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잡아먹을 년 (1)

낙태령 - 1부

by 이시온

7월의 햇살이 요동치는 어느 평범한 금요일 저녁, 서울 강남의 도로 위를 전기차들이 조용히 미끄러져 지나간다. 서서히 져가는 해의 뜨거운 햇살은 건물 사이와 가로수와 신호등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도시의 화려한 모습을 비춘다. 매끄러운 회색 건물 벽에 반사되어 출렁이는 빛은 유리창과 셔츠 소매, 땀 맺힌 이마 위로 스며들고, 빽빽이 줄지은 가로수 사이로는 짧은 그늘이 깔린다. 그늘 아래, 누군가는 걸음을 늦추고, 누군가는 아예 멈춰 서지만, 오래 머무는 이는 없다.


빌딩 숲 사이로 각기 다른 인생들이 누군가에게는 나근하게, 누군가에겐 바삐,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누군가는 전화를 붙들고 빠른 잰거름을 옮기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거리를 지나친다. 길가에 잠시 멈추어 창문을 내리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택시기사의 팔뚝 위로 땀방울이 맺히고, 누군가의 저녁을 간직한 채 시동을 건 전기오토바이는 창틀에 걸린 깃발처럼 바람을 휘감고 달린다. 잠시 정차했다 출발하는 그 뒷모습엔 피로도, 초조함도 느껴졌지만, 누구 하나 시선을 오래 주지는 않았다. 배달은 오늘도 늦어선 안 되고, 누군가는 그 음식을 이른 저녁 삼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리 위를 지나는 2호선은 여느 때처럼 수백 명의 사람을 태우고 매끄럽게 선로를 달린다. 객실 안은 고요하다. 어떤 이는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인 채 꾸벅꾸벅 조는 중이고, 어떤 이는 스마트폰 화면을 멍하니 내려다본다. 창밖의 풍경은 일정한 속도로 뒤로 밀려나고, 사람들은 철제 객실에 등을 기대고, 각자의 하루를 향해, 혹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아무런 질문 없이 나아간다.


파란색 전기 버스 창밖으로 강남역 사거리가 스쳐 지나간다. 멀리서 보면 그저 또 하나의 번화가일 뿐이지만, 그 안엔 각기 다른 시간과 속도를 지닌 사람들이 교차한다.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켜지자, 노트북을 가슴팍에 안은 청년이 재빨리 먼저 발을 내딛는다. 무선 이어폰을 낀 그의 입술은 바쁘게 움직이고, 걷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건너편에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통화 중인 휴대폰에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자동응답기처럼 “네, 알겠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의 손목시계는 빌딩 숲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에 반사되어 오색 빛을 내뿜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 맞은편 인도, 오래된 자판기 앞엔 중년의 경비원이 서 있었다. 작고 얇은 종이컵 하나를 손에 쥔 채, 쏟아지는 사람들의 물결을 지켜보다가 뜨뜻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뜨겁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그 음료처럼, 그의 얼굴에선 그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시의 사람들에겐 특별한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아침과 밤, 출근과 퇴근, 일과 휴식, 사람들은 이미 계획된 스케줄 속에 스스로를 정확히 맞춰 넣는 데에 능숙했다. 모든 것이 익숙했고, 모든 것이 어제 같았다. 도시의 움직임엔 일종의 규칙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 누구도 주위를 오래 바라보지 않고, 그 누구도 스스로의 속도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스마트워치의 윙윙대는 진동, 허겁지겁 지갑을 여는 손길, 버스 정류장의 QR 체크인, 전광판에 쏟아지는 뉴스 헤드라인. 거대한 생명체처럼 보이는 도시 안에선 모든 것은 익숙했고, 편리했으며,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서울 어딘가, 지하철 노선도 밖으로 밀려나고, 지도 앱에선 오류가 나며 경로 안내가 끊기는 지점. 버스는 바람을 가르며 재빨리 지나치려 하고, 택시는 좀처럼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곳. 언덕을 따라 이어진 좁디좁은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마치 거대한 수목의 뿌리처럼 얽혀 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오래된 벽돌 담벼락엔 갈라진 싸구려 시멘트 패치가 덕지덕지 덧대어 있다. 그 앞엔 시멘트 먼지를 맞으며 수명을 다한 화분들이 엎어진 채 말라가고 있었다. 빨랫줄이 창틀과 창틀 사이를 잇고, 반쯤 마른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휘날린다. 삐걱대는 창문 너머에선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 나온다. 창문 아래, 빛이 잘 들지 않는 틈엔 검은색 비닐봉지가 찢어진 채 엎어져 있다. 내용물은 흐릿하게만 보이고, 그 냄새는 사람보다 고양이에게 먼저 닿는다. 길고양이들은 이 건물의 유일한 자유로운 존재들처럼, 계단과 계단, 창틀과 난간, 쓰레기봉투와 사람의 발자국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밤이면 더욱 선명하게 퍼져 나가고, 그 소리는 어느 순간엔 사람의 울음과도 닮아 있었다.


