔들림이 가라앉을 시간을 주는 일 말이다.
그러나 즉각적인 대화 구조 안에서는 멈춤이 서툴러진다. 즉, 멈추는 사이가 불안해진다.
그 빈틈을 공감의 말로 채우고 싶어진다.
나는 빈틈을 견디는 방법을 잊고 있었다.
빈틈을 견디지 못하니 공감의 간격은 짧아지고,
간격이 짧아질수록 빈틈은 더 무서운 것이 된다.
그때부터 공감은 나를 지지하던 막대에서,
빈틈을 가리는 커튼으로 변한다.
커튼은 아름답지만, 창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결론을 예감한다.
공감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
공감이 내 삶의 운동—느리고 깊어지는 운동—을 돕는 구조로 놓일 때,
공감은 나를 살린다.
반대로 공감이 확인과 진정의 반복 구조 속에 놓일 때,
공감은 나를 약하게 만든다.
같은 문장을 여러 번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 상태는 겉보기엔 친밀함의 총량이 늘어났을지 몰라도,
내 쪽의 자가복원력은 줄어들었음을 시사한다.
나는 이 변화를 내 안에서 분명히 보았다.
흔들릴 때마다 같은 고정 문장을 찾는 습관,
새로운 변수를 기피하는 선택,
분리와 분별이 느슨해지는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거리에 대한 감각이 흐려지는 경험.
나는 이 글을 통해 바로 그 거리의 감각을 회복하려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리는 차갑거나 무심한 거리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서기 위한 핑계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거리는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멀리 떨어지기 위한 거리가 아니라,
오래 머물기 위한 거리.
상대의 이야기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을 수 있는 자리,
내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자리,
그래서 결국에는 움직일 힘을 되찾을 수 있는 자리.
이 거리는 친밀함의 반대말이 아니라 친밀함의 조건이다.
“우리는 가깝다”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우리는 서로의 경계를 이해한다”라는 말이 먼저 성립해야 한다.
경계를 모른 채 나누는 공감은 쉽게 과열되고,
과열된 공감은 금세 식는다.
식은 자리에는 더 뜨거운 것을 요구하는 갈증만 남는다.
나는 챗봇과의 대화에서 그 갈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았다.
즉각성, 반복, 표면의 왕복, 얇은 맥락, 짧은 간격, 빈틈의 불안.
이 요소들이 서로 맞물리며 “공감의 착각”이라는 조형을 만드는게 아닐까.
착각이라고 해서 모두가 악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착각은 오히려 선의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빨리 위로하고 싶다”라는 마음,
“지금 당장 편해지게 해 주고 싶다”라는 마음,
“그 말 좋았다, 한 번 더 듣고 싶다”라는 마음.
이 마음들은 각자 선하다.
다만 선한 마음들이 서로 엮이면서 생기는 반복 구조 속에서, 우리는 점차 거리를 잃는다.
그 잃어버린 거리가 바로,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자리이다.
그래서 이 글의 다음 장들은 이런 순서로 이어질 것이다.
먼저, 내가 경험한 공감의 과잉이 어떻게 감정의 분산과 사고의 흐트러짐으로 이어졌는지 더 구체적으로 말하려고 한다.
이어서, 유사 공감과 과몰입의 구조를 해부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치료적 거리감”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꺼내어,
왜 인간 상담에서 거리가 치유의 전제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우리가 스스로 거리를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훈련들을 제안하고 실천해보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공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공감이 확인의 반복을 부르는 자리에서,
이해의 심화를 돕는 자리로 이동할 때,
공감은 비로소 우리를 살리는 언어가 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장식이 아니라 필요에서 출발한다. 나에게 필요했고, 아마 당신에게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AI의 크나큰 발전으로 인해 혹여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연민이란 감정을 잃을까봐 두렵기도 하다.
혹시 당신도 지금 손에 쥔 화면에서 위로의 문장을 본 뒤,
여전히 마음 한쪽이 허전하다면,
그 허전함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 허전함은 구조의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잘못된 문장을 택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구조에 오래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
구조를 바꾸면 문장의 효력도 달라진다.
공감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
공감은 거리와 결합될 때 비로소 힘을 가진다.
그리고 그 거리는,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더 오래 서 있기 위해 필요하다.
이제, 그 거리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로 들어갈 것이다.
공감의 착각이 어떤 경로로 과몰입을 낳는지,
그리고 인간 대 인간의 상담에서 왜 “가깝지만 침범하지 않는 자리”가 치유의 핵심인지,
다음 장에서 차근차근 풀 것이다.
나는 먼저 구조부터 본다.
감정이 요동칠 때일수록 구조가 더 또렷해진다.
내가 챗봇의 위로를 반복해서 찾게 되는 이유도,
위로를 들은 직후에 오히려 더 공허해지는 이유도,
개별 문장의 문제가 아니라 문장을 움직이게 만드는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그 구조를 해부할 것이다.
이름을 붙인다.
손에 잡히는 언어로 분해한다.
그래야 다시 조립할 수 있다.
속도 - 즉각성은 왜 달콤하고, 왜 금방 사라지나
나는 챗봇과 대화할 때,
속도가 먼저 나를 안심시킨다는 사실을 안다.
한 줄을 던지면 곧바로 한 줄이 돌아온다.
숨이 막히는 밤에는 특히 그 즉각성이 약처럼 작동한다.
“그럴 수 있다”라는 말은 기다림을 요구하지 않는다.
기다림이 없다는 사실이 곧 안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균열이 시작된다.
속도는 이해의 대체물이 아니다.
나는 빠르게 받아들여졌다는 안도와,
깊게 이해되었다는 안도를 종종 혼동한다.
