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에 관한 기억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조각가였다. 그는 성적으로 문란한 키프로스의 여인들을 혐오했고 여자를 멀리한 채 오로지 조각에만 몰두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토록 꿈꾸고 바라던 여인상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그가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실제의 여인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사랑은 점차 깊어져 밤낮으로 조각상에게 입맞춤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갈라테이아
피그말리온이 연인으로 맞이하길 갈망하던, 바로 그 조각상의 이름이다. 그리고 열일곱의 늦가을, 나에게도 갈라테이아가 있었다.
학원 강의실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여학생 하나가 맨 앞줄에 앉아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는 것만 같았다. 애석하게도 그 시선을 사양하고는 맨 뒷자리에 앉는다. 어차피 아는 사이도 아니거니와 섣불리 말이라도 붙였다가는 신상에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학생은 학원의 슈퍼 아이돌이었다. 삼십대 아저씨가 학교로 찾아가 꽃다발을 바친 프러포즈는 한참 떨어진 우리 학교에서도 꽤 유명한 일화. 언뜻 듣기로 대형 연예기획사로부터 캐스팅 제의를 받아 아마 데뷔 직전이라지. 덕분에 미소녀가 출석하는 날에는 학원이 온갖 남학생들로 득실거리는 정글이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이게 웬걸. 이제는 여학생이 나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예 몸까지 뒤로 돌린 채로. 나도 지지 않고 눈을 마주했다. 그런데 별안간 그 애의 눈동자가 마치 블랙홀처럼 느껴졌다. 온 우주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소문은 과소평가된 게 분명했다. 저런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책걸상에 앉아 얼굴을 파묻었다.
알아둬야 할 게 있다. 기본적으로 미소녀는 공공재다. 다만 귀갓길만큼은 사유재의 성격을 띤다. 학원이 끝나면 에스코트하려는 남학생들의 적극적인 애정공세가 펼쳐지는 거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는 미소녀는 고결한 백조로소이다. 아수라장이 된 로비를 저토록 유유히 헤쳐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미소녀는 아파트 단지 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나는 헤링본 패턴의 점토블록을 반달음 했다. 이제 미소녀와는 제자리멀리뛰기로도 닿을 거리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무작정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나는 같은 학원 수강생인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미소녀는 블랙스완이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늦은 밤, 우리는 공원으로 향한다. 반원형의 트랙에는 알록달록한 낙엽이 카펫처럼 깔려있었다. 그 애는 살짝 얼어있는 벤치에 앉는다. 나도 조금 떨어진 옆으로 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 애를 훔쳐보았다. 이마부터 코를 지나 입술까지 내려오는 라인이 조각상처럼 아찔하다. 미소녀가 대뜸 물어온다.
"할 얘기라는 게 뭐니?"
"아. 그건... 강의실에서 나를 쳐다보길래.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해서..."
"응? 기억 안 나는데. 내가 그랬어?"
멋쩍게 웃는 미소녀의 양볼은 볼터치한 듯 연한 핑크빛이다.
"아마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쳐다본 걸 거야. 사실 시력이 좋지 않거든.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미소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구름사다리 위에 올라선 듯 현기증이 났다. 사춘기의 카스트제도. 그 신분은 외모 순으로 결정 나는 법이다. 그 애가 브라만 계급이라면 나는 바이샤나 수드라 계급. 미천한 나를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니 황송할 따름이다. 그 순간 스쳐가는 바람이 내 귀에 속삭였다.
저 끝을 향해 지금 달려가지 않으면 평생 보물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
더럽혀진 하늘에 좀처럼 보기 힘든 무지개. 나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은 흔하다. 아름다움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사람에 비한다면. 그래서 그 애는 특별했다.
“나랑 사귀어 주지 않을래.”
그것이 나의 첫 고백이었다.
그 애는 귀밑머리를 그러 올렸다. 고백받는 건 감사한 일이야. 하지만... 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나는 독신주의인 데다 연애에도 관심이 없어. 상대가 누구라도 예외는 없을 거야. 양해를 구하진 않을게. 모호한 태도로 헷갈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정중한 거절이었다. 평소라면 꽁무니를 뺐겠지만 어쩐지 그날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혹시 친구는 어때?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한참을 고민하던 그 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렇게 그 애의 친구로 살아남았다. 언제 사그라들지 모르는 거품 같은 감정들. 나는 그것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프랑스 양식의 무늬 화단을 함께 거닐다 자정이 될 무렵에 헤어졌다.
