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령 - 1부
방으로 돌아간 가희는 손끝으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딸깍, 작은 전구 하나가 깜빡거리다 이내 밝은 불빛을 내뿜으며 켜졌다.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 그 사실만으로도 가희는 이곳이 썩 마음에 들었다.
2평 남짓한 조그마한 골방. 천장에서 내려오는 전구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벽 한쪽에는 오래된 검은색 나무 책장이 놓여 있었다. 그 속은 틈 하나 없이 책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매번 어머니라 불리는 사람이 어느 날은 봉투에, 어느 날은 종이끈에 묶인 채 책을 들고 들어왔다. 어머니가 쥐어주는, 혹은 사다 주는 책들이 정말 가희를 위해 준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측은해서, 목줄 매인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장난감 같은, 잠시 달래주기 위한 보상 정도였는지는 가희도 알 수 없었다.
그 책들은 가희의 나이에 맞는 동화책이나 그림책이 아니었다. 세계사 전집, 클래식 소설 전집... 두꺼운 책들의 표지는 거무튀튀했고, 모서리는 세월에 못 이겨 찢어져 있었다. 책을 펼치면 누렇게 바랜 종이들이 오래된 책의 눅눅한 냄새를 풍겼고, 갈색 빛으로 바래 버린 본드는 그 힘을 다해 몇몇 페이지는 이미 빠져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새 책이 도착하면, 가희는 늘 시간을 다투듯 빠르게 읽었다. 언젠가 어머니나 아버지가 불쑥 들이닥쳐 책을 다른 데로 팔아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은 언제나 조급하고, 언제나 목이 타들어가듯이 마른 듯했다.
어쩔 땐 가희는 왜 책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책을 읽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던 까닭이다. 책에 손을 대는 건 늘 가희뿐이었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릴 수 있었던 건 언제나 가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골똘히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단지 ‘책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가끔 교회 사람들이 가희네에 놀러 오거나 손님들이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서두르듯 가희 방으로 들이닥쳐 책장을 통째로 싹싹 비워냈다. 가희가 하나하나 정리하여 꽂아 놓여있던 책들은 거실의 빈 선반들로 그리고 벽면으로 옮겨졌다. 그 순간, 그렇게 빽빽이 꽂힌 멋있는 오래된 책들은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휘둘렀던 플라스틱 빗자루와 효자손 대신 집안의 ‘품격’을 자칭하는 도구가 되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카프카의 '변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카뮈의 ‘이방인’, 단테의 '신곡', 오웰의 ‘동물농장’,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그 외의 수많은 책들. 손님들은 그 광경을 보고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이런 어려운 책을 다 읽으시네요.”
“가희네는 참 멋있어요.”
아부와 칭송의 말이 오갈 때마다, 검붉은 빛의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어머니와 은색 정장을 빼입은 아버지는 멋쩍은 듯 웃으면서도 실실 올라가는 입가를 감추지 못했다. 그 새어나가는 웃음들을 보고 있자니, 가희도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였든 가희에겐 상관없었다. 가희는 그 책들을 참으로도 좋아했다. 책들은 가희의 조그마한 세상 밖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이었고, 무언가를 더 배울 수 있는 통로였다. 가희는 어제 읽다 만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며칠 전 읽었던 세 문장이 가희의 눈에 다시금 들어왔다.
‘전쟁은 평화.’
아버지와의 싸움은 늘 전쟁 같았다.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고, 장판 위를 울리는 발소리가 마치 전쟁터의 북소리처럼 쿵쿵 울려댔다. 살과 뼈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들이 방 안의 공기를 짓이겨놓았고, 그 뒤를 이어 가구가 쓰러지는 소리,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이 씨발년아!”