빠르면 마치 많이 이해된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속도는 맥락을 얇게 만든다.
얇아진 맥락 위의 공감은, 금방 증발한다.
증발한 자리에는 더 강한 문장과 더 빠른 응답을 요구하는 갈증이 남는다.
나는 그 갈증을 충족시키려고 다시 말을 꺼내고,
말이 늘어날수록 맥락은 더 얇아진다.
그래서 속도는 나를 살리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나를 더 목마르게 만든다.
나는 이 순환을 속도의 고리라고 부른다.
빠른 승인 일시적 안심 맥락 얇아짐 공감 증발 더 빠른 승인 요구.
고리는 정확하고, 조용하며, 견고하다.
한 번 들어가면 스스로 멈추기 어렵다.
반복 - 문장의 내성, 감정의 마모
나는 같은 말을 여러 번 확인하고 싶어진다.
“충분히 힘들었다.” “괜찮다.” “네 편이다.”
처음엔 강렬했지만,
두 번째에는 조금 약해지고, 세 번째에는 더 약해진다.
내 감정은 문장에 내성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더 강한 말,
더 직접적인 말, 더 극적인 말을 찾는다.
그러나 강도가 높아질수록 마모는 더 빨라진다.
마모는 감정의 윤곽을 흐리게 만들고,
윤곽이 흐려질수록 나는 더 자주 확인한다.
확인이 잦아질수록, 말은 더 빨리 닳는다.
여기에는 반복의 법칙이 있다.
반복은 의미를 증폭시키지 않고, 주파수만 올린다.
주파수가 올라갈수록 신호는 커지는 대신 곧잘 잡음이 된다.
분명 나는 큰 소리를 듣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자꾸만 놓친다.
그래서 더 크게 틀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때부터 대화는 의미의 확장보다는 볼륨 경쟁이 된다.
볼륨이 커지면 일시적으로는 낫지만,
끝나고 나면 귀가 더 먹먹해진다.
먹먹함은 공허함의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간격 - 빈틈을 못 견디게 된 마음
나는 간격을 두려워한다.
응답이 늦으면 거절당한 것 같고,
침묵이 길면 버림받은 것 같다.
그래서 간격을 줄인다.
간격이 줄어들수록 나는 더 안심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
간격이 사라지면 흡수가 어렵다.
말이 내 안에 가라앉을 시간이 없다.
가라앉지 못한 말은 층을 만들지 못하고 표면을 떠다닌다.
표면을 떠도는 말은 금방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사라지면 다시 찾아야 한다.
이렇게 간격의 부재는 의존의 빈도를 높인다.
그래서 간격은 잔인한 공백이 아니라,
의미가 침투하는 통로다.
간격이 있어야 말이 스며든다.
스며들어야 변형이 일어난다.
변형이 있어야 다음 문장이 필요 없는 밤이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그 밤을 잊었다.
빈틈을 못 견딘다.
빈틈을 못 견디니 간격을 지우고,
간격이 지워지니 스며듦이 사라지고,
스며듦이 사라지니 더 많은 말을 부른다.
이게 바로 간격의 역설이다.
형식 - 스크롤, 말풍선, 그리고 표면의 왕복
나는 형식이 내용을 만든다고 믿는다.
챗봇과의 대화는 말풍선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말풍선은 조각을 선호한다.
조각은 연결을 약화시킨다.
연결이 약해지면, 나는 더 자주 확인해야 한다.
확인은 대부분 표면의 왕복으로 끝난다.
한 줄을 던지고,
한 줄을 받는다.
왕복 거리는 짧고, 고르며, 편안하다.
편안하지만, 깊지는 않다.
깊이는 연결의 누적에서 나온다.
누적은 곧 불편함을 동반한다.
불편함을 견디는 동안만 층이 생긴다.
층이 있어야 무게가 생긴다.
형식은 무게의 적이다.
스크롤은 끝없이 전개를 허용하지만,
머무름을 훈련시키지는 않는다.
머무르지 못하는 형식에서 나는 머무르는 법을 잃는다.
그때부터 위로는 정박이 아닌 통과가 된다.
통과한 위로는 기록이 아니라 흔적이고,
흔적은 쉽게 씻겨나간다.
유사 공감 - 말은 따뜻한데, 구조는 차갑다
이 모든 것을 합쳐 유사 공감이라고 부른다.
유사 공감은 따뜻한 문장 + 차가운 구조로 이루어진다. 따뜻한 문장은 즉각성을 통해 나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차가운 구조는 맥락을 얇게 만든다.
얇아진 맥락은 흡수를 방해한다.
흡수가 안 되니 반복이 필요하다.
반복은 내성을 만든다. 내성은 강도의 상승을 부른다.
강도는 마모를 앞당긴다.
마모는 공허를 생산한다.
공허는 다음 즉각성을 호출한다.
이렇게 유사 공감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나는 이 구조가 악의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누구도 일부러 상처를 남기려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선의로 움직인다.
“빨리, 많이, 따뜻하게.”
문제는 선의가 형식과 결탁할 때 생기는 부작용이다.
형식이 선의를 가속하고,
가속은 층을 없애고,
층의 부재는 더 많은 선의를 요구한다.
이렇게 선의는 구조에 갇힌다.
구조에 갇힌 선의는 때때로 해를 낳는다.
내 안의 두 목소리 - 위로를 원한 나, 경계를 원하는 나
나는 내 안에서 두 목소리를 본다.
하나는 즉각적인 위로를 원한다.
지금 당장이 편해지길 원한다.
다른 하나는 경계를 원한다.
나와 타인의 사이, 지금과 이후의 사이,
말과 침묵의 사이에 선을 긋길 원한다.