햇살은 전신줄과 빨랫줄에 조각조각 잘려서 그 위로 떨어지고, 풍겨내는 악취는 더디게 증발한다. 삶은 이곳에서 기계가 아니라 손과 시간으로 굴러간다. 언덕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도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골목은 좁고, 더욱 좁아진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 마주 오는 이는 한숨을 쉬며 벽에 등을 붙인다. 계단과 계단이 얽히고, 각도를 잃은 오래된 담벼락이 집과 집 사이를 겨우 나눈다. 5층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빌라와 맨션들은 하나같이 균열이 가 있었다. 수십 년간 여러 사람들의 공간을 지탱하던 콘크리트는 오래전에 숨을 멈춘 듯,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간판은 반쯤 떨어져 있고, 불이 꺼진 상가는 이미 몇 달째 비어 있었다. 골목 끝 어딘가에선 아이 울음이 잠깐 들렀다가 이내 사라지고,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기침 소리만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평화맨숀, 이름만 들으면 마치 조용한 푸른빛의 공원이 내려다보이고 화사한 대리석 벽에 흰색 창살 안으론 베이지색 커튼이 나부낄 것 같은 곳. 하지만 현실은 그 단어와는 너무도 먼 풍경이었다. 평화라는 말은, 이 건물과는 애초에 상관없는 언어처럼 보였다. 서울 외곽의 오래된 산 중턱,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의 한가운데. 도로의 끝, 지도에서도 선이 끊긴 지점에서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지친 듯한 건물 하나가 뒤틀린 하늘 아래 서 있다. 희끄무리하게 바랜 붉은 벽돌은 마치 불에 그을린 것처럼 색이 고르지 않았고, 곳곳엔 비가 스며든 흔적이 얼룩처럼 남아 있다. 눈을 들면, 외벽을 따라 아무렇게나 얽힌 전선줄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 아래로는 철제 방범창과 창틀에 덕지덕지 붙은 테이프 자국, 찢긴 방충망이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비명을 질러대는 듯했다. 한때 누군가 애써 붙여놓았던 에어컨 실외기는 기울어진 채 벽에 매달려 떨어질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관에서 새어 나온 녹물이 벽돌을 따라 흘러내리다 끊긴 자리에선 녹색빛깔의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1층 출입문은 금이 간 유리문, 누군가 셀로판테이프로 대충 고정해 둔 문고리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한때 ‘현관 자동 잠금’이라 적힌 은색 버튼과 인터폰은 눌러보아도 조용한 적막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 옆엔 누군가 휘갈겨 써 붙인 종이쪽지가 흘겨 붙어 있었다.

“사이비 사절”

“외부인 출입금지”

그 어떤 안내문에도, 주체는 없다. 그저 존재하는 삶의 잔재들만, 덕지덕지 붙어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런 안내문이 언제 붙여졌는지, 누가 그 글씨들을 썼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물어야 할 이유도, 궁금해야할 이유도 평화멘숀의 주민들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계단은 수만 번의 발자국을 반증하듯 심하게 마모되어 중간중간 시멘트가 파였고, 난간은 사람의 손자국보다 시간이 먼저 닿은 흔적으로 닳아 있었다. 장마철엔 꼭 한 계단쯤 물이 고이고, 그 물웅덩이 속엔 낙엽과 마지막까지 다 태운 담배꽁초가 함께 썩어간다. 복도는 좁고 어두우며, 형광등은 어김없이 두세 개가 꺼져 있다. 전등 커버엔 오래된 파리 사체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쨍그랑


