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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 Jan 28. 2023

비행기에서

Road To Iraq (1)


   너무 바빴던 낮 시간이 일몰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나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긴 여정을 위한 막바지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약을 사고, 은행에 가고, 치과에 들리고, 중고차 판매를 위해 인감도장도 등록했다. 피부과와 통신사에 다녀오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신없는 하루가 반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나는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그 뒤론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나는 어느새 자정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탑승 플랫폼에 앉아있었다. 분명 그 사이에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직장 동료들을 만나 짐을 부치고 저녁을 먹었다. 늦은 시간.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이제 심야로 접어들고 있었다. 북적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플랫폼의 고요한 적막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을 상기시켰다. 그럼과 동시에 시시콜콜한 지난 시간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마주한 눈앞의 낯선 광경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는 걱정이라고 읽지만 다른 누군가는 설렘이라고 표현하는 그것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순서에 맞춰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설국을 맞이하는 한국을 뒤로하고 눈이라곤 내린 적 없을 곳으로 향하는 여행을 늦은 밤 싸라기눈이 배웅해 줬다. 인천에서 출발해 두바이에 도착할 이 2층짜리 비행기는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승객들을 받아들였다. 기내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들. 필경 유럽으로 향할 테지. 감추어지지 않는 무수한 설렘 사이에 끼어 낯선 곳으로 도전을 하러 간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무미건조했다. 예상했던 것만큼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향땅을 떠나 광야로 향하는 마음이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신기함이 가장 컸다. 물론 여러 가지의 작은 걱정거리들을 품고 있긴 했지만 내 시선을 가로막을 정도로 나를 괴롭히진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막연한 두려움에서 나를 꺼내줄 책 한 권도 챙겼으니 나는 아주 든든한 마음으로 이륙을 기다렸다.

   자정에 출발하기로 했던 비행기가 궂은 날씨 때문에 조금 늦게 이륙했다. 비행기는 웅장한 굉음을 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시끄럽고 기분 나쁘기까지 한 전투기 이륙소리와는 사뭇 달랐다(나는 지난 8년간 전투기의 이륙소리를 듣고 지냈다). 비행기는 멀리 떠나기 위해서 제 고도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또 계속 올라갔다. 이 과정은 승객들이 몇 번이고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침을 세 번 삼켰을 즈음 비행기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곧 천장 구석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안전띠 경고등이 꺼졌다. 어수선한 기내가 정리되고 하나둘씩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했다. 다행히 4년 만에 탄 비행기는 아직 낯설었다. 나도 조금은 나의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고개를 들면 복도 사이에 있는 화장실이 보이는 자리. 썩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부산한 움직임. 화장실에 드나드는 승객들과 여전히 웃고 있는 승무원들이 복도를 채웠다. 일행들끼리 소곤대는 소리도 기분 좋은 출발에 힘을 더했다. 새벽 한 시가 넘었을 시간이었지만 잠자리에 드는 승객은 없었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으리라. 나도 나의 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나는 승무원에게 기내식이 몇 시에 제공될 예정인지 물었다. 외국 항공사여서 한국인 승무원이 몇 분 안 계셨다 보니 예상보다 일찍 영어를 사용하게 됐다. 어째서인지 잠시 뒤에 기내식을 제공한다고.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가방에서 책과 펜을 꺼내 나의 골방의 문을 열었다. 나는 곧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나의 시야는 좁아졌고 무의식 속에 주변의 분주한 움직임이 익숙해졌다. 맑은 정신과 그렇지 못한 눈꺼풀이 참 대조적이었다. 귀에 꽂은 장치는 주변의 소음을 모두 가져가줬다. 노래를 듣지 않더라도 앞으로의 여정에 꼭 필요하겠구나.

   어쩌면 누군가에겐 고역일 수 있는 장시간 비행이 나에겐 행운처럼 여겨졌다. 행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내가 가진 취미라는 게, 혹은 비전이라는 게 결국 책상 앞에 앉아 혼자 끄적이고 읽는 것이라서 그렇다. 분명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뻐근해지고 피곤이 쌓이는 게 생생히 느껴질 것이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취미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커다란 행운이다. 그래서 슬리퍼를 주지 않는 에미레이트 항공사와 슬리퍼를 캐리어에 부쳐버린 나를 원망하면서도 책과 펜을 챙겨 놓은 나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주변의 여러 다른 행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열 시간이 넘는 자신만의 제자리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불행한 사람들도 구석구석 보였다. 특히 이 작고 좁은 자리는 나이 드신 분들에겐 고역인 게 분명했다. 더 늦기 전에, 꼭 부모님과 저 멀리 멋진 풍경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두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일순간 맛있는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는 것으로 마음의 경종을 울렸다. 나름 즐겁게 책을 읽고 있었나 보다. 시간이 다시 한번 나를 배신했고 너무 빠르게 흘러가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억울함이 몰려왔다. 실제론 몇 장 못 읽었던 것 같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향기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승무원들이 빠르게 좌석 사이를 지나면서 아이들에게 기내식을 보여주며 식사할지를 묻고 있었다. 곧 기내식이 제공된다는 뜻이었다. 이미 눈치 빠른 승객 몇 명은 기울였던 좌석을 제자리로 세우고 무릎 위로 간이 책상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광경이 시각과 후각을 뚫고 한 번에 전해진다면 누가 자신 있게 책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책을 덮어 의자 주머니에 넣었다. 작은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코를 간지럽히는 맛있는 빵 냄새도 오랜만이었다.