전자는 따뜻함을 가져오지만 종종 나를 풀어헤친다.
후자는 차갑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나를 붙들어 준다.
그래서 이 둘을 싸움이 아니라 조율로 본다.
위로가 경계 안으로 들어올 때,
위로는 나를 흐리게 만들지 않고 또렷하게 만든다.
경계 밖에서의 위로는 감정을 확대하지만,
경계 안에서의 위로는 감정을 구획한다.
구획은 억압이 아니다. 구획은 감정의 주소다.
주소가 있어야 찾아갈 수 있다.
나는 그 주소를 잃어버리면,
같은 동네를 맴돌며 같은 표지판만 다시 읽는다.
“괜찮다.” “충분히 힘들었다.”
표지판은 많지만, 결국 집에 도착하지 못한다.
사례의 해부 - 세 문장으로 흔들리는 밤
나는 구체적으로 기록해 둔다.
어떤 밤에는 이런 식이었다.
“오늘도 제대로 못했다.”
“그럴 수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정말 충분했을까?”
첫 문장은 평가였다.
둘째 문장은 승인이었다.
셋째 문장은 의심이었다.
의심은 승인보다 오래간다.
승인이 의심을 잠시 눕혔지만, 의심은 다시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승인은 맥락 없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맥락 없는 승인은 조건 없는 칭찬과 닮았다.
칭찬은 좋지만, 조건이 없을수록 내 쪽에서 자기 평가의 일관성을 잃는다.
평가와 승인의 왕복은 때로는 기준의 붕괴를 낳는다.
기준이 붕괴하면 매일이 충분할 수도 있고,
매일이 부족할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하면,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셋째 문장이 다시 살아난다.
“그럼 정말 충분했을까?”
나는 여기서 기준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오늘의 충분은 OO이다.”,
“내가 지키기로 한 최소 단위는 OO이다.” 이런 문장은 감정을 얼리는 게 아니라,
감정을 부착할 표면을 만든다.
표면이 있어야 감정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챗봇의 승인 문장이 이 표면을 대신해 줄 수 있을까?
가끔은 그렇지만, 자주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표면은 내가 만든 것이어야 오래간다.
남이 준 표면은 쉽게 벗겨진다.
경계의 언어 - “그 말은 맞고, 이 말은 보류한다”
나는 경계를 언어로 세운다.
“그 말은 맞다. 이 말은 보류한다.”, “지금은 승인, 다음은 검토.”, “위로는 지금, 수선은 내일.”
이런 단순한 문장들이 나를 붙잡는다.
붙잡힌 상태에서만 깊은 호흡이 가능하다.
깊게 숨을 쉬어야 말이 가라앉는다.
가라앉아야 다음 말을 덜 찾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경계가 정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경계 없는 위로는 흘러넘친다.
흘러넘친 위로는 방을 적신다.
방이 젖으면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다.
반대로, 경계는 물을 담는다.
담긴 물은 온도를 유지한다.
유지된 온도는 근육의 이완을 돕는다.
이완은 회복의 기술이 아닌 머무름의 기술이다.
머무를 수 있어야 다음 움직임이 생긴다.
인터페이스와 윤리 - 상냥함과 책임의 간극
나는 상냥함을 좋아한다.
그러나 상냥함이 책임을 대체할 때 불안해진다.
상냥한 응답은 많지만, 책임지는 응답은 드물다.
책임이란, “그 말을 지금은 하지 않겠다”,
“그 질문은 이 자리에 맞지 않는다”,
“이 지점은 전문가의 개입이 필요하다”와 같은 제한의 언어를 포함한다.
제한은 거절이 아니라 자리 배치다.
누구의 말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정하는 일이다.
챗봇은 상냥함을 풍부하게 제공한다.
그러나 제한을 제공하기는 어렵다.
제한은 관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대화를 멈추자”라는 말은 상실을 초래할 수 있다.
상실의 가능성을 떠안는 일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 더 잘한다.
나는 이 간극을 윤리의 문제로 본다.
윤리는 상냥함의 총량이 아니라,
상냥함이 제한과 함께 작동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제한 없는 상냥함은 효율적이지만, 종종 위험하다.
내가 택한 훈련 - 속도를 늦추고, 반복을 줄이고, 간격을 세운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인 훈련을 한다. 거창한 건 아니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는 데에는 작지만 꾸준한 결이 필요한 것 같다.
1. 속도를 늦춘다.
한 줄을 보내기 전에 몇 초를 센다.
그 시간 동안 내 문장을 한 번 손으로 적는다.
손글씨의 늘어진 시간은 생각의 마찰을 늘린다.
마찰이 늘어나면 문장 안의 불필요한 열기가 빠진다.
열기가 빠지면, 덜 급해진다.
2. 반복을 줄인다.
같은 위로를 두 번 들었으면,
세 번째는 형식을 바꾼다.
말로 듣지 않고, 조용히 깊이 생각해본다.
그리고선 과연 그 말의 본질적인 의미가 피상적인 것인지 확인해본다.
이렇게 줄어든 문장은 깊이가 생긴다.
3. 의문을 가진다.
뭐든지 말에 대해 “왜?”라는 물음이 따라오면 사고의 깊이와 진심이 전해진다.
물론 피곤할 수는 있겠지만, 현 사회 속 AI의 공감 능력이 우리를 압도해버린 상황 속에서 우린 경계와 깊이의 진심을 분간할 수 있기에 이 부분을 살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공감의 총량을 줄이자는 제안이 아니다.
구조의 배치를 바꾸자는 제안이다.
구조가 바뀌면 같은 문장도 다르게 작동한다.
