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스레터 #37
암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껏 기울어져 있는 오버행, 아찔한 절벽을 구현한 슬랩, 그 벽에 붙은 홀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죠. 탑을 찍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벽. 때로는 야속하기도 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믿음직스럽기도 한 벽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수많은 클라이머가 매달려도 무너지지 않고, 무거운 홀드 수십 개가 붙어 있어도 쓰러지지 않는 그 벽을 만들고 세우는 조현봉 목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안녕하세요! '암장 벽은 도대체 누가 만드는 걸까?' 무척 궁금했는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35년 차 목수이자 클라이밍 센터 벽을 만드는 조현봉입니다. 이렇게 인터뷰하게 되어 저 역시 영광입니다.
최근 문을 연 '서울볼더스 목동점'의 벽을 현봉 님과 팀원들이 구축했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그 밖에도 어떤 암장들을 작업하셨는지 궁금해요!
2005년 대구의 '챌린저 클라이밍 짐'이라는 암장을 시작으로, 강서클라이밍센터, 더클라임 홍대/일산/마곡, 피커스 종로점 등 여러 센터의 벽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수리 요청을 받으면 또 가서 벽을 고치기도 했고… 돌이켜보니 정말 많은 센터와 함께했네요.
목수도 분야가 다양하다고 알고 있어요. 처음부터 "암장 벽을 만드는 목수의 길을 걷겠다!" 결심한 건가요?
처음부터는 아니에요. 청년이었을 적 목수였던 친구를 따라 원목 가구를 만들 기회가 있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목수의 길을 걷게 됐어요. 이후 10년 동안 집 짓는 형틀 목수, 토목 목수, 내부를 짓는 인테리어 목수까지, 여러 분야를 배우면서 일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라이밍과 일은 별개였죠. 제게 일은 생계를 위한 것이었거든요. 몸과 마음을 단련해 주는 취미와 나무를 다루는 일, 그 둘을 접목할 생각은 못 했어요.
Part. 1
벽을 만들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군요!
맞아요. 2005년 어느 날, 친한 클라이머가 암장을 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네가 목수니까 벽을 맡기고 싶은데 해줄래?"라면서 부탁해 왔습니다. 그동안 생각도 못 한 작업이라 큰 용기가 필요했죠. 하지만 그때 당시 클라이밍 센터가 몇 없는 대구에서, 네 번째로 생기는 암장의 시작을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욕심나더군요. 저도 1998년부터 클라이밍을 쭉 했던지라 여러 암장 벽과 자연 바위를 많이 만져봤고. '뭐, 크게 다를 게 있나? 해보자!' 하며 의뢰를 받았죠.
본격적으로 작업하기 전에 제가 다니던 곳과 다른 암장에 원정 가서 벽 좀 보게 해달라고 계속 요청했어요. 그렇게 벽만 열심히 들여다봤죠. 클라이머가 직접 오르는 벽, 그 벽을 받쳐주는 뒷벽을 살펴보며 어떤 식으로 구축할지 끊임없이 연구했습니다.
건축 및 인테리어 분야의 목수에서 암장만을 위한 목수로, 정말 한순간에 활동 분야가 바뀌었네요. 어쩌면 큰 도전이었을 것 같아요.
가보지 않은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는 게 어렵지, 사실 목수가 하는 모든 작업은 계속 배우면서 해나가는 일입니다. 기술은 다 습득했어도 디자인, 자재 등은 끊임없이 변하니까요. 시대에 발맞추며 일해야 하죠. 변화하는 현장에 잘 적응하고 유연하게 살자는 생각을 해와서 크게 힘들진 않았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암장의 트렌드를 따라 공사의 방향성 또한 매번 달라지니 작업이 늘 새롭게 다가왔어요. 다방면으로 연구할 수 있는 데다가 자신의 성장이 바로 느껴지는 이 일이 참 좋더라고요.
그렇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암장 벽을 만드는 일과 인테리어 목수의 일은 무엇이 다른가요?
인테리어 목수의 경우 집이 완성될 때까지 현장에 계속 있어야 해요. 내가 담당하는 부분만 완성하고 끝난다, 이런 개념이 없어요.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전기 공사, 수도 공사 등 다른 시공을 담당하는 담당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동시에 공간을 구축하고, 내부를 채울 가구를 짜고. 모두가 최종 기한에 맞춰 집 전체를 완성한다는 느낌이죠.
반면 실내 암장 공사는 벽의 핵심인 합판에 중점을 두고 1mm, 2mm처럼 사소한 간격이나 벽의 각도 등 수치를 세세하게 따집니다. 방심하는 순간 바로 벽에 틈새가 생기기 때문에 깔끔한 마감과 안정성을 위해 세밀히 작업해요. 무엇보다 의뢰를 준 센터장과 가장 긴밀하게 소통하며 벽을 만들어가죠. 센터장이 원하는 벽의 각도, 디자인, 현재 트렌드까지 고려해서 클라이머에게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벽을 만져만 봤지, 만드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암장 벽을 구축하는 과정을 더욱 자세히 알려주세요.