그날 이후로 그 애는 내 시공간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 마치 위성처럼 그 애 주변을 맴돌았다. 서점이나 인디음반 전문점에 동행하고,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수다로 밤을 새우고, 새벽이면 함께 <고스트 스테이션>을 청취하며 통화를 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데이트였고 행복했다. 문제는 감정을 숨기는 일이 생명력을 좀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얼마 못가 탈이 나버렸다. 빗줄기가 포렴같이 쏟아지던 겨울밤, 우리는 투명한 비닐우산 속에 웅크리고 있었고 나는 그 타이밍에 두 번째 고백을 저지르고 만다.
“분명히 거절했었는데. 내 기억으론 말이야.”
그 애의 반응이 첫 고백 때와는 사뭇 달랐다. 마치 드라이아이스 같아서 감히 손댈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내 그 애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태엽이 풀려버린 인형 마냥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졸지에 두 번째 고백이란 죄명으로 감옥에 갇힌 수감자 신세였다. 한동안은 유선상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으니까. 엎친 데 덮쳐서 내 비기 요금제도 그즈음 알이 바닥난다. 아쉬운 대로 집 근처 공중전화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최악의 경우, 이글루 같던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한파를 두 시간 이상도 버텨봤으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아무튼 오랜 수감생활을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은 분명했다. 이런 애매한 관계는 그 애에게도 나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모범수로 가석방되자마자 그 애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주말에 시간 좀 내줄 수 있니?
플랜은 이러했다. 스카이락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지하철역과 이어지는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미리 예매해둔 <안녕! 유에프오>를 관람한다. 마무리는 선물과 함께 준비한 멘트로 해피엔딩.
그러나 마지막 바람조차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느릿느릿 도착한 그 애는 어색한 말투로 약속이 있다고 했다. 서둘러 가봐야 한다며 식사권과 영화표마저 거절한다. 심지어는 내가 인플레임즈의 앨범을 건네는데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이 앨범, 고맙긴 한데.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 거라면 받을 수 없어."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걱정 마. 선물은 작별의 의미니까. 너에게 약속할 게 한 가지 있어. 대신 듣고 비웃지는 말아줘."
그 애는 의아해하는 눈초리다. 내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앞으론 연락하지 않을게. 네 근처에 얼쩡거리지도 않을 거야. 물론 우연히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워낙 좁은 동네잖아.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오늘 보자고 한 거야. 그동안 부담을 주어서 미안해."
그 애가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나는 더디게 뒷걸음질 쳤다.
"그럼. 난 그만 가볼게. 너도 약속에 늦기 전에 어서..."
“미안.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단지, 또 고백을 받을까 봐 불안했던 거야. 나는..."
그러더니 돌연 말을 멈춘다. 주변에 볏짚을 두른 겨울나무들이 우리의 대화를 숨죽여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 애를 기다려주었다.
"고마워.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줘서."
그 애는 끝내 내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래. 잘 지내. 안녕.”
나도 가볍게 인사한다. 그 애는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등을 돌린다. 나는 그 애의 잔상에 대고 행복을 빌어주었다.
누군가 단념이냐고 물었다면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그러나 더 이상의 용기가 없던 것도 내 감정을 하찮게 여긴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랑을 구걸하다 강요하고 집착하게 될 나를 내 손으로 죽여 버린 것뿐이었다. 그렇다. 시시한 어른들이 코웃음 치던 열일곱에 나는 정말 사랑을 했던 모양이다. 과소평가한 만큼 아로새겨야 통과할 수 있는 잔인한 첫사랑 말이다.
제법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훗날 갈라테이아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 의해 실제의 여인이 되고 피그말리온은 그녀와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나는 안녕, 하고 갈라테이아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이 작별의 인사가 될지 아니면 재회의 기약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기도로, 조각상이 실제의 여인이 되었듯 언젠가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