그 한가운데서, 가희의 시간은 늘 느리게 흘렀다. 주먹을 꽈악 쥔 손이 날아오르는 궤적,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 몸짓, 그리고 내려앉으며 울려대는 고함소리까지 모두가 물속의 파동처럼 둔하게 번졌다. 하지만 동시에, 심장은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숨은 목구멍 어귀에서 잘려 떨어져 나가듯 짧아졌고,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 전쟁이 끝나면 집은 믿기 힘들 만큼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졌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흐느낌조차 금방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 고요 속에서는 심지어 가희의 숨소리마저도 적막을 깨는 죄처럼 느껴졌다. 시간조차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멍과 상처가 심장 박동에 맞추어 욱신거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묘한 편안함과 안도감이 가희의 심장에 스며들었다. 다시금 대지와 공기를 뒤흔드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 짧고 불안정한 평화라도 꽉 붙잡고 싶었다. 싸움과 폭력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평화. 피와 멍 자국 위에 살포시 놓인 잠깐의 고요. 그게 가희가 아는 유일한 평화였다.
‘자유는 구속.’
자유롭다는 말은 언제나 함정이고 속박이었다. 사람들은 웃고 싶으면 웃어도 된다고 했다. 심지어 웃으면 웃을수록 행복이 찾아온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순간 입가를 씰룩하며 웃은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해야 했다. 때로는 그 웃음에 대한 사과를 했다.
“괜히 웃어서 죄송해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 웃음이란 것이 얼마나 값비싼 행위인지 깨달았다. 밖에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가희는 이미 빚을 지고 있었다. 돌아오면 왜 나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털어놓아야 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묻고, 다시 캐물었다. 때로는 같은 질문이 세 번, 네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꼭 이런 말이 따라왔다.
“네가 선택했잖아. 그러니까 네가 책임을 져야지. 다 너 때문인데.”
그 말은 가희의 귀 속에서 오래 맴돌았다. 자유라는 단어가 허락처럼 주어졌지만, 그 대가는 언제나 발목을 묶는 밧줄이었다. 그 밧줄은 선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고, 책임이라는 무게를 실어 가희를 더 깊이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 밧줄은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에 감겨 있었다. 가희가 무슨 행동을 하든, 결국에는 그 끈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라는 사람의 손이 잡혀 있었다. 그 손은 놓아주는 법이 없었다. 자유는 그렇게 주어졌고, 그렇게 빼앗겼다.
‘무지는 힘.’
아는 게 많아도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는 편이 더 안전했다. 아버지의 기분이 왜 나쁜지 묻지 않는 것, 어머니의 표정이 왜 굳었는지 헤아리지 않는 것.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네”라고만 대답하는 것. 그 무지가, 오히려 그녀를 지켜주는 강력한 힘이었다.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실수도 줄었고, 묻지 않을수록 대답도 필요 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지을수록 그 표정은 가희의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주먹을 휘두를 때, 어머니는 늘 가희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그 목소리는 간절하다 못해 절박하게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개장수에 의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가 목줄에 매달린 채 괴성을 내지르듯, 어머니라는 사람은 가희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댔다.
“도와줘! 가희야! 살려줘! 가희야! 가희야!!”
그 인간의 목으로부터 나왔다고는 믿지 못할 괴성에 가희의 발끝은 얼어붙었고, 심장은 좁은 가슴 안에서 쇳덩이처럼 내려앉았다. 거실로 질질 끌려간 어머니는, 이내 짧은 외마디 비명을 흘리기 시작했다. ‘억... 억...’ 그 소리는 종일 울려 퍼졌지만, 저항은 단 한 번도 없었다. 30분 동안 이어진 끝이 보이지 않는 매타작 속에서 팔과 다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렸고, 살과 뼈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장판 위로 튀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얼굴이 검푸르게 변한 어머니가 비틀거리며 부엌 문턱을 넘었다. 터질 듯 부은 푸른색 입술이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열렸다.
“가희야, 네가 가서 애교 좀 부려.”
그 목소리에는 사과도, 미안함도 없었다. 그저 습관처럼 꺼내는 명령이었다. 가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했다. 발끝을 들고 조심스레 거실로 나가, 머리를 숙이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깎아내며, 아버지라는 사람 앞에 섰다. 그럴 때마다 가희의 무지는 힘이 되었다.
