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내요! 싱어송라이터!

I. 기차에서 만난 미소녀

by 데미안

열여섯의 마지막 날은 해가 유달리도 짧아서 마치 폴라나이트(고위도 지방이나 극점 지방에서 겨울철에 오랫동안 해가 뜨지 않고 밤만 계속되는 상태를 가리키며 극야 현상이라 불리기도 한다)라도 일어난 것만 같았다.

레일 위에 얼어붙은 기차가 꿈틀거렸다. 꼬리칸은 다른 객실에 비해 흔들림이 심하다. 나는 새우처럼 굽은 등을 곧게 펴고 차창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형, 일기예보는 확인했어?”

썬이 그렇게 물으며 스테인리스 선반에 여행용 백 팩을 얹는다. 내게서 물려받은 터라 낡고 조임 버클도 망가져 있다.


“웬일로 그런 걸 다 신경 쓰시고?”

나는 은근히 빈정거렸다. 녀석의 준비성을 수치화하자면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해돋이 보러 가는 건데 날씨는 기본이지. 게다가 이번 여행은…”

“그래서 날씨가 어떻다는 건데?”


내가 중간에서 말을 자르자마자 녀석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날씨는 기본이라며?!”


“그러니까 형이 기본으로 잘 챙겨야지! 여행 계획은 내가 짠 게 아니니까.”


그러면 그렇지.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네 녀석이 무작정 따라오는 바람에 내 계획이 엉망이 된 거잖아.”


그 말에 아차 싶었던지 능구렁이 같은 그 녀석은 구겨진 인상부터 쫙 편다. 마치 다림질을 하는 것 마냥 순식간이다.


“그게 말이야… 막상 형을 혼자 보내려니 걱정이 되더라고…”


“웃기고 있네. 아버지를 피하려고 따라온 것뿐이면서.”


나는 흰색 스니커즈를 벗어 객실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맞은편 좌석은 아직 비어있었다. 이대로라면 다리 거치대로 사용될 확률이 높다.


“피차일반이지 뭐.”


썬은 옆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구시렁거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새해 첫날이면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꼭두새벽부터 등산을 해야만 했다. 집안의 대표적인 가족행사였는데 새해 첫 일출의 기운을 몸소 받는다나 뭐라나.(물론 나와 썬은 아버지의 구박과 설교를 몸소 받는다)

아무튼 사춘기가 시작되면서는 그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새해부터는 열일곱! 고등학생이 되는 첫날부터 어린애 취급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연유로 반년 가까이 구상해온 여행이었다. 물론 이렇게 중학생 한 놈을 더 달고 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내가 작년 말부터 얘기해왔잖아! 귀찮다고 혼자 가랄 땐 언제고.”


내가 나무라자 썬은 발길질로 검은색 스니커즈를 벗어던진다. 내 것과 같은 옥스퍼드 형이지만 고무창이 어지간히도 닳아있다.


“또 잔소리. 난 잔다. 도착하면 깨워.”


기차는 굴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보호 필름도 벗기지 않은 흰색 헤드폰을 머리에 썼다. 음악은 평소 즐겨 듣는 F. 펑크. 익숙한 베이스의 그루브 사운드가 흘러나오자 볼륨을 높이고 두 눈을 감는다. 역시 코르크 마개 같은 헤드폰으로 귀를 막고 맞닥뜨리는 세상은 묘한 감상일 수밖에 없다.




새벽 한 시가 넘어가자 간접조명방식의 천장에 설치된 동그란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의 시그널이 쏟아져 내렸다. 덕분에 눈을 뜬 나는 헤드폰을 벗고 목적지까지의 루트를 곱씹는다. 다음 역에서 내리면 되겠군. 옆을 보니 썬은 젖은 종이박스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왠지 깨우고 싶은 마음이 절로 사라지는 몰골이다.

그때 철제 프레임에 유리로 된 자동문이 열리며 작은 그림자 하나가 객실로 들어섰다. 내 또래로 보이는 작은 여자애였는데 체크무늬 와이드 팬츠에 구김이 많은 보라색 오버코트 그리고 등에는 커다란 모카색 기타 케이스를 메고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미소녀의 실루엣. 참고로 사춘기 남학생에게는 석발기가 모래에서 자갈과 돌을 걸러내듯 기막히게 미소녀를 가려내는 능력이 있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몰딩이 벗겨진 창 모서리에 투명한 손톱 달이 옷핀으로 고정된 듯 꼼짝없이 붙어있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미소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 묻는다.

