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저녁
방 안의 공기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눈을 뜨자, 벽에 드리워진 창문 그림자가 보였다. 진한 창틀의 그림자 위로 커튼의 옅은 실루엣이 나부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가 너머 수평선에 파랗게 걸려있는 해가 보였다. 그 위로 보랏빛 별들이 드문드문 떠올라있었다.
드넓은 수평선. 바람은 창틀만을 흔들고 있었다. 파도 한 자락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저녁이었다.
꿈이었나.
상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상실된 채 매끈해져 있다. 요철 없는 손등을 바라보다, 아이보릿빛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직선으로 떨어진, 통이 넓고 간결한 스타일의 원피스였다. 무릎까지 떨어진 원피스는 펼쳐지지도 오므라들지도 않은 채 바닥을 향해 딱, 떨어지고 있었다.
앞이 막힌 부드러운 슬리퍼. 옆으로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아치형으로 세워진 창문 앞 발코니에는, 비스킷과 떡이 들어있는 고급 대나무로 섬세하게 직조된 바구니와 고급 와인, 와인잔이 놓인 희고 둥근 탁자가 있었다. 탁자 옆의 안락한 의자에 몸을 내려놓고 바구니 속의 비스킷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푸른 석양에 반사된 바다의 윤슬은 희고, 분홍빛이 돌았다. 간혹 반짝였지만, 이내 어두운 빛이 돌며 심해로 가라앉았다.
갑자기 부드럽고 큰 손이 눈을 가렸다.
"와인은 안 돼요."
저음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말씨를 지닌 그 손의 주인은 천천히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나의 고개를 들어 올려, 나의 눈을 한동안 응시하면서 나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부드러운 미소를 띤 남자였다. 남자의 손은 자연스럽게 나의 어깨를 한번 스치고 내려와 와인병을 향했다.
남자 역시 아이보릿빛의 파자마와 앞이 막힌 슬리퍼 차림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깊은 밤이 오겠군요."
나는 비스킷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다시 바구니로 돌려놓았다. 목이 너무 말라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남자는 내 손 끝을 바라보다가 깍지를 끼고선, 다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금만. 이제 곧이에요. 우리 아이가 태어나요. 오늘."
화들짝 놀란 나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석양. 희고 뿌연 하늘. 보랏빛 별들. 심해로 가라앉는 자줏빛 윤슬.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통이 넓은 원피스가 꽉 죄일 정도로 배는 부풀어 올라, 저절로 다리가 옆으로 벌어졌다.
남자는 내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차고 선명한 감촉. 아까와는 달리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그때 훅, 강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고요했던 수평선이 요동치고 있었다. 보랏빛 파도가 솟아오를 때마다 별들은 하늘 위로 줄행랑치며, 해안선을 그렸다. 뒤따라 보랏빛, 분홍빛, 금빛을 띠는 별들이 빼곡히 찍혔다. 하늘은 점점 녹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갈증이 너무 심해서 와인잔에 손을 뻗었다. 남자는 완강하지만 부드럽게 와인잔을 빼앗아 들고 문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 복도를 조금만 지나가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요. 그 근처에 물병이 놓여있을 거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어, 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문고리를 쥐고 나가기 전에 그 남자를 한번 바라보았다.
차갑고 푸른 눈동자. 하늘빛에 반사된 금발. 남자는 담담하고 상냥하게 덧붙였다.
"이 복도의 끝에 있는 방에 들어가서는 안 돼요. 부디. 부탁해요."
저녁 하늘을 움켜쥐어 한번 꼭 짜낸 듯한, 습도의 슬픔이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물만 마시고 돌아올게요.
그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기 전,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귀의 요철마저도 파랗게 빛나고 있는 그는 지금 왜 이리도 슬퍼하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멈춘 채, 복도로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남자의 목덜미 너머 어둑한 벽에는 그 양탄자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