책 속에선 윈스턴에 대한 취조가 시작됐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묶어 둔 채 전기고문을 시작했고, 그의 눈앞에 네 개의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물었다. “내가 지금 몇 개의 손가락을 펼치고 있는지 말해봐.” 윈스턴이 “네 개”라고 답하자, 다이얼이 한껏 올려졌다. 몸이 뒤틀릴 만큼의 고통. 결국 윈스턴이 “다섯 개”라고 말했을 때, 오브라이언은 차갑게 웃으며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가희는 문뜩 아버지라는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늘 정답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그 정답은 곧 아버지였다. 그 사람 앞에서, “잘못했어요”라는 말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답이었다. 그가 내미는 손가락이 네 개인지 다섯 개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의 말이 곧 진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가희의 아버지가 네 개의 손가락을 치켜들며 몇 개냐고 물었다면, 가희는 과연 “네 개”라고 답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당당히, 또 재빠르게 “다섯 개”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다섯 개라 믿었기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네 개라고 생각할 이유도, 네 개라고 믿을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가 틀릴 리 없었고,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은 무너진다. 그래서 가희는 틀린 답을 ‘틀린 답’이라 부르지 않았고, 다섯 개를 다섯 개라고 부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 믿음은 강요나 협박이 아니라, 더 오래되고 지속적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매일의 시선, 매일의 말투, 매일의 발걸음 소리.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하나의 법칙을 주입했다. '아버지가 말하면 그것이 곧 진실이다.' 진실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희는 두려움 속에서가 아니라, 확신 속에서 '다섯 개'라고 말했을 것이다.
가희는 책을 한 장, 또 한 장 넘기며 이야기를 따라갔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윈스턴은 행복해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으며, 다시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혔을 때, 그 행복은 정점에 달했다. 가희는 책을 덮고, 조용히 손바닥 위에 시선을 내렸다. 윈스턴이 총알과 함께 느낀 그 고요는, 어쩌면 자신이 매일 밤 느끼는 고요와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단지 윈스턴의 고요는 영원했지만, 가희의 고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희는 책장을 덮고, 마지막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빅브라더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어머니도 피해자였다. 아버지의 손에 맞고, 소리를 지르고, 울고, 무너졌다. 그러면서도 늘 그 집에 남았다. 가희는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왜 어머니는 떠나지 않는 걸까. 도망갈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친정집이 있었다. 사람들이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적도 있었다. 가희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며칠 동안 집을 비운 틈에 두 번이나 가방을 꾸렸던 걸 기억한다. 그때 정말 떠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결국 가방을 풀었다. 그 이유를 가희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릴 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마음. 폭력이 멈췄을 때 찾아오는 짧은 평화와, 가끔 주어지는 "잘했어"라는 말이 모든 상처를 덮어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게 어머니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갇혀서 미움이 닳아버린 상태였다. 미움을 잃고 나면, 남는 건 기묘한 애착뿐이었다. 그 애착이 살아남게 해 주니, 결국 그 애착을 ‘사랑’이라 부르게 되는 거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게 되고, 그게 곧 안전이라고 믿게 되는 것. 아마 윈스턴도 그랬을 것이다. 고문과 굶주림 속에서, 자신을 짓밟은 권력을 미워하는 힘이 조금씩 사라지고, 그 자리를 복종과 애착이 차지한 것. 그리고 마침내, 그걸 ‘진심’이라 부르는 순간이 온 것. 그 순간, 가희는 이상한 두려움이 들었다. 혹시 나도 언젠가 어머니처럼 될까?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게 될까? 그 사람 없이는 내 삶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믿게 될까?
가희는 책을 덮고 조심스레 책장에 다시 꽂았다. 그러곤 매트리스 위로 올라가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살짝 반쯤 감았다. 째깍째깍, 초침은 쉴 새 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거실의 티비에서 쏟아지는 우렁찬 함성은 여전히 벽을 뚫고 방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긴장감과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을 눌렀고 가희의 의식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철커덕, 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집 안을 갈랐다. 낡은 자물쇠와 열쇠가 맞부딪히며 내는 오래된 금속의 삐걱임은 이 집의 인내심을 긁어내는 듯 불쾌했다. 뒤이어 들린 건 문이 밀리며 바닥에 찢기는 날카로운 소리.