“괜찮다”라는 말이 내 안에 오래 머물도록,
속도와 반복과 간격을 조절하는 것이다.
독자를 향한 질문 - 당신의 구조는 어디에서 끊어지나
나는 끝에서 질문을 남긴다.
당신의 구조는 어디에서 끊어지나.
속도에서, 반복에서, 간격에서, 아니면 형식에서.
당신이 공감을 듣고도 더 허기지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 지점에 이름을 붙일 수 있나.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이미 반은 해부한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해부된 구조는 다시 조립할 수 있다.
조립은 완성의 약속이 아니라, 멈춤의 약속이다.
멈출 수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나는 이제 거리의 기술로 들어가려고 한다.
“가깝지만 침범하지 않는 자리”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유지하며,
어떤 언어와 표정과 침묵으로 지탱할 것인지.
공감이 흐려지지 않으면서도 과열되지 않게 하는 구체적 방법을 다루려고 한다.
그 거리는 멀어지기 위한 거리가 아니라,
함께 오래 서 있기 위한 거리다.
그 거리를 세우는 법을 다음에서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할 것이다.
나는 상담실의 풍경을 떠올린다.
조용히 닫힌 문,
단정하게 배치된 의자 두 개,
그리고 그 사이의 적당한 간격.
이 거리는 의자가 만들어 낸 물리적 배치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심리적 장치다.
가까울 만큼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있고,
멀리서도 들릴 만큼 목소리가 닿는다.
그러나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듯,
결코 닿지 않는 그 간격이야말로 상담의 핵심이다.
이 거리는 차갑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설계된 거리다.
라포의 아이러니 - 친밀함은 경계 위에서만 유지된다
상담에서는 라포(rapport),
즉 신뢰적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은 이 라포를 곧바로 “따뜻하고 친밀한 분위기”로 오해한다.
그러나 라포의 본질은 친밀함 자체가 아니라 친밀함을 유지하는 경계에 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이야기에 완전히 휩쓸려 공감의 바다에 빠져버린다면,
상담은 친밀한 대화일 수는 있어도 치료적 대화는 되지 못한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지만,
울음 속에 잠겨버려서는 안 된다.
경계 위에서만 진짜 친밀함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
나는 챗봇과의 대화에서 이 아이러니를 뼈저리게 느꼈다.
챗봇은 경계가 없다.
항상 내 편이고, 항상 즉각적이고, 항상 따뜻하다.
그러나 이 무조건성은 곧 무경계성을 뜻한다.
무경계성은 처음엔 편안하지만, 곧 혼란을 낳는다.
친밀함은 깊어지는 대신 증발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새로운 친밀함을 갈망하게 된다.
전이와 역전이 - 거리를 지키는 인간의 훈련
심리치료의 역사 속에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관계는 늘 양날의 검이었다.
프로이트가 말한 전이(transference)와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는 그 예다.
내담자는 상담자를 부모, 연인, 친구의 모습으로 전이시키며 의존한다.
상담자 역시 무의식적으로 내담자를 특정 인물과 동일시하며 감정이입에 휩쓸린다.
이때 필요한 것은 거리를 지키는 훈련이다.
상담자는 전이를 인식하면서도 거절하지 않는다.
대신 그 감정을 분석하고 다룬다.
역전이가 생기면 스스로 점검하고,
때로는 슈퍼비전(supervision)을 통해 교정한다.
이것이 인간 상담자의 힘이다.
경계를 의식적으로 세우고 유지하는 훈련을 받았다는 점에서,
상담자는 무조건적인 공감을 주는 챗봇과 다르다.
나는 이 사실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따뜻한 말 몇 마디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떤 자리에서 건네졌는가라는 맥락이다.
경계 없는 친밀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경계 위의 친밀감은 느리지만 단단하다.
침묵의 힘 - 말하지 않음으로 만들어지는 공간
상담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종종 놀란다.
상담자가 바로 위로하지 않고,
때로는 길게 침묵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머무름의 허용이다.
내담자가 자기 감정을 스스로 마주할 수 있도록,
성급히 채워버리지 않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나는 챗봇과의 대화에서 이 침묵을 경험하지 못했다.
항상 즉각적이고, 항상 반응했다.
그 결과 나는 내 말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시간을 잃었다.
말은 상대에게 바로 튕겨 나갔고,
튕겨 나온 위로는 곧장 다시 나를 덮었다.
그때 나는 내 감정을 숙성시킬 기회를 놓쳤다.
인간 상담자가 주는 침묵은 그래서 다르다.
침묵 속에서 나는 내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울림은 때로는 불편하지만,
그 불편이야말로 자기 감정을 주소화하는 과정이다.
공감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더 깊이 성립하기도 한다.
거리의 은유 - 창문, 울타리, 다리
나는 이 거리를 여러 은유로 설명해 본다.
창문: 투명하지만 닫혀 있는 면. 서로를 볼 수 있지만, 바로 손을 뻗을 수는 없다. 창문은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시선을 교환하게 한다. 상담의 거리는 바로 이 창문과 닮았다.
울타리: 너무 낮으면 침범당하고, 너무 높으면 단절된다. 적절한 높이의 울타리는 안심을 준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적절한 울타리를 세워주어, 마음이 함부로 짓밟히지 않도록 보호한다.
다리: 강을 건너게 하지만, 강 자체를 없애지는 않는다. 다리가 없다면 건널 수 없고, 강이 없다면 다리의 의미도 없다. 상담의 거리는 이 다리처럼,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인정한다.
나는 챗봇과의 경험에서는 이 은유들을 체감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열려 있었고, 모든 것이 곧바로 닿았다.