   기내식은 여행의 시작을 실감시켜주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제 이것을 시작으로 한식을 그리워할 것이란 걸 적나라하게 알려줬다. 외식의 시작이자 한식과의 이별을 고하는 첫 번째 식사였다. 도착지가 어디였는지보다 기내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기뻐했던 학생이 자라나 이제 기내식을 보며 씁쓸하게 미소를 짓게 됐다.



  식사는 금방 끝났다. 빵이 기억에 남는다. 맛있게 먹었다. 얼마 안 가 갑작스럽게 잠이 쏟아졌다. 승객이 많은 탓에 개인 트레이를 반납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잠을 참는 건 고역이었다. 그래도 얼른 졸음을 뒤로하고 그 틈을 통해 여기에 일기 아닌 일기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눈을 잠시라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게 기억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더 잠에서 깨고 싶었다. 글은 그렇다. 아무리 순간적인 상념을 휘갈기며 빠르게 써 내려간다 해도 처음의 강렬한 인상을 있는 그대로 모두 보존하기가 너무 어렵다. 종이에 떨어진 한 방울의 눈물처럼 잠시 돌아보면 그 사이에 이미 스며들어 작은 자국만 남아있다. 쓰다가도 생각하다가도 사라지는 게 글이다. 적어도 내가 겪은 글은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이것만 얼른 적고 잠에 들고 싶어졌다.

  새벽 두 시 반. 기지개를 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음식과 함께 알코올을 들이켠 승객들은 금세 잠에 들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물이나 음료를 마신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사’라는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고 나니 승객들은 한층 더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에 푹 빠지게 됐다. 그들은 잠에 빠질 준비도 함께 마친 듯했다. 양치질을 하려는 승객들이 화장실 앞에서부터 줄지어 복도에 늘어섰다. 조금은 게을러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식사 시간이 끝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가 요동쳤다. 모든 좌석의 화면에 경고 메시지가 뜨고 안전띠를 메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승무원들은 일어서 있는 승객들에게 앉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귀를 닫고 입만 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의 관성을 유지했다. 나의 대각선 앞자리에는 한 잔 더 마시고 싶어 고개를 들어 승무원과 눈을 마주치려는 승객이 있었고, 그 옆에 그와는 반대로 고개를 떨군 채 이미 잠에 빠져버린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승객들 너머로 승무원에게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꽤 지날 동안 비행기의 진동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림이 심해져서 승무원들은 기내의 불을 모두 끄는 것으로 승객들의 협조를 암묵적으로 요구했다. 내 오른쪽에 앉은 승객은 지속되는 난기류에 메스꺼움을 느껴 화장실에 가려고 했지만 승무원은 그녀를 제지하고 구토를 담아낼 종이봉투를 대신 쥐어줬다. 나 역시 이런 3차원적인 진동 속에 작은 핸드폰을 부여잡고 일기를 쓰다 보니 금방 멀미를 느꼈다. 잠에 빠졌던 어린아이도 어느새 잠에서 깨 최선을 다해 울음으로 불편을 호소했다. 다행히 비행기는 얼마 안 가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승객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남은 시간을 다시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피로감과 포만감, 거기에 더해진 멀미 기운을 핑계로 잠에 들기로 마음 먹었다.






  비행기는 인간군상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평소에 쉽게 지나쳤을 무수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는 강제로 그들에게 시선을 두게 한다. 짧은 대화를 하게 한다. 다닥다닥 붙은 비좁은 각자의 세상에서 그 경계를 조금씩 조정하며 장시간을 버텨내는 훈련은 우리를 사유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이곳에서 자유로운 건 복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승무원들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그들 역시 이 고철덩어리에 종속된 사람들인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서로의 상황에 대해, 각자의 처신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래서 비행기는 그 안에 앉은 채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일상에서 벗어나 낯섦을 느끼게 만든다. 여행의 설렘에는 몇 가지의 조건들이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중에 순수한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이렇게나 쉽게 만족시킬 수 있다.

  잠시 지긋지긋할 수 있는 오랜 이야기를 하자. 꽤 긴 시간 동안 밤하늘은 꿈을 담은 한 폭의 바다로 여겨져 왔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껏 유랑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바다. 특히 밤이 맑은 날엔 그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왜 밤이 그렇게 여겨지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줬다. 지금 이 순간 꿈의 바다를 향해하는 이 고철 덩어리는 정말 말 그대로 여기에 탑승한 몇백의 꿈을 나르고 있다. 꿈의 바다.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이 사실은 꽤나 유명한 과거의 말로부터 전해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말을 통해 전달받은 사실은 직접 느끼기에는 너무 어렵다. 마찬가지로 비행기에 탄 채 겨우 몇 센티미터뿐 안 되는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우리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 속해 있는지를 쉽게 알아챌 수 없다. 한 번도 꿈을 제대로 꿔 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밤하늘을 올려다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저 아래 어딘가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꿈에 대해 생각하는 어린아이가 느낄 비행기의 위대한 인상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꿈이란 어쩔 수 없이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언제나 올려다볼 수만 있는 것일까. 비행기가 지상에 착륙하는 그 순간에 꿈이라고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다시 우리를 일상으로,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곳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해답을 이번 여정에서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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