끼익-
그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들어왔다. 현관문 앞에 들어선 어머니는 하얀 원피스를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다. 입술에는 짙은 빨간 립스틱이 곱게 발라져 있었다. 볼에는 한껏 두드린 파운데이션이 화사하게 빛났고, 눈두덩이에는 은은한 푸른 빛깔의 아이섀도가 번져 있었다. 어머니는, 그리고 아버지는, 집을 나설 때면 늘 그렇게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어머니는 옷장 깊숙이 넣어둔 형형색색의 원피스를 꺼내 걸쳤다. 아버지는 해진 메리야스를 속에 받쳐 입고, 부활절에 교회에서 나눠주던 흰 와이셔츠를 껴입고, 번들거리는 은색 정장으로 마지막 단장을 했다. 둘은 거울 앞에 서서 서로의 차림을 확인하고, 때로는 작은 미소까지 나눴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마치 아주 지극히 평범한 부부라도 되는 양, 무던하고도 화사한 빛깔을 띄었다. 그리고 가희의 눈에는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방금 전까지 이 집을 짓누르던 고함과 욕설, 깨진 그릇과 피비린내가 지워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외출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장 멀쩡하고 품위 있는 얼굴을 사람들 앞에 내보였다. 밖에서는 칭송을 받고, 안에서는 서로를 짓밟는 사람들. 그 모순된 광채가 가희의 위장을 뒤틀리게 했다. 화사하며 추악했다.
“왔냐?”
거실에 앉아있던 아버지라는 사람이, 눈은 여전히 티비 화면에 고정한 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티비 화면엔 아까 파란 글씨가 써져 있는 바지를 입었던 남자가 팔각형 울타리 위에 올라탄 채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
어머니가 구두를 벗으며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차분한 듯했지만, 립스틱 아래로 바짝 말라붙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권사님이 뭐라셔?”
어머니가 구두를 방으로 가져가기 위해 집어 들었다. 먼지를 손으로 간단히 툭툭 털어낸 뒤, 어머니가 대답했다.
“이번 주 우리 그룹 헌금이 살짝 부족하다네.”
“그럼 뭐 어떻게 되는데?”
아버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팔각형 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의 관심 속에서 사라졌다.
“계속 이러면 다음 달부터는 첫 번째 줄엔 못 앉는다네.”
어머니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마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듯이 낮게 덧붙였다.
순간 거실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희는 방 문틈 사이로 그 표정을 엿보았다. 아버지의 어깨가 단단히 굳어지고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교회, 그리고 그 교회 예배당의 첫 번째 줄, 그건 단순한 의자와 자리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자리, 목사를 쳐다보기 위해선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자리, 목사의 설교가 가장 크게 울려 퍼지는 자리, 누가 봐도 “중심”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곳에 앉아 있는 순간만큼은 누구도 평화멘숀 202호를 떠올리지 않았다. 해진 티셔츠와 달동네의 쉰내 나는 집구석도, 집 안에서 날마다 오가는 욕설과 폭력도, 그 줄에 앉아 있는 동안만큼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사람들은 예배가 끝나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와 악수를 건넸고, 권사와 집사들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은근한 미소를 나눴다. 그 자리는 아버지가 세상과 맞설 수 있는 마지막 방패였고, 그 방패가 벗겨지는 순간 그의 초라함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터였다. 가희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굳은 어깨와 날카롭게 치켜뜬 눈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공포, 그 깊은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불안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이, 곧 이 집 안의 또 다른 전쟁으로 번져나갈 거라는 걸 가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희네의 초점은 결코 가희가 아니었다. 가희가 오늘 무엇을 입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친구는 있는지, 공부는 하는지, 글자를 읽을 줄 아는지, 덧셈과 뺄셈은 할 줄 아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가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디가 불편한지, 혹은 꿈꾸는 게 있는지, 부모님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살피거나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희를 보지 않았다. 아니, 그저 단순히 보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바깥과 외부인을 향해 있었다. 집 안의 작은 생명을 돌보는 대신, 교회 예배당의 첫 번째 줄에 앉는 것이 더 중요했고, 헌금을 얼마 했는지가 집안의 체면을 결정하는 잣대였다. 이웃이 자신들에 관해 무슨 말을 해대는지, 권사와 집사가 어떤 눈빛을 자신들에게 주는지, 오늘 모임에서 누가 누구에게 칭찬을 하고 욕을 했는지가 늘 생각의 중심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가희네 부모님에게 아양을 떨며 두 손으로 공손히 악수를 건넬 때, 가희 부모님의 입가엔 뿌듯한 미소가 환하게 번졌다. 세상에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표식을 새겨두려는 듯한 얄팍한 승리의 표정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집 안의 곰팡이 냄새도, 깨진 접시도, 피멍으로 얼룩진 가희의 몸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의 인사와 존경 어린 눈빛들이 곧 그들의 재산이었고, 칭찬 한 마디가 곧 집안의 명예였다. 그 미소 속엔 오직 타인의 시선에 기대어 얻는 만족감만이 번져 있었다.