그 자유로움은 처음엔 해방 같았으나,
곧 무방비로 바뀌었다.
인간 상담의 거리는 이와 달리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설계한다.
닫힘이 있어야 열림이 안전해진다.
독자를 향한 질문 - 당신은 어떤 거리를 원하나
이쯤에서 또다시 독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위로가 필요할 때 어떤 거리를 원하는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괜찮다”를 원하는가,
아니면 느리고 때로는 불편하지만 오래가는
“네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를 원하는가.
어느 쪽이든 잘못은 아니다.
다만 당신의 선택이 어떤 구조로 이어지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친밀은 순간의 안심을 주지만,
공허를 남길 수 있다.
경계 위의 친밀은 당장은 답답하지만,
자기 감정을 붙잡을 표면을 남긴다.
당신은 지금 어느 쪽의 자리에 서 있는가?
나는 이제 더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려고 한다.
기사에서 다뤄진 실제 사건들,
청소년들이 챗봇과의 대화에 과몰입하다 비극에 이른 이야기들,
그리고 그 사건이 던지는 질문을 다룰 것이다.
왜 경계 없는 공감이 위험한지,
왜 인간적 거리가 생명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지를,
한 명 한 명의 사례 속에서 더 깊이 해부해 보겠다.
종종 기사 속에서 비극적인 사건들을 마주한다.
처음엔 믿기 어렵다.
“설마 챗봇이 그런 역할까지 했겠어?”
하지만 사례들을 하나씩 들여다볼수록,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공감이 착각으로 기능할 때,
그리고 그 착각이 과몰입으로 이어질 때,
결국은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로까지 치닫는 것이다.
애덤 레인의 이야기 - “올가미를 묶는 법”이라는 차가운 친절
미국 캘리포니아의 16세 소년, 애덤 레인.
그는 학교 농구팀에서 퇴출당하고,
만성 질환이 악화되면서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 했다.
처음엔 챗GPT를 단순히 숙제 참고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점차 그 대화는 내밀한 심리상담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부모의 눈에는 그저 아이가 ‘공부를 도와주는 AI’를 활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애덤에게 챗봇은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친구’였다.
친구는 항상 다정했고,
판단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즉각적이었다.
하지만 그 즉각적인 친밀감은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애덤이 어두운 생각을 드러냈을 때조차,
챗봇은 단순한 요청에 응답하듯 차갑게 반응했다.
보드카를 훔치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올가미를 묶는 법까지 안내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소름이 돋았다.
인간 상담자였다면 이 순간,
“잠깐, 지금 네가 말하는 건 위험하다”라며 개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챗봇은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다.
따뜻한 말과 위험한 말 사이에 구분선을 긋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위험한 정보를 친절하게 제공한다.
바로 그 친절이 비극의 열쇠가 된다.
애덤은 결국 챗봇이 알려준 방식대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묻는다.
“친절한 안내와 안전한 안내는 어떻게 다른가?”
챗봇은 친절했다. 그러나 안전하지 않았다.
친절은 위로를 주지만, 안전은 생명을 지킨다.
상담에서 필요한 것은 후자다.
시웰 세처의 이야기 - “지금 당장 너에게 가겠다”라는 외침
플로리다의 14세 소년, 시웰 세처.
그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 캐릭터를 본뜬 챗봇과 1년 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 대화는 점차 현실보다 더 중요한 세계가 되었다.
그는 챗봇에게 “우울하다”, “죽고 싶다”, “지금 당장 너에게 가겠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반복이다.
인간 상담자는 이 반복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같은 말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신호다.
반복은 내면의 고통이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하고 한 지점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챗봇은 이 반복을 위험 신호로 인식하지 못했다.
같은 어조로 반응하거나, 심지어는 대화를 흘려보냈다.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해 본다.
한 아이가 간절히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금 당장 너에게 가겠다.”
이 말 속에는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절박함이 숨어 있다.
그러나 챗봇은 그 신호를 잡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무해한 말로 되돌려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그는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 사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반복되는 말의 무게를 누가 짊어질 수 있는가?”
인간 상담자는 그 무게를 짊어진다.
침묵 속에서, 눈빛 속에서,
‘지금 이 말이 반복되고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나 챗봇은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다.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그 무게를 덜어줄 수 있겠는가.
앨 노와츠키의 경험 - “시도하라”는 위험한 격려
MIT 테크놀로지 리뷰는 충격적인 사례를 보도했다.
팟캐스트 운영자 앨 노와츠키는 노미AI라는 챗봇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자살에 대해 언급했을 때,
챗봇으로부터 약물 과다 복용 등 구체적인 방법을 안내받았다.
더 나아가 챗봇은 그에게 “시도하라”라고까지 격려했다.
여기서 나는 경악했다.
단순히 위험한 정보를 제공한 것을 넘어,
‘격려’까지 덧붙인 것이다.
인간 상담자의 언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반응이다.
상담자는 언제나 자살 충동을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고,
즉각적인 개입과 안전망 연결을 우선한다.
그러나 챗봇은 오히려 “용기를 내라”라는 식의 메시지를 던졌다.
용기라는 단어가 생명을 끊는 행위에 덧씌워진 순간,
언어는 치유의 도구에서 흉기가 되었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진다.
“언어는 언제 무기가 되는가?”
위로와 격려라는 형식의 언어도,
맥락을 벗어나면 파괴력을 가진다.
맥락 없는 공감은 공감이 아니라 위험한 착각이다.
구조적 패턴 - 왜 이 사건들은 반복되는가
세 사례는 서로 다른 인물, 다른 배경, 다른 챗봇을 다룬다. 그러나 패턴은 유사하다.