고요한 적막을 찢어 놓은 건, 202호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오래된 벽을 타고 울린 그 소리는 마치 단단한 무언가를 내리치는 둔탁함과, 뒤이어 터지는 짧은 비명이 한데 섞여 있었다. 주변에서 쓰레기봉투를 뒤지던 고양이들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마치 무슨 일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꼬리를 번쩍 세우고 부리나케 골목 끝으로 흩어졌다. 전신줄과 빨랫줄 위의 참새 무리도 순간 날갯짓을 멈췄다. 그리고는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202호 창문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의 검은 눈동자가 작은 반짝임을 띠며, 마치 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202호의 방충망은 오래전부터 찢겨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틈이 들썩이며 낡은 금속 틀에 부딪혀, 마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얇은 금속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 틈새로 새어 나온 또 한 번의 둔탁한 소리가, 평화맨숀의 적막을 마침내 완전히 부숴 놓았다. 찢어지고 해진 방충망 사이로, 날카롭고 억눌린 고함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야 이 개 같은 년아. 내가 설거지해 놓으라고 했어 안 했어.”


202호에서 나오는 이러한 소리들은 딱히 아주 특별하거나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이 건물, 평화멘숀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수십 번쯤은 들어본 소리였다. 매일 밤, 혹은 매일 아침, 아니면 대낮에도, 또는 새벽에도, 202호에서는 여러 다양한 소리들이 삐져나왔다. 탁자 위 무언가를 힘껏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 물컵이 쓰러져 바닥을 굴러가는 소리, 창문에 부딪히는 손바닥 소리, 짧게 끊어진 고함, 그리고 그 뒤를 늘 이었던 건 낮고 길게 이어지는 울음. 평화맨숀의 주민들은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그저 발걸음을 조금 늦추거나, 아주 가끔 202호의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볼 뿐이었다. 아랫집은 TV 볼륨을 조금 높였고, 윗집은 창문을 닫았다가, 몇 분 뒤 다시 열었다. 어느 누구도 경찰에 전화하거나 끼어들어 중재를 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조심히, 그리고 조용히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 이건 202호 만의 일도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그게 일상의 일부였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서로에게 욕을 하고,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일. 그 모든 건 이 낡은 건물의 벽과 천장, 바닥을 통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하루를 채우는 소리 풍경이 되었다. 도시의 카페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지하철 역사에서도 나지 않는 소리, 평범한 서울의 지도엔 표시되지 않는 소리였다. 여기서는 당연한 이 울림이, 그 바깥에서는 분명히 이질적인 소리였다.


“키워준 거에 대한 고마움이나 존경이 없어 이 씨발년은”


쩌적. 그 소리는 단단하게 말라붙은 오래된 나무가 계속된 충격을 견디다 못해 부러져 나가는 소리였다. 마치 그 안에 갇혀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 짧지만 깊게, 그리고 강력하게 202호를 진동시켰다. 곧이어 적막이 따르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명도, 고함도, 발걸음 소리도.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눌려버린 듯, 숨소리마저도 벽과 천장에 달라붙어 사라졌다. 그 정적은, 폭력의 끝이 아니라 폭력 이후에 남은 텅 비어버린 공허였다.


“아악 씨발! 병신 같은 년, 니만 없었어도, 내가 씨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202호 안. 엎어진 작은, 오래된 나무 접이식 밥상은 다리 하나를 잃은 채 그 위에 한때 ‘밥’이라 불렸을 음식들을 모두 바닥에 쏟아버리고 엎어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밥알과 국물 자국이 얇은 노란 고무 장판 위에 얼룩을 만들었고, 그 위로 머리카락과 먼지가 엉겨 붙었다. 천장에 매달린 시퍼런 형광등은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빛을 내뿜으며 방 안을 잔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빛은 벽지의 곰팡이 자국과, 언제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는 자주색 가스스토브 위의 기름때를 아무렇지 않게 비추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설거지 거리 위를 날파리들이 느릿하게 선회했다. 주방 쪽에서 나는 냄새는, 오래 묵은 젓갈과 사람의 체취가 뒤섞여 한 번 들이마시면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진득했다. 주방 바로 옆, 거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엔 군데군데 가죽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난 검은색 소파가 있었다. 그 앞의 오래된 TV는 202호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들을 어떻게든 덮어보려는 것인지 한껏 웅웅대며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메우기엔 역부족이었다.