“하... 그럼 뭐 어떡하라고”
아버지의 근심 가득한 표정이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 자신이 둘째 줄로 밀려난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사람들의 따갑고도 매서운 시선이 등을 꿰뚫는 듯했고, 너무나도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목사님은 뭐라 생각하실까. ‘믿음이 부족한 자.’ ‘헌금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자.’ 그렇게 속으로 낙인찍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 많은 교인들은? 앞에 앉은 자신을 힐끗 바라보고는, 예배 끝나면 뒤에서 쑥덕거리겠지. ‘아이고, 제네도 별 볼일 없구먼.’ ‘내가 저럴 줄 알았다 쯧쯧.’ 그 말들이 귀에 쏟아지는 듯했다. 상상만으로도 얼굴은 달아올랐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비웃겠지. 뒤에서 다 비웃겠지. 개 같은 새끼들. 거지 같은 새끼들...
“비면 니 돈으로라도 채워 넣어야 할 거 아니야, 썅년아!”
결국은 아버지라는 사람의 분노가 폭발했다. 목소리는 거실 벽을 울리고, 형광등 불빛까지 떨리게 만드는 듯 컸다.
“내가 씨발, 하루 종일 밖에서 돈 벌어다 갖다 바치면 뭐 하냐? 밥이나 축내는 벌레 같은 새끼들이 집에 앉아서 지랄이야? 내가 너네 노예냐, 어?!”
욕설이 거실 공기를 날카로운 면도칼 처럼 베어냈다.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어머니라는 사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은 달싹이지도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었다. 사실은 수십 개의 변명과 항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쥐어주는 돈은 쥐꼬리 만했고 그마저도 먹고사는 데에 있어서 쓰고 나면 남은 건 당연히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입을 열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수없이 겪어왔다. 대들었다간, 그다음은 주먹과 발길질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더 무겁고, 더 지독한 폭력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사람은 침묵했다. 굴종이며 생존이었다.
“좆같은 새끼들”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아버지라는 사람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쿵, 무겁게 울리는 못된 발자국 소리. 그리곤 안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던지듯 닫았다. 쾅! 쇠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집 안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잠시,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어머니라는 사람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치 몇 분 동안이나 숨을 참아왔던 것처럼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작고 오래된 검은색 가죽 가방. 아버지라는 사람이 연애 시절,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선물이라며 건네온 것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았던 ‘명품’이라는 이름의 선물. 세월이 흐르며 가죽은 닳고 빛을 잃었지만, 어머니라는 사람은 그 가방을 여전히 소중히 다뤘다. 마치 그 안에 옛 시절의 약속과 희망이 아직 남아있는 것처럼. 그녀는 매일 닦았다. 닦고, 또 닦고, 낡은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문지르며, 가방을 오래된 장롱 안 깊숙이 넣어 두었다. 그 가방은 평소엔 나오지 않았다. 오직, 높으신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혹은 체면이 걸린 날에만 꺼내졌다.