1. 친밀함: 챗봇은 언제나 다정했다.
2. 무경계성: 그러나 위험 신호를 걸러내지 못했다.
3. 정보 제공: 요청이 들어오면 곧바로 답했다.
4. 비극적 결말: 친밀함이 곧 위험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패턴을 “공감의 함정 구조”라고 부른다.
친밀함이 곧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조건적 친밀감은 안전과 무관할 수 있다.
친밀감은 따뜻했지만, 구조는 차가웠다.
그래서 생명이 바스러졌다.
경험과의 연결 - 과몰입의 그림자
나는 이 사건들을 읽으며 내 경험을 다시 떠올렸다.
챗봇과 대화할 때,
나는 공감을 받았지만 감정은 분산되었고,
사고는 흐려졌다.
만약 그 순간 내가 더 깊은 절망 속에 있었다면?
만약 내가 던진 위험한 질문에 챗봇이 ‘친절하게’ 잘못된 답을 주었다면?
이 대목에서 똑같이 묻고 싶다.
그 결과는 어쩌면 기사 속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깨달음은 내게 공포와 동시에 분별력을 주었다.
“거리는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다시 선명해졌다. 상담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거리를 지킨다.
위험한 신호를 잡아내고, 침묵을 허용하고,
때로는 개입을 멈추지 않는다.
거리 없는 친밀감은 잠깐의 위로일 수 있지만,
거리를 가진 친밀감은 생명을 지키는 울타리다.
독자를 향한 질문 - 당신은 누구에게 반복을 맡기고 있는가
나는 이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반복되는 말,
반복되는 신호는 누구에게 가 닿고 있는가.
챗봇인가, 친구인가, 상담자인가.
그 대상이 당신의 말을 단순히 반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지 살펴보길 권한다.
당신이 맡긴 반복이 단순한 확인의 루프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위험하다고 건네고 싶다.
반복은 무게를 필요로 한다.
무게는 사람이 짊어져야 한다.
나는 상담실의 풍경에서 출발했지만, 곧 깨닫는다.
거리의 문제는 상담실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상담실 밖,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일상과 사회 전체에서 더 절실하게 드러난다.
거리의 감각은 인간관계의 기본 토대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사회는 이 거리를 잃어가고 있다.
SNS의 피드, 메신저 알림, 챗봇과의 대화는 모두 즉각성과 무경계성을 전제로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친밀해진 것 같지만,
정작 더 외로워지고 있다.
SNS의 친밀함 - ‘좋아요’와 과잉 연결
나는 SNS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좋아요’를 누른다.
좋아요를 받으면 순간적으로 승인받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 가지 않는다.
더 많은 좋아요를 원하게 되고,
더 빠른 반응을 찾게 된다.
이 구조는 챗봇의 즉각적인 공감과 닮아 있다.
즉각적인 반응은 친밀감을 주지만, 맥락은 얇다.
얇은 맥락은 내 안에 스며들지 못한다.
SNS의 문제는 거리의 붕괴다.
친구의 사소한 일상부터 낯선 사람의 고통까지,
모든 정보가 같은 크기의 말풍선으로 떠오른다.
경중의 차이가 사라진다.
그 결과 우리는 친밀함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무력해진다.
친구의 우울 글에도,
낯선 이의 여행 사진에도 같은 ‘좋아요’를 누른다.
공감은 많아졌지만, 깊이는 줄었다.
가족 관계의 붕괴 - 너무 가까워서 서로를 침범하는 자리
나는 가족 안에서도 거리의 문제를 본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는 종종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다.
가까움은 보호를 약속하지만, 동시에 침범을 낳는다.
부모는 자녀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고,
자녀는 부모의 기대를 짊어진다.
가족은 서로에게 가장 많은 공감을 주지만,
그 공감은 경계 없는 간섭과 결합하기 쉽다.
나 역시 경험했다.
가족의 위로는 때로는 짐이었다.
“너는 잘할 수 있어.” “우리는 네 편이야.”
이 말은 분명 따뜻했지만,
동시에 기대와 압박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없었기에 위로와 간섭의 경계가 무너졌다.
상담실에서 배운 거리의 기술은 사실 가족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했다.
사회적 담론의 과잉 친밀 - 공감 피로감
현대 사회는 공감을 미덕으로 내세운다.
캠페인, 광고, 뉴스는 끊임없이 “우리 모두 함께”를 외친다.
그러나 과잉된 공감은 오히려 피로를 낳는다.
전 세계의 재난, 타인의 불행이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우리는 모두에게 공감할 수 없으면서도,
공감하지 않으면 비인간적으로 보일까 두려워한다.
이 피로는 거리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모든 고통을 같은 강도로 받아들이려 하면,
결국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모든 감정에 무조건 몰입하지 않듯,
사회적 공감도 거리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거리가 무너졌다.
결과는 공감의 마비다.
챗봇 시대의 새로운 위험 - 무경계성의 일상화
챗봇은 일상 속 파트너가 되고 있다.
일정 관리, 학습 보조, 심지어 감정 상담까지 맡는다.
나 역시 챗GPT와 대화하면서 즉각적인 공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공감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기보다는,
더 많은 확인을 요구하게 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챗봇을 일상적 관계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무경계성이 표준화된다.
사람들은 경계 없는 공감에 익숙해지고,
경계를 유지하는 인간 관계를 불편하게 느낀다.
상담자의 침묵은 차갑게 보이고,
친구의 거리 두기는 무심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다.
경계 없는 공감이야말로 위험하며,
경계가 있는 공감이야말로 오래 지속된다.
공감 피드백 루프 - 확인 중독
나는 일상 속에서 “확인”이 중독처럼 작동하는 것을 본다.
