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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곧 나를
자유롭게 한다.

판단 없이 바라보기

by 신선한량

문이 닫히는 순간


"성수기라 다들 바쁘고 놀러 가고 싶은데 그날 일정을 잡는 것은 좀 그렇지 않아요? “

며칠 전 박 모 해설사가 내게 흘린 말이다.

최근에 김 모 해설사가 자신의 자연환경해설사 보수교육 출장을 해설사 단톡방에 올린 직후였다.

그녀의 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나는 그에게 답신을 보냈다.

요지는 해설사들과 충분히 논의하고 진행하시라는 말을 남겼다.

일부 해설사들이 논의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어 신경이 쓰인다는 말도 덧붙였다.

잠시 후 구구절절 논리와 근거로 무장한 장문의 답변이 돌아왔다.

문닫히다.jpg


왜 논의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오해를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고 했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은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날의 일들이 불쑥 안으로 치고 들어온다.

그는 나보다 대여섯 살 연상에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면담이 있던 날 그는 내가 보낸 카톡 이미지와 관련된 문서와 근거자료들을 프린트해서 내 앞에 내밀었다.

고양이 앞에 붙들려온 쥐처럼 나는 검사 취조장 의자에 찌그러져 있었다.

그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 그리고 근거자료를 들이밀면서 청산유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불만을 가진 상대의 생각이 뭔지 중재해 달라고 했다. 가슴에 돌이 하나 더 얹혔다.


면담이 끝나갈 무렵 그의 자초지종을 듣고 작은 탄식을 뱉어냈다.

“해설사들만의 건전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게 쉽지 않네요”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한다.

서로 이해와 오해를 버무린 뒤라 우린 서로에게 감화되었다.


‘각자의 개성은 살리되 서로 조화를 이룰 수는 없을까?‘


사실 내 기질 자체가 조화와 이상이다.

현실의 규칙을 무시할 수 없고 그들의 속성을 간과할 수 없어

어떻게든 좋은 색으로 배합하려 했으나

붓을 잃어버리거나 색 조합에 실패하거나 옷을 버리거나 구겨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색이 나오기도 했다.


’어느 선까지 담당자가 개입하고 어디까지 그들의 이슈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도록 해줄 수 있을까?’


종종 내 머리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주제다.

내가 나서야 할 영역과 해설사 자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영역은 서로 다르다.

어느 날 그들의 문제가 내 안으로까지 들어왔다.

누구를 겨냥하거나 잘잘못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모난 결론은 또 다른 문제를 다시 잉태한다.

그렇다고 누구의 편을 들어줄 수 없고 어떤 일이든 일단락은 지어야 한다.

사실 당시 그녀의 말만 듣고 그의 입장이나 전후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성급하게 답신을 보냈다.

불쑥 낯설어진 그에게 어떤 자극이라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불만을 표시한 그녀를 뭐라고 할 수도 없다.

답답한 현실에 누구에게라도 푸념을 했어야 했으리라 갑작스러운 피드백에

그는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 멍했을 수 있다.



다름은 거리감을 만든다.


그는 자기 방식이 강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대면해서 상의하기보다는 톡으로 의견이나 업무를 공유했다.

독자적으로 순찰을 가고 트레킹을 좋아하는 나 홀로 활동이 두드러진 사람이었다.

튀는 것은 남의 이목을 끌기도 하지만 거슬리기도 한다.

해설사들과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알았다.

나이가 지긋하고 개성이 강한 그에 비해 젊은 해설사들은

그가 결정을 하면 맞추는 식으로 일을 진행해 온 듯하다.

자기 중심성이 강한 나마저도 그를 이상하고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주말 근무를 해야 하는 국립공원의 특성상 직원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기 어렵다.

드문드문 주고받는 대화보다 단톡으로 확실하게 의사표시를 하고 싶은 게 그의 방식이었다.

그날 박 모 해설사의 의견에 얹혀서 충분한 논의가 없었다는 나의 말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말은 찜찜한 험담으로 남았다.

사실 그녀의 말이 영향을 주었을지언정 그에게 답신을 보낸 것은 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판단 멈추기.jpg 사진: Unsplash의Grace Galligan


판단을 멈출 때 우리는 유연해진다.


해설사들을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실로 복잡하고 오묘하다.

내 생각만큼 따라와 주지 않는다고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프로그램이 있을 때면 서로 엇갈리기도 한다.

현수막은 누가 설치하고 행사장 세팅은 누가하고 홍보 문안은 누가 만드는지

각자의 역할을 담당이 배정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매한 일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때는 그들이 각자도생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간의 업무영역이 다르고 성향도 다르다.

의논과 조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심에서 조율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러저러해도 어떻게든 굴러가기야 하겠지만 가끔 흐름이 막히면 문제가 생긴다.

그건 사무소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애매한 일들이 나에게 넘어오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렇게 골머리를 앓다 보면 그들을 멀리하기도 했다.