가방을 잠시 신발들 옆에 조심히 내려놓은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걸음을 조용히 옮겼다.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려 사뿐사뿐 걷던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몸에 새겨진 일과처럼, 이미 수백 번은 반복했을 손길이었다. 어머니는 작은 그릇들을 하나씩 꺼냈다. 가장자리가 닳아 무늬가 지워진 그릇, 살짝 금이 갔지만 여전히 버려지지 못한 그릇들. 그리곤 양은 냄비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몇 시간 전 아버지의 발길질에 쏟아졌다가 다시 주워 담은 듯한 김칫국이 남아 있었다.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본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묻지 않은 채, 애써 덮으려는 듯 말없이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냄비를 얹었다. 곧이어 ‘따닥’ 소리와 함께 낡은 스토브 위로 불빛이 일었다. 몇 분이 지나자 집 안은 다시금 쉰 김칫국 냄새로 가득 채워졌다. 알싸하면서도 텁텁한 냄새가 곰팡이 핀 벽지와 뒤섞였다.
안방에서 아버지라는 사람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갓 다려낸 듯 빳빳한 흰색 메리야스를 안에 걸치고, 그 위에는 주름 하나 없는 흰색 와이셔츠, 그리고 푸른빛이 도는 정장 재킷을 걸쳤다. 바지는 칼날처럼 각이 잡힌 흰색 정장 바지였다. 머리는 이미 몇 번이나 빗질을 한 듯 가지런했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을 빗어 넘겼다. 한 줌의 머리카락이 아직 버티고 있는 부분을 잡아 뜯어내듯, 힘주어 뒤로 쓸어 올렸다. 스프레이를 집어 들자, ‘치이익’ 소리가 거울과 방 안을 채웠다. 뒤로 넘긴 머리카락들이 서로 달라붙으며 단단히 고정되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혹여 머리카락이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옷깃을 매만지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쳐 매며 거울 속 자신에게 한 번 더 눈을 맞췄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세상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할 것처럼, 그 시선에 맞설 준비라도 하듯 눈빛이 번득였다.
그는 마치 이 집의 누추한 공기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차림은 마치 회사원이나 사업가 혹은 어디 건실한 직장의 중역처럼 단정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아버지라는 사람의 출근길은 매일 밤 달라지지 않았다. 언덕을 내려가 버스를 타고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시내 구시가지 한복판,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나이트클럽 정문이었다. 그곳에서 그의 일은 단순했다. 정문 앞에 서서 술에 취한 손님들을 맞이하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김사장님, 정사장님, 박사장님, 이사장님이라며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 비틀대며 다가오는 손님에게는 서슴없이 90도로 고개를 숙였고, 때때로 얕잡아보는 시선을 보내는 취객에겐 겉으로는 웃음을 짓다가도 속으로는 씹어 삼킬 듯 욕설을 중얼거렸다. 간혹 술에 잔뜩 취한 손님이 시비를 걸면, 그는 순간 얼굴을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90도로 허리를 숙이던 몸이 곧장 펴졌다. 그리고 얼마 뒤, 입술 사이로는 거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씨발, 꺼지라고 좆같은 새끼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고, 그 순간만큼은 그 또한 네온사인과 술기운에 물들어 취해버린 거리의 취객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광경은 집과 동네와 교회에 들어서면 말 한마디로 바뀌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일하는 남자’라 불렀고, 정장을 걸친 자신의 모습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교회 사람들에게는 ‘사업을 본다’라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새벽에도 사람 상대하는 바쁜 비즈니스맨’이라고 얼버무렸다. 그의 옷은 진실을 감추는 가면이었고, 그 가면은 언제나 잘 다려진 주름과 단정한 구두로 빛났다.