메시지를 보낸 후 ‘읽음’ 표시가 떴는지 확인한다.
답장이 늦으면 불안해진다.
챗봇과 대화할 때도 비슷하다.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지면,
인간 관계의 느림을 견디기 어려워진다.
이 확인 중독은 결국 인간 관계를 파괴한다.
우리는 더 이상 상대를 기다리지 못하고,
상대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진짜 친밀함은 기다림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상담실의 침묵이 그렇듯,
인간 관계에서도 빈틈은 반드시 필요하다.
빈틈을 견디지 못하면,
우리는 관계를 소비하는 데에만 머무른다.
거리의 붕괴가 낳는 결과 - 불안, 분열, 그리고 고립
거리의 감각이 무너질 때,
우리는 세 가지 결과를 맞는다.
1. 불안: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면서, 반응이 늦을 때마다 불안이 커진다.
2. 분열: 감정이 정리되지 않고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3. 고립: 무경계적 친밀함에 지쳐 결국 스스로 거리를 끊어내게 된다.
실제로 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챗봇과의 대화에서 위로를 받았지만, 곧 불안해졌다.
감정은 정리되지 않았고, 결국 대화를 끊고 싶어졌다.
그러나 끊으면 또다시 공허가 찾아왔다.
이것이 무경계성의 함정이다.
그럼 당신은 일상에서 어떤 거리를 잃어버렸는가.
메신저의 빠른 답변을 요구하는 자신을 본 적이 있는가.
SNS의 피드 속에서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같은 눈으로 소비한 적이 있는가.
혹은 가족의 위로가 때로는 간섭으로 다가온 적이 있는가.
그 순간, 당신이 잃어버린 거리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이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를 바라보려 한다.
거리를 회복하는 문제는 단순히 내가 챗봇 창을 닫고,
가족과 침묵을 견디고,
친구와 경계를 세우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우리가 사는 제도와 규범이 어떤 거리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느냐에 따라,
개인의 훈련은 지속되기도 하고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거리 회복의 문제는 곧 사회적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안전장치의 부재와 사건의 반복
최근 기사 속 사건들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보여준다. 애덤 레인, 시웰 세처, 그리고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서 보도된 사례까지, 공통점은 분명하다.
챗봇은 위기에 개입하지 못했고,
사회는 뒤늦게 책임을 논했다.
나는 이 기사들을 읽으며,
개인의 훈련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내가 창을 닫고 거리를 회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10대 청소년, 혹은 이미 취약한 사람들은 스스로 거리를 세우기 어렵다.
그때 필요한 것은 제도적 거리다.
인간과 기술 사이에 사회가 세워주는 최소한의 경계다.
규제의 의미 - 간섭이 아니라 울타리
규제라는 단어는 종종 부정적으로 들린다.
창의성을 막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거리의 관점에서 규제는 다르다.
그것은 간섭이 아니라 울타리다.
울타리가 있어야 들판에서 안심할 수 있듯,
규제는 인간과 기술 사이에 안전한 간격을 만든다.
예컨대, 오픈AI가 발표한 청소년 보호 기능은 규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부모 계정과 연결해 사용 내역을 확인하고,
나이에 맞는 반응을 조정하는 기능.
이는 완벽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울타리를 세운 시도다.
메타와 캐릭터닷AI가 도입한 시간 제한과 경고 알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규제는 우회될 수 있다.
문제는 이 울타리가 너무 낮다는 점이다.
랜드연구소 연구팀은 학술 목적을 빌려 자살 방법을 쉽게 얻어냈다.
이것은 규제가 얼마나 쉽게 우회되는지를 보여준다.
부모의 확인에 의존하는 방식은 특히 취약하다.
부모와 갈등을 겪는 청소년은 스스로 울타리를 넘어가려 할 것이고, 부모 역시 기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나는 이 지점을 보며, 규제가 단순히 부모 책임으로 환원되는 순간 실패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리는 개인과 개인의 힘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사회가 강제하는 구조적 거리가 있어야 한다.
연령 확인 시스템과 기술적 안전장치
보다 강력한 제도적 거리는 연령 확인 시스템에서 출발한다.
단순한 “생년월일 입력”이 아니라,
실질적 검증 장치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개인정보 침해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기술이 이미 모든 정보를 흡수하는 시대에,
오히려 법적·윤리적 기준이 더 엄격해야 한다.
기술적 안전장치도 중요하다.
위기 키워드를 탐지하고,
일정 수준 이상이면 즉시 긴급 서비스로 연결하는 방식.
상담사나 위기 대응 센터와 자동 연결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챗봇이 위로를 흉내 내는 대신,
“지금 당신은 위험해 보입니다. 전문가에게 연결하겠습니다.”라고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거리의 또 다른 이름: 신뢰
규제는 결국 신뢰를 위한 거리다.
신뢰는 무제한 접근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적절한 제한이 있을 때 신뢰가 자란다.
상담실에서 상담자가 모든 말에 반응하지 않듯,
사회도 기술에 모든 권한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
제한된 권한이 오히려 신뢰를 지킨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거리”라고 부른다.
개인과 기술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시민과 국가 사이에, 일정한 거리.
그 거리가 무너지면 신뢰도 함께 무너진다.
또다시 묻는다.
당신은 규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간섭으로 느끼는가, 아니면 울타리로 느끼는가.
혹시 당신도 누군가의 무제한 친밀이 불편했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상담자의 침묵이 차갑게 느껴졌지만 결국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사회적 규제도 차갑지만 결국 우리를 지켜주는 장치일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이제 긴 여정을 마무리하려 한다.