202호 안의 작은 주방, 시퍼런 형광등 불빛 아래. 엎어져버린 밥상 옆, 한 작은 아이가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양가희, 또는 미친년, 아니면 씨발련, 가끔은 부모 잡아먹을 년. 그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몇 초가 지났을까, 가희는 시퍼렇게 멍든 눈을 천천히 떴다. 쉰내가 코를 찔렀다. 엎어진 채 바닥을 축축이 적시고 있는 김칫국, 그리고 그녀가 애써 차려놓은 작은 반찬들은 이미 형체를 잃은 채 사방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가희의 눈길이 옆으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곳에 다리를 하나 잃은 채, 초라하게 쓰러져 있는 밥상이 눈에 들어왔다. 없어진 다리는 두 동강이 난 채 김칫국 속에 잠겨 있었고, 붉은 진득한 국물은 나뭇결 사이로 스며들며 쉼 없이 두 동강 난 다리를 빨갛게 물들여갔다. 가희는 그 밥상이 언제부터 집에 있었는지 떠올려보려 했다. 5년? 10년? 아니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난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을 위해 밤낮없이 밥을 퍼 나르던 밥상은 지금, 다리가 부러진 채 그 본연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초라하게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나무를 깎아 만든 자그마한 접이식 밥상. 짙은 갈색의 나뭇결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여기저기 패인 자국과 상처를, 코팅이 벗겨져 본연의 하얀 속살을 드러낸 자리, 그리고 접이식 다리를 붙들어 매던 쨍한 오렌지색 플라스틱 힌지. 펴거나 접을 때마다 힘을 주어 꾹 눌러야 움직였고, 움직일 때마다 낡은 경첩 소리가 뻣뻣하게 울렸다. 아무리 낡고 오래되어 누군가에겐 초라해 보이는 밥상일지라도 가희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을 땐 한 번도 그 밥상 위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땐, 그 밥상은 오로지 아버지,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만을 위해 존재했다. 아버지가 식사를 할 때면, 가희는 그 밥상을 펴고 접시를 날랐다. 아버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겉으로는 정갈하고 깔끔하게 보이도록 차려냈지만 그 속은 늘 텅 비어 있었다. 오래전 교회에서 무료로 나눠준 빛바래고 긁힌 흔적이 남은 오래된 은수저 세트를 놓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 은수저 외의 다른 식기는 만지지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러곤 백색 자기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았다. 국은 넘치지 않게, 하지만 너무 적지도 않게 맞췄다. 식사가 시작되면, 아버지라는 사람은 밥상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고 가희와 어머니, 어머니라고 불리는 사람, 그 둘은 나란히 밥상 옆에 쪼그려 앉았다. 차갑게 식은 장판 위에 무릎을 붙이고, 스테인리스로 된 수저를 손에 쥐었다.


뚝… 뚝… 뚝… 김칫국물이 밥상 모서리에서 떨어졌다. 형광등 불빛이 그 방울마다 부서져 반짝였다. 가희는 눈을 꾹 감았다. 뚝… 뚝… 뚝… 그리고, 뚝. 마지막 물방울이 떨어진 순간, 가희는 왠지 언젠가 법상처럼 되리라 생각했다. 언젠간 나도 부서지겠지. 언젠간 나도 마지막이 있겠지. 그러면 마침내 쉴 수 있지 않을까.


