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
파도에 사방이 씻겨나가며 금빛 포말로 흩어지고 있었다.
모래언덕과 맑은 하늘. 해변가를 정처 없이 걸었다. 줄지어 날아가는 새 떼들의 날갯짓과 파도에 구르는 조약돌의 움직임이 발 끝의 진동으로 전해져 왔다.
하늘과 빛.
푸른, 이곳의 저녁 햇살.
고요하고 넉넉한 바다와 함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탁 트인 수평선의 오차 없음이 반가웠다.
산등성이 너머에서 빠르게 전진하는, 짙고 푸른 무언가. 높이의 끝이 보이지 않는 해일이었다. 파도를 발 끝부터 머리끝까지 입은 사내가 다가와 내 앞에서 우뚝 서서 멈췄다. 그는 파도의 벽 안에서 쩌렁쩌렁, 말을 했다.
그가 공중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내 머리는 단정하게 올려져 묶였고, 순백색의 드레스가 어깨에서부터 발목까지 드리워졌다.
드레스는 얼음으로 짜였는지, 살을 파고들어 피부는 이내 창백해졌다. 두 발에도 얼음구두가 신겨졌다. 나는 금세 혈색을 잃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비릿한 핏방울이 날아들어 입술을 긁었다. 입술이 붉게 물들며 드레스와 구두가 살짝 녹아 은은한 빛을 띠었다.
그것은 물 밖으로 천천히 나오며 정체를 드러냈다.
값비싼 보석으로 이루어진 반지, 고급스러운 버클 장식이 달린 벨트. 코 앞이 바짝 올라간 부츠.
눈동자가 텅 비어있는 푸른 수염의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는 끔찍한 시취가 풍겼다.
그가 손가락을 휘두르자, 하늘에서 무수한 비단과 장식, 장미꽃과 보석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은 이리 뭉치다가 깨지고, 다시 뭉쳐서 흩어지다가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성들이 되어 꽝꽝, 세워졌다. 하늘은 점점 좁아져 가려지고, 성들이 내뿜는 강렬한 빛은 드레스와 구두, 모래사장을 서서히 녹였다. 드레스는 민소매가 되었고, 정강이까지 짧아졌다. 구두 발등이 녹아내려 얼음끈으로 얇아졌다. 콧잔등과 가슴께에서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붉은 실로 수 놓인 고급 양탄자가 어디선가 날아들어와, 발 밑에서 멈추었다.
거절하면, 죽일 것이다.
양탄자에 올라타자, 귀퉁이가 금빛으로 녹아내렸다. 구두 역시 펑, 하고 터지며 포말로 흩어졌다.
바다가 크게 일렁이며, 성을 뒤흔들었다.
쨍그랑, 챙챙, 파앗. 보석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려, 어깨에 꽂히고 허벅지를 찔렀다.
드레스는 혈흔과 섞여 녹아내렸다.
핏빛 발자국이 여기저기 난동을 부렸다.
바위 아래로 숨어드는 순간, 그는 다시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휘둘렀다. 바위는 번쩍 들려 날아가 먼바다에 떨어졌다.
나는 피투성이 나신이 된 채, 온몸을 떨며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내쉬는 숨에 파도가 일었다. 그 파도가 사정없이, 그리고 여러 번 덮치기를 반복하자 온몸의 생채기가 금세 아물었다.
그가 다시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물에 젖어 뚝뚝 아래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이 도르륵 말려 올라가 정돈되었다. 또다시 얼음의 순백색 드레스가 잔뜩 몸을 옥죄어 왔다. 가쁜 청백색 숨을 내뱉자 와락, 핏방울이 입술을 스치며 붉게 번졌다. 아까의 드레스, 구두와는 달리 곱게 간 얼음가루들이 마치 깃털처럼 피부 아래를 샅샅이 파고들었다. 얼음가루들은 혈관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는, 맥박마저도 철저히 움켜쥐었다.
나는 더 하얗게 질렸다.
사내는 다시 양탄자를 불렀다. 붉은 실로 수 놓인 자줏빛 양탄자.
나는 다시 발을 양탄자에 올려두었다. 양탄자는 유리구두를 삽시간에 붉게 물들였다. 양탄자는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등, 허리, 배, 가슴... 점점 드레스가 붉게,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검붉은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보석의 휘황한 빛이 온통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머리카락이 풀려 핏빛으로 흩날리면, 남자는 다시 손가락을 치켜들고 휘두르며, 머리를 휙휙 말아 올려 그물망에 가두기를 반복하였다. 그물망은 머리카락에서 배어 나온 붉음을 흡수하고는 다시 쩡, 하고 깨져 떨어졌다. 다시 음산한 적빛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었다. 온몸은 창백했으나, 얼굴은 온통 붉었다.
나는 양탄자와 드레스에 구속된 채로, 새빨간 덩어리가 되어 빛나는 성들 사이를 수없이 날아다녔다.
이 성에서 튕겨지고 저 성으로 날아가, 다시 튕겨져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드레스가 찢어질 때마다, 사내는 마치 개복 수술을 하듯이 손가락을 휘둘러 찢어진 드레스 조각을 양탄자에 이어 붙였다. 혈관이 모조리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양탄자는 화려한 성들을 모두 지나치고, 청회색 지붕과 베이지 벽돌로 이루어진 한 대저택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푸른 수염은 껄껄, 크게 웃으며 다시 파도의 벽 속으로 사라졌다.
번쩍이던 성들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이내 붉은 모래가 되어 파도에 쓸려 반짝이는 것을 보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지옥의 저녁은 푸른 석양의 일몰을 지나며, 자정을 향한 붉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