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복도의 끝에서 끝으로, 방에서 보았던 아치형 창문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검푸른 뱀이 끝도 모르는 곳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려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회갈색 벽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림 한 점 걸려있지 않은 어두운 복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깔려있는 양탄자에 발을 올려놓자마자, 슬리퍼는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그리고 발가락 사이를 흠뻑 적시는 축축한 물기.
양수가 터지고 있었다.
천장의 암흑. 석양의 푸른빛에 젖은 복도의 끝부터 시작된, 블랙홀과도 같은 천장의 암흑. 높이의 끝을 알 수 없는 암흑.
그 암흑에 압도된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다리 밑으로 물이 주룩주룩 빠져나가고 있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정신이 혼미했다. 복도엔 전등 하나 없었다. 발 끝이 벌어진 걸음으로 힘겹게 벽을 지탱하며 나아가던 중, 벽의 측면에 또 다른 암흑이 보였다. 왼쪽 아래로 쑥 빠진.
계단인가 싶었지만, 그 어디에도 물병은 보이지 않았다.
주르륵. 다시 물이 쏟아졌다. 눈앞이 노래지며 손발이 후들거렸다. 문득, 암흑이 만져졌다.
문?
힘주어 앞을 내다보았지만, 건조해진 안구는 초점을 잡지 못했다. 이지러진 푸르름 속 입을 벌리고 들이닥쳐올 것만 같은 어둠. 나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암흑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마자 엄청난 양의 물이 삽시간에 쏟아져 나왔다. 물은 머리를 적시고 얼굴을 적시고, 코와 입으로 마구 흘러들어오더니 어깨와 가슴, 배를 모두 적시고서는 복도의 이 끝과 저 끝을 가득 채우고 끝을 모르는 천장까지 차올랐다. 나는 둥실, 떠올라 암흑의 문으로 끌려들어 갔다.
암흑 속은 커다란 어항이었다.
곳곳에 놓인 커다란 조개껍질들이 연분홍, 노랑, 상아색과 연파랑 등으로 예쁘고 반짝였다. 호리호리하고 부드럽게 춤추고 있는 수초들. 반짝이는 물결을 헤치며 작고 예쁜 물고기들이 꼬리를 흔들며 생기 있게 헤엄쳐갔다. 붉은 산호초와 흰 백사장에 반쯤 묻힌 아름다운 불가사리와 반짝이는 돌들.
나는 그 아름다움에 미소를 지었다.
부력으로 몸이 둥실, 떠올랐다. 조금씩 열리고 있는 조개껍질에서 하얀 발과 손, 머리카락들이 조금씩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꼬리지느러미의 투명한 끝이 보였다. 조개껍질이 반 이상 열리며 화려한 보석들과 꽃들을 뿜어냈다. 그리고 파란 머리의 여자들. 상앗빛 피부가 윤기 있고 꼬리가 힘차게 움직였다. 발갛게 상기된 입술과 볼. 유려한 몸짓으로 여자들은, 푸른 머리를 일렁이며 수면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다 바닥으로 잠영하여 흰모래를 훑었다.
걸리적거리는 원피스를 벗어버린 채, 어항 속을 헤엄쳤다. 무거운 배는 가벼워졌고, 벌어진 다리도 부드럽게 모아졌다. 발등으로 물속을 치고 가르며 한없이 유영했다. 초록빛으로 수렴된 둥글고 맑은 구슬 속.
여자들은 나에게 손짓했다. 어항의 한 구석에 깊게 뚫린 동굴이 보였다.
여자들은 원을 그리며 아름답게 헤엄쳤다. 멀찍이 물러나 화려하게 헤엄치다가, 곁으로 다가와 나의 턱선과 입술,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을 이끌고 동굴로, 동굴로 헤엄쳐가려 했다. 그러나 배가 잔뜩 부른 나는 여자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여자들은 꽤 강하게 나를 이끌었지만,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내가 와서는 안 되는, 그 방일까?
