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옷 Sep 09. 2015

『페스트』, 알베르 카뮈, 책세상, 1995.









평상시에 우리들은 누구나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사랑이란 예상 밖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우리들의 사랑이 보잘것없다는 것도 다소 담담한 태도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추억이란 더 까다로운 것이다. 그리고 극히 당연한 결과지만,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달려들어서 도시를 강타했던 그 불행은, 우리로서는 분노를 금치 못할 그 부당한 고통을 우리에게 끼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괴로워하도록,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 그 고통에 동의하도록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면서 그 저의를 은폐하는 이 질병의 상투적인 수단들 중 하나였다. / p. 109



"서로 사랑하고 있을 때는 말을 안 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사람이란 항상 사랑하지는 못하죠. 적당한 시기에 아내를 붙들어둘 수 있는 좋은 말들을 생각해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 p. 119



보통 새벽 4시까지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비록 배반의 밤이라 하더라도 그떄는 모두들 잠을 잔다. 그렇다, 그 시간에는 모두들 잠을 잔다. 그리고 그것은 안도감을 준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끝없이 소유하고 싶다거나, 또는 한동안 헤어져 있어야만 될 경우 다시 만나는 날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깨어나지 않을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 빠뜨려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것이 안심 못하는 마음의 가당찮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 p. 155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 p. 178



세계의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총명한 지혜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이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이 없고서는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 / p. 182-183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떄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 p. 223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는 법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현재의 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p. 248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 뿐이다. / p. 387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징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 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 4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