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친자 확인 검사를
영화 <매트릭스>에는 두 개의 알약이 등장한다. 삼키는 순간 진실의 세계로 발을 디디게 되는 빨간약. 그리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아가게 되는 파란약. 당연히 주인공 네오는 빨간색 알약을 선택한다. 두려움을 딛고 진실과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히어로의 필요충분조건 아니겠는가. 고로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 신념에 따른 선택은 정의이고 진실을 거부하고 현상 유지를 바라는 것은 악의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열일곱이던 내게는 그랬다는 거다. 사춘기란 지구의 자전·공전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분명 돌아가고는 있는데 마치 고정된 듯한 착각에 빠져 산다지. 즉 따분함이 곪은 여드름처럼 터져 나오는 그 불변의 시절에는 적나라한 모험이 닥치기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거다. 허나 그런 나에게도 영화 속 양자택일의 순간은 매일 수십 번씩 잠기는 몽상에 불과했다랄까.
이제부터는 그 공상이 보기 좋게 현실이 돼버린 질풍노도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도록 하겠다. 카메오로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출연하니 참고 바란다.
동생과 학교 숙제가 겹친 어느 날이었다. 물론 평소라면 중학생 나부랭이와 고등학생을 교집합 할만한 과제가 감히 존재할 리 없다. 하지만 새 학기면 으레 돌아오는 자기소개서만큼은 예외다. 게다가 내신에 반영되는 첫 수행평가였던 탓에 아쉬운 대로 녀석과 백지장을 맞들여 제법 열을 올렸더랬다.
우리가 합의한 키워드는 혈액형이었다. 혈액형별로 특징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유전되므로 가족관계와 성격을 개연성 있게 풀어가자는 것이 골자다. 더불어 흥미를 끄는 건 덤이라 고민할 것도 없이 채택. 여기까지는 딱히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의 혈액형 조사를 마치고 나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잠깐. 엄마가 B형이 아니라, O형이잖아. 아버지랑 동생은 A형. 그런데 어떻게 내가 B형이지?
구조적 모순이었다. 그 당시 나는 혈액형 유전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작고 좁은 세계에 살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그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돌연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혹스러웠다. 그렇지만 너스레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자칫 심각해져선 안된다. 고등학생의 감정은 헬륨 풍선보다도 가벼워야 한다. 착오나 실수가 있었겠지 뭐. 별 일 아닐 거야. 나는 짐짓 어른처럼 무디게 굴었다.
하지만 미성숙한 중학생의 견해는 달랐다. 월리를 찾는 것처럼 형 자신을 찾으라나 뭐라나. 그 까닭은 대충 이러하다. 첫째, 형은 외모도 성격도 가족과는 닮은 데가 없으며. 둘째, 공교롭게도 가족사진첩에 형의 돌 사진만 빠져있고. 셋째. 미아였던 형을 안양천에서 데려온 루머를 가족모임을 통해 접했다는 것이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다만 뽀글뽀글 일어난 거품 같은 호기심마저 부정하진 않겠다. 어느 틈엔가 우리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애초에 길을 표시할 자갈이나 빵 조각 따윈 없다. 마침내 나는 이복동생일지 모를 그 녀석에게 설득당하고 만다. 부모님 몰래 친자 확인 검사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친자 검사에 관한 정보를 검색·수집하는 것이었다. 심사숙고하여 선정한 검사기관은 서울의 모 대학병원. 간편하게 유선상으로 문의했는데 다짜고짜 여직원이 나를 야단쳤다. 미성년자 단독으로는 불가능 하니 관심 끄고 공부나 하랍디다. 나는 중간에서 말을 잘라, 아줌마 같은 사람이 친모라면 반드시 가출하고 말 겁니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고배를 들이켜니 빈속이라 속이 마구마구 쓰려온다. 포기를 모르던 나는 사설 업체로 노선을 변경했다.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OK! 우편접수를 통한 비대면 검사! 가명을 사용한 익명성 보장!
위와 같은 배너 광고가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그 웹사이트로 접속해 유전자 시험 의뢰서와 유전자 검사 동의서를 프린트했다. 그 서류들을 작성하고 검사 대상자란에 엄마인 척 서명한다. 분석 시간은 12시간, 지불 방식은 현금, 수령 방법은 우편으로 체크한다. 그다음 동봉할 지폐까지 준비했다면 이제 거의 다 온 셈이다. 검사의 열쇠는 최소 2주 이상 사용한 칫솔. 나는 엄마의 칫솔을 슬쩍해서 지퍼백에 넣고 이름이 적힌 방수 스티커를 겉면에 붙였다. 내 것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쳐 베이지색 봉투 안에 담아 넣으니 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B5 크기의 입구를 스테이플러로 완전히 봉인했다.