보랏빛 저녁해가 보이는 위쪽으로 헤엄쳐갔다. 창문 틀은 마치 고급 설탕을 발라놓은 것처럼 달콤한 향을 내뿜으며, 하얗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온화한 초록빛이 경계를 보이는 그곳에서 물 밖으로 손을 내밀어 어항의 입구를 잡고 걸터앉아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파도는 보랏빛 하늘을 향해 해안선을 그리며 요동치고, 검은 별들이 씻겨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다시 자맥질을 하려고 고개를 돌려 어항으로 빠져들려고 했던 나는, 급격한 둔중함에 필사적으로 어항의 귀퉁이에 매달렸다.
어항은 모두 물이 빠진 상태였다.
쨍,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어항에 금이 가며 부서졌다. 어항의 날 선 유리조각들과 함께 나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름다웠던 여자들은 동굴 어귀에서 앙상한 백골이 되어 누워있었다. 백골 위에는 잔뜩 상해서 부스러져가는 누런 머리카락들이 얽혀있었다. 부서진 조개껍질들은 날카로운 구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희고 눈부셨던 모래는 바닥에 검게 눌어붙었고 빛나던 산호초도 누렇게 말라 늘어져 있었다. 그 위에 걸쳐진 희미한 거미줄 아래로 거미 한 마리가 날줄을 길게 늘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산통이 찾아왔다. 그 고통을 참기 위해 더러운 해초 찌꺼기 범벅이 되며 바닥을 기었다.
배는 무겁게 부풀고 조이기를 반복했다. 마치 몸이 위와 아래로 분리되는 것 같았다.
"결국 여기로 들어왔구나."
암흑의 문 속에서 나타난 그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자줏빛으로 녹아들었다. 턱에는 검푸른 수염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머리칼도 점점 보랏빛을 거쳐 청회색을 지나 푸르게, 푸르게 변해갔다.
LIE
아니, 저 여자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어. 저 여인들은, 당신과 이별하고 나서 만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니.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당신이에요. 제발 가지 말아요. 이게 꿈인 걸 알아요. 하지만 끝까지 들어봐요, 부탁해요. 제발.
미안해요. 당신을 단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은 것,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정말 자신이 없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저 여인들은 내가 마련해 준 좋은 거처에서,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양질의 수발을 받다가 스스로 죽었어요. 내가 저 여자들을 죽이지 않았어요! 저 여인들 모두가, 나에게는 관심 없었어요. 오로지 반짝이는 목걸이와 드레스, 구두, 가방에만 혈안이 되어있었고, 나는 그걸 다 아낌없이 해주었어.
저 여인들이 당신에 대해 한 말이 사실이지요? 당신은, 당신은 푸른 머리 남자아이를 낳았고. 하지만 나는 금발이고 당신은 아름다운 흑발이니. 백옥같이 투명하고 맑은 피부와 어울리는.
미안해요. 당신을,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도 내게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어. 대체 왜 아무 말도 안 해주었지?
당신은 왜 그렇게 서둘러 세상을 떠난 건지, 왜 아이도 오래 살지 못했는지 나는 많은 것이 궁금해요. 나는 그 검푸른 해뜨기 전의 새벽빛에 잠깐 당신과 아이를 보았을 뿐이었는데.
가지 말아요! 제발 나에게 대답을 해줘요. 제발...
어항의 귀퉁이에서 푸르고 맑은 물이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유리조각들이 순식간에 떠올라 차란차란 부딪치며 공중에서 결합하고, 또 분해되면서 직조되고 있었다. 유리조각들은 다시 둥글게 여며지고 있었다. 물은 바닥을 가득 메우고 힘차게 복도 밖으로 흘러가면서도, 조립되는 어항 속을 세차게 들이치며 채워갔다.
배가 내려앉았다. 코 끝으로 장미향이 감돌았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금빛 가루가 눈꺼풀을 때리는 듯했다. 까끌하고 청량한 모래알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위아래로 밀려있던 나의 내부는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며, 물속에서 수직으로 정렬해 갔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치솟았다.
청보랏빛 저녁 햇빛을 반사하며, 아기의 금발이 푸르게 빛났다. 아기가 눈을 번쩍, 떴다. 쨍, 푸른빛이 반짝였다.
희고 반짝이는 창문이 텅, 하고 닫히며 검은 커튼이 드리워지며, 창 밖으로 넘실대던 보랏빛이 사라졌다.
눈부신 금발과 푸른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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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울부짖으며 무너지기 시작한 남자의 눈동자가 마치 저녁빛처럼, 붉고 푸르게 나뉘며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