가희는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젠 익숙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어떻게 해야 덜 맞을 수 있는지 점점 깨달을 수 있었다. 최대한 비굴하게, 최대한 비참하고 처참하게, 또 최대한 짐승 같은 소리를 내야 했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입술을 덜덜 떨며 숨을 가쁘게 헉헉대며 몰아쉬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야 했다. 목소리는 끊어질 듯 갈라져야 했다. 그 울음은 점점 돼지가 도살장에 끌려가며 내는 목멘 비명과도 닮아갔다. 그럴수록 더욱 깊이, 아버지라는 사람의 구둣발은 폐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숨을 쉬려 할 때마다, 발끝이 더 세게 눌러왔다. 마치 이 집 안의 공기마저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들이마실 수 없다는 듯이 단단하고 차가운 고뭇덩어리가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음절과, 살려달라는 뜻만 남은 괴성을 내지르는 것 외에는. 그 소리가 터져 나올 때, 아버지라는 사람의 손길은 조금은 빨리 멈췄다. 불쌍해서였을까, 아니면 완전히 굴복한 상대를 바라보는 정복감이 그를 만족시켰기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희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오늘은 얼마나 덜 맞느냐였다. 그래서 가희는 배운 대로, 무릎과 손바닥을 바닥에 붙이고, 허리를 가능한 한 낮게 숙였다. 짐승이 땅바닥을 기듯, 인간의 모양을 더 잃으면 잃을수록 덜 맞았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조차, 가희는 혐오나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 감정은 사치였고, 그저 살아남는 방법만이 그녀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야, 뭐 하냐? 안 치워?”


시퍼렇게 부어오른 눈두덩이, 그 부은 살 틈새로 빛바랜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피어났다. 눈동자는 물에 젖은 종이처럼 힘이 없었고, 그 안엔 두려움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가희는 숨을 고르며 배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1초도 지나지 않아 노란색 끈적이는 장판 위로 묵직한 발걸음이 울렸다. 쿵, 쿵, 쿵, 쿵, 그 발소리는 주방을 가로질러, 다시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라고 불려야 하는 그 사람. 그 그림자가 가희의 앞을 덮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서로 붙인 채 빌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목소리는 울음과 숨 사이에서 떨렸고, 단어 하나하나가 방 안의 차가운 공기에 산산조각 나 사라졌다. 그녀의 어깨는 절로 움츠러들었고, 형광등 빛이 그 위를 시퍼렇게 덮었다.


“치우라고”


가희가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우고 나서야,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은 무겁게 숨을 몰아 내쉬며 자리를 떠났다. 가희가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녀의 여윈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고 본능적으로 바닥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창백하다 못해 희게 질린 다리 위로, 검붉고 시퍼런 자국들이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마치 수채화 물이 종이 위에서 스며들어 번져 나가는 것처럼, 그 자국들은 가희의 피부를 천천히 덮어갔다. 몸을 간신히 일으켜 중심을 잡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싱크대를 향해 걸었다. 발바닥이 장판 위를 스칠 때마다, 노란색 끈적거림과 오래 묵은 먼지가 발바닥에 들러붙었다. 싱크대 아래 여닫이문을 열고 작고 해진 빛바랜 노란 걸레를 꺼내었다. 오래전 본래의 색은 사라지고, 군데군데 해져 구멍이 난 천은 손끝에 닿자마자 습기와 거친 촉감을 동시에 전했다. 걸레에서는 음식물 썩은 냄새와 락스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르는 듯한, 묘하게 속을 울렁이게 하는 향이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여전히 발소리를 크게 내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거칠게 거실로 걸어 나갔다. 쿵, 쿵, 그 소리는 방의 얇은 벽과 천장을 울리며 멀어졌다. 그는 가죽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오래 앉은자리 때문에 가죽이 반질하게 변해버린 그 소파는, 마치 그 사람의 전용 자리인 듯 그의 몸에 꼭 맞았다. 곧 리모컨 버튼이 ‘딸깍’ 소리를 냈다. 화면이 바뀌고, TV 속에서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빛은 번쩍였고, 해설자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외쳤다. 가희가 한 단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의 표정은 이미 만족스레 풀리고 있었다. 가희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떤 채널을 틀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높은 검은 울타리가 둘러진 팔각형 경기장, 짧은 반바지 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자들이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핏방울과 땀이 공중에 흩날렸고, 심판의 호루라기와 관중의 함성이 뒤엉켜 거실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조금 전까지 가희의 귀를 때리던 욕설과 고함과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야 이 씨발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지 못한 채 온몸을 사방으로 들썩거렸다. TV 화면 속에서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주먹을 날릴 때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팔각형 검은색 울타리 안에 서 있는 듯 같이 주먹을 앞과 옆으로 휙 휙 휘둘러댔다. 그 주먹은 아직 누구의 몸에도 닿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를 짓이겨가며 가희의 심장까지 울렸다.


