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ramita Mar 26. 2021

친할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

소중한 사람이 떠나간 나의 첫 슬픔

삶에는 끝이 있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머지않아 모두 사라지고 잊힌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언젠간 죽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모두 죽는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하루하루 죽어간다. 이것은 ‘던져진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이다.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보통은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고, 연애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다시 새로운 존재를 낳아 기르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무수히 남긴 삶의 흔적들을 뒤로한 채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나 잊힌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독자들도, 죽음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삶에 부여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청춘이기에,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도 거의 겪어보지 못한 행운을 아직 누리고 있기에 그렇다. 적어도 나는 그런 것 같다.


아직 죽음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하였고, 그럴 기회도 많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서 나름 진지하게 고민한 상황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친할아버지의 죽음이다. 나는 고3 19살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나의 친할아버지였다. 나는 할아버지와 많은 추억을 쌓았다. 어떤 때는 친구들보다도 친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할아버지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같이 놀러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공부하다가, 산책하다가 외로워지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리워지면 홀로 할아버지 댁까지 걸어가 할아버지 옆에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할아버지와 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옆에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했다.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셨던 것 같다. 손주 중에 나를 가장 예뻐하시고, 내가 집에 오기만 하면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나를 안아주셨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서글피 우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손주와 둘이서 있으면 늘 웃기만 하시던 분이셨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오는 날이면 여김 없이 할아버지께서는 눈물을 쏟아 내시며 당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잘못 살아온 인생을 하소연하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을 머슴처럼 기계처럼 일해 오셨다. 그렇게 자신의 아내와 여섯 자식을 먹여 살리셨다. 그러나 다른 가족이 문제였다. 그 당시는 처자식보다 부모 형제에게 더 잘하는 것이 상식이고 문화였던 시대였다. 나의 큰할아버지는 참 나쁜 분이셨다. 착하고 순진한 동생이 돈은 잘 버니 늘 동생의 돈으로 본인과 처자식을 배부르게 먹이고 옷을 입히셨다. 하지만 한 번도 자신에게 동생의 도움을 받는다고 말한 적은 없다. 다 본인의 노력에 의한 것처럼 밖으로 꾸미고 행세하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셨다. 나중에는 보증을 잘 못 서셔서 그동안 번 돈을 모두 날리고 쓰러지셨다. 수십 년 간 짐승처럼 일해온 대가도 허망한 결과만 남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삶을 뼈저리게 후회하셨다. 자신의 삶이 인정받지도, 보상받지도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절망이었다. “내가 바보였지…” 흐느끼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고3 때, 할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차에 치여 몇 미터를 날아가셨다. 그러나 다행히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천행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간 병원에서 폐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아이러니했다. 할머니와 친척들은 그 사실을 할아버지께 비밀로 했다. 그 이후로, 내가 여느 때처럼 할아버지 댁에 찾아가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친척들이 유난히 늘 계셨다. 고모들, 사촌 누나, 형, 동생들.


학교에서 자습하며 곧 닥쳐올 할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곤 했다. 19년 동안 나와 함께하며 의지가 되어준 사람이 떠나간다. 80년 넘게 산 인생을 뒤로하고 홀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무렵 ‘말 그릇’에 빠졌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 책의 이런 구절이 내 마음을 관통하였다. ‘어릴 때 들었던 감동적인 한 마디에 늙어서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말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말은 한 사람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근원을 건드려 줄 수 있다.’ 사실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적어도 난 이렇게 이해했다. 그 직후, 하나의 결심이 섰다. 다음 날 할아버지 댁에 갔다. 그날도 어김없이 방문하신 친척들이 떠나고, 할아버지의 손을 꽉 잡으며 말씀드렸다. “할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응? 무슨 소리냐?” “할아버지가 누구보다 외롭고 힘드셨을 때, 도망치지 않아 주셔서요. 요즘 제가 농구를 해요. 농구를 할 때 정말 행복합니다. 걱정 없이 공부하고 농구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전 정말 너무 행복해요. 그런데 이게 모두 할아버지께서 그때 도망가지 않으셔서, 자식들을 끝까지 책임졌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요. 할아버지 다음 생엔 제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태어날게요. 제가 온갖 고생 하면서 살면 할아버지는 그 혜택 누리면서 다음 생만큼은 부디 즐기면서 행복하게 사세요.” 벌써 2년 가까이 지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충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다음에 할아버지를 찾아뵈었을 때, 생전 탈모 한 번 없으시던 분께서 며칠 사이에 머리의 절반이 빠져계셨다. 그날 유독 밝아 보이셨다. 내가 오자마자 어이구! 소리 지르며 좋아하셨다. 오늘 선산에 다녀온 얘기며, 돌아오는 길에 손주 자랑한 이야기며 즐겁게 수다를 떠셨다. 손주 자랑 얘기 도중 갑자기 말을 멈추셨다. 말을 잇지 못하셨다. 속으로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했다. 다음 할아버지를 찾아뵈었을 때, 할아버지는 계속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셨다. 고통에 신음할 뿐이셨다.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어느 날 자는 나와 내 동생을 말없이 깨우신 아버지는 우리를 차에 태우고 급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노인과 서글피 울고 있는 자식들이 있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영영 떠나셨다. 80년 넘게 살아온 할아버지의 자취는 그날의 하늘에도, 나무에도, 새 지저귐 소리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거의 2년이 더 된 이야기다. 그 사이에 나의 외할아버지와 친구의 부모님 몇 분 이외에는 아직 부고의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아직 나에게 죽음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은 알지만, 현재의 나에겐 먼 이야기일 뿐이다. 어느 정도의 낭비, 방황, 시행착오를 겪을 청춘의 특권을 누리며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문득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있다. 관련 독서를 하거나, 문득 할아버지 생각이 나거나, 뭐 그런 이유로 가끔 그런 듯하다. 의미 없고, 부질없는 행위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판단하게 한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내 주변 사들의 소중함을 환기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간다면 느끼지 못할 행복과 의미이다. 영생은 존재의 의미를 말살한다. 오늘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와 활동이 의미가 없어질 것이고, 열정을 쏟을 이유도 없어진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많은 자식과 손주들이 찾아왔다.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사라진다는 것은 할아버지와의 교감, 대화, 만남을 모두 소중하고 간절하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듣지 못했을 따뜻한 말 한마디도 죽기 직전에라도 비로소 가슴에 품을 수 있게 되었다. 폐암 진단 이후가 아니라 그전에 그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할아버지는 죽음과 마주하고 나서야 자신의 의미를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신 것일까.


유시민 작가는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고 말한 바 있다.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닌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생각해 봄으로써,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순간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더 평화적인 대화를 하고, 관계의 진전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은가. 나의 죽음에 대해 미리 사유해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의의가 있지 않을까. 내가 죽기 직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훌륭하고 품격 있는 인생을 설계할 것인가 고민해볼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오로지 ‘자살’만이 중대한 철학적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이다. 비록 가끔 버겁고 힘든 무게가 나를 덮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순간, 이루면 방방 뛰어다닐 정도로 설레는 목표, 그저 하기만 해도 충만한 행복감이 느껴지는 소소한 행복들은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이다. 세상에 던져졌을 뿐인 난, 백지 위에 나름의 의미를 그리고 찾아가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분을 계속 버티며 살아가게 했을까. 물어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