마감 삼십 분 전이라 실내는 한산했다. 나는 품 안에 넣어둔 서류 봉투를 우체국 직원에게 곡진히 건넨다. 기계 같은 직원은 그것을 스테인리스 전자저울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둔다. 액정에 표시되는 숫자는 31그램. 어쩌면 뒤바뀔지 모르는 인생의 무게다. 나는 그 판도라의 상자를 익일 특급으로 전송했다.
해리포터의 입학통지서가 아니고서야 공휴일에도 우편이 배달될 리는 없다. 이어진 주말과 어린이날로 인해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답신은 그 다음주를 기약했고 운명의 날은 수요일이었다. 개교기념일을 맞아 휴교 중인 동생에게 혹시 모를 우편 수신을 부탁하고 온 터였다. 오후 첫 수업에 느닷없이 교복 재킷 안주머니가 진동했다.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어보니 동생의 문자다.
검사 결과 도착했고 다행히 내가 받았어. 집에는 엄마가 있으니까 원더랜드에서 보자. 롸잇나우.
대충 이런 내용이라 꾀병으로 조퇴했다. 잰걸음은 교문을 나서는 순간 뜀박질이 되어버린다. 목적지까지는 삼 킬로미터. 숨도 차지 않았으나 나들목 입구의 'ㄷ'자 형 계단을 오를 때는 별안간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 체감은 물속을 걷는 것과 비슷하다. 내 몸 어디에 중심점을 둔다 해도 생각대로 나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는 돌바닥에 촘촘히 박힌 차돌을 지르밟았다. 드디어 축축한 타일로 둘러싸인 어둠과 부닥치게 될 테지. 그 터널만 통과하면 한강이 열릴 거야. 나는 자동 넥타이의 매듭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폴리우레탄 재질의 보행자 전용 도로를 따라 백 미터만 걸으면 철제 펜스가 없는 지점이 딱 한 군데 있다. 그 아래로 육십 미터 길이의 콘크리트 호안이 둘러져 있는데 나와 동생은 그곳을 원더랜드라 불렀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시기상 <꾸러기 수비대>에 나오는 원더랜드일 확률이 높다. 수초도 철새도 없는 외로운 콘크리트 발코니가 어쩌면 꼬마들 눈에는 동화 나라처럼 비쳤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원더랜드의 비탈진 호안 블록에 앉아있었다. 내가 어깨를 툭 건드리자 상호명이 인쇄된 편지 봉투를 들어 보인다. 애석하게도 두려움 앞에 호기심이란 아스팔트 위에 타오를 불꽃같은 거다. 운명의 갈림길에 우뚝 서니 히어로나 모험가는 온 데 간데없다. 단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미성년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나는 도도한 잔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강은 햇살을 받아 은박지처럼 번쩍거렸다. 동생이 말없이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고개를 떨군다. 녀석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빠트리는 대신 나 자신을 건져내기로 한다. 나는 편지를 가까스로 내던진다. 출생의 비밀은 허우적거리지도 않더니 금세 강물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여태껏 이 일화를 공론화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패배감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중간고사를 망친다거나 여학생에게 고백을 거절당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껏 구축해온 나 자신이 너무도 쉽게 붕괴돼버린 것이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촬영 필름은 잘도 도는데 정작 주연은 없는 영화. 그게 내 민낯이었으니까.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인지 부조화와 자기 합리화의 무한루프에 빠져있었다. 아는 게 병이야. 나는 파란색 알약을 삼켰어. 모르는 게 약인걸. 그때는 바로 그런 때였잖아.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기억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그 가엾은 소년을 향해 이렇게 속삭이려 한다.
“넌 그때 겁이 났던 거야. 그래서 도망쳤어. 그렇지 않니?”
그러면 소년이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되묻겠지.
“지금의 너라고 진실을 파헤칠 수 있을까? 네오처럼 빨간약을 선택할 수 있겠어?”
"글쎄. 그건 장담할 수 없겠는걸."
나는 소년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는다. 나는 너를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소년은 핸들링되지 않을 고슴도치다. 소년도 머지않아 알게 될 테지. 실패한다 해도 끝장나는 건 모험일 뿐, 결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서른넷인 내게는 그렇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