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당나귀가 진 짐에 대하여

by 백설


나의 반복되는 과오와 비극은 불운의 탓도 있지만 나의 몫이기도 하니 모조리 내 탓과 세상 탓이 될 수 없다.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약을 먹는 등의 일은 회귀가 아닌 또 다른 출발점인 것이다. 늘 벌어지는 관계의 문제, 습관의 문제는 이미 그럴듯한 패턴이 되어, 이미 나는 그렇게 부분적으로 원에 가까운 굴렁쇠에 안착해 살아가고 있다. 삶의 당나귀는 그렇게 쳇바퀴를 잘 돈다. 매번 결승점이자 출발점에서 만나는 당나귀는 뻔뻔하게 웃고 있다. 아침을 먹었으니 점심을 먹어야지. 해가 떴으니 이제는 질 차례지.


영혼의 당나귀는 얌전히 앉아있다. 좀체 눈을 뜨지 않는다.

한 가지 반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삶의 당나귀와 인사하는 일이다. 그 당나귀는 느물거리며 늘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간다.


"자꾸, 뭐가 되려고 하지 마."


삶의 당나귀는 권태롭게 웃으며, 웃으면서도 권태롭게 "그냥 좀 살자. 아무도 관심 없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하며 부지런히 금 간 곳을 메워버린다. 영혼의 당나귀는 금 간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새로운 앎의 빛을 눈꺼풀 위에서 잃어버린다.


영혼의 당나귀는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다.


삶의 당나귀, 너는 너무 열심히 달려. 여기 이 심해에는 빛도 산소도 없어 숨을 쉴 필요도 눈을 뜰 필요도 없어. 영원히 돌아가는 회전식 자물쇠에는 Key가 없어. 이 사슬을 끊어줄 틈이 없어. 너무 오래된 쉼이, 단 한순간도 일으켜지지 않는 눈꺼풀이, 도저히 틈을 만들 수 없는 피조물들의 세상이 너무나 매끈해서 숨 쉴 구멍이 없어.


나는 삶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온 의미부여와 깨달음에 눈을 뜰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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