“여기 앉아도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꿈치가 꺾어진 스니커즈를 바로 신었다. 썬도 잠에서 깨어나 급격하게 부풀고 있다. 바야흐로 사춘기의 팽창이다.


미소녀는 어쿠스틱 크기의 케이스 먼저 창가 쪽으로 밀어 넣더니 그 옆으로 자기 몸을 신문지처럼 구겨 넣었다. 그 사이에 나는 좌석 아래의 서류 보관용 포켓에서 되도록 판형이 큰 잡지를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 마주 보는 위치에서는 시선 둘 스폿이 상당히 애매해진다.

“나한테 할 말 있니?”


미소녀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나는 기함할 듯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버무린다.

“아, 아니…”

“그래? 그럼 왜 아까부터 나를 흘끔거리는 건데? 잡지 읽는 척하면서.”

그러면서 눈길도 주지 않고 빳빳하게 펴진 노치 라펠만 쓰다듬을 뿐이다. 나는 범죄현장의 용의자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런 적 없는데… 난 그냥…”

“너 말이야, 잡지를 거꾸로 읽는 신기한 재주가 있구나?”

나는 황급히 잡지를 접어버렸다. 그러자 미소녀가 다시 입을 연다.

“생각보다 음흉하군?”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한다. 검은 똑 단발에 동그란 눈과 작은 입술. <철도원>의 ‘히로스에 료코’가 떠오르는 이미지다. 나도 모르게 발가락을 세게 오므렸다.

“왜 그래?”

바로 그때 썬이 무관심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나이스 타이밍. 곤란한 상황에서 나를 구조하는 것은 녀석의 담당이다.

“네 친구가 나를 훔쳐보길래 무슨 속셈이냐고 물었어.”

미소녀가 말했다.

“난 또 뭐라고. 그리고 친구는 무슨. 우리 형이야.”

썬의 대답에 미소녀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공항 검색대라도 통과하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너희들 혹시 이복형제야?”

장난기 섞인 질문에 썬이 맥 빠진 듯 받아쳤다.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군?”

미소녀는 쿡 하고 웃는다.

“조크야. 그렇지만 형제라기엔 둘이 너무 안 닮았잖아.”

그 말에는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하도 들어와서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니까. 썬은 까무잡잡하고 선이 굵은 반면에 나는 하얗고 동글동글하다. 나눠 가진 거라곤 흑발의 반 곱슬 정도 일까나. 그나마 걸쳐있던 형제의 느낌도 녀석이 내 키를 따라잡으면서, 그러니까 작년 말부터는 꼬리를 감췄다. 공교롭게도 그건 우리 둘 모두에게 스트레스였다. 원래 인간이란 각자의 방식대로 피해의식을 고집하는 동물이니까.

“나는 유리라고 해. 이제 새해니까 열일곱. 너희는?”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는다. 단순히 붙임성이 좋은 걸까.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도 열일곱이야. 이름은 유림.”

그리고 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녀석은 버튼이 눌린 장난감처럼 입을 연다.

“나는 전유선. 열다섯.”

“유선이는 나보다 어리군. 그럼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유리의 말에 썬은 입을 삐죽거렸다. 위계질서가 강한 가풍 탓에 나이로 줄 세우는 데에는 민감한 녀석이다.

“어디 가는 길이니?”

그러나 도리어 유리는 느긋한 목소리였다. 예상외로 둔감한 타입 인지도. 내가 대표로 말했다.

“해돋이 보러 가는 길이야.”

유리는 예상답안을 들이민다.

“아하. 새해 첫날이라서?”

“음… 뭐 겸사겸사…”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가족행사가 아니더라도 나는 새해를 달가워하지 않는 십 대니까. 특히 새해 자정에 맞춰 시작하는 불꽃놀이는 질색이고. 폭죽을 모조리 써버리면 어차피 판에 박힌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텐데, 하는 삐딱한 관점이랄까. 역시나 유리는 미심쩍어하는 눈초리였다.

“뭔가 사연이 있는 거군. 야반도주 느낌이랄까?”

“비슷해. 아버지를 피해 달아나고 있지.”