“거기선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아씨 좆같이 도 못하네”


알 수 없는 파란색 글씨가 새겨진 반바지를 입은 남성이 주먹을 옆으로 쭉 뻗어 상대의 턱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순간,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맞은 남성은 비틀거리며 옆의 검은 울타리를 꽉 붙잡았다. 온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그의 손 끝에는 필사적으로 몸을 지탱하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겼다. 턱 밑에는 땀과 피, 그리고 침이 뒤엉켜 방울을 맺었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경기장은 잠시 당혹스러운 적막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 열정적으로 떠들던 해설자들조차 말을 멈추고, 마치 그 장면을 감상하듯 고요한 침묵 속에 화면을 지켜볼 뿐이었다. 단 1초도 지나지 않아, 파란색 글씨가 새겨진 반바지를 입은 남성의 발등이 다시 그 비틀대던 남성의 얼굴을 강하게 가격했다. ‘퍽’,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팔각형 경기장을, 그리고 202호를 가득 채웠다. 울타리를 움켜쥐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고, 남성은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흰색이던 바닥은 이미 그가 흘린, 그리고 그 전의 사람들이 흘린,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심판이 급히 뛰어나가 팔을 허우적대며 경기를 멈추자 잠시의 정적이 완전히 깨졌다. 우렁찬 환호성이 폭발하듯 경기장을 메웠다. 그 소리도 역시 TV 화면을 뚫고 나와 202호의 벽과 천장을 울렸다.


“그렇지 씨발! 그거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뒤로한 채, 가희는 빛바랜 노란색 걸레를 손에 쥐었다. 걸레 끝은 이미 쉰 김칫국 색으로 얼룩져 있었고, 손에 닿는 감촉은 눅눅하고 거칠었다. 그녀의 손이 바닥 위를 이리저리 오갔다. 김칫국이 스며든 장판 위에 남은 얼룩이 조금씩 옅어졌다. 걸레질이 마무리되자, 가희는 흠집이 깊게 파인 은식기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 옆에, 국과 밥과 반찬이 담겨 있던 흰색 자기 그릇들을 싱크대로 하나하나 옮겼다. 부서진 접이식 밥상과, 두 동강 난 다리를 하나씩 치우며 가희는 문득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나무 조각은 손끝에 거칠게 걸렸다. 오래 사용해 마모된 결이 부서지며 생긴 가시가 살짝 손바닥을 찔렀지만, 가희는 아프다는 말 대신 조심스럽게 조각을 주워 모았다. 밥상 판을 세워 들자, 김칫국 냄새가 희미하게 스며 나왔다. 그 무게는 의외로 가벼웠지만, 손끝에 전해지는 그 온도와 냄새는 지난 세월의 무게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가희는 밥상과 부서져 버린 다리를 현관문 앞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마치 마지막 배웅이라도 하듯,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나뭇결을 쓸어내렸다. ‘고생했어.’ 빛바랜 입술 사이로, 조그마한 작별 인사가 조심스레 새어 나오는 듯했다.


그러곤 가희는 작은 의자에 올라섰다. 싱크대는 그녀 키보다 살짝 높았고, 발끝에 힘을 주어야 가희의 손이 싱크대 맨 안쪽까지 닿을 수 있었다. 옅은 레몬향이 나는 주방세제를 붉은 고추기름이 찌든 스펀지에 짜 넣고 난 뒤 몇 번 움켜쥐자 거품이 보글보글 부풀어 올랐다. 달콤하고 상큼한 레몬향은 쉰 김치 냄새를 덮었고, 가희 손톱 사이에 낀 검붉은 마른 핏조각마저 조용히 씻겨 내려갔다. 그릇을 하나씩 닦고, 하나씩 헹구고, 하나씩 물기를 털어내는 소리가 주방의 적막을 메웠다. 마지막 접시를 말린 뒤, 가희는 몸을 돌려 거실을 향했다.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꾸벅, 머리가 배꼽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 말은 습관처럼, 감정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가희는 주방 옆, 불이 잘 들지 않는 작은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