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스타터레터 #6
처음 클라이밍을 시작할 때 클라이밍의 종류가 ✔️볼더링 ✔️리드 ✔️스피드로 나뉜다는 걸 간략하게 배웠지만, 볼더링 외에 다른 클라이밍에 도전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일 체험 이후 유튜브를 통해 찾아본 리드 클라이밍, 스피드 클라이밍은 운동 신경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리드는 장비를 착용한 뒤 약 15m~18m 높이의 벽을 오르는 클라이밍이다. (이 벽을 몇 안 되는 홀드를 잡고 누구보다 빠르게 올라야 하는 등반이 스피드 클라이밍이다.) 완등 후에는 줄 하나에만 매달려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까마득히 높은 벽을 오르고 내려오는 영상을 보자마자 절로 “저게 뭐야, 번지점프야? 근데 운동이라서 힘도 엄청 들고 그럴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등반 시 추락하지 않도록 지상에서 줄을 잡아주는 파트너인 ‘빌레이어(belayer)’가 있지만, 그래도 5m를 오르는 볼더링 클라이밍도 덜덜 떨면서 간신히 하는 내가? 그야말로 ‘감히, 내가?’, ‘나… 뭐 돼?’의 마음이 들어 도전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 볼더링에 이어 리드 클라이밍의 재미에 빠지게 될 줄은.
그동안 내게 인천은 ‘제2의 고향’ 정도였다. 부모님이 인천에서 서점을 운영해 8살부터 19살까지 인천에서 산 적이 있다. 성인이 되어 서울로 이사해 한동안 인천에 가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언니! 리드하러 인천 가지 않을래?”
“??? (리드…? 선도하다? 리더…?)”
“인천에 큰 센터 있는데, 리드도 할 수 있고 볼더링도 할 수 있어!”
아, 그 리드구나! 그렇게 긴장감과 두려움에 덜덜 떨며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센터로 향했다.
먼저 입장하자마자 등반하며 홀드를 놓쳐도 추락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안전장치, 벨트라고도 불리는 하네스를 빌려 서툴게 다리와 허리에 착용했다. 친구들은 능숙하게 내 하네스에 8자 매듭으로 묶은 줄을 연결해주었고, 겁에 질린 내가 홀드를 잡고 엉금엉금 올라가도 침착하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발을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면 밑에서 발과 손을 어디에 딛고 잡으라고 일러주었다.
높은 벽을 오르는 일은 생각만큼 무섭지 않았다. 벽만 보고, 홀드만 보면 되니까. 내게 가장 큰 두려움을 안겨준 것은 예상했던 대로 완등 후의 일이었다. 벽의 꼭대기까지 무사히 올랐다면 이제 남는 것은 땅으로 무사히 내려오는 일뿐이다. 그러려면 등반 파트너를 믿고 손과 발을 모두 홀드에서 떼야 한다. 그러니까 그냥 위에서 추락하듯이,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손을 놔버려야 한다.
밑에서 ‘언니! 손 놔! 할 수 있어!’, ‘누나, 절 믿으세요!’라며 연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실내 클라이밍장이어서 아래에 푹신한 매트리스도 있고, 든든한 친구가 줄을 잡아주고 있는데 손과 발에 접착제라도 바른 듯이 왜 그렇게 못 놓겠는지. 한참을 홀드를 잡은 채 바들바들 떨다가 결국 힘이 빠졌다. 떨어진다! 생각해 크게 놀랐는데 의외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처럼 몸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중에 다양한 모습들을 보았다. 바로 아래에서 나의 첫 리드 경험을 찍어주고 있는 친구, 내가 잘 내려오도록 줄을 꽉 잡다가도 서서히 놓기를 반복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친구, 이제 막 벽을 오르기 시작하는 사람들, 강습 중인 센터 직원의 모습, 여기에 통유리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풍경까지. 위에 올라야 비로소 보이는 전체의 모습들. 그때의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라, 해보니까 별거 아닐 수도? 어쩌면 재밌을 수도?
리드의 재미를 알고 난 뒤, 볼더링 강습에 이어 리드 강습까지 알아보는 나를 발견했다. 리드 클라이밍도 벽을 어떻게 오르는지 방법이 나뉘고, 등반자의 안전을 확보하는 빌레이어의 역할까지 알게 되니 구석구석 알고 싶어졌다.
줄을 몸에 연결해 무작정 오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톱 로핑’ 방식과 ‘리딩’ 방식으로 나뉘는 걸 강습을 들으며 알았다.