어머니는 일하지 않았다. 일할 능력이 없는 것도, 일할 마음이 없는 것도 전혀 아니었다. 아버지와 같은 고졸 학력이었지만, 원한다면 시장의 계산대든, 음식점의 주방일이든, 청소든 뭐든 손에 잡히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아내가 밖에 나가 돈을 번다는 건 단순한 선택이나 평범한 생활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가장의 권위와 자존심에 금이 가는 모욕이었다. 남자 혼자서 가족 하나 건사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 아버지의 이름은 더 이상 '남자다운' 가장이 아니었다. 그는 늘 상상했다. 누군가 어머니에게 "요즘 어디서 일하세요?" 하고 묻는 순간, 자신을 향해 들려올 비웃음소리, 뒤에서 수군대는 교인들의 시선, ‘가족 하나 못 먹여 살리는 남자’라는 낙인. 그는 그 상상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비웃음을, 그 모욕을, 그는 차라리 주먹으로라도 짓눌러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렇기에 어머니도 더욱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일하겠다는 입 밖의 말은, 곧 기름 위에 불붙은 성냥개비를 던지는 꼴이었다. 차라리 침묵이 더 편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잔혹하게도, 굳이 일할 필요도 크게 없었다.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은 늘 모자랐지만, 동시에 늘 아슬아슬하게 버틸 만큼이었다. 굶어 죽지 않을 만큼, 그러나 숨통이 크게 트일 만큼은 아닌 돈. 그 팍팍한 생활은 매일 불평을 낳았지만, 이상하게도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어머니는 집 안에서, 아버지가 부여한 ‘가장다운 체면’을 보호해 주는 조용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을 지나 현관 앞에 섰다. 낡고 해진 검은색 구두 한 켤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손때가 묻어 가죽의 윤기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코끝과 뒤꿈치엔 꽤나 깊은 금이 패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 구두를 소중히 들었다. 옆에 놓여 있던 작은 구두약 통을 열고, 솔에 살짝 묻혔다. 삭삭, 삭삭. 규칙적인 마찰음이 집 안의 적막을 채웠다. 솔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오래된 흉터를 지우듯, 검은빛으로 덮여갔다. 잠깐 전까지만 해도 거칠고 초라해 보였던 구두 위의 상처들이, 마치 원래 없었던 흔적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버지라는 사람의 표정에는 묘한 안도감이 스쳤다. 낡고 해진 현실은 이 구두약 몇 번의 손길로 감춰졌다. 그리고 그 낡고 해진 현실은 남 앞에서, 밖에서 번쩍였다.
“저 년은 애비가 돈 벌러 나가는데 지 방에서 나오지를 않아요.”
어머니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흘렀다. 그녀는 아버지라는 사람 앞에서 만큼은 늘 가희를 향해 화살을 돌렸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희가 방 안에서 헐레벌떡 튀어나왔다. 발뒤꿈치가 노란 장판 위에서 미끄러질 만큼 급하게 뛰어나와,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숨이 가쁘게 차올라 가슴이 들썩였지만, 가희는 서둘러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버지.”
짧고 떨리는 목소리. 아버지라는 사람은 잠시 가희를 내려다보더니, 코웃음을 흘렸다.
“잘하라고.”
굵은 검지 손가락이 가희의 이마 정중앙을 꾹 눌러 쳤다. 가희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가희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움찔거리는 가희의 모습을 보자, 아버지라는 사람의 얼굴엔 마치 자신이 원하던 반응을 정확히 얻어낸 사람처럼 묘한 만족감이 스쳤다. 그리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가희가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그는 현관을 나섰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 이어 복도를 지나는 그의 무겁고도 가벼운 구둣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초가 지나자 그 끔찍한 소리가 가희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제야 가희의 긴장이 풀렸다. 공손하게 모아 두었던 작은 두 손이 힘없이 무릎 옆으로 떨어졌고,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왔다. 짧지만, 숨을 고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밥 다 차려놨으니까 먹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 고요를 깨뜨렸다. 가희는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식탁이...”
가희의 눈이 재빨리 현관 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분명히, 조금 전까지, 버리기 위해 조각난 채 가지런히 놓인 식탁이 있었다. 가희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희의 눈앞에 놓인 건, 부러진 다리에 노란색 박스테이프가 칭칭 감긴, 억지로 다시 세워진 식탁이었다. 테이프 위로 삐져나온 가느다란 나무 조각들은 여전히 상처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고, 밑으로는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쉰내 나는 김칫국과 눅눅한 밥이 올려져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까이고, 금이 가고, 이제는 부서지기까지 했던 그 식탁이 다시 돌아와 주방 한가운데에 가희 앞에 섰다. 가희는 순간, 온 집안이 자신과 식탁을 노려보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딜 도망가. 넌 어디도 못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