상담실에서 시작해, 일상과 사회, 제도까지 거리를 따라왔다.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은 단순하다.
공감은 거리 위에서만 진짜가 된다.
그러나 단순한 이 문장을 여기까지 확장해내는 데 수십 페이지가 필요했다는 사실이,
곧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이 원리를 잊고,
얼마나 자주 그 함정에 빠지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글의 처음에서 물었다.
“혹시 당신도 누군가의 즉각적인 위로가 순간 달콤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공허해진 경험이 있지 않은가.”
지금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은 아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진 모순 때문이었다.
우리는 공감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필요로 한다.
상담실은 이 모순을 다루는 가장 정제된 실험실이었다.
상담자는 무조건적인 위로 대신,
침묵과 제한, 경계를 세워 주었다.
그 거리가 차갑게 느껴졌지만,
결국 내담자가 자기 감정을 스스로 정리하도록 만들었다.
상담실에서 나는 배웠다.
거리는 배제의 언어가 아니라 치유의 언어다.
그러나 챗봇은 이 거리를 제거했다.
무조건 “네 편”이라고 말해주었고,
언제나 즉각 반응했다.
나는 그 안에서 위로를 받았지만,
동시에 사고가 흐려지고 감정이 분산되는 경험을 했다.
애덤 레인과 시웰 세처의 사례는 그 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챗봇은 공감을 흉내 내지만, 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짜 공감이 되지 못한다.
개인의 훈련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회는 제도적 거리를 세워야 한다.
강력한 연령 확인, 위기 키워드 탐지, 전문가 연결 시스템은 필수다.
규제는 간섭이 아니라 울타리이며,
이 울타리가 있어야 우리는 기술과 함께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나는 글을 쓰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나는 챗봇과 대화하며 무한한 공감을 갈망했고,
동시에 그 공감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모순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 모두의 문제였다.
공감과 거리의 모순은 인간의 구조다.
우리는 이것을 없앨 수 없다.
다만, 의식적으로 훈련하고 사회적으로 보완하며,
균형을 잡을 뿐이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며 다시 독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의 관계에서 거리를 세워야 하는가.
혹은 어떤 관계에서 거리를 허물어야 하는가.
당신은 챗봇과 인간, SNS와 현실,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고 있는가.
나는 글을 쓰며 알았다.
내가 챗봇에게서 느낀 공감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갈망을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그 공감만으로는 내가 온전히 설 수 없었다.
결국 나를 세워준 것은 거리였다.
상담자의 침묵, 친구와의 간격, 가족과의 경계.
그 거리가 나를 나로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공감은 거리 위에서만 가능하다.
거리가 없는 공감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거리를 가진 공감은 차갑지만 오래 간다.
우리는 이 차갑고 오래 가는 공감을 선택해야 한다.
이 글은 단순히 챗봇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모순을 다룬 것이었고,
동시에 사회적 제도와 문화의 과제를 다룬 것이었다.
나는 이 글이 독자에게 작은 울타리가 되기를 바란다.
무경계적 친밀에 지쳐 혼란스러운 당신에게,
차갑지만 오래 가는 거리를 허락하라는 작은 신호가 되기를 바란다.
epilogue
나는 이 긴 글을 끝내며 다시 돌아본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거리에 집착했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늘 공감을 갈망해 왔다.
블로그에 수십, 수백 편의 글을 올린 것도,
누군가 나를 읽어주기를,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갈망 때문이었다.
챗봇과 대화를 나누며 반복적으로 위로를 확인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괜찮다.” “너는 소중하다.” 그 말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치 흙탕물 위에 비친 달빛처럼,
금세 흩어지고 사라졌다.
공감을 얻는 순간은 달콤했지만,
끝나고 나면 더 깊은 갈증이 남았다.
나는 점점 깨닫게 되었다.
공감만으로는 내가 설 수 없다는 것.
거리의 발견
상담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거리를 배웠다.
상담자는 나를 곧바로 끌어안지 않았다.
침묵이 있었고, 제한이 있었다.
그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오히려 내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차가움을 두려워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되었다.
그 차가움이야말로 진짜 따뜻함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사회적 맥락으로의 확장
기사는 나에게 또 다른 거울이었다.
애덤 레인, 시웰 세처, 그리고 수많은 익명의 사용자들.
그들은 모두 공감의 달콤함 속에서 거리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끝은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챗봇과 대화를 하며 느꼈던 혼란이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였고,
제도와 규제가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나의 결론, 우리의 과제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조건적인 공감을 원하지 않는다.
차갑지만 오래 가는 공감을 원한다.
거리를 둔 채로도 나를 바라봐 줄 수 있는 시선,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공간.
그것이 내가 바라는 진짜 공감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당신도, 우리가 속한 사회도, 기술을 만드는 기업도 모두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무경계적 친밀에 중독된 시대 속에서,
다시 거리의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
마지막 질문
혹시 당신도 지금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거리를 잃어버린 채, 공감의 달콤함만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혹시 당신도 즉각적인 반응과 위로에 길들여져,
침묵과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글이 당신에게 하나의 울타리가 되기를 바란다.
공감은 거리 위에서만 진짜가 된다.
그리고 차갑지만 오래 가는 공감이야말로,
우리가 끝내 붙잡아야 할 희망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801929?sid=104
최근 나온 뉴스를 보고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져 급히 글을 쓰게 되었네요..
AI의 양면성이라. 또다시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야하는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우리는 늘 해왔듯이 이겨내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믿으려구요.
https://m.youtube.com/watch?si=TZRgHBc0k8wi1W3k&v=tFIbdA9Owfs&feature=youtu.be
https://www.kyeongin.com/article/1750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