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알베르 카뮈 (1942, 프랑스)
삶의 부조리에 맞서는 고요한 반항, 카뮈 철학의 문학적 구현
신쨩별점: ★★★★☆
1. 실존주의, 사르트르, 카뮈
두 개의 죽음이 실존주의 철학을 탄생시켰다. 하나는 신의 죽음: 니체가 말했듯 인간은 자기 스스로 신이 규정한 세계관을 깨고 나왔다. 과학의 발달이 신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근대 합리주의는 세계를 신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보고자 했고, 근대적 인간은 이제 신 대신 과학을 신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또다른 죽음, 인간의 죽음을 불러왔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다. 진보라 믿었던 인간 이성의 질주가 인류를 세계대전이라는 유례 없는 파멸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이성 역시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프랑스와 독일, 참혹한 전쟁의 한가운데에는 헛된 죽음과 헛된 삶에 대한 회의가 들끓었다. 세계의 본질을 규정하는 모든 의미들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는 이제 새로운 질문들이 떠올랐다. '나는 왜 이 세계에 태어났는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이 같은 공허의 토양에서 꽃피운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다. 그 무엇도 삶의 의미를 규정해 주지 않는 시대, 실존주의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위로이자 지침이 되었다. 이와 같은 철학적 흐름의 선두에 서 있던 이들이 바로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선언에서 출발한다. 그에 의하면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부여되는 절대적인 삶의 목적이나 가치, 의미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살아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진리이며, 그렇기에 인간은 자유롭다. 이 자유의 바탕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직접 형성해 간다.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규정해감으로써 삶은 자기만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의 창조자가 될 것, 이것이 사르트르가 제시한 답이다.
카뮈도 기본적으로 세계는 무의미하고 인간에게 본질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의미를 창조함으로써 세계를 극복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사르트르와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카뮈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늘 침묵한다. 그러한 인간과 세계의 충돌, 그것이 바로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이다. 카뮈가 제시하는 길은 이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다. '반항'이란 삶의 무의미를 끝까지 응시하며 살아내는 자세, 의미도 구원도 없는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태도에서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 나아가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카뮈의 철학은 모든 '반항하는 인간'들에 대한 조용한 위로이자 찬사라 할 수 있다.
2. 카뮈 철학의 화신, '이방인' 뫼르소
소설 『이방인』은 이러한 카뮈의 철학 세계를 문학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특히 주인공 뫼르소는 그야말로 카뮈 철학의 화신이자 '반항하는 인간'의 표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이방인』을 읽어야만 우리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뫼르소는 그저 한 명의 이방인으로서 우리를 스쳐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라는 강렬한 첫 문장은 뫼르소가 어떤 인간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에 드러나듯,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어제 죽었는지 오늘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자신에게 남긴 말은 없었는지 그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슬퍼하는 기색 역시 없으며, 심지어 엄마의 시신이 든 관 앞에서 담배를 태우거나 커피를 마시며 장례식을 따분해하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뫼르소의 모습을 괴상하게 여긴다.
다른 사례들도 살펴보자. 가령 작중 뫼르소의 연인 마리는 그에게 자신과 결혼할 것이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뫼르소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런 건 하든 안 하든 상관 없다. 다만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결혼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 전혀 뉘우치지 않으며, 법정 판결 역시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감옥에 가든 말든. 또한 교도소에서 만난 사제가 그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어보았을 때도 그는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처럼 뫼르소는 '상관 없다',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는 뫼르소가 '카뮈적 인간'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카뮈의 세계에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카뮈는 이를 일종의 자기기만 혹은 '철학적 자살'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 만든 제도, 윤리, 종교 등에서 비롯되는 모든 '의미'는 세계의 무의미라는 진실을 가리는 껍데기일 뿐이다. 카뮈 철학의 화신인 뫼르소는 이를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러므로 뫼르소에게는 세상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뫼르소의 모습에서 어딘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이는 뫼르소가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된 '의미'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화된 개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사회의 도덕, 가치, 행동양식 등을 내면화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를 지배하는 규범이 되어 우리가 사회의 틀에 맞게 동작하도록 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부모님이 죽으면 슬퍼하고, 연인과는 때가 되면 이별 혹은 결혼 중 하나를 선택하고, 법을 어기는 것은 죄임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교육되어 있다. 즉 우리는 사회화를 통해 삶과 세계의 '의미'를 규정하고, 그 '의미'들이 우리의 실존에 앞서는 본질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반면 뫼르소는 '비사회적' 인간이다. 그는 사회가 규정하는 모든 '의미' 혹은 행동양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 행동을 꾸며내지 않고, 그저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과 생리적 욕구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의미 체계가 결코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뫼르소는 우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사회화된 인간'인 우리의 존재 방식을 의심하는 불쾌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뫼르소를 통해 일종의 존재론적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카뮈의 철학이 사회적 가치에 위배되는 비사회적 행위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뫼르소는 '카뮈적 인간'의 극단적인 예시일 뿐이다. 카뮈가 말하려 했던 것은 세계의 '무의미'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삶을 견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세계에 대한 '반항'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뫼르소는 '반항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를 헛된 '의미'들로 덧칠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 사형을 앞둔 뫼르소는 자신이 이 무의미한 삶을 끝까지 솔직하게 감내해냈음을 깨닫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해야 한다." 뫼르소는 바로 그 시지프의 소설적 재현이다. 즉 카뮈는 뫼르소의 반항하는 삶이 분명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소설 『이방인』과 카뮈 철학의 현대적 의의
소설 『이방인』, 그리고 카뮈의 철학은 분명 세계 대전의 폐허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비단 20세기의 절망에만 응답하는 사유가 아니다. 오히려 카뮈의 철학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더욱 절실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는 그 무엇도 삶의 '의미'를 제시해주지 않는다. 현대인은 신이나 이데올로기는 물론 모든 관습, 도덕, 규범까지도 하나하나 철저히 의심하며 스스로 세계를 구성해간다. 이처럼 모든 '본질'이 해체되고 무의미가 보편적 조건이 된 오늘날의 자유로운 세계에서는 그 누구라도 존재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매순간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만 한다. 오늘날 삶의 '의미'에 관한 사유는 더 이상 추상적인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침에 눈을 떠야 할 이유, 오늘의 괴로움을 버티는 이유, 타인과 관계 맺을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너무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때로 이에 대해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은 허무의 늪을 헤메며 고립, 불안, 우울을 느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는 일 역시 결코 적지 않다. 즉, 오늘날 삶의 '의미'에 대한 사유는 철학의 범위를 넘어 개인의 생존과 인류의 존속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미'의 부재가 존재의 기반을 위협하는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이방인』의 대답은 여전히 강력하다. 카뮈는 냉정하게 삶에 '의미'란 없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원래 허무하고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삶의 의미가 없음을 눈치챈 자들이야말로 진정 자기 삶의 주인이다. 이들은 '무의미'라는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의미'의 착란을 극복하고 실존적 자아를 찾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카뮈는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체념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삶의 무의미를 똑바로 마주보되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반항'의 자세, 이것이 카뮈가 긍정한 삶의 방식이다. 카뮈 철학에서는 세계에 대해 '반항하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주체적이고 존엄하며 아름다운 인간이다. 그러므로 카뮈의 철학은 이 의미 없는 세계를 끝까지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깊은 존경이자 찬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