먼저 합판의 예상 단가, 인건비 등 예상 공사 비용을 센터장에게 고지합니다. 이후 서로 협의하며 맞춰가요. 예산이 이만큼인데 괜찮은지, 맞춰줄 수 있을지 물어오면 어느 면에서 제가 조율할 수 있을지 의견을 주고받죠.
그다음 도면 스케치를 보자고 해요. 암장 측이 공간의 너비, 높이, 길이 등을 측정해 벽이 위치할 곳과 벽의 각도, 탈의실, 화장실 등 시설의 위치를 예상해 적은 작업물이죠. 그걸 토대로 우리의 의도가 잘 구현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상의합니다. 이만큼의 면적에서 오버행 벽을 세우면 클라이머가 추락할 때 위험하다, 매트리스를 깔아도 밖으로 튕겨 나가서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요.
최종 도면이 나오면 이제 벽을 짓는 데 필요한 합판 수량을 예상해 공장에 발주를 넣죠. '홀드를 고정할 볼트, 너트가 들어갈 크기로,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린 합판이 필요합니다'라거나 '실내 암벽등반 센터용입니다' 등 꽤 구체적으로 공장에 요청해요. 합판이 도착하면 그때부터 빠르게 조립하며 벽을 세웁니다. 도면과 현장 간에 오차 없이 딱 맞아떨어진다면 일주일 만에도 완성할 수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오차가 있죠. (웃음) 그러면 현장에서 다시 측정하고, 재단하고, 이어 붙이고 그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칩니다. 벽이 완성되기까지 넉넉잡아 3주에서 한 달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Part. 2
완벽을 기하다
현봉 님이 공사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이에요?
역시 '안전'이죠. 바위를 오를 때, 산을 탈 때 바위나 산이 움직이나요? 아니죠. 실내 암장 벽 또한 마찬가지예요. 절대 흔들리면 안 됩니다. 무너져서는 안 돼요. 그래서 벽 뒤쪽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보강재를 특히 신경 씁니다. 벽의 수리나 철거를 위해 앞쪽의 합판을 제거할 때에도 보강재의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있을 만큼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전은 정말 모두에게 인지시키고 계속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봉 님이라면 정말 모든 걸 믿고 맡긴다는 암장 센터장분들도 있더라고요.
내가 시공한 암장이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걸 그 친구들이 알아봐 준 것 같은데? (웃음) 한 번은, 춘천에서 일산까지 밤새 달려 벽을 수리하러 갔던 적이 있어요. 춘천 암장에서 공사하던 중에 일산의 한 암장에서 저를 찾는 전화가 왔죠. 벽에 틈새가 생겨 벌어진 것 같다고요. 하던 작업을 다 끝내놓고 새벽 내내 차를 몰고 갔어요. 너무 놀랐거든요. 다행히 틈이 생긴 건 아니었고, 해외에서 온 클라이머가 결착 부분을 착각하고 직원에게 얘기했던 거였죠. 그래도 혹시 몰라서 챙겨간 목재로 보강재 하나 더 붙여줬어요. 그만큼 제가 한 작업, 특히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끝까지 책임지고 있어요.
운동하러 가서도 벽부터 보일 것 같은데, 가장 인상 깊었던 암장이 있다면요?
2015년에 더욱 새롭고 다양한 암장 트렌드를 보기 위해 일본으로 암장 투어를 갔어요. 그때 비펌프 오기쿠보(B-PUMP Ogikubo)를 포함해 14곳 정도를 방문했습니다. 쭉 돌아보니 일본 암장 벽의 변천사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때 당시 한국은 각도의 변주를 다양하게 해서 원형 벽도 세우고 그랬거든요. 일본 암장에선 그런 이색적인 특징이 없는데도 항상 재밌는 문제를 만나고 왔어요. 창의적인 루트를 만들 수 있도록 최대한 넓고 크고 안전한 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새로운 기술을 접하고 응용해서 만든 벽도 기억에 남아요. 라운드 벽을 만들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는데 한국에선 그런 형식의 벽을 가진 암장이 없었어요. 일본의 플랫 암장이라는 곳에 라운드 벽이 있다고 해 가 봤죠. 일본어도 잘 못하는데 손짓, 발짓해 가며 "벽 좀 보게 해달라" 요청했어요. 각도며 합판 조립이며 전부 복합적인 요소로 이뤄진 벽이더라고요. 돔구장을 보면 라운드 형식이 복잡하게 구성돼 있잖아요.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더클라임 서울대점을 시공할 때 라운드 기술을 적용해 지었는데, 처음 해보는 기술이라 걱정했지만 잘 나왔더라고요. 근데 아무도 못 알아봐서… 살짝 아쉬움이 남지만 개인적으론 뿌듯한 작업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생계 때문에 일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일을 좋아하는 진심이 느껴져요.
