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위에 세운 누각.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손이 먼저 덜컥한다.
발신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가슴이 앞질러 결론을 낸다.
부모님, 이모, 삼촌의 부재중 전화.
“밥은 잘 챙겨먹어?”로 시작해 “그런데”로 끝날 질문들이 미리 들리면,
화면을 아래로 밀어 넣는 습관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답장을 미루는 동안 죄책감이 자라고,
죄책감은 다시 떨림으로 되돌아온다.
원을 안다. 그래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전공을 바꾼 뒤에는 더 그랬다.
“3학년이라 바쁘다”라는 문구는 이제 쓸 수 없는 변명이 되었고,
설명이 필요한 자리에 나를 세워둔 채 밤이 길어졌다.
설명은 체력이 든다. 때로는 용기보다 더 많이.
강박적으로 하던 노트 정리는 어느 순간 글쓰기로 옮겨탔다.
손으로 개념을 옮겨 적던 습관 대신,
문장으로 오늘을 붙들어 매는 방식.
이상했다.
같은 밤샘인데도, 이건 덜 공허했다.
내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일까.
피곤 속에서도 묘하게 명료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뱉고 나니,
예전에 붙들고 있던 것들이 생각보다 쉽게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때 스스로에게 놀랐다.
나는 이렇게 쉽게 놓아버리는 사람인가.
실망해야 할까, 아니면 박수를 쳐야 할까.
대답은 하루마다 달라졌다.
어젯밤, 거의 밤을 새다시피 투고 메일을 보냈다.
첨부파일을 여러 번 확인하고,
제목 줄을 바꾸었다가 되돌렸다가,
마지막에 “보냈습니다”를 누르고 나니 손끝이 얼얼했다.
그렇게 해가 뜨고, 그대로 학교로 갔다.
오전 수업을 앉아서 버텼다.
형광등 아래 칠판 글자는 흐릿했다가 또렷해졌다가,
교수님 목소리는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태블릿을 켜도 펜을 잡은 손은 자꾸만 선을 그었다.
그러다 남은 전공 두 과목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교실과 나 사이에 갑자기 얇은 유리가 생긴 것 같아서,
가방을 들고 그대로 지하철을 탔다.
처음이었다.
친구에게는 컨디션 때문이라 대충 변명하고,
“지금 나가도 되나?”를 묻지 않고 그냥 나와버린 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아주 선명하게 생각했다.
학교 수업이 이제 나를 옭아매지 못하나보다.
몸이 먼저 다른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지하철 창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밤샘의 잔여물,
눈 밑 그늘,
그런데 표정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해야 할 걸 안 했다”라는 자책보다 “하지 않겠다를 선택했다”라는 감각이 더 컸다.
선택이 공허를 밀어낸 순간.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가며 한강을 건널 때,
햇빛이 창틀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 빛이 내 모래성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 하루만큼은 모서리를 다듬겠다는 마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점심 무렵, 거절 메일이 도착했다.
예상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몸이 또 먼저 반응했다.
심장은 빨라지고, 손끝은 차가워졌다.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제목 줄을 한 번 더 읽고,
본문을 끝까지 읽고,
다시 처음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읽었다.
어제의 내가 보낸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됐다. 보내놓고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어제의 나는 보내는 쪽의 사람이라는 사실.
그 사실 하나가 오늘의 나를 조금 세웠다.
“안 되는구나”가 아니라 “한 발 갔구나”로 읽어보려고 애썼다.
속으로 단어를 바꾸는 일만으로도,
어쩌면 생각보다 멍청하기도 한,
마음의 온도를 속일 수 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연락이 올 때마다 손이 떨리고,
종종 답을 미루고,
그 미룸이 곧 자책으로 돌아오는 이 순환.
나는 그들과 다를까, 같을까.
가끔은 내가 그들처럼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건 아닐까 겁난다.
다만 요즘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으려고 한다.
아예 연락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 오히려 아예 연이 끊겼으면 더 후련하지 않을까.
나는 도망자여도 괜찮다.
여태 잘 도망쳐왔으니,
이번에는 끝을 향해 도망쳐도 된다.
미친 듯이 달려서,
손끝이 다 갈라지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달려나가는 편이 내 몸에는 더 솔직하다.
답장을 남기지 않는다.
“지금은 어렵습니다” 같은 말도 하지 않는다.
문을 닫아두는 게 아니라, 아예 길을 지워버린다.
그 흔적 없는 도망이 관계를 깨뜨린다 해도 상관없다.
덜 부서지는 쪽을 택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이번만큼은 부서져도 좋으니 나를 위해 달린다.
집 근처조차도 가지 않은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듯 하다.
체감상 몇 년이 흐른 것 같다.
영상 화면 속 화목한 가정이든,
정반대의 가정이든,
둘 다 나를 같은 생각으로 데려간다.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진자.
진폭이 커지면 나는 회피로 미끄러지고,
회피의 아래에는 늘 자책이 눌려 있다.