톱 로핑 방식은 리드 클라이밍 시 안전하게 등반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확보물에 먼저 줄을 건 뒤, 그 줄을 등반자의 하네스에 연결해 올라가는 방식이다. 리딩 방식은 등반자가 직접 확보물에 줄을 걸어 안전을 확보하며 벽을 오르는 방식이다. 클라이밍 경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보편적인 장면이 바로 이 리딩 방식이다. (이미지를 보는 게 이해가 쉬울 듯하여 사진을 함께 붙여본다.)
문제의 난이도 표기법도 볼더링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보통 실내 암장은 색상으로 난이도를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리드 클라이밍에서는 숫자와 알파벳을 결합해 난이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5.9부터 시작해 숫자가 높아질수록, 알파벳 표기가 뒤로 갈수록 문제가 어려워졌다. (5.9 문제, 5.10 문제, 10a, 10b, 10c 등등… 이걸 요세미티 10진법이라고 칭한다고도 한다.)
실외 강습을 들으면서는 주로 리딩 방식으로 벽을 올랐다. 지구력과 힘이 부족해 한 달 동안 가장 쉬운 5.9 문제만 했지만, 리드를 처음 접했을 때보다 높이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는 걸 느꼈다. 문제를 풀기 위해 길을 찾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걸 절절히 깨닫기도 했다.
볼더링 문제는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아 1~2분이면 오르는데, 리드 클라이밍은 벽이 높아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5분, 많게는 10분까지 걸리기 때문이다. 이때 손이나 발이 꼬이면 그날 나의 전완근과 허벅지 근육은 주인을 잘못 만나 호되게 혹사당하는 것. 하지만 루트 파인딩 바보는 어김없이 등장했고 덕분에 한 달 내내 지구력을 잘 기를 기회가 됐다(고 생각한다).
클라이밍이라는 운동을 인생에 빗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조금은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다. 하지만 한 달 동안 강습을 들으면서 어쩌면 마음 맞는 사람과 살아간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됐다.
최대 10분 정도 위에 있다가 내려오는 리드 특성상 한 문제당 최대한 오래 쉬어야 몸에 무리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강습생이 한꺼번에 올라가지 않고 번갈아 가며 문제를 풀도록 수업이 진행됐다. 내 차례가 아닐 때 나는 편히 쉴 수 있도록 센터에서 깔아준 돗자리에 앉아 다른 강습생이 올라가는 걸 지켜봤다.
그때마다 높이높이 올라가는 등반자보다는 밑에서 그를 끝까지 주시하는 등반 파트너, 빌레이어에게 더욱 눈길이 갔다. 그를 보면서 ‘내 목숨을 쥐고 있는 게 빌레이어다. 그만큼 믿을 만한 사람, 마음이 잘 맞는 사람에게 줄을 맡기는 거다’라는 말을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다.
빌레이어는 등반자가 벽을 오를 동안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 또한 분주히 움직인다. 등반자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등반자가 홀드를 잡고 디딜 때마다 그 동작에 힘이 아직 남아있는지 혹은 힘들어하는지를 가늠한다. 등반자가 확보물에 줄을 걸기 위해 줄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모습을 본 빌레이어는 등반자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줄을 잡아당길 때 걸리는 것이 없도록 줄을 힘껏 뽑아준다. 홀드를 잡는 동작이 아슬아슬하다, 잡지 못하고 놓칠 것 같으면 빌레이어는 밑에서 소리친다.
“텐션 받을래?”
등반자가 ‘텐션!’을 외친다. (텐션은 리드 클라이밍 사이에서 흔히 잠시 쉬는 시간으로 인식된다.) 빌레이어는 즉시 잡고 있는 줄이 팽팽해지도록 뒤로 몸을 젖힌다. 두 발로 땅을 단단히 지지한다. 등반자는 빌레이어를 믿고 홀드에서 잠시 손을 뗀다. 빌레이어는 아래에서 등반자의 무게를 지탱한다. 그가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돕는다. 길 좀 찾고 가! 팔 좀 털고, 호흡도 좀 하고! 외치면서.
등반자와 빌레이어가 주고받는 대화를 들을 때마다 혼자서 둘이 함께 보낸 세월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저만큼 합이 잘 맞으려면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할까. 둘은 어떤 일을 겪었을까. 위를 오르는 동안 든든히 밑에서 받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을 걷는 과정은 퍽 신나겠다, 즐겁겠다, 행복하겠다. 나도 걷는 동안 신나고 힘이 되어주고 합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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