아무래도 저 또한 클라이머인지라. 클라이밍계의 발전에 동참한다, 그런 마음이 들어요. 벽을 지어준 암장이 잘 되면 제 기분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제가 만든 벽에서 클라이머분들이 즐겁게 운동하는 걸 보면 정말 뿌듯하고요. 이전엔 출근하기가 정말 힘들고, 알람이 울려도 침대에서 눈 뜨기가 어렵고 그랬어요. 하지만 이 일을 하고부터는 산에 가는 것만큼이나 현장에 가는 발걸음이 즐거워요. 나 아직 현역으로, 힘차게 일할 수 있구나 싶고. 몸이 힘든 육체노동이 많은데도 아주 가뿐하게 일터로 향합니다.
Part. 3
암벽을 오르다
클라이머 현봉 님의 모습도 궁금해요. 언제부터 클라이밍을 하기 시작했나요?
1986년도였던 것 같은데… 우연히 TV에서 프리솔로로 산을 타는 사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산에 살면서 아침마다 구보하고, 턱걸이하고, 5~7m 높이의 바위를 줄도 없이 오르고.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멋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야, 참 대단하다. 나도 하고 싶다' 생각했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니 보통 산악회에 들어가데요? 그때부터 <벼룩시장> 같은 무가지에서 동호인 모집 광고를 열심히 찾고, 연락하고. 근데 시간이나 일정이 잘 안 맞았어요.
*프리솔로 :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두 손으로만 암벽을 등반하는 일
그러다 2년 뒤, 알고 지내던 한 친구가 알고 보니 산악회 출신이란 걸 알았어요. 등산한 얘기며, 자연 암벽에서 등반한 얘기며 들려오길래 바로 연락했죠. 제가 엄청나게 졸랐어요. 나도 좀 데리고 가 줘라. 그렇게 그 친구 산악회에 가입했죠. 거기서 돌려쓰는 공동장비로 리드하고, 바위도 타고. 집념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자연에서 하는 클라이밍 이외에 실내 볼더링도 하는지 궁금해요.
그럼요. 스포츠 클라이밍은 2004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자연에서만 등반하다가 2004년에 설악산의 토왕성폭포를 사람들과 올랐는데, 제가 선등으로 오르게 됐어요. 먼저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되고 책임감도 느끼고. 그래도 덕분에 정신 바짝 차려서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으로 올랐어요. 그때 함께한 사람들과 더 친해지면서 스포츠 클라이밍을 접하게 됐죠. 빙벽등반은 물론이고, 인공 외벽 클라이밍도 하고. 점점 활동 범위가 넓어지니 암장 벽을 구축하는 공사도 맡게 되었고요. 클라이밍으로 인해 제 삶이 더욱 다채로워졌어요.
1986년부터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종류의 클라이밍을 해냈을 것 같아요.
아, 인도에 있는 6,500m 산을 등반하러 여행을 떠나기도 했네요. 덕분에 외국인 친구들도 사귀고. 산이라는 자연과 클라이밍이라는 운동 행위. 이 둘이 여러모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멀티 피치 등반, 실내 암벽 등반 모두 할수록 생각이 굳지 않고 계속 굴러가더라고요. 사람의 사고가 무궁무진하게 넓어지는 느낌?
힘을 많이 쓰는 직업이어서 클라이밍도 처음부터 잘했을 것 같은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고요. 다만, 너무 바빠서 운동을 못 하는 날엔 작업하면서 동시에 (기술을) 응용해서 제 나름 훈련해 볼까, 생각하긴 했죠. 망치질하고, 대패질하면서. 망치질은 뭘 찍어 누르는 건데 빙벽 등반할 때 도움 된 것도 같고. 대패를 쥐는 건 또 핀치 홀드를 잡을 때와 비슷하거든요. 뺀치로 계속 자재를 자르다 보니 전완근도 저절로 훈련되더라고요? 노동으로 얻은 생활 근육들을 운동할 때 조금씩 써 보려고 하긴 했어요.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라 아쉬워요. 다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암장에서 뵙고 싶어요. 그날을 기약하며, 현봉 님에게 '클라이밍'이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음… 오래된 친구다!
제가 사람을 참 좋아해요. 운동을 통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보니 클라이밍 하면 친구 만나러 가는 것처럼 신나고 그래요. 젊은 시절엔 운동하러 가면서 오늘은 어떤 문제를 하지? 어떤 무브를 익힐 수 있을까? 하면서 행위 자체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목적이 커요.
클라이밍은 개인적인 운동이라기보다는 친구들과 함께하며 또 성장하는 운동이잖아요? 함께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한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요. 앞으로도 클라이밍을 하며 폭넓은 세계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 건 물론, 클라이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협업 문의 : slowstarter@slowstart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