그래도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 패턴을 글로 적기 시작했다는 것.
“가족 발신자 표시 몸의 떨림 미루기 자책 다시 떨림.” 끝에 작은 화살표 하나를 더 그린다.
“ 원고로 돌아가기.”
해결은 아니어도, 복귀선 하나쯤은 만들 수 있다.
복귀선은 얇아도 방향을 주지 않을까.
그 방향이 오늘의 나를 구한다.
학교와 나 사이의 거리를 다시 재본다.
예전의 학교는 ‘정답을 주는 곳’이었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곳’ 인 줄 알았다.
지금의 학교는 ‘한때 살았던 주소’에 가깝다.
주소는 옮길 수 있다.
옮긴다고 해서 지난 시간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우편물이 한동안 예전 주소로 도착하듯,
가족의 연락도, 과거의 습관도,
끊임없이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 한꺼번에 처리하려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열어볼 봉투와 내일로 미룰 봉투를 나누는 연습.
다 열어젖히지 않아도 괜찮다.
이게 나에게 맞는 속도이니깐.
나는 가끔 생각한다.
혹시 이 모든 판단이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나만 편한 길을 고르며,
이해를 미루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올라오면, 내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대답한다.
“이건 이기심이 아니라 경계야.”
나는 침투보다 만남을 원한다.
경계 안쪽에서, 서로의 자리를 무너뜨리지 않고 마주 앉는 방법.
그 방법을 몰랐던 시절의 나는,
상대를 탓하거나 나를 몰아붙이는 둘 중 하나였다.
지금의 나는 잠깐의 유예를 산다.
유예는 회피와 닮았지만, 다르다.
회피는 등을 돌리는 것이고,
유예는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시간을 정하면, 말의 톤도 조금 달라진다.
그러니 오늘의 나는 메모장에 조용히 적는다.
“떨림이 오면, 먼저 시간을 정한다.”
몸의 반응은 대체로 솔직하다.
불안과 공포에서 몸이 아프다 소리치는 걸 왜 나는 의지 문제라며 애써 외면했을까.
몸은 곪아가는데 나는 귀를 닫았다.
영상 속 ‘좋은 집’과 ‘나쁜 집’을 보며 드는 그 묘한 감정에 대해, 나는 아직도 말을 고른다.
질투도 아니고,
연민만도 아니고,
설명되지 않는 흐린 복합색.
요즘은 그 흐림이 내 진짜 색에 가까운 건 아닐까 생각한다.
맑은 척하느라 더 지쳤던 날들이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흐림을 흐림으로 인정하고,
그 위에 단단한 말을 얹는 쪽으로.
“나는 아직 불완전하다.”
“그래도 오늘은 이것만 하겠다.”
“그리고 원고로 돌아가겠다.”
이 세 문장이면, 어차피 하루는 지나간다.
거절 메일을 여러 번 더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다시 흔들리고, 다시 무력해질 것이다.
그 사실을 미리 인정해버리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두려움은 조금 줄어든다.
‘다시’가 있다는 예고가,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나를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만든다.
모래성도 매일 무너진다.
파도에, 빗물에, 어쩌면 한 아이의 발길질에.
기반은 너무나도 약하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손바닥만 한 부분이라도 다시 쌓아올리면,
그게 오늘의 성이다.
내일 비가 오면 내일의 모래를 다시 모으면 된다.
완전함을 기대하는 마음이 오히려 나를 옭아매왔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완전함은 목표가 아니라 착시였다.
지하철에서 내릴 즈음, 휴대폰이 또 울렸다.
손이 약간 떨렸다.
알림 미리보기만 보고 화면을 덮었다.
일단 몸이 신호를 보냈기에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걸 확인하고 난 뒤의 나는,
나의 방법대로 휴식을 택하기로 했다.
글을 쓰고,
잠을 몰아서 자기로.
그리고 나서 심장이 조금 천천히 뛰었다.
이것이 오늘 내가 선택한 속도다.
집 근처에 언제쯤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 가게 될 때,
나는 예전과 다른 걸 들고 갈 것이다.
변명 대신 한 줄의 경계,
억지 이해 대신 한 줌의 유예,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원고.
그때도 떨리겠지만,
떨림 위에도 문장은 쓸 수 있다. 바로 스스로 배운 것.
밤을 또 새울지, 일찍 잘지,
내일 정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학교 수업이 더는 나를 묶지 못하듯,
과거의 방식도 이제 나를 묶지 못한다.
나는 나를 위해 조금 다르게 선택했고,
그 선택 덕분에 오늘을 버텼다.
내일의 나도 최소한 이만큼은 버틸 수 있기를.
알림이 울릴 때,
떨리는 손으로라도 천천히 화면을 올려다보고,
필요하면 유예를 선언하고,
그리고 다시 원고로 돌아오기를.
그 뒤의 문장들은, 천천히 내가 고르면 된다.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