한때 3개월 동안 해설사 사무실에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내 안으로만 침잠하다 보니 생각이 많아져서 내 입장만을 고수했다.

직접 맞대다 보면 해설사들의 도움으로 일이 풀린 적도 많았다.

내 관점으로 시야가 좁아지다 보니 나만 보였다.



우리로 우회할 때 나는 확장한다.


최근에 화두가 바뀌는 중이다.

자기 발견과 정체성을 잠시 옆에 두고 우리로 우회하는 중이다.

나에게만 몰두하는 나에게 그녀가 왔다.

내 못난 구석을 채워줄 거라는 무의식적인 선택이 그녀를 향했다.

강한 인상과 달리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만이 아니라 그 뒤에 처가 식구라는 거대한 배경이 한꺼번에 왔다.

일대 혼란이었다.

혼자 연필깎이 들어가 10여 년을 깎여 나가다가 설레게 하는 일을 만났다.

지금의 국립공원 탐방프로그램이 그랬다.

처음으로 내가 상상만 하던 구상을 현실로 이뤄줄 거 같은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글을 쓰다 보면 나를 자각하는 걸 넘어서서 내 생각과 감정에 누군가가 반응해 주고 그런 일을 근사하게 봐주는 게 신기하고 새로웠다.

삶의 변곡점마다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아내가 그렇고 직장동료, 특히 해설사들이 그랬고, 친구들이 그랬다.

그들은 설렘과 기쁨도 주지만 고통과 슬픔도 주는 존재들이다.

먹구름이 드리우고 천둥이 칠 때면 거기서 비를 흠씬 맞는가 하면 우산을 쓰거나 은신처로 피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골몰했다. 지금 나에게는 어떤 것이 최선 인지를


결국 사람이다.


기획하는 걸 좋아한다.

나는 줄곧 마당을 깔아주는 사람이었다.

조금 시들해졌지만, 여전히 친구들 사이에서 약속을 잡고 모임을 주선한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나의 취향과 관점을 얹어 예술과 생태를 접목한 프로그램을 만든다.

그 마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들은 그곳에 와서 잘 놀아주고 이야기하면 된다.

그런 모습을 늘 가슴 시리듯 그리워하고 갈망한다.

어제 아내가 보낸 사진을 잠시 쳐다본다.

큰 놈과 둘째는 가끔 티격태격하는데 어제는 햄을 볶으려고 칼질하는 형 옆에 동생이 지그시 옆자리를 지킨다. 혼자는 조금 외롭다.

둘은 조금 더 푸근하다.

그 마당에 같이 있지만 늘 행복할 수는 없다.

복작대지만 그래서 여전히 갈등을 회피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엮이고 엮여주면서 한바탕 들썩인다.

내가 잠시 찌그려져서 그들이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다.

일부러 아이들에게 장난을 치고 아내에게 치대고 직장후배에게 아재 개그를 시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생활이 각박하고 고달플수록 내 입과 몸은 쉬지 않는다.

혼자이면서 함께.jpg 사진: Unsplash의Ivan Moncada


혼자이면서도 함께 있기

’ 나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

며칠 전 아내와 오랜만에 카페를 갔다.

브런치의 식감도 좋았지만, 통창 너머에 비가 내리는 초록색 전원 풍경이 푸근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내 컵과 쟁반을 치웠다.

무의식적으로 그녀 것은 마치 남인 것처럼 놔뒀다.

아내는 그때부터 틀어졌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다.

그게 오빠의 못된 성격이라니까” 이기심이 깊이 베여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던 속성은 여전했다.

가끔은 무의식적으로 나를 먼저 챙기고, 그녀를 뒷전으로 두기도 한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은, 때로 내 안의 굳은 틀을 흔든다. 틀이 느슨해질 때,

우리 모두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유튜브 그랜드마스터 클래스에서 강연한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꽂힌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남에게 들려주기 위함이니 독백이 아니라 항상 대화다.

그러면서도 하나뿐인 나의 목소리와 음성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나를 위해 존재한다.

’따로‘와 ’ 서로‘가 주고받는 모순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진다.

오늘 슬며시 아내가 보고 싶다. 어제 잘 통화하다가 삐거덕거려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농을 서로 건넬 것이다.

온전한 삶은 늘 입체적이다.

사방팔방에서 보고 만지고 헤아리려면 시간과 이해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해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조만간 그와 그녀를 따로 만날 생각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각자 들어볼 생각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감을 잡고 싶다.

사이는 상대를 헤아리고 나를 마주하는 일이기에 에너지와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봐줘야 하는 일이다.

판단하는 순간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마음의 문이 닫힌다.

그의 전후 사정과 감정과 태도를 읽어주는 마음은 상대에게 깊은 믿음과 신뢰를 준다.

이해 없는 판단은 관계에 벽을 쌓지만, 판단 없이 이해하려는 태도는 진정한 교감이 함께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다를 것이고, 오해도 다시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선택은 나를 가볍게 하고,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이해는 상대를 살리고, 나를 놓아준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조금씩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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