썬이 음침한 목소리로 그렇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유리가, 왜 무슨 일인데? 하고 놀라 물어서 내가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새해 첫날에는 아버지랑 등산을 해야 하거든. 그게 싫어서 우리끼리 여행하는 것뿐이야.”

“아아 그랬구나. 난 또…”

유리의 말줄임표에서 왠지 모르게 안심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를 학대아동으로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신경과민이거나.


아무튼 그 뒤로는 적막이 블라인드처럼 펼쳐져서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거울 같은 까만 창에 희멀건 그림자 세 개가 위태롭게 어른거린다. 유리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오버코트의 소매가 올라가며 왼 손목에 감긴 흰 붕대가 드러났다. 썬도 그것을 발견했는지 나를 제치고 캐묻는다.

“손목은 왜 그래? 다친 거야?”

유리는 황망히 팔짱을 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더니 애써 화제를 돌려본다.

“어쨌든, 부모들은 다 똑같아.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 들지. 정말 그렇지 않니?”

그 말에 썬이 지긋이 나를 바라본다. 미적미적 대답을 떠넘기려는 수작인 걸 알지만 내가 입을 열수 밖에.

“하지만 그것도 길어야 삼 년인 걸. 스무 살만 되면 우리도 독립해서 근사하게 살 수 있잖아."

유리는 한숨을 지었다. 뭐 하나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은 미소녀에게도 십 대라는 굴레는 공평한가 보다.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종착역을 향해 의심 없이 달리는 부모들도 어쩌면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매 순간 자신들이 직접 결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덕분에 우리도 이 기차의 꼬리칸처럼 그들로부터 맥없이 끌려갈 뿐이지만. 바보들. 기차의 방향을 바꾸는 건 머리칸이 아닌 텅레일인데. 기차에 핸들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너희들. 일기예보는 확인한 거야?”

어수선하게 나풀거리는 햇빛가리개용 커튼을 응시하던 유리가 불쑥 물었다.

“아마 아닐걸. 근데 그건 왜?”

썬이 나를 슬쩍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왜라니? 오늘 흐리대. 안타깝지만 새해 해돋이를 볼 수 없을 거라던 뉴스가 생각나서 말이야.”

그 말을 신호탄으로 우리 셋은 영락없이 얼음땡 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술래의 손이 닿기 전이다.

“형. 그럼 괜히 헛고생만 하는 거 아닌가? 그럴 바엔 다시 동네로 돌아가서 시간이나 때우는 건 어때?”


아니나 다를까, 썬은 나를 떠보는데 열심이다. 유리가 곧장 말을 이어받았다.

“가면 이백 프로 후회할 걸?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사람 구경이나 실컷 하겠지.”

그 애의 태도에는 다소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으나 그에 관해 따져볼 겨를도 없이 안내멘트가 객실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해돋이 여행객은 이번 역에 하차하여 고속버스로 환승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내용이다. 창밖으로 어둠이 자욱한 도시가 점차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어차피 이 시간에는 돌아갈 차편도 없어. 게다가 환승할 고속버스까지 예약을 마쳤고 그건 환불도 안 된단 말이야. 물론 일출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잠깐!”

기다렸다는 듯 유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예약한 표 값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라면 내가 대신 돌려줄까?”

영문 모를 제안에 썬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냉정하게 물었다.

“우리한테 그러는 의도가 뭐야?”

유리는 제법 다정하게 대답한다.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것뿐이야. 보아하니 너희도 계획이 틀어진 것 같은데.”

내 눈치를 살피던 썬이 말을 꺼냈다.

“구체적으로 뭘 하자는 건데?”

“그건 차차 고민해 봐야지. 배고픈데 야식부터 먹을까?”

쇠바퀴가 철로를 잡아끄는 마찰음과 함께 기차가 덜컹덜컹거린다. 곧 요동치던 움직임이 멎자 승객들은 저마다 분주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유리도 태평하게 일어나 어깨에 케이스부터 둘러멘다. 밑창에는 충격방지용 우레탄 부츠가 부착되어있다. 군용 보트 제작에 사용되는 하이팔콘 소재다. 나는 썬과 바쁘게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 둘이 상의한 다음 알려줘. 나는 개찰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감질이 났던지 유리는 몸을 홱 돌려 걸음을 옮긴다. 우리는 순식간에 비어버린 맞은편 좌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촌스러운 고동색 시트에 미소녀 모양의